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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장에 부는 바람 (148/223)

촬영장에 부는 바람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무슨 일이든 순항할 때는 잡음이 없다. 그러나 삐끗하는 순간 잡음이 들리기 시작한다.

이때가 되면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뉜다.

순응하는 사람과 간섭하려 드는 사람으로.

양신옥은 후자였다.

안하무인에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전성기 시절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오죽하면 ‘촬영장의 마녀’라는 별명이 붙었겠는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이라 아무도 그녀에게 뭐라고 하지 못했다.

당시는 신문과 TV에서 나오는 뉴스가 진실이라고 여기며 살던 시절이었다. 돈을 먹은 기자가 침묵하니 그녀의 악행을 대중들은 모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TV는 시청률을 잘 뽑아내는 양신옥의 편이었고.

그런 그녀는 감독의 권위 따위는 발톱 밑의 때보다 못하게 여겼다.

지금도 그렇다. 이미 모든 배우, 스태프가 촬영장에서 준비를 마쳤는데 양신옥은 이제야 나타났다.

느긋하게 커피도 한 잔 마시고, 메이크업과 헤어를 만진 후에야 촬영에 들어갈 수 있었다.

모두를 기다리게 만든 주제에 자신의 씬을 몰아서 찍자마자 양신옥은 촬영장을 떠났다.

감독인 김민호는 그런 양신옥을 보며 속이 탔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소문에는 천기철과 내연관계라지 않은가.

똥은 더러워서 피한다는 격언을 새기며 남은 촬영을 서둘렀다.

집으로 돌아온 양신옥은 샤워를 하고 와인 한잔을 따라 TV 앞에 앉았다.

최근 그녀가 신경 쓰이는 것은 마천루의 시청률이었다.

마천루에는 자신의 시녀 정도 위치였던 이명선이 출연한다.

1회의 시청률을 보며 비웃었지만, 이제는 거의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왔다.

마천루가 올라오는 만큼 낙원의 도시도 성큼성큼 걸어가야 하는데 어쩐 일인지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다.

“이건 작감의 탓이지.”

언제나 그랬다. 드라마는 작가 놀음이라고 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 대본을 잘 표현해야 하는 감독도 중요하고.

와인과 함께 7회를 집에서 모니터링하고 있던 양신옥의 눈썹이 꿈틀했다.

“왜 씬 하나를 날린 거지?”

이해되지 않는 NG에도 감독이 빌다시피 해서 무려 세 번이나 재촬영을 해줬건만 그 씬을 날려버린 것이다.

그녀는 곧장 전화기를 들었다.

“나야, 김 감독. 뭐야? 왜 씬 하나가 없어졌어?”

-죄송합니다, 선배님. 아무리 잘라 붙여봐도 이야기가 흐트러져서요.

양신옥의 눈썹이 바짝 솟아올랐다.

“당신만 예술 해? 씬 날리자는 건 누구 의견이야? 작가야?”

-네? 그야 제 의견입니다만···.

“알아서 부는데 좋을 텐데.”

수화기 너머에서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간 꾹꾹 눌러놓으며 쌓아둔 것이 폭발하는 것 같다.

-제 의견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선배님. 고작 씬 하나잖아요. 감독으로서 씬 하나도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까?

“고작 씬 하나? 말이 안 통하네. 알았어, 끊어.”

-선배님! 선배님!

전화가 끊기자마자 김민호에게서 연달아 전화가 걸려왔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

그의 전화번호를 수신 차단하고 천기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오빠. 나야. 할 이야기가 있어. 예전에 만나던 곳에서 봐.”

짧은 통화를 끝낸 양신옥은 외투를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며칠 후, 김민호는 성적 부진을 이유로 낙원의 도시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그의 후임으로 들어온 PD는 바짝 얼어붙은 상태였다.

PD 하나를 날려버리는 배우가 존재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사실 김민호는 언제 교체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번 드라마에는 많은 것들이 달려있다.

평소라면 다음을 기약하며 기대감을 내려놓았을 텐데, 당장 수십, 수백억이 왔다 갔다 하는 판이다.

거기에 양신옥이 씬을 마음대로 주무른다고 일러왔으니 당장 조처를 한 거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후임자로 들어온 PD는 양신옥을 두려워했고, 작가는 작가대로 아무런 상의도 없이 PD를 바꿔버렸으니 불만이 커졌다.

그 불만을 대본으로 풀어봤으나 통하지 않는다.

양신옥을 엿 먹이려고 대본을 살짝 수정하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방송사 사장을 앞세워 클레임을 걸어대니 작가도 두 손 들었다.

원래도 자신 위주로 돌아가는 촬영장이었지만, 지금이 더 만족스럽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떠받들어 주니까.

그녀로서는 오래 참은 거다. 은퇴하기 전만 해도 촬영 현장의 분위기는 이랬으니까.

이제야 예전으로 돌아온 기분이랄까.

촬영장을 휘어잡은 그녀의 다음 순서는 자신의 비중을 늘리는 거였다.

“현 작가. 드라마에서 악역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 내가 부각 돼서 계속 방해를 해줘야 주연 배우들의 사랑이 더 확 타오르지 않겠어? 원래 사랑에 걸림돌이 있어야 당사자들은 더 불붙으니까.”

현수영은 양신옥이 원하는 대로 대본을 수정했다. 어차피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다. 뻗대봤자 머리채만 쥐어 잡힐 거다.

잘못되면 자신의 커리어가 박살이 나겠지만 마녀에게 시달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우연의 일치인지 양신옥의 악역 연기가 시청자들의 호평에 힘입어 시청률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악역의 정석, 양신옥 시청자를 홀리다.

틈을 놓치지 않고 천기철도 친한 기자들을 이용해서 언론에 불을 지폈다.

본격적으로 악역으로 변신한 12회 전까지만 해도 마천루가 2%를 앞섰는데, 13회가 지나고 시청률은 다시 동률이 되었다.

두 드라마가 엎치락뒤치락하며 이슈를 모으다 보니 유입되는 시청자도 늘어났다.

다른 드라마가 종영한 이유도 있겠지만, 두 드라마의 시청률을 합하면 45%에 이른다.

편당 광고비도 껑충 치솟아서 TVB와 DBS는 콧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화무십일홍이라.

오랜만에 드라마에 복귀한 양신옥의 연기 변신은 색달랐지만 그뿐이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계속 먹으면 물리는데 악역은 오죽할까.

이제 슬슬 그만 나왔으면 좋겠는데 거의 주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비중이 크다 보니 지친 시청자들은 채널을 돌려 버렸다.

그 수혜는 마천루가 톡톡히 보기 시작했다.

개판으로 치닫는 낙원의 도시와는 달리 마천루의 촬영 현장은 분위기가 좋았다.

드라마는 시청률이 전부인데, 시청률도 높게 나온다. 어떻게 분위기가 나쁠 수 있겠는가.

촬영장도 사람이 부대끼는 공간이라 항상 분위기가 좋을 수만은 없다.

배우와 배우 간의 마찰도 있고 심지어 스태프와 배우 간의 자잘한 다툼도 발생한다.

다툼이 감정적으로 번지면 큰일이겠으나 일과 관련된 부분에서 끝난다면 건설적인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다.

마천루의 촬영장이 그러한 경우다.

특히 그 중심에는 민우가 있었다.

주연배우가 감범석과 자주 부딪히는데도 그 순간만 지나면 다툼은 끝나버린다. 촬영장의 구심점이 이러한 상황이니 다른 이들도 거기에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것이다.

덕분에 현장에서 수정된 씬도 꽤 많다. 그 씬은 시청자의 호평을 받았고.

안 그래도 존재감이 큰 주연배우다.

더불어 영향력마저 커져 버린 그가 스태프들에게 갑질은커녕 겸손한 자세를 보인다.

스태프를 하인처럼 생각하던 배우도 마천루 촬영장에서만큼은 망나니처럼 굴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이니 어찌 분위기가 나빠지겠는가.

아직 해도 뜨지 않은 꼭두새벽.

“안녕하세요. 고생 많으십니다.”

언제나처럼 일찍 촬영장에 나온 민우는 스태프와 인사를 나누었다.

“이거 드시고 하세요.”

안 그래도 출출할 시간에 빵과 우유를 잔뜩 사 와서 나눠주니 스태프 모두가 민우를 좋아한다.

“잘 먹을게요.”

“그냥 빵이랑 우유인데요.”

“제가 언제 돼지 껍데기에 소주 한 잔 사겠습니다.”

카메라 감독의 너스레에 민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기대할게요.”

인사를 마치고 주연급 배우들의 의자가 놓여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민우보다 더 일찍 나온 반태근이 손을 흔들었다.

“제거는 없나요?”

주연배우는 억대 출연료를 받는지만 조연은 그 절반도 받지 못한다.

절반이 뭔가. 베테랑이나 돼야 회당 1~200만 원 수준으로 받는다. 단역은 말할 것도 없고.

마천루는 조금 사정이 달랐다.

톱스타가 민우 혼자였고, 제작비도 넉넉하다. 민우는 배우들의 출연료를 어느 정도 올려주기를 원했다. 모자란 제작비는 직접 영업을 뛰어서라도 끌어오겠다며.

마천루의 제작비가 풍족한 상황이었기에 민우의 제안은 통과되어 다른 주·조연급 배우들은 꽤 높은 출연료를 받게 되었다.

민우가 관계자들에게 입조심을 시킨 덕분에 일부 고위급을 제외하면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었고.

“너는 요즘 돈도 잘 벌면서 직접 사 먹어.”

최근 CF도 찍었다고 들었다. 남유태도 그렇고 반태근도 그렇고 둘 다 KH 엔터에 들어오고 잘 풀려서 다행이다.

“원래 공짜가 더 맛있는 법인 거 모르세요?”

“그러다 머리 벗겨진다.”

“윽! 안 그래도 요즘 신경 쓰이던 참인데.”

이제 20대 중반이 된 반태근은 열심히 두피 마사지를 했다.

민우는 반태근을 안쓰럽게 바라봤다.

“약이라도 먹던지.”

“풍성충은 제 심정을 모를 겁니다. 아침에 머리를 감을 때마다 손바닥에 머리카락이 묻어 나오면 얼마나 슬픈지 아세요?”

“병원은 가봤어?”

“스트레스 때문이라죠.”

드라마가 잘 된다고 배우들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건 아니다. 오히려 더 잘해야 한다, 내 실수로 시청률이 떨어지면 안 된다, 하는 부담감이 목을 옥죈다.

아무래도 현대인은 스트레스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일지도.

어느 정도 마사지를 마친 반태근이 물었다.

“그나저나 오늘 식사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도시락?”

“안 그래도 감독님한테 연락드렸는데 오늘 밥차가 올 거다.”

“밥차요? 누가 쏘는 건데요?”

“수연이가.”

“수연이라···. 혹시 한수연?”

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태근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쩍 벌렸다.

루머에서 벗어난 한수연은 과거의 영광을 찾아가는 중이다.

원래 빼어난 외모와 연기력은 원래 깔 곳이 없던 그녀다.

주연을 맡아 올해 초에 끝난 드라마의 시청률도 높게 나왔다.

이 정도면 제2의 전성기라도 불러도 될 정도다.

“형 수연 님이랑 친해요?”

“친하다고 하면 친하고, 아니라면 아니고.”

“무슨 대답이 그래요?”

“친하고 안 친하고가 나 혼자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 내가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방이 아니라고 하면 그게 친한 걸까?”

갑자기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니 반태근은 고개를 저었다.

“어유, 밥차 보내줄 정도면 친한 거겠죠. 그런데 갑자기 왜 밥차를 보내줬어요?”

그건 민우도 모른다.

먼저 밥차를 보내준 것도 아니고, 그녀에게 도움을 준 것도 없다. 갑자기 연락이 와서는 밥차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러고 한마디를 남기기를.

“드라마 재밌게 보고 있다더라. 응원차 보낸다던데.”

“잘 먹겠다고 꼭 전해주세요. 꼭이요, 꼭.”

간절한 반태근의 표정에 마지못해 수락하려는 찰나.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나누세요?”

윤은설 역을 맡은 안시아가 커피 두 잔을 내밀었다.

“고마워, 마누라. 잘 마실게.”

반태근이 눈을 찡긋하며 커피잔을 들어 보였다.

“우리 남편의 바람피우는 냄새가 촬영장에 가득하던데.”

“내가? 설마. 나는 한수연 열 트럭 가져다줘도 윤은설이랑 안 바꾸지.”

두 배우의 연기에 민우는 피식 웃으며 커피를 마셨다.

그녀를 시작으로 안승환, 류다빈도 도착했다.

안승환과 안시아가 같은 성씨라 친척은 아닐까 생각했으나 안시아는 가명이란다.

보통 극에서 대립하는 배우는 감정유지를 위하여 촬영장에서 말 한마디도 나누지 않는 일도 있다.

이곳에 모인 배우들도 원래는 그런 성향이었지만 스위치를 켰다 껐다 하듯 연기를 하는 민우 때문에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가끔 연기의 합도 맞추고 대화를 통해 나은 연기를 선택할 수 있었고.

모두 장단점이 있겠지만 지금 마천루 촬영장의 분위기는 최고라고 해도 무방했다.

최근 촬영장에서 민우의 활력소는 아역배우 김윤지다.

“윤지야 맛있어?”

“네, 삼촌.”

민우는 흐뭇하게 웃으며 이제 유치원에나 들어갔을 법한 꼬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김윤지가 히히 웃었다. 앞니가 빠진 모습이 얼마나 귀엽던지 민우의 손이 바쁘게 주머니를 오갔다.

원래 군것질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닌데 김윤지에게 주려고 유기농 과자며 무설탕 사탕 같은 것들을 챙겨 다니게 됐다.

“이것만 먹고 이따 밥 맛있게 먹자. 알겠지?”

입안에 과자를 밀어 넣어서 대답하지 못한 김윤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양 갈래로 땋은 머리가 고갯짓에 따라 팔랑거리자 민우는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아이를 좋아하나 봐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더니 예전보다 더 예뻐진 한수연이 웃고 있었다.

“이게 누구야? 오랜만이다.”

“잘 지내셨죠?”

“나야 잘 지냈지. 넌?”

“저야 뭐···. 그럭저럭? 오랜만에 보니까 더 멋져졌는데요?”

“너도 예뻐졌네.”

민우의 칭찬에 한수연이 볼을 붉혔다.

가만히 둘을 보던 감범석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이자 곧바로 전화기를 들었다.

“네, 작가님. 촬영장에 여배우가 등장했어요. 그야 당연히 우리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가 아니죠. 이름요? 한수연이라는 여배우인데···. 음? 작가님?”

끊어진 전화기를 내려다본 감범석은 히죽 웃었다.

“청춘이로다. 이거 꿀잼 매치를 보게 될지도 모르겠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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