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반사회적 인격장애 (170/223)

반사회적 인격장애

민우는 말끔해진 모습으로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

커피숍에 들어선 배유진은 단번에 민우를 찾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 유일한 동양인이라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있을 거다.

간혹 인파 틈에 묻혀 있더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을 발견해낼 때가 있다. 지금 배유진이 그러했다.

배유진이 앞에 앉자 민우가 읽던 시나리오를 덮으며 그녀를 반겼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오셨네요. 길도 익숙하지 않으실 텐데.”

대충 30분은 일찍 온 것 같다. 민우야 시나리오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려고 했었고.

배유진은 상큼하게 웃었다.

“여기에서 머물고 있었거든요.”

“어? 저도 여기에서 지내는 중인데. 현지 코디네이터님이 여기가 괜찮다고 소개를 해줬거든요.”

“저는 그냥 느낌이 좋아서 골랐는데. 이런 우연도 다 있네요.”

생글거리던 배유진이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민우는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려 함을 직감했다.

잔뜩 긴장한 그 표정은 금방 눈치챌 수밖에 없었으니.

“우선 커피부터 주문하죠.”

무슨 말을 하려는지 조금은 짐작했기에 한숨이라도 돌리라는 배려다.

둘은 각자 주문한 차가 나올 때까지 평범한 대화를 나눴다. 날씨라거나 취미라거나 하는 그런 사적인 것들 위주로.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배유진이 민우를 바라봤다.

배유진은 돌려서 말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게다가 연애 경험도 없다 보니 돌직구를 서슴없이 날려버렸다.

“전 민우 씨가 마음에 들어요.”

“푸훕!”

허를 찔린 민우는 입에 머금고 있던 커피를 토해낼 뻔했다.

가까스로 수습하고 배유진을 바라봤다. 그녀는 태연한 얼굴이었다.

“딱 열 번만 만나봐요.”

“그게 그러니까···. 사적으로 만나 보자는 말씀이신 거죠?”

“맞아요.”

잠시 생각하던 민우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어쩌면 한 달에 한 번 만나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당분간 한국에 귀국하지 않을 생각이라서요. 아니다. 귀국 못 한다는 게 더 맞는 표현 같네요.”

“상관없어요. 저도 일에 집중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니까.”

“서로가 바빠서 만나기도 힘든데 연애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이유야 많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좋은 사람을 놓치기 싫어서겠죠.”

또다시 날아온 직구에 민우는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혹시 누가 대본이라도 써줬어요?”

농담으로 던진 말인데 배유진이 당황했다.

“엄마가 조언해주기는 했지만 제 진심은 의심하지 말아 주세요. 제 생각도 마찬가지라서 말했던 거니까.”

“그런 의심은 안 했어요.”

이미 배유진과도 알고 지낸 지 꽤 됐다.

그녀의 취미 같은 사적인 것을 모를 뿐이지 사람 됨됨이에 관해서는 파악한 이후다.

민우는 남은 커피를 모두 입안에 털어 넣었다.

“저한테도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어요?”

“물론이죠. 기다릴 테니까 편하게 연락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사실 내일 일찍 이탈리아로 가야 해서 길게 시간을 못 내요. 약속장소를 제가 머무는 호텔로 잡은 이유기도 하고요.”

“그럼 일어날까요?”

둘은 시선을 교환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이 엘리베이터에 올랐지만, 내리는 것은 배유진이 먼저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배유진이 잔뜩 지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나대지 마 심장아. 뒤늦게 왜 이러니.”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자신의 객실로 향하는 배유진이었다.

배유진을 배웅해준 민우도 잔뜩 지친 얼굴로 자신의 객실로 올라갔다.

그를 발견한 홍경섭이 호들갑을 떨며 다가왔다.

“뭐야? 왜 기 빨린 얼굴이야?”

“그럴 일이 좀 있었다.”

음흉하게 웃고 있는 홍경섭의 어깨를 한 대 때려주고 간단하게 세수를 하고 나왔다.

“배 작가님이랑 사귀기로 했어?”

“그냥 연락부터 하기로 했다.”

“어휴 진상아. 너도 그리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며? 그냥 남자답게 사귀자고 할 것이지.”

“너는 그랬고?”

“당연하지.”

뻔뻔한 홍경섭의 대답에 민우는 휴대폰을 들었다.

“뭐해?”

“제수씨한테 전화. 남자답게 사귀자고 했는지 확인해보게.”

“으악!”

후다닥 민우에게 달려든 홍경섭이 휴대폰을 뺏어 들었다.

“남의 사생활을 함부로 캐고 그러면 안 되지.”

피식 웃는 민우에게 휴대폰을 돌려주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너 연애 할 시간이라도 빼볼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그렇게 얘기도 했고. 만약 이어지지 않으면 인연이 아닌 거겠지.”

“네 생각이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고.”

민우의 스케줄이 적힌 다이어리를 펼친 홍경섭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다음 달 중순에 오디션 일정에 맞추려면 빡빡하겠다.”

패션쇼에 이어 배유진에게도 신경을 쏟고 난 이후라 급격하게 피곤해졌다.

“나 먼저 잘게.”

“그래라. 나는 일정 조율마저 끝내고 잘 테니까.”

“고생해.”

다음날부터 민우의 스케줄이 시작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자동차와 가죽 명품, 그리고 남성복 회사의 화보를 찍었다.

숨돌릴 틈도 없이 유럽을 돌며 찍은 여러 화보는 CG 작업이 끝나자 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아시아에서는 한참 민우에 관한 관심이 높은 상황이다.

그를 모델로 쓴 회사들의 아시아 매출이 단 한 달 만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시아에 진출했다가 주춤하는 회사나, 이제 시장을 개척하려는 회사들은 민우를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 모두가 민우에게 접근한 것은 아니다. 관망하고 있는 회사도 다수였다. 그러나 관망만 하고 있을 수 없게 된 회사는 직접 민우를 찾아 나섰다.

머리가 살짝 벗겨진 남자의 이름은 제르미였다.

오디션 준비에 열중인 민우 대신 홍경섭이 그를 만났다.

명함을 내민 제르미가 순박한 미소를 지었다.

“제리라고 불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메일로 거절 의사를 밝혔는데 이렇게 찾아오실 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회사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결례를 범한 것 같습니다.”

제리의 회사는 무선 청소기를 만드는 곳이다.

성능이야 써보지 않아서 모른다.

하지만 이쪽 시장은 이미 막강한 메이커 회사가 버티고 있어서 뚫을 수 없다.

그렇다고 저가 시장을 노리기에는 가격이 제법 나가기도 했고.

굳이 나눠보자면 중간 가격대를 형성 중인데 이쪽도 경쟁이 치열하기는 마찬가지다.

괜히 광고를 맡았다가 회사가 망하기라도 하면 민우에게도 타격이 올 수 있다. 그래서 거절 했던 거다.

그런데도 굳이 연락해서 이렇게 찾아왔다.

왠지 민우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했다.

그런 홍경섭의 불만스러운 내심을 짐작했던지 제리는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괜히 길게 이야기 해봤자 반감만 사게 되니까.

“제가 회사 제품을 가지고 와봤습니다. 써보고 연락해 주세요.”

자신을 설득하려 하지도 않고 그저 청소기만 주고 가버린다.

멀거니 그를 배웅한 홍경섭은 무선 청소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래. 물건이 무슨 죄겠어.”

제리의 의도가 먹혀들었다.

화가 누그러든 홍경섭은 박스를 뜯었다.

청소기는 꼼꼼하게 포장이 되어 있었다. 충전재도 확실했고.

꺼내든 무선 청소기의 외관은 값비싼 것에 비하면 투박한 편이다.

대충 청소기를 돌려봤더니 흡입력은 그리 떨어지지 않는다.

“250달러 정도라고 했던가? 이 정도면 가성비가 미친 수준인데?”

홍경섭이 감탄을 토해내고 있을 때, 위층에서 부스스한 모습의 민우가 내려왔다.

“그건 뭐야?”

“무선 청소기.”

“얼마 전에 700달러 가까이 주고 샀잖아. 근데 또 샀어?”

“산 게 아니라 주고 가더라.”

“이유도 없이?”

“써보고 연락 달래.”

“저번에 봤던 그 광고 의뢰야?”

“응. 이게 250달러 정도 하는 데 나쁘지 않은 수준이네.”

“줘봐.”

건네받은 청소기를 돌려봤다. 고개를 갸웃하고는 비싼 것도 같이 돌려서 비교했다.

“이건 홍보만 잘 되면 무조건 잘될 것 같은데.”

“네 생각도 그렇지?”

“근데 당분간 시간은 내기 힘들 것 같은데.”

유럽에서 돌아온 후 민우는 오디션 준비에만 매달렸다.

타인에 대한 감정이 거세된 것 같은 사이코패스의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서다.

“이 광고 건을 거절한 이유는 너도 알지?”

“알지. 근데 잘하면 망하지는 않겠는데. 오히려 크게 성장할 수도 있고.”

“이를테면 저평가된 우량주라는 뜻인가?”

곰곰이 생각하던 홍경섭이 민우의 어깨를 툭 쳤다.

“좋아, 이 건은 나한테 맡겨.”

“언제는 안 맡겼냐.”

“나는 한국 좀 들어갔다 올게. 애인도 보고 싶고.”

그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민우가 캐릭터를 만드는 것을 방해하지 않기 위함이다.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 민우가 괜히 타박했다.

“나 버리고 십 리도 못 가서 발병이나 나라.”

“덕담 감사.”

홍경섭은 써보라고 줬던 청소기를 챙겨 한국으로 떠났다.

홀로 남게 된 민우는 캐릭터 만들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현실에서의 사이코패스도 사람이다.

사람이 모두 한가지 성격이 아니듯, 사이코패스도 모두가 잠재적 살인자는 아니다.

거의 모든 사이코패스의 공통점은 상대에게 감정이입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죄책감이 결여되어 있고, 충동성과 자기중심적이다.

타인의 아픔을 모르기에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살인도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는 거다.

이를 기본 베이스로 두고 캐릭터의 디테일을 채워나갔다.

우선 겉으로 봤을 때 매우 매력적인 인물이다.

머리가 좋고, 예술적인 감각도 뛰어나다. 말주변도 좋아서 그가 사이코패스라는 것을 주위 사람은 아무도 모른다.

그저 법이라는 족쇄 때문에 가까스로 참을 뿐.

그런데 그 족쇄가 풀어지는 계기가 바로 마을에 들어선 후다.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불도 켜지 않고 캐릭터를 만들어가던 민우는 오디션 날이 되었을 때 비로소 밖으로 나갔다.

환한 햇빛에 민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젠장.”

나직한 그의 한마디는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 * *

‘크라임 타운’의 오디션은 한국으로 치자면 비공개 오디션에 가까웠다.

에이전시에서 추천한 배우들이 모여 오디션을 치른다.

민우는 미국 에이전시의 소속은 아니었지만 추천한 사람이 랄프다.

지금이야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었지만 그의 영향력은 한때 할리우드에서 절대적이었다.

자신의 에이전시도 아닌데 추천을 한 배우가 있다는 소식은 관계자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원래라면 첫 대면 오디션에서 나오지 않을 감독과 제작사 대표도 스튜디오에 나타났다.

현재 오디션에 관한 절대 권력자들의 등장에 에이전시 사람들은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거의 말단에 가깝다. 이들의 위치에서 캐스팅 권한을 쥐고 있는 사람들을 상대하기란 왠지 껄끄러운 게 사실이다.

“얼른 오셔야겠습니다. 감독이랑 제작사 대표까지 나왔어요. 이 사람들이 왜 왔는지 저도 모르죠.”

매니저들의 연락을 받은 상급자들이 한달음에 스튜디오로 오고 있을 때.

감독과 제작사 대표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민우는 이어폰을 꽂고 가만히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한 명, 두 명.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사라져도 민우의 자세는 변하지 않았다.

“미스터 강.”

자신의 이름이 들렸을 때, 민우가 고개를 들었다.

언제나 반짝이며 총기를 보이던 그의 눈빛은 무기질을 보는 듯 텅 비어있었다.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점검하고 오디션장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주목하던 배우의 등장이다.

심사원들이 민우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민우는 입가에 매력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반갑습니다. 참가번호 58번. 강민우라고 합니다.”

완벽한 영어 발음과 목소리는 귀에 단번에 틀어박혔다.

대사를 처리하는 능력은 배우의 기본이다.

이런 기본을 지키지 못하는 배우가 얼마나 많던가.

게다가 발성도 좋다. 듣기에 부담스럽지도 않고 오히려 편안함을 준다.

체크리스트를 채워가던 감독은 고개를 들어 민우를 바라봤다.

외모야 이미 퍼스트 러브에서 충분히 봐둔 상태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다.

전체적인 외모를 훑어보고 민우와 눈이 마주친 순간.

오싹!

등판에 소름이 쫘르르 돋는 것을 느꼈다.

얼굴 전체가 웃는 상이다.

그런데 눈빛은 완벽하게 다른 감정을 품고 있다.

‘어쩌면···.’

랄프의 안목은 아직도 녹슬지 않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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