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자해지
[마천루 마지막 회 40% 돌파.]
올해 가장 뜨거웠던 드라마 마천루가 높은 시청률과 함께 막을 내렸다.
시청자는 시즌 2를 만들어달라며 아우성쳤다. A그룹의 회장이 된 박시훈이 어떤 모습을 보일지 궁금하다는 반응이 대부분.
마천루의 대본을 쓴 배유진 작가는 당분간 시즌 2는 예정에 없다며 못 박았다.
CHA 스튜디오는 엔플릭스 OTT 방영권에 관한 협상에 들어갔다.
이미 다른 OTT 업체들도 CHA 스튜디오에 손을 내민 상황이라 대박을 터트릴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팽배하다.
이에 CHA 스튜디오는 모든 배우와 스태프에게 인센티브를 지급하겠다고 밝혔다.
-회장실에서 박시훈 창밖을 바라볼 때 찡했던 건 나뿐임?
└온갖 고생은 다 했으니까.
└내가 박시훈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A그룹 날름 삼켜버림. 개꿀.
└현실에서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감정이입 하면서 봤다.
-강민우 데뷔 때부터 팬인데 진짜 연기 잘하는 거 같음. 연기가 아닌 것 같아서 더 몰입할 수 있게 만드는 듯.
└나도 팬인데 흥행 제조기라는 별명이 딱 맞아. 찍는 작품마다 다 대박 남.
└선구안이 좋은 걸까? 아니면 별로인 작품도 뜰 수 있게 만드는 힘이 있는 걸까?
└예전에 신인 작가와 PD 작품도 대박 낸 걸 보면 강민우 덕분인 거 같다.
-강민우 다음 작품은 어떤 건지 아는 사람?
“아는 사람이 없지. 본인도 아직 모르는데.”
대중의 반응을 살피던 홍경섭의 목소리에 민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안 그래도 그 일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려던 참이었다.
“결정했어.”
“뭔데?”
“할리우드.”
모니터를 보던 홍경섭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도전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 민우는 현재 광고만 찍어도 사는 데 지장이 없다. 찾는 기업도 많고, 충분한 돈도 벌어둔 상태다.
홍경섭은 민우의 도전을 응원하면서도 걱정을 감출 수 없었다.
이제 그간 쌓은 것을 누리고 살아도 될 텐데 다음 스탭으로 가려고 하니까 걱정이 될 수밖에.
“예전에 네가 출연했던 영화가 흥행하기는 했지만, 할리우드에서 동양인이 주연을 따내는 건 쉽지 않을 텐데.”
‘리벤져 온 힘’을 찍을 당시 주연에 가깝지만 조연이었다. 만약 민우가 주연이라고 포스터에 찍혀있었다면 흥행도 힘들었을 거다.
겉으로야 차별이 없다고 하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전혀 아닌 곳이다.
“이왕 하늘에 별이 되려고 마음먹었으니 끝을 봐야 하지 않겠어?”
“그야 그렇지.”
배우라면 누구나 꿈꿀 것이다.
세계 최고의 무대인 할리우드를 접수하는 꿈을.
“하긴 한국에서 웬만한 건 다 이뤘으니까 그게 나을 수도 있겠다.”
“실패하면 어쩌지? 나만 조롱당하면 괜찮은데 그게 아닐 거 아냐.”
“실패하면 실패하는 거지. 그래도 상관없어. 어차피 회사 주가 떨어지면 너도 개털 되는 건 매한가지니까. 아, 너는 다르구나. 어차피 네가 번 돈은 지금부터 펑펑 쓰면서 살아도 다 못 쓸 테니.”
홍경섭의 너스레에 민우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예전 계좌에 들어있는 예금을 쪼개가며 쓰던 때도 있었다.
지금은 총자산이 얼마인지 알 수조차 없다.
가끔 홍경섭이 좋은 투자처를 물어오거나 쓸만한 건물을 알아 오면 거기에 쓰는 게 전부였다.
근래 부동산도 크게 올라서 연예인 부자 순위를 매기면 꽤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지도.
“언제 갈 건데?”
“일단 한국에서 벌여놓은 일은 다 마무리 지어야지.”
“오케이. 그럼 너 밀린 일들부터 다 해결하자.”
그러면서 다이어리를 펼치는데, 페이지마다 글자가 빼곡하다.
안 좋은 예감이 떠오르자 조심스레 물었다.
“그거 우리 회사 사람들 전체 스케줄이지?”
다이어리를 보며 체크를 하던 홍경섭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민우를 바라봤다.
“무슨 소리야? 내가 애들 스케줄을 왜 챙겨? 모두 담당이 따로 있는데. 네 스케줄이니까 내가 챙기는 거지.”
“···나 올해 한국 뜰 수 있는 거냐?”
“어디 보자···.”
사라락 페이지를 넘기더니 상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 것 같습니다, 대주주님. 우선 오늘부터 발바닥에 땀 나도록 뛰어볼까? 그래야 조금이라도 일찍 비행기를 탈 수 있을 테니까.”
어물쩍거리는 민우를 재촉한 홍경섭은 민우와 함께 밴에 올랐다.
운전석에는 이미 로드 매니저가 앉아 있었는데, 민우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인사해, 양석아. 강민우 알지?”
“처음 뵙겠습니다. 경섭이 형 사촌 동생 홍양석입니다.”
덩치가 제법 있는데도 처진 눈매 덕분인지 인상은 순해 보였다.
“경섭이 동생이면 내 동생이기도 하지. 근데 섭이 너 설마 대표의 권력을 이용해서 낙하산을 꽂은 거냐?”
낙하산을 꽂을 거였으면 로드매니저를 시킬 리가 없지 않은가.
민우의 농담에 홍경섭은 코웃음을 치며 받아쳤다.
“구멍 난 낙하산으로 꽂았다. 요즘 하도 사람을 구하기 힘들어서 운전만 할 줄 알면 로드는 경력도 안 보고 뽑는 판국이거든. 길이야 네비가 알아서 가르쳐주니까. 양석아, 출발하자. 명원전자 본사로 가면 돼.”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운전을 꽤 잘하는지 차는 부드럽게 출발했다.
지하 주차장을 막 빠져나갔을 때였다.
“우회전하겠습니다.”
뜬금없이 터져 나오는 말에 민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너 전역한 지 얼마 됐어?”
운전에 집중하던 홍양석이 무릎반사처럼 대답했다.
“잘못 들씀다?”
한숨을 내쉰 홍경섭이 대신 대답했다.
“얼마 안 됐어. 전역하자마자 납치해왔지.”
“그럼 기왕 데리고 오는 거 사무실에 넣지 그랬어.”
“제가 원했지 말입니다. 저도 경섭이 형처럼 매니저부터 대표까지 되고 싶어서 말입니다.”
“그랬구나. 근데 양석아. 군대 전역도 했는데 슬슬 군대 말투는 그만 써도 되지 않을까?”
“신경 써보겠습니다.”
홍경섭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쟤 군번줄 더럽게 꼬여서 맞선임이 한 달 차였대. 성격도 개 같은 놈이라 아주 완벽히 세뇌를 시켜놨네. 요 며칠 갈구고 갈궈서 말투가 저 정도는 된 거야. 처음에는 아주 말도 못 했다.”
정작 당사자인 홍양석은 가만히 있는데 홍경섭이 푸념을 늘어놓는다.
“맞다, 양석아. 그 자식 연예인 지망생이라고 했지?”
“응. 소속사에도 들어가 있댔어.”
“어딘지는 모르고?”
“그때야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디오네가 TV에 나왔을 때 선배라고 그랬던 거 같아. 같은 회사에 있다고도 했던가.”
민우와 홍경섭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봤다.
“이런 인연이 있을 줄은 몰랐네.”
“이거 더 패줘야 할 이유가 늘었는데.”
오영환이 항복했다고 해서 그가 법을 어긴 것을 덮어줄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공개하는 거야 누가 했는지 모르게 하면 되는 거고.
홍경섭의 사인만 떨어지면 장민석은 곧장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친 상태다.
오영환을 날려버린다고 해서 회사가 공중분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신인 그룹은 데뷔하기 힘들 것이다.
안 그래도 성공하기 힘든 바닥인데 회사가 오물을 뒤집어썼으니 놀림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
“그 자식 이름이 뭐랬지?”
“본명은 추일구. 근데 가명 쓴다고 들었어.”
“가명이 뭔데.”
“다비드.”
“뭔 돌멩이 같은 이름이래. 조각상보다 못하면 때려주고 싶겠는데.”
툴툴거리다 보니 어느덧 명원전자에 도착했다.
담당자와 CF 계약을 하고, 신문사와 인터뷰를 했으며, 잡지 화보 촬영도 끝냈다.
예정에 없던 스케줄임에도 간단하게 처리해버리는 홍경섭의 수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게 다 네가 유명해져서 그래. 오늘 아니면 시간 안 난다고 하면 어쩔 수 있나.”
“그거 갑질 아니냐?”
“사실인데 어쩔 거야. 너 이제 내일부터 시간 없어. 피부관리실에 내려줄 테니까 관리 확실하게 해둬.”
밴에서 내린 민우는 실감했다.
당분간 별 보며 출근해서 별 보며 퇴근하는 날이 계속될 거라는 것을.
민우를 내려주고 돌아가는 중에 홍경섭은 휴대폰을 들었다.
“변호사님 슬슬 시작하셔도 될 것 같아요.”
원래 마무리는 확실히 해야 하는 법이다.
“팩트로 맞아야 아프다는 것을 깨닫게 될 거야.”
괜히 진실을 꼬집고 들춰내면 화를 내는 줄 아는가.
아프기 때문이다.
* * *
애트라는 DBS 방송국에 출연하지 않는다.
처음에야 방송국도 아쉬울 게 없었다. 음방중에서 시청률이 가장 높은 쪽은 DBS였으니까.
그런데 마천루가 방송되면서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마지막 회가 무려 40%를 기록해버린 대박 드라마에 OST는 음원시장을 석권해버렸다.
타 방송국의 음방 순위를 모두 휩쓸어버렸는데 DBS에만 출연하지 않는다.
팬들은 시청자게시판에 애트라를 출연시켜 달라고 글을 올려댔지만, 노대식은 그럴 수 없었다.
단단하게 화가 난 KH 엔터에서 보이콧을 선언했으니.
“난들 출연시키지 않고 싶겠냐고.”
안 그래도 최근 시청률이 떨어져서 탈모가 올 지경인데.
갑질을 일삼던 노대식은 요즘 된서리를 맞고 있었다.
시청률이라는 권력이 약해진 탓이다.
다른 방송국의 음방도 어느 정도 시청률이 나오다 보니 뮤직랭크에 목을 매지 않는 가수도 늘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국장실에 불려가서 한 소리 듣게 될지도 모른다.
답답한 마음을 금치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는데.
“노 PD. 무슨 일 있어요?”
부드러운 목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그의 눈앞에 새로 온 젊은 국장, 천기주가 서 있었다.
“국장님?”
“뭔가 고민거리가 있으면 말씀해보세요. 제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처리해드릴 테니까.”
마음을 다독이는 음성에 노대식은 최근 쌓였던 스트레스가 쫙 풀려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 사람이라면 말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고민을 시원하게 털어버렸다.
“그게 실은···.”
이야기를 모두 들은 천기주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습니다. 제가 어떻게든 처리해보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세요. 키는 우리가 아니라 KH가 쥐고 있는 것 같으니까.”
“물론입니다.”
노대식과 헤어진 천기주는 국장실로 돌아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나야.”
-뭔데? 왜 전화하고 난리야?
“미처 치우지 못한 똥이 남았던데. 그것도 처리하고 가야 하지 않겠어? 유식한 말로 결자해지라고 하지.”
-미친 거냐? 이제 내 손을 떠났으니 네가 알아서 해 이 자식아!
“그래? 그럼 형이 가진 재산부터 압류해야겠네.”
-뭐?
“국장실 의자에 앉아서 거드름 떨면서 번 돈이잖아. 이곳과 상관없는 사람이니까 거둬들이는 게 맞지 않겠어?”
-너···!
“부족함 없이 살던 사람이 무일푼이 되면 볼만 하겠네. 시간은 많이 줄 수 없어. 이달 안으로 싸둔 똥 다 처리하지 못하면 형네 집에 빨간 압류 딱지가 붙기 시작할 거야.”
-야!
“아버지도 나한테 모든 권한을 줬다는 걸 잊지 마. 그럼 끊는다.”
-잠깐만!
“뭔데?”
-정확하게 무슨 일을 해결하라는 건데? 그건 말해줘야지.
천기주는 피식 웃었다.
욕심 많은 그를 굴복시키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가진 것을 빼앗는 것.
이미 칼자루는 이쪽으로 넘어온 상황이니 휘둘러도 상관없다. 이때껏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반항하지 못할 테니까.
천기주는 지금 상황이 즐거워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KH 엔터.”
노대식에게 듣기로도 제법 사연이 있어 보였다.
강민우라고 했던가?
천기철과 헤어질 때 단호하게 경고도 했다지.
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언제 한번 시간 내서 따로 밥이라도 사주고 싶을 만큼.
역시나 예상대로 수화기 너머의 천기철이 잔뜩 당황했다.
-뭐? 거기는···.
“잊지 마. 이달 말이야.”
뚜뚜뚜.
천기철은 들고 있던 전화기를 벽에 던져버렸다.
얼마 전에 출시한 신형 스마트폰이 박살 났지만, 전혀 속이 풀리지는 않았다.
씩씩거리며 분을 참지 못하던 그는 민우가 헤어질 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잊지 마세요. 사과를 할 때 자존심 따위는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뿌드득.
이가 갈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을 해결 하지 못하면 그가 누리던 모든 것을 내놔야 할 테니.
“빌어먹으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