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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스타의 출연료 (177/223)

슈퍼스타의 출연료

겨우 설득해서 스케줄을 시작했다. 이후로 미국에 가기 전까지 조금씩 늘려갈 생각이었는데 그걸 다 끊어내라니.

나라 잃은 표정을 짓던 홍경섭의 눈이 번쩍 떠졌다.

“맞다. 너 영화는 어쩌려고? 영화 들어가면 촬영 시간 빼기도 힘들 거 아냐. 그렇지 않나요, 피디님?”

“영화는 언제 들어가나요?”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세트장도 다 만들어진 상황이라. 캐스팅만 끝나면 바로 촬영 시작할 거예요.”

“촬영 기간은요?”

“영화 촬영 기간은 짧아요. 대략 2달 정도 되니까. 그런데 내부 사정까지 고려하면 넉넉하게 6개월은 잡아야 할 것 같은데요. 내일 당장 확정되면 3달 정도고.”

“그 정도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기획서에도 있다시피 이건 파일럿이니까요.”

파일럿 프로그램에 톱스타가 나오는 때도 있다. 정규 방송과 달라 1회만 출연하면 되니까 부담도 덜하다.

민우 역시 단발성 출연이라면 상관없다. 문제는 정규 편성이 됐을 경우다.

“만약 편성이 잡히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민우는 단발성 촬영으로 끝나는 겁니까? 화제성만 끌어올려 놓고?”

“그건···.”

두 눈을 끔벅거리던 황영수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계산해봤더니 6개월이나 기다릴 수 없다.

당장 명절에 프로그램이 방송돼야 한다.

편집하는 시간까지 계산한다면 지금 팀을 꾸리고 서둘러야 일정에 여유가 있을 거다.

파일럿 프로그램만 어떻게 찍었다고 치자.

정규 편성이 됐을 경우 6개월 이내 시즌 1이 시작돼야 하는데 그때는 영화 촬영 시기와 겹치게 된다.

정규 편성이 되지 않는다면 문제는 깔끔하게 해결되겠지만 그럴 확률은 낮아 보인다.

강민우의 능력이라면 분명히 프로그램의 시청률을 어느 정도 보장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다고 파일럿 프로그램에만 출연하라고 권유할 수도 없다. 듣기에 따라서 이용하겠다는 의도로 보일 수 있을 테니.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한다면 강민우의 섭외는 물 건너간다고 봐야 한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봤지만 마땅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6개월보다 길어질 가망성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지금 내부 사정이 있어서요.”

홍경섭의 이 말은 결정타였다.

강민우 섭외가 저 멀리 날아가는 모습이 눈에 훤했다.

기획서를 처음부터 다 뜯어고치게 생긴 황영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고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던 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혹시 할리우드 영화입니까?”

“네, 맞습니다.”

“그럼 예능도 미국에서 촬영하면 어떻습니까?”

“미국요?”

“네. 촬영지야 세계 어디라도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민우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미국이라···.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요.”

홍경섭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민우를 바라봤다.

“괜찮겠냐?”

영화와 예능을 병행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던 탓이다.

예능까지 겹쳐서 출연하면 쉬는 시간은 없다고 봐야 한다.

얼마 전까지 배역에 과몰입한 후유증으로 고생을 했던 민우다.

하루도 쉬지 않고 촬영만 하겠다는데 어느 매니저가 허락하겠는가.

이러한 걱정에도 민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오히려 더 나을지도 몰라. 에드가의 몰입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있을 거고.”

원래 스위치를 켰다 끄듯 캐릭터의 몰입에서 벗어나던 민우지만 이상하게 에드가는 말썽이다.

조절하려고 하면 할 수 있겠지만, 에드가의 캐릭터 자체의 성격에 문제가 있으니 오랜 기간 몰입하면 좋지 않다.

잠시 고민하던 홍경섭도 민우의 말이 일리가 있었던지 고개를 끄덕였다.

몸은 좀 고될지도 모르지만, 가면을 쓰고 팬들과 소통을 하는 게 집에서 멍하니 쉬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게다.

결심을 굳힌 홍경섭이 황영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좋습니다. 기획서 다듬어서 다시 제안해주시면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습니다.”

얼굴이 환해진 황영수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자신의 입봉이 걸린 프로그램이다. 황영수는 잠도 아껴가며 기획서를 다듬었다.

국장에게 보여줄 기획서도 이렇게 정성을 쏟지는 않을 거다.

완성된 기획서는 홍경섭에게로 전해졌다.

골자를 살펴보자면 가면을 쓰고 버스킹이든 뭐든 수입을 얻어서 생활하면 된다.

돈을 저축하는 것도, 모두 쓰는 것도 온전한 출연자의 선택이다.

돈이 없어 굶어도 되고, 풍진 노숙을 마다치 않아도 된다.

파일럿 프로그램은 여기서 끝이지만 정규 방송이 됐을 경우는 룰이 추가된다.

같은 연예인만 계속 출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택한 것은, 기왕 가면을 씌웠으니 패널과 시청자투표, 거기에 ARS를 추가해서 정체를 밝히는 형식을 택했다.

패널과 시청자게시판에서 정체에 관한 추리로 후보를 가리고 거기서 투표하는 방식이다.

투표 비중은 패널 40%, 시청자와 ARS 투표는 30%다.

정체가 밝혀진 연예인은 그간 번 돈을 모두 기부하고 방송에서 하차한다.

“그럼 모두가 민우의 정체를 밝히지 못한다면 계속 출연하게 되는 겁니까?”

홍경섭의 물음에 황영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룰은 룰이니까요.”

“어휴. 이거 골치 아픈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네요.”

“어째서요?”

“계속 정체를 숨기는 데 성공하면 얘가 체력적으로 문제가 될까 봐서요. 아무리 할리우드가 촬영 스케줄을 지킨다지만 사람의 체력은 한계가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워낙 강민우 씨가 유명하시니까 단번에 정체가 밝혀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맹목적인 민우의 편이었던 홍경섭은 계속해서 정체를 숨길 수 있으리라고만 생각했지 반대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민우 너 잘못하면 금방 정체를 들키겠는데?”

“왜?”

“너만큼 재주 많은 연예인이 어딨냐? 당장 들키고도 남지.”

다재다능함은 정체를 숨기는데 유리한 법인데, 민우는 오히려 역으로 작용하는 셈이다. 뭐든 잘해버리니까.

그렇다고 어설프게 했다가는 관객들에게 차디찬 외면을 받을 게 뻔하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그럼 정체가 탄로 날 위기에 처하게 되고.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씩 웃은 홍경섭이 놀리듯 말했다.

“그냥 빨리 탈락하는 게 낫지 않겠어?”

“자존심이 있지 어떻게 그래.”

민우를 가만히 보아하니 당장 탈락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어 보인다.

계속 출연하면 장점도 있으나 단점 또한 많다. 특히 가장 큰 단점은 지겨워질 때다.

안 그래도 볼만한 프로그램들이 범람하는 시기에 화제가 식어버리면 프로그램의 수명만 짧아지게 된다.

민우는 이 모든 것을 충당하는 방법이 떠올랐다.

“5주 연속으로 정체를 숨기는 데 성공하면 명예의 전당에 올려주고 자진 하차하는 건 어떻습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5주라···.”

말꼬리를 흐리던 황영수가 입맛을 다셨다.

“그건 너무 짧지 않겠습니까?”

“1년은 대충 52주 정도 됩니다. 한 번도 못 맞췄을 경우 연예인은 10명 정도 출연하게 되죠. 중간에 맞추더라도 1년에 대략 20명 내외는 될 거고. 그럼 다양한 연예인이 출연할 수 있으니까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요.”

곰곰이 계산기를 두드려보던 황영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보면 괜찮은 방법이군요.”

대충 프로그램의 가닥이 잡히는 것으로 보이자 홍경섭이 물었다.

“그런데 출연료는 어떻게 합니까? 정체를 숨기는 데다가 파일럿 프로그램이니 단가가 높을 리도 없고요. 몇 군데나 들어올지도 의문이고.”

“그 부분은 조금만 기다리시면 결과가 나올 것 같습니다. 광고를 넣을만한 기업에 연락을 돌리는 중이거든요.”

“방송국에서 연락을 한다고요? 방송국으로 연락이 오는 PPL을 받는 게 아니라?”

“어쩌겠습니까? 강민우 씨 몸값을 맞춰 보려면 저희가 발 벗고 나서야죠.”

황영수는 방송국과 연결된 모든 회사에 제안서를 넣었다.

강민우가 예능에 출연한다.

이 한마디에 기업은 PPL을 넣기 위하여 줄을 섰다.

그러나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는 말에 돌아서는 회사가 절반이 넘었다.

광고를 넣는 이유가 뭔가. 연예인의 얼굴을 봐서다. 연예인이 사용한 물건. 여기서 신뢰도가 생기는 거다. 그런데 정체를 밝히지 않는 예능이라니.

비밀서약까지 받고 나서야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거로 봐서 철저하게 정체를 숨길 예정인 듯 보인다.

PPL 비용이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니니 꺼려질 수밖에.

하지만 강민우라는 이름에 PPL을 적극적으로 유치한 회사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민우가 처음으로 CF를 찍었던 수트 회사다.

쓰러질 위기에 처했던 회사는 이제 탄탄한 중견기업으로 성장해있었다.

그들이 정한 단가는 무려 2억 원.

상표가 가려져도 된다. 그냥 민우가 옷을 입어만 주는 조건이다.

황영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제 파일럿이 제작되는 프로에 2억 원의 단가라니.

이 금액은 시청률과 브랜드평판 순위가 높은 예능과 비슷한 수준이다.

민우의 일이라면 빠지지 않는 명원전자도 무거운 엉덩이를 뗐다.

휴대폰과 태블릿 PC를 각각 나눠서 PPL에 밀어 넣어버렸다. 두 개의 금액은 5억 원.

여기까지야 그러려니 했다.

두 회사는 민우와 커넥션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뜬금없이 미국에서 PPL 요청이 들어왔다. 그것도 듣도 보도 못한 무선 청소기 업체에서.

단가가 얼마냐는 물음에 막내 PD는 얼떨결에 2억 원이라고 대답해버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수트 회사의 PPL이 가장 싼 가격이었으니까.

미국 업체는 잠시 고민하더니 흔쾌히 2억 원을 수락해버렸다.

이쯤 되니 관망하던 회사들은 부랴부랴 방송국으로 연락을 취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민우가 사용할 악기와 다양한 집기까지.

수십 개의 PPL이 쏟아져 들어와 그중 골라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황영수는 목록을 정리한 서류를 받아 들고 넋이 나가버렸다.

“이게 다 얼마야?”

3천만 원부터 2억 원까지 골고루 들어있다.

평균 5천만 원 정도로 잡고 20개의 PPL을 받았을 경우, 민우의 출연료는 회당 10억 원.

거기에 5주 연속으로 정체를 숨기는 데 성공하면 파일럿 프로그램까지 포함해서 60억 원이다.

대충 잡은 출연료가 이 정도다.

지금 당장 9억 원은 확정됐으니, 의류와 청소기, 전자제품은 제하더라도 들어갈 만한 PPL은 많다.

여행이 컨셉이라 캐리어와 백팩, 거기에 모자와 신발 같은 다양한 물품을 끼워 넣을 수 있으니까.

캐스팅도 확정됐고, 기획서도 완성됐기에 황영수의 팀은 모두 PPL에 달라붙어 분류에 들어갔다.

완성된 서류를 확인한 황영수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 정도면 강민우 씨한테 면이 서겠지?”

막내 PD가 부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면이 서는 정도가 아니죠. 저도 그냥 연예인이나 할 걸 그랬어요. 한방에 제 연봉의 몇 배를 버는 건지.”

“네 얼굴과 키로? 무리. 땅땅땅.”

판사처럼 선고한 황영수는 곧장 KH 엔터로 향했다.

홍경섭은 황영수에게 최종금액을 듣고는 입을 쩍 벌렸다.

“회당 20억요?”

“네. PPL 제품은 굳이 사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노출해도 상관없다고 합니다.”

“아니 음식이면 먹어줘야 하고, 음료면 마셔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냥 가지고만 있어도 된다고요?”

“제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회사들이 그렇다네요.”

회당 20억 원. 파일럿을 포함해서 5주만 출연을 유지해버리면 120억 원.

이 정도면 웬만한 드라마 부럽지 않은 액수다.

16부작 드라마에 회당 2억 원의 출연료라고 쳐도 지금 예능의 출연료에 비비지도 못하는 수준이니까.

마른침을 꿀꺽 삼킨 홍경섭이 조심스레 물었다.

“제작비에 좀 보태야 하지 않겠습니까?”

황영수는 픽 웃었다.

“저희 프로는 다른 프로와 달리 제작비가 훨씬 덜 드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부디 시청률만 대박 나도록 해주시면 됩니다.”

판권이나 OTT, 거기에 방송 광고까지 포함하면 방송국도 손해를 보는 건 아니다.

“그럼 고민하지 않고 사인하도록 하겠습니다.”

국장이 민우의 출연료를 보고 펄쩍 뛰었지만 어쩌겠는가. 사인까지 마쳤는데.

“이거 절대로 새어 나가면 안 된다. 만약 누군가가 알게 되면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알아들었어?”

“명심하겠습니다.”

황영수는 자신의 팀에게도 강민우의 출연료는 회당 2억 원이라고 못 박았다.

만약 출연료가 밝혀지면 단단히 각오 해야 할 거라는 협박과 함께.

촬영팀은 곧바로 준비를 시작했고, 보름 후 민우와 함께 미국으로 떠나기로 했다.

떠나는 당일.

“풉!”

공항에서 민우를 만난 제작진은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토끼 탈을 쓴 민우가 수트를 입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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