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야에 들어왔다
감범석은 성격과는 별개로 능력이 뛰어난 감독이었다.
적재적소에 OST가 들어감으로써 시청자의 감수성을 자극하고, 작품에 녹여낸 PPL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도록 했다.
제작비도 배우들의 몸값이 아니라 온전히 드라마를 제작하는 데다 투자를 했으니 액션 씬은 영화와 맞먹을 정도다.
1회 시청률 전국 5%, 수도권 5.6%.
2회는 소폭 상승해서 5.5%와 7.3%.
13%로 시작해서 14.8%를 기록한 낙원의 도시에 두 배 이상 차이가 나지만, 메이저 방송국과 종편이라는 상황을 따져보면 그리 나쁜 수치는 아니었다.
비록 시청률은 초라할지라도 영상미나 다른 부분에서 낙원의 도시를 압도한다.
커뮤니티도 재미있다는 반응과 추천하는 글로 뜨겁게 달구고 있으니 이대로 회차가 진행되면 역전을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낙원의 도시도 그러하다는 점이다.
아직 부정적인 평은 나오지 않고 순항 중.
뭔가 시청자를 끌어들일 수 있는 포인트가 없다면 이대로 시청률이 굳어질 확률도 높았다.
그 포인트가 되어 줄 것으로 기대 중인 것이 애트라가 부른 OST였다.
100위권 차트 밖으로 사라졌던 애트라의 데뷔곡은 1회의 방송이 끝나자마자 차트인에 성공했다.
몇 년 동안 지지부진하다가 갑자기 1위에 오르는 아이돌도 있으니 그리 놀라운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역주행 자체가 눈길을 끄는 것은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드라마가 OST를 끌어올려 줄 때도 있지만, 그 반대가 될 때도 있다. 오히려 드라마보다 유명해진 OST도 있고.
현재 애트라의 재등장에 가장 똥줄이 타는 것은 스프링 엔터의 오영환이다.
재계약은 오늘내일하면서 지지부진한 상황인데 갑작스럽게 애트라가 치고 올라오고 있으니.
1위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던 디오네도 시간이 갈수록 점점 순위가 내려가고 있는 상황.
지금에야 행사로 돈을 쓸어 담고 있지만 재계약을 하지 못한다면 이번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
양희린과 은빛나에게 임무를 맡겼지만 둘 다 이렇다 할 성과도 보이지 못했다.
“이렇게 되면 차라리 둘을 유닛으로 묶어서 팔아야겠어. 마른오징어도 쥐어짜면 엑기스가 나오기 마련이니.”
결정은 했으니 어떻게 엮을 것인가를 고민할 때다.
순간, 그의 뇌리로 아주 좋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거 괜한 짓을 한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오히려 잘 됐잖아?
양희린은 자신의 제안을 절대 거절할 수 없을 거다. 만약 그랬다가는 파멸행 열차에 올라타게 될 테니까.
비릿하게 웃은 오영환은 자신의 생각을 더 디테일하게 다듬기 시작했다.
* * *
홍경섭은 업무용이 아닌 개인용으로 사용하는 휴대폰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 번호를 가르쳐준 사람은 모두 번호를 저장해뒀다. 그런데 지금 걸려온 번호는 모르는 번호다.
평소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는데 오늘따라 이상한 예감이 드는 게 아닌가.
고민하던 홍경섭이 전화를 받았다.
“네, 홍경섭입니다.”
-홍 대표님이신가요?
“그렇습니다만. 누구시죠?”
-저 디오네의 미지라고 해요. 예전에 저희 매니저한테 명함을 주신 적 있는데···.
“아. 기억나요. 그런데 어쩐 일로 전화를 다 주셨어요?”
-혹시 시간 되시면 내일 만날 수 있을까요?
만나는 거야 어렵지 않다. 그러나 다른 소속사의 연예인과 개인적으로 만났다가 무슨 구설수가 생길지 알 수 없는 노릇 아닌가.
“괜찮으시면 회사로 찾아오시겠어요?”
-그럴게요.
뭔가 다급함이 느껴지는 미지의 대답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미지는 다음날 곧바로 KH 엔터로 찾아왔다. 선글라스에 모자, 마스크까지 해서 철저히 정체를 숨긴 채.
데스크에서 그녀의 이름을 말하자 곧장 대표실로 안내되었다.
대표실에 들어선 미지는 자신의 정체를 가렸던 것들을 벗었다.
수수하지만 예쁘장한 외모가 모습을 드러냈다. 적당한 키에 비율도 좋다.
디오네라고 하면 양희린과 은빛나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평가가 지배적인데, 어째서 그런 이야기가 도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디오네의 그룹 컨셉상 해야 했던 화사한 메이크업이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르고.
‘이미지 변신을 한다면 제법 잘 어울릴 것도 같은데.’
속으로 중얼거리던 홍경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다른 회사의 사람. 그가 관여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자리에 앉은 미지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갑자기 연락을 드려서 죄송해요. 상담을 할 만한 사람이 대표님밖에 떠오르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들은 자기들 욕심을 차리느라 혈안인데 대표님은 다르시다고 들었거든요.”
초장부터 뭔가 안 좋은 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오는 느낌이다.
일단 거절부터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괜한 일에 끼어들었다가는 곤란한 일만 발생하게 될 테니까.
그러나 미지가 한발 빨랐다.
“혹시 재계약을 거절하면 문제가 커지나요?”
겁먹은 미지의 눈빛을 보며 홍경섭은 목 끝까지 치밀어올랐던 거절의 말을 꿀꺽 삼켰다.
강한 궁금증이 불안한 예감보다 더 강렬했기 때문.
자세를 고쳐 앉은 홍경섭이 물었다.
“자세하게 말해줄 수 있겠어요?”
주저하던 미지는 천천히 그간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침음성을 흘려낸 홍경섭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재계약을 하지 않으면 가수 활동을 못 한다라···. 사실 틀린 말은 아닐 거예요.”
미지의 얼굴에 절망이 드리워졌다.
“그러나 맞는 말도 아니에요. 아마도 가수 활동이 아니라 그룹 활동을 하는 데 지장이 있을 겁니다.”
이미 디오네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박힌 상태다. 다른 그룹을 만들더라도 디오네의 그림자는 너무도 짙어서 모두 가려버릴 거고.
“인기 그룹이 해체하고 쪼개져서 새로 데뷔한 적이 없던 건 아니에요. 그런데 다들 성공은 하지 못했죠. 그룹의 해체가 아니라 유닛 활동을 하는 게 차라리 나을 겁니다.”
“저도 알죠. 근데 재계약 조건이 너무 심해서 거절할 수밖에 없었어요.”
다른 회사의 조건을 묻는 건 어찌 보면 실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홍경섭은 대놓고 물었다.
“조건이 어떻게 되길래요?”
“7:3요.”
“오 대표가 욕심이 과했네.”
디오네는 이미 투자비를 모두 뽑은 상태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사옥을 새로 지을 수 있을 정도로 돈도 벌어줬고. 그런데 30%를 원한다는 건 욕심이다.
어차피 활동에 드는 돈도 정산금에서 빼지 않는가.
“사실 고민도 돼요. 해체하면 수입이 끊어지겠지만 계속 그룹을 유지하면 돈은 벌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돈이 문제가 아니라 계약기간이 걸림돌이다.
무려 7년.
만약 디오네의 인기가 시들해진다면 가장 큰 피해를 당하는 건 팬덤이 약한 3명이다.
양희린과 은빛나야 유닛으로 묶거나 예능으로 활약을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욕심 많은 둘이 자신의 수입을 호락호락 나눌지도 미지수다. 아마도 재계약 조건에 활동에 따른 정산금 분배 문제도 삽입되어있을 확률도 높고.
게다가 7년 후 나머지 세 명은 9:1의 계약조건을 받아 내고도 그대로 은퇴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미지도 자신의 능력에 대한 한계는 잘 알고 있다.
연기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입담이 좋아 예능에서 불러주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7:3으로 7년간 계약하고 기간이 끝나면 그냥 은퇴하는 게 나은지 아니면 홀로서기를 하는 게 나은지를 두고 고민하는 거군요.”
깔끔한 정리에 미지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전자와 후자 모두 장단점이 있다.
“그런데 왜 저를 찾아오셨는지···. 그냥 상담만 하려고 온 건 아닌거 같은데요.”
“매니저 오빠가 적극적으로 추천하기도 했고, 만약 재계약을 하지 않으면 KH와 계약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들어서요. 굳이 KH가 아니더라도 홍 대표님이 추천해 주시는 회사라면 고려해보도록 할게요.”
로드 매니저들 사이에서 홍경섭의 평판은 꽤 좋은 편이다. 원래 그도 로드 매니저 출신이라 보수도 후하게 책정했다.
덕분에 신입 매니저가 가장 입사하고 싶은 회사가 KH다.
가만히 미지를 보던 홍경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만약 재계약을 하지 않기로 했다면 우리 회사도 고려해보세요.”
“저 혼자만요?”
“나머지 두 분도 만나 뵙고 고려해보도록 하죠.”
셋을 뭉쳐서 그룹으로 만들 생각은 없다. 일단 만나보고 세명에게 어울리는 플랜을 짤 생각이다.
정상을 찍었다는 것은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다는 뜻이다.
어쩌면 KH의 기획이 그녀들에게 반등의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연예인의 흥망은 그야말로 하늘에 달렸다고 봐도 옳으니까.
* * *
쾅!
오영환이 테이블을 내려쳤다.
은빛나가 그의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레 사무실을 빠져나가 줄행랑쳤다.
험악한 오영환의 시선을 홀로 감내하던 양희린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역부족이었어요.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소용이 없더라고요. 아마도 재계약은 하지 않을 건가 봐요.”
오영환의 번들거리는 눈이 양희린의 동공을 직시했다.
“큭. 내가 병신이지. 쥐도 막다른 곳으로 몰면 깨문다고 해서 살길을 열어줬더니. 뭐? 역부족? 소용이 없어?”
비꼬는 말투에 양희린이 고운 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되든 말든 상관없으니까 대충 말이나 걸어보고 말았겠지. 거절하면 빛나랑 같이 새로 그룹을 만들어서 활동하면 되고, 재계약을 수락하면 상금을 타 먹으니 양손에 꽃놀이패잖아. 그치?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절박하게 해줄 걸 그랬다.”
“저를 이렇게 다그쳐서 좋을게 없을텐데요. 저도 계약하지 않는 수가 있어요.”
오영환의 입이 좌우로 쭉 찢어졌다.
“이거 어쩌나? 너하고 나 사이에 밝혀서는 안 되는 계약이 있는데.”
어느새 꺼내 들었는지 그의 손에는 종이가 들려있었다.
“솔직히 각서를 쓰자고 할 때는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는데, 생각해보니까 잘한 거더라고. 이렇게 너를 설득하는 데 써먹을 수도 있고.”
“협박 아니고요?”
“네가 자꾸 거절하면 협박이 되겠지? 자, 이제 너랑 나랑 새로운 계약을 해야 하지 않겠어?”
양희린의 아미가 찌푸려졌다.
“9:1로 계약해주신다면서요.”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각서가 양희린의 눈앞에서 팔랑거렸다.
“이게 밝혀지면 꽤 곤란한 상황에 부닥칠 텐데. 괜찮겠어?”
오영환을 옭아매려고 했던 각서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발목을 잡는다.
“좋아. 9:1? 해줄게. 이 각서도 공개하고. 투명하게. 사람은 원래 정직해야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7:3으로 할게요.”
오영환은 비릿한 웃음이 새어 나오려고 하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빛나 설득도 잘해야겠지?”
“왜 그것까지 제가···.”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해봐. 마냥 안 좋은 일도 아니라니까? 7:3으로 계약하면 너희 둘을 유닛그룹으로 만들 거야. 그럼 70%의 정산을 너희 둘이 나누는 거지. 두당 35%.”
35%라는 말에 양희린의 눈빛이 변했다. 오영환은 그녀를 비웃듯 음흉한 미소를 머금었다가 재빨리 지우며 마저 이야기했다.
“9:1로 계약해봤자 90%를 5명이 나누잖아. 그럼 개인당 18%밖에 더 돼?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떨거지들 다 떨어버리고 빛나랑 둘이서 깔끔하게 유닛 활동 들어가자. 어때?”
양희린은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봤다.
다섯 명과 두 명은 무대의 볼륨에서 차이 난다. 한눈에 봐도 무대가 휑해 보이니까. 하지만 백댄서를 쓴다면 충분히 상쇄할 수 있다.
5명이 파트를 나눠서 부르던 것을 단 두 명이 해결하면 분명히 힘들 거다. 그러나 그것도 립싱크를 사용하면 해결.
숙소도 두 명만 쓰게 되면 여유로울 거고.
아무리 생각해도 나쁠 게 없다.
“좋아요. 계약서 쓰죠. 대신, 계약하고 나면 그 각서는 저한테 주세요. 직접 찢을 테니까.”
“에헤이. 너만 계약한다고 끝인가? 빛나도 데리고 와야지. 둘 다 계약서를 쓰면 직접 파쇄기에 넣도록 해. 좋지?”
덜미를 잡힌 양희린은 결국 현란하게 혀를 놀려 은빛나를 설득했다.
35%를 먹을 수 있다는 말에 홀딱 넘어간 은빛나가 양희린과 계약을 마치자 오영환은 나머지 셋을 불렀다.
“너희가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면 이제 더는 말리지 않겠어. 활동 끝나면 조용히 회사를 떠나도록 해.”
오영환은 그녀들을 조용히 내보낼 생각이 없었다.
똥물을 뒤집어 씌워서 다른 사람들은 만지기 꺼리도록 할 예정이다.
그전까지는 최대한 뽑아 먹을 수 있을 만큼 굴릴 생각이고.
디오네가 마지막 불꽃을 태우듯 전국을 누비며 행사에 열중할 때, 애트라의 음원 순위는 디오네를 밟고 위로 올라가 버렸다.
KH의 경사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낙원의 도시의 시청률이 답보 상태에 이르렀음에도 마천루는 꾸역꾸역 시청률을 늘려갔다.
6회가 끝났을 때.
낙원의 도시 18.3%.
마천루 17.2%
마천루가 낙원의 도시 턱 밑에 날카로운 칼끝을 들이밀었다.
멀리 있다고만 생각했던 기다란 꼬리가 드디어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