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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관은 건드리면 안된다 (149/223)

뇌관은 건드리면 안된다

명절 같은 가족 행사를 할 때면 언제나 배유진의 집은 북적였다.

그들의 목적은 하나다. 엄마에게 인사를 하고 눈도장을 찍는 것.

방송국 사장이거나 톱스타를 보유한 소속사 사장, 누구나 얼굴만 봐도 알아볼 수가 있을 정도의 톱스타가 아니라면 문턱조차 넘지 못했다.

손님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다 보니 배유진의 용돈도 풍족했다. 그들이 올 때마다 지갑에 있는 현금을 손에 잡히는 대로 주었으니까.

어머니나 아버지도 돈을 잘 벌다 보니 친구들의 집처럼 크면 주겠다며 대신 맡아주지도 않았다.

덕분에 학창 시절 친구들의 군것질은 그녀가 책임졌다.

어렸을 때야 연예인을 본다는 생각에 즐거웠다.

예쁘고 끼도 있었으니 집에 인사차 오는 소속사 사장들 모두가 배유진에게 눈독을 들였다.

만약 유명희가 유명한 드라마 작가가 아니었다면 배유진은 연예인의 꿈을 키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철이 들고 나서는 화려할 것만 같은 연예계에 어두운 이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였을 거다. 톱스타라도 그녀의 눈에 차지 않게 된 것이.

아니, 인기 있는 연예인이라면 일단 거부감부터 들었다.

배유진은 유명희와 함께 대본을 수정할 때 민우가 어떤 사람인지 물어봤다.

“좋은 사람이지. 녹턴 에튀드 끝나고 포상 휴가를 가기로 했는데, 그때는 민우 씨가 데뷔하고 처음으로 조연 롤을 맡았다고 들었거든? 그런 사람이 출연료를 받아봐야 얼마나 받았겠어? 근데 자기 돈을 털어서 스태프 전부···.”

배유진도 기억난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들이 어째 좋은 것뿐이라 미심쩍었다. 그러나 같이 작업을 해보고 난 후 유명희의 말이 전혀 과장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술, 담배는커녕 자기 관리 철저하고 겸손하며 자기 일에 열정을 가지고 일한다.

이런 사람이라면 일반인이라도 매력적일 텐데 사방에서 온갖 유혹의 손길이 뻗쳐오는 연예인이다.

자잘한 스캔들도 없다는 것은 그런 유혹도 모두 뿌리쳤다는 뜻이 아닌가.

어떻게 보면 남자를 고르는데 까탈스러울 수도 있다.

허나 배유진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접근해오는 남자들의 상태는 이상했으니까. 오히려 남자 혐오증에 걸리지 않은 것만 해도 용하다.

감범석에게서 온 연락을 받은 배유진은 휴대폰을 꼭 쥐었다.

“이제야 만나봐도 괜찮을 것 같은 사람을 발견했는데.”

아직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도 모른다. 하지만 왠지 빼앗기면 후회할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배유진은 서둘러 화장대 앞에 앉았다.

작업을 하느라 대충 묶었던 머리도 새로 하고, 화장도 고쳤다.

아껴두었던 옷도 꺼내 입어 여배우 뺨칠 정도로 세팅이 끝나자 촬영장으로 향했다.

막 점심시간인지 촬영장의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밥을 먹고 있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배유진의 눈에 단박에 들어오는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민우와 여자아이, 그리고 늘씬하고 예쁜 여자.

함께 밥을 먹는 모습이 마치 부부처럼 보인다.

어쩐지 가슴 한편이 불편해지는 느낌이다.

배유진은 식판에 밥을 담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실례하겠습니다. 혹시 여기 앉아서 먹어도 될까요?”

김윤지를 챙겨주던 민우가 고개를 들었다.

“어? 작가님?”

“오랜만이죠?”

“그러게요. 이쪽으로 앉아서 드세요.”

민우가 비워준 자리에 앉아 한수연에게 인사를 했다.

“한수연 씨죠? 저는 배유진이에요. 밥 잘 먹을게요.”

“별거 아닌데요, 뭐. 그런데 오빠가 작가님이라고 하시던데. 어떤 작가님이세요?”

오빠라는 단어에 배유진의 눈썹이 움찔했지만 그런 기색은 금방 지워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천루를 제가 썼어요.”

“어? 정말요? 저 드라마 정말 재밌게 보고 있어요! 작가님을 꼭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오네요!”

“고, 고마워요.”

한수연의 급발진에 배유진은 당황했다.

눈빛이 얼마나 초롱초롱한지 보고 있으면 빠져들 것 같다.

어째서 사람들이 한수연, 한수연 하는지 알 것 같달까.

‘안돼. 내가 넋을 놓아서 어쩌겠다고.’

내심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배유진은 숟가락을 쥐며 스쳐 지나가듯 물었다.

“그나저나 여긴 어쩐 일이세요?”

“그냥 응원차 왔어요. 예전에 도움도 많이 됐었고요.”

“그렇구나.”

“제가 녹턴 에튀드 오디션에 합격할 수 있었던 것도 오빠 덕분이거든요.”

“배 작가님이 유 작가님 따님이셔.”

“어머, 정말요?”

“마천루를 쓸 때 어머니가 도움을 많이 주셨어요.”

밥을 먹으며 아무리 살펴봐도 둘은 그냥 아는 오빠, 동생 사이로 보인다. 썸타는 기색도 없어 보인다.

왠지 속은 것 같아 감범석이 있는 곳을 노려봤다.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은 그가 종이컵을 들어 보였다.

속기는 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긴가민가했던 마음을 어느 정도 확신하게 됐으니까.

식사를 마치고 간단하게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배유진은 한수연이 마음에 들었다.

코드도 맞고 이야기가 잘 통해서인지 금방 둘은 언니, 동생 하며 친자매처럼 굴었다.

식사 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조PD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터졌다!”

촬영장에 모여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조PD는 헛숨을 들이마시며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덕분에 그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모두가 확인할 수 있었고.

궁금증은 생겼을 때 풀지 못하면 답답하다. 그걸 해결해야만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증상이다.

이제 촬영을 시작해야 하는데 스태프나 배우, 모두가 휴대폰을 흘긋거리고 있다.

아무리 봐도 촬영을 할 상태가 아니다.

집중하지 못하면 시간과 필름만 낭비다.

차라리 사람들의 궁금증을 풀어 주고 촬영을 재개하는 것이 나으리란 판단이 들었다.

감범석은 한숨을 내쉬며 메가폰을 입가에 가져갔다.

“한 시간 추가로 쉬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잽싸게 휴대폰을 손에 쥘 때, 감범석은 조PD의 귀를 움켜잡고 구석으로 끌고 갔다.

“도대체 뭐가 터졌다는 거지?”

민우도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휴대폰을 들었다.

포털사이트에 들어갔더니 이유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하나의 기사가 우라까이(베껴 쓴 기사의 은어) 되어 모든 연예기사를 도배하고 있었으니까.

기사들을 보다가 조회 수 1위를 기록하고 있는 것을 터치했다.

(단독) 어느 여배우의 갑질 행태

요즘 갑질을 하면 어떻게 되는가?

영상으로 기록되어 미디어에 업로드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답은 간단하다.

웹상에서 조리돌림을 당한다.

인터넷 세상에서 끝나지 않고 현실로까지 이어지니 더 큰 문제가 된다.

과거는 달랐다.

당사자들만 입을 막으면 새어나갈 일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현재는 쉬쉬하며 넘어가던 예전과 큰 차이가 있다.

그 이유는 촬영기기가 소형화되고 발달한 것이 첫째요, 미디어가 방송국과 신문사의 전유물에서 개인에게도 개방된 것이 둘째다.

이제 스마트폰은 유용한 증거수집용 도구가 되었다.

오늘 새벽 유티비에 ‘촬영장의 마녀 1탄’이라는 제목의 동영상 하나가 올라왔다.

여기까지 기사를 본 민우는 곧장 유티비를 실행했다.

기사의 뒷부분은 동영상의 설명이었기에 동영상을 보는 것만 못했던 탓이다.

기자가 알려준 제목의 동영상은 이미 인기 급상승 동영상 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동영상을 켜자마자.

-야!

우렁찬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옆에서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배유진과 한수연도 깜짝 놀랄 정도로 큰 소리였다.

“죄송합니다.”

민우는 머쓱한 얼굴로 볼륨을 줄였다. 자막이 있었기에 볼륨을 줄여도 감상하는 데 지장은 없었다.

동영상에는 2명의 여자가 찍혀있었다. 모두 얼굴만 블러 처리를 해서 알아보지는 못했다.

-넌 도대체 할 줄 아는 게 뭐니? 이게 메이크업이라고 한 거야? 기미가 그대로 있잖아!

-죄송합니다, 선생님. 저는 한다고 했는데···.

-이제는 말대꾸까지.

소리를 지른 여자가 한숨을 팍팍 쉬더니 손을 까딱거렸다.

주춤거리며 다른 여자가 다가가자.

짝!

휘둘러진 손이 그대로 싸대기를 올려붙였다.

뺨을 맞은 여자가 말문을 잇지 못하고 멀거니 서 있었다.

“너 말고 가서 실장 데리고 와. 도대체 아랫사람 교육을 어떻게 했길래 이 모양인지 따져봐야겠네. 뭐해? 얼른 안 가?”

실장이라는 여자가 실내로 들어왔다.

거울을 들여다보던 여자가 차갑게 말했다.

“너는 애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니?”

“죄송해요, 선생님.”

“사과하는 자세가 영 별로네?”

실장이 후다닥 무릎을 꿇었다.

“걔가 내 눈에 다시 띄면 그때는 너희 의상실도 날려버릴 거야. 알아들었지?”

“네, 선생님.”

동영상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거기 반사판.

-저요?

-그럼 너 말고 누가 반사판 들고 있니?

-선생님. 제 이름은 반사판이 아니라···.

-됐고. 반사판 너 이리와. 여기 서서 나만 비춰.

-이번 씬은 주연배우를···.

-너 지금 나 가르치니? 네가 나를 가르칠 정도로 내 경력이 짧은 것 같아?

-죄송합니다.

-그래, 죄송해야지. 또 죄송할 일을 만들면 그땐 반사판도 못 들게 될 거야. 알아들었어?

-네.

한마디 쏘아붙인 그녀가 늘씬한 체형의 여인에게 말했다.

-얘, 반사판 내가 써도 되지? 너는 아직 젊으니까 반사판 없어도 화사하잖아.

-네? 네, 선생님. 물론이죠.

화면이 잠시 까맣게 암전되었다가 밝아졌다.

이번에도 대기실로 보이는 곳이었다.

거울 앞에 앉은 여자의 오른손에는 베이지색 원피스가 들려있었다.

-코디야 이리 와봐.

-네, 선생님.

-내가 했던 말은 귓등으로 들었니? 내 피부톤이랑 의상이랑 안 어울린다고 몇 번을 말해?

여자는 손아귀에서 옷을 꾸깃꾸깃 뭉쳐 들었다.

-이딴 거지 같은 옷을 지금 나더러 입으라고 하는 거니? 듣도 보도 못한 디자이너가 만든 옷을 입으라고 하는 거냐고!

포탄처럼 날아간 의상이 여자의 얼굴을 때렸다.

-죄송해요, 선생님. 준비했던 의상이 주연이랑 색깔이 겹쳐서요.

-그래서 걔가 내 의상을 바꾸라고 하디?

-그건 아니지만···.

-그럼 당장 원래 의상 가져와.

값비싸 보이는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뒤늦게 촬영장에 도착했다.

원피스의 색상은 검붉은색이었는데, 하필 주연배우의 의상도 붉은색이다.

-어? 미안하다 얘. 코디가 의상 톤을 잘못 알았나 본데. 이거 어쩌니? 내 지금 당장 가서 코디를 혼내고 옷 갈아입고 올게.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여우주연상급 연기다.

주연배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선생님. 제가 갈아입고 올게요.

-그럴래? 미안해서 어쩌니?

-괜찮아요. 죄송합니다, 감독님.

-시간 없으니까 서둘러주면 좋겠어.

행패 부리는 게 이쯤 되면 사탄도 울고 갈 정도로 몹쓸 사람이다.

게다가 이게 1탄이니, 2탄도 있지 않겠는가.

이미 댓글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낙x의 도x 촬영장인 거 같습니다.

└낙원의 도시라고 왜 말을 못 해.

└아아부못 낙낙부못.

└뭔 개소리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하아. 설명하면 망한 드립이거늘.

-의상을 보니까 갑질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겠네.

└누군데? 왜 말을 하다 말아?

└양xx잖아 멍충아!

└x신옥이잖아 멍충아!

-꼰대력 만렙에 무릎을 꿇고 갑니다.

└우리 회사 부장은 저 여자한테 비비지도 못하겠다.

└카악!퉤!아놔~어이가음네!양신옥, , 배우님, , 까는, , 쉐리들, , 므냐?한때, , 체고의, , 여배우셨다, , 너희노무쉐리들, , 태어나기도, , 전에, , 알아~?

└졸리면 주무세요. 헛소리는 일기장에 쓰시고.

-와 낙원의 도시에 나오는 악역은 그냥 원래 성격 그대로를 보였던 거구만?

└오히려 현실이 더한 거 같은데?

-저 여자가 깽판 쳐서 PD도 짤려 나감.

└지금 시청률 잘 나오잖아. 피디를 왜 짤라?

└자기 나오는 씬 하나 편집했다고.

└리얼임?

└근데 뭘 이렇게 자세하게 아시나? 관계자심?

└엑스트라 알바 하는 사람임. 저건 진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데. 그리고 편집도 잘해줬네. 저것보다 더 개판이야. 진짜 단역이하 배우들은 숨도 쉬지 못한다.

대충 댓글을 살피기도 마친 민우는 왜 조PD가 터졌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야말로 핵폭탄이 터져버렸다.

수습하려면 꽤 고생할 게 분명한 그런 폭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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