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가 되는 자질
홍경섭은 제안서가 온 순서대로 늘어놓았다.
3대 명품이라 불리는 C사, L사, H사를 시작으로 D사와 G사, P사도 있다.
패션뿐만 아니라 시계와 자동차도 수두룩하다.
금액만 봐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다.
“이렇게 놓고 보니까 이제 완벽하게 글로벌 스타네.”
퍼스트 러브를 찍기 전에도 해외에서 제안이 오기는 했다.
다만 중국과 일본 같은 동아시아 쪽 위주였지만.
제안서를 뒤적이던 민우에게 홍경섭이 물었다.
“랄프의 제안은 어떻게 할 거야?”
“글쎄다. 네 생각은 어때?”
“나는 받아들였으면 좋겠는데.”
“왜?”
“우리 회사가 미국에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랄프가 돕기로 했으니까 그렇지.”
민우는 홍경섭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눈매에는 웃음기가 다분하다.
“눈은 다르게 말하는데?”
“어휴, 눈치 빠른 놈.”
“이실직고하시지.”
민우의 채근에 홍경섭은 헛기침을 하더니 자기 생각을 털어놓았다.
“네가 미국에 처음 왔을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다르지. 굳이 랄프가 아니라도 너한테 손을 내밀 사람은 차고 넘친단 말이야.”
그러면서 들고 있던 휴대폰을 흔들며 메일함 가득한 제안서를 가리켰다.
“그 증거가 바로 이거고.”
“고작 영화 하나 흥행했을 뿐이야. 톱스타들에 비하면 아직 멀었어.”
“뭐 어때? 첫 단추는 잘 끼웠는데.”
“랄프의 제안을 승낙하면 빠르게 자리를 잡을 거고, 거절하면 좀 더 돌아갈 수도 있어.”
홍경섭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민우를 바라봤다.
“맨땅에 헤딩하려고 미국으로 훌쩍 날아왔으면서 그런 말이 나와?”
그러고 보니 그렇게 말을 했던 적도 있다. 홍경섭이 옆에 붙어 있으니 잠시 잊고 있었나 보다.
피식 웃은 민우가 휴대폰을 들었다.
“좋아. 그럼 랄프의 제안은 거절할게.”
냉큼 달려온 홍경섭이 민우의 휴대폰을 낚아챘다.
“이거 왜 이래? 네 뒤치다꺼리는 내 일이야. 너는 네가 할 일을 해야지.”
“내가 할 일? 그게 뭔데?”
홍경섭이 자신의 휴대폰을 테이블 위로 쭉 밀어주었다.
“사업 종목이 겹치지 않도록 마음에 드는 곳으로 하나씩 골라봐.”
가만히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메일함에 메일이 가득하다. 이걸 사업 분야마다 분류하고 그중 괜찮은 업체로 고르는 일을 하려면 매우 매우 귀찮을 게 분명하다.
고개를 들어 홍경섭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닌 척하고 있지만 흘끔거리며 민우를 보는 게 느껴졌다.
‘어쩐지.’
대뜸 나서서 뭔가를 하겠다고 나서더니만 꿍꿍이가 있었던 거다.
속으로 실소를 흘린 민우가 팔짱을 끼고 소파에 몸을 기대앉았다.
“네가 골라줘. 그것도 네가 해야 할 일이잖아. 괜찮은 곳으로 두세 곳씩 가려서.”
“···눈치 빠른 놈.”
랄프와 대거리하는 것보다 더 귀찮은 일을 떠넘기려고 했는데 그걸 눈치채다니.
메일함을 보니 한숨만 나온다.
민우의 할리우드 영화 성공으로 인해서 KH 엔터의 업무도 포화상태다.
잠깐 반짝한 일 때문에 인력을 늘릴 수 없으니 자신이 맡아야만 한다.
“그냥 한국 갈까?”
“이미 늦었어. 한국 일은 믿을만한 사람한테 당분간 맡겨.”
“여친이 나 기다릴 텐데.”
“전번 줘봐. 보너스 두둑한 일이라고 하면 일 년 정도는 여기 머무르라고 할 테니까.”
어떻게든 빠져서 나가려던 홍경섭은 민우에게 번번이 가로막혀버렸다.
샐쭉한 눈으로 노려보자 민우는 씩 웃었다.
“CF 개런티의 5%가 인센티브.”
원래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인센티브를 주겠단다.
순간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굴려보던 홍경섭이 퍼뜩 민우를 바라봤다.
열 군데와 계약을 하면 100억이 훌쩍 넘는다.
그럼 고작 대여섯 시간 일하고 최소 5억 원이 손에 들어온다.
고작 제안서를 분류하고 민우와 어울릴법한 곳들을 가려주는 대가로.
시급으로 치면 1억 원이 넘는 돈이다.
“이거 대부분 광고료가 1년에 기본 10억씩은 되는데 진짜 5%를 주겠다고?”
“내가 언제 거짓말한 적 있어?”
“없지. 그럼 고용주님 지금부터 당장 일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홍경섭이 머리를 싸매고 노트북에 자신의 메일을 로그인했다.
민우는 느긋하게 소파에 몸을 기대고 창밖을 바라봤다.
돈 버는 이유가 뭔가.
귀찮은 일을 하지 않으려고 버는 거다.
바로 지금처럼.
게다가 힘들게 일하는 친구 보너스도 줄 겸, 겸사겸사.
물론 귀찮은 일을 피하려는 목적이 더 컸지만.
* * *
홍경섭은 바쁘게 움직였다.
제안서를 분류하고 업체를 선정해서 민우에게 건네주고 곧바로 랄프에게로 향했다.
랄프를 만난 홍경섭은 정중하지만 비굴하지 않은 태도로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그런가? 그거 아쉽게 됐구먼.”
랄프가 입맛을 다셨다.
“랄프가 돕는다면 여러모로 편하겠지만, 저나 제가 데리고 있는 배우나 워낙 가시밭길을 좋아해서요.”
“어쩔 수 없지. 동양에서는 인연이라는 것이 있다지? 자네들과 나 사이에 인연이 없다고 믿을 수밖에.”
“이런 말도 있습니다. 만날 사람은 어떻게든 만나게 된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저는 이게 인연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동양사상은 알면 알수록 새로운 것들이 튀어나오는구만.”
“만약 랄프와 우리 사이에 인연이 있다면 다시 만나게 되겠죠. 그때까지 웃으며 기다리겠습니다.”
“허허, 거절을 당했으니 언짢아야 하는데 오히려 기분 좋아지는 말이군.”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배웅은 하지 않겠네.”
홍경섭이 떠나고 랄프는 가만히 천장을 바라봤다.
손가락이 닿을락 말락 하는 그림이 왠지 자신의 지금 처지와 같아 눈살이 찌푸려졌다.
문이 열리고 일전에 민우와 홍경섭을 이곳에 데리고 왔던 중년인이 들어왔다.
그가 랄프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야기가 잘되지 않은 모양이군요.”
여전히 천장에 시선을 둔 랄프가 물었다.
“어째서 그런가?”
“천장을 보고 계시니까요.”
“그게 혹시 내 버릇인가?”
“좀 복합적이지만 말하자면 기니까 그냥 그렇다고 치도록 하죠. 그나저나 어떻게 할까요?”
그때서야 천장에서 시선을 돌린 랄프가 중년인을 쳐다봤다.
“뭘?”
“조처할까요?”
“이보게, 위즈만. 제안을 거절당했다고 해서 수작을 부리고, 앞길을 방해하고 그러면 우리가 마피아와 다르게 뭔가?”
“저는 다른 배우를 찾아볼 건지를 여쭌겁니다만.”
멋쩍어진 랄프가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는 책상 위에 펼쳐진 시나리오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랬나? 내가 요즘 이놈의 시나리오에 너무 심취해서 그만. 그런데 이 배역에 미스터 강이 참 잘 어울릴 것 같았는데 아쉽게 됐어.”
위즈만이 볼멘소리를 냈다.
“동양인은 많습니다. 미스터 강보다 더 유명한 배우도 많고요. 특히 중국 시장을 노리려면 중국 배우가 더 낫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은인과도 같은 랄프를 거절한 사람이다. 왜 이렇게 미련을 가지는지 모르겠다.
안 그래도 랄프의 얼굴을 한번 보려는 배우가 미국에서 넘치는데.
만약 계약하자고 한다면 발이라도 핥을 사람이 수두룩하다.
“어쩔 수 없지. 내 눈이 그렇게 말을 하는데 어쩌겠나.”
랄프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자신의 몸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삐걱거리는 무릎을 달래며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본디 배역에는 어울리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스터 강은 달라. 그는 마치 물과 같네. 배역에 자신을 맞출 줄 안다는 뜻이지.”
“배우가 배역에 맞추는 건 당연한 거 아닙니까? 모든 배우가 주어진 배역에 어울리도록 연기를 합니다.”
“맞아, 그렇지. 그런데 그렇게 당연한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언젠가 이런 호칭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곤 하지.”
랄프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해가 졌는지 사위는 어두컴컴했다.
가만히 하늘로 시선을 돌리니 반짝이는 별들이 보였다.
“그 호칭을 사람들은 스타라고 부른다네.”
“···미스터 강이 스타가 될 재목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아닐세.”
이랬다가 저랬다가 영문을 알 수 없는 대답에 위즈만이 눈살을 찌푸렸다.
랄프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슬쩍 웃었다.
“이미 준비가 끝난 상태였네.”
그의 대답에 위즈만은 끙, 하고 신음을 흘렸다.
랄프가 그렇다면 그런 거다. 그의 사람 보는 눈은 할리우드 바닥에 정평이 나 있으니.
“미스터 강이 출연했던 모든 작품을 찾아봤지. 어느 날을 기점으로 마치 각성한 것처럼 사람이 변하더군. 그때 이후로 그는 이미 완성되어있었네.”
“이거 참. 그럼 꼭 잡아야 하는 인재군요.”
“그럴 수 없었으니 안타까운 거지.”
랄프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갔다.
방금까지 살펴보던 시나리오를 챙겨 위즈만에게 넘겨주었다.
“이걸 미스터 강에게 전해주게.”
“결정을 하신 겁니까?”
대답 대신 다시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 품에 안을 수는 없었지만, 내가 사람 보는 안목이라도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알려야지 어쩌겠나.”
위즈만은 랄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한숨과 함께 서재를 나섰다.
* * *
홍경섭이 고른 기업 중에서 민우가 최종적으로 고른 것은 모두 12개의 업체였다.
명품에 D사, 스포츠 대기업 N사, 자동차 F사를 비롯해서 스위스 시계까지 다양한 업체를 선택했다.
제안이 온 것은 1년부터 5년까지 기간도 다양했는데, 민우는 대부분 1년짜리 단기 계약을 원했다.
일부러 장기간 계약은 하지 않았다.
세계적인 스타에 비하면 제안한 몸값은 그리 높지 않은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에 비하면 인기나 인지도나 어느 하나 못 미치는 것은 사실이나 앞으로 더 올라갈 자신이 있지 않은가.
기업들도 상대적으로 싼값에 광고 효과가 좋을 것으로 내다보고 제안했던 거다. 광고도 아시아 쪽으로 집중하는 편이고.
이를 보며 다짐했다. 언젠가 세계 곳곳에 영향력을 끼치는 스타가 되고 말겠다고.
“이게 다 얼마냐?”
그래도 개런티를 모두 합치자 300억 원에 이른다.
홍경섭은 15억 원의 보너스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연봉도 적지 않게 받는 놈이.”
“연봉은 연봉이고, 보너스는 보너스지. 이 월급쟁이 마음도 모르는 고용주님아.”
“나도 돈의 소중함은 알거든? 인센티브도 확 없던 일로 할까 보다.”
앗 뜨거라 한 홍경섭이 재빨리 다이어리를 펼쳤다.
“일단 파리부터 가는 게 낫겠다. 거기서 이탈리아, 스위스를 거쳐서 도는 거지.”
홍경섭의 너스레에 민우는 허탈한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일정을 짜고 곧장 파리로 이동했다.
그러고 보니 프랑스에는 제법 추억이 있는 편이다. 몽마르뜨 언덕에서 그림을 그렸던 적도 있고.
파리에 처음 온 홍경섭은 미간을 찌푸렸다.
“거리가 왜 이래?”
프랑스 파리는 쓰레기로 몸살을 앓는 곳이다. 쥐 떼는 덤이고.
오죽하면 프랑스 파리에 환상을 가지고 있던 일본인이 관광을 갔다가 쓰레기를 치우고 오겠는가.
민우가 시계를 흘긋 보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누가?”
“현지 코디네이터.”
유랑민을 촬영할 당시 프랑스에서 지내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다.
한국으로 귀국했다가 얼마 전에 다시 프랑스로 파견을 나왔다고 들었다. 덕분에 이번 광고 촬영에서 신세를 질 수 있게 되었고.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민우가 모든 일을 처리해도 되지만, 그럴 시간에 좀 더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게 이득이라 그녀를 고용했다.
약속 시간에 맞춰 늘씬한 키에 예쁘장한 미녀가 나타났다.
현지 코디네이터였던 임유람이다.
“죄송해요. 회사 일이 조금 밀리는 바람에.”
“아닙니다. 시간에 딱 맞춰서 오셨네요. 인사해. 임유람 씨. 이쪽은 우리 회사 대표 홍경섭이라고 해요.”
“반가워요.”
둘은 서로 명함을 나누고 인사를 마쳤다.
미리 섭외한 숙박업소로 이동하던 와중 임유람이 은근슬쩍 물었다.
“이번에 패션쇼에 참여하신다면서요?”
“어떻게 아셨어요?”
“이미 소문이 파다해요. 동양인 남자가 패션쇼에 참여한다고.”
원래는 런웨이에 오를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디렉터가 영화 속 민우의 워킹을 인상 깊게 보는 바람에 제안을 해온 것이다.
민우는 흔쾌히 허락했다. 피땀 흘려 모델 에이전시를 통해 교정한 것들을 썩히기는 아깝지 않은가.
“동양인 남자가 저뿐만은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죠. 그런데 이 시기에 프랑스에 온 유명한 동양인 남자. 게다가 업무 내용은 D사와의 협업. 패션 쪽이랑 협업할 일이라고는 광고뿐이겠죠. 어때요? 이쯤이면 감이 올 것 같지 않아요?”
“유람 씨 눈치가 많이 늘었네요.”
“눈치 없으면 살아남기 힘든 세상이라서요.”
임유람이 안내한 호텔은 넓고 깨끗한 곳이었다.
객실 키를 넘겨주며 그녀가 물었다.
“이틀 후 맞죠?”
“맞습니다. 내일 관광을 알아서 할 테니까 모레 봬요.”
“그래요. 그럼 그때 뵐게요.”
임유람이 떠나자 홍경섭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술? 프랑스니까 와인으로.”
“미안. 혼자 마셔. 나는 할 일이 있어서.”
“뭔데?”
“시나리오 보려고.”
민우는 미국을 떠나기 전 랄프에게서 전해진 시나리오를 펼쳤다.
겉장에는 ‘크라임 타운’이라는 글자가 필기체로 흘려서 적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