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크쇼
다행스럽게도 고정아는 그림을 보고도 안무를 이해했다.
윤우주의 우주로 가버린 안무를 보지 않아도 됐기에 다행이다.
“흐음. 곡이랑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우선 동작을 소화해보고 조금씩 수정해나가면 될 거 같아요.”
안무를 마음에 들어 했던 그녀는 곧장 애트라를 모아 연습에 들어갔다.
고정아는 안무를 가르치고, 윤우주는 상상속의 동작과 현실의 갭을 줄여나가는 작업을 했다.
둘은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조금씩 친해져 갔다.
안무가 완성되는 사이 민우는 다시금 애트라의 데뷔곡 음원을 녹음했다.
일전에 나눠주었던 음원보다 훨씬 나아졌다.
여기에 맞춰 믹싱을 끝내자 음원이 완성되었다.
안무의 수정도 끝났기에 거기에 맞춰 피나는 연습에 돌입했다.
KH엔터의 임원은 애트라의 데뷔 날짜를 정했다.
원래 행사가 많은 봄과 가을에 많이 하는 편인데, 시기상 가을은 한참 멀었기에 3월 말에서 4월 초쯤으로 결정됐다.
보통 성수기인 7월쯤을 노리겠지만 그때까지 미뤘다가는 텐션만 떨어질 뿐이다.
지금 애트라의 성장은 데뷔날짜가 코앞에 다가왔음을 그녀들 스스로가 알았기 때문이었으니까.
데뷔날짜가 정해지자 예상대로 애트라의 실력은 점점 성장해나갔다.
그중 눈에 띄는 멤버는 민주빈이었다.
작은 육각형이었던 그녀는 어디서 각성했는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육각형의 크기를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홍경섭은 강사들의 리포트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러다가 얘가 에이스 되겠는데?”
그녀의 나이는 올해 스물이 된다.
이제 성장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착오였나보다.
원래 외모도 튀던 아이였는데, 이제는 실력도 늘어서 더더욱 튄다.
민우의 곡을 받기 전까지만 해도 그저 그런 멤버였던 그녀였다. 그러나 지금은 노래면 노래, 댄스면 댄스.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다.
물론 메인을 맡은 멤버보다는 아직 못하겠지만, 이대로 성장해나간다면 그룹의 멱살을 쥐고 위로 끌어 올릴 인재가 될 거다.
서류를 함께 보던 민우가 감탄했다.
“그럴 거 같았어. 걔가 가장 열정이 넘치더라고.”
민우는 가끔 회사에 들를 때마다 찾아와서 배움을 청하던 민주빈의 얼굴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팬심인가 했는데, 위로 올라가려는 욕구가 매우 강한 편이었다.
이는 홍경섭도 알고 있던 바였는지 미간을 좁혔다.
“이런 타입은 외부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던데.”
자신의 현실을 비관하다가 검은 유혹의 손길이 뻗어지면 어쩔 수 없이 잡고 만다.
물론 그렇지 않은 연예인이 대다수기는 하지만, 욕망이 강한 사람치고 유혹을 쉽게 뿌리치는 사람은 드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가끔 찾아와서 얘기를 나눌 때 들어보니까 그럴 거 같지는 않아 보이더라.”
“상담사도 나랑 같은 의견인데?”
“사실은 나한테 털어놓은 이야기가 있어. 오디션에서 떨어지고 방황할 때 그런 제의를 해왔다더라고.”
“그때는 미성년자 아닌가?”
“어린아이를 좋아하는 변태도 많잖아. 아무튼 그때 아무리 힘든 상황에 부닥쳐있어도 거절했대. 그러다가 우리 회사에 합격했던 거고.”
“그래? 의외네.”
“자기 실력으로 스타가 되고 싶어서 하는 타입인 거지.”
“그럼 그 부분은 마음 놔도 되겠네. 근데 이거 골치 아프네. 원래 센터는 유인하가 맡을 예정이었는데. 이거 자리 배치를 새로 해야 하나?”
“바꾸지 마. 오히려 숨은 멤버를 찾는 기분이 들어서 입덕하게 될지도 모르잖아.”
“나만 아는 멤버, 그런 느낌? 나쁘지는 않네. 그런데 그것도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못하면 다 헛거라는 건 알지?”
“지금 애들 분위기 좋잖아. 괜히 배치 바꾸고 그러면 악영향을 끼칠지도 몰라.”
어느 소속사가 애써 만든 그룹 내부의 왕따를 그냥 보고 있겠는가. 왕따는 은밀히 하니까 눈치채지 못하는 거다.
애트라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다.
서류를 내려놓은 홍경섭이 은근한 눈으로 민우를 보며 물었다.
“데뷔곡이 좋으니까 잘 되겠지?”
이미 함께한 세월이 얼마인가. 그의 눈빛에서 어떤 의도를 느낀 민우가 손사래를 쳤다.
“내 얼굴에 금칠 한다고 뭐 안 나온다.”
“코러스는 어때? 사람들이 궁금해서라도 한 번쯤 들어볼 거 같은데.”
“남자 목소리가 들어가면 분위기가 달라져서 안 돼. 코러스가 필요하면 여자 보컬을 알아봐.”
“쳇.”
작곡가가 그렇다는데 어쩌겠는가. 포기해야지.
“다음 달에 데뷔지?”
“라찬 밴드를 할 때 친해진 최경륜 PD님이 힘 좀 써주셨어. 후배가 뮤직파티 PD라네. 덕분에 데뷔는 공중파에서 하게 됐다.”
“잘 돼야 할 텐데.”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 한해에 5~60개 팀이 데뷔하는데 그중 살아남는 건 1팀이 될까 말까니까.”
“만약 애트라도 실패하면 애들은 어떻게 돼?”
민감한 질문에 홍경섭은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렸다.
“일단 애들한테 물어봐야지. 계속 도전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쪽으로 나설 생각인지.”
“배우나 예능쪽으로?”
“우리 인맥이면 끼워 넣기로 어떻게 비벼볼 수 있지 않겠어? 애들한테 들어간 돈이 얼만데. 회수는 해야지.”
민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의외네. 홍 대표는 사람 냄새가 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사업에 인간미가 끼어들면 안 돼. 인간적으로 대해주는 건 개인적으로 해줘야지. 냉정하지 못하면 망한다. 내 어깨에 달린 사람이 몇 명인데.”
말은 그렇게 하지만 씁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실패한 연예인이었으니까.
“문제는 그냥 은퇴하는 애들이지.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해서 사회에 나가면 할 일이 알바밖에 없을 텐데.”
“그러면 우리 회사에서 일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봐.”
“그거 나쁘지 않은 생각인데?”
“어차피 이 바닥은 경력도 중요하잖아. 오래 연습생 생활도 했으니까 돌아가는 상황도 어느정도 알 거고.”
“대주주님이 괜찮다면야 나도 찬성이지.”
“그럼 우리 홍 대표 힘내라고 돈 많이 벌어와야겠네.”
“됐거든. 너는 지금도 충분해. 다만 이상한 작품 하겠다고 나서지만 마라. 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삐끗했다가는 후배들에게 밀린다.”
“내가 별로인 시나리오를 가지고 온 적 있어?”
“없지. 그런데 시나리오가 좋다고 이상하지 않은 작품은 아니잖아. 예를 들자면 주말연속극이나, 일일연속극의 막장 소재들.”
“알아서 잘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죠. 그나저나 이제 내가 도울 일은 없는 거지?”
휴식을 취하는 동안 잠깐 도울 생각이었는데 거의 몇 달을 묶여버렸다.
홍경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하늘에 달렸지. 운이 좋으면 뜰 거고, 없으면 망하는 거고.”
실패의 원인을 운으로 돌려야 정신적인 타격이 덜한 법이다.
“그럼 나는 정리 된 시나리오나 보러 가련다.”
민우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때야 뭔가 떠오른 홍경섭이 발목을 잡았다.
“아참. 인터뷰 하나 하자.”
뜨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사람의 이목을 끌어모아야 한다.
아이돌이 괜히 과한 노출 의상을 입는 게 아니다. 그래야 사람들의 시선을 조금이라도 끌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과한 노출은 오히려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므로 자제하는 편이지만.
“마케팅에 이용하게?”
“고 기자님이라면 기깔나게 기사 써주실 거야.”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 어차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발 벗고 나설 생각이었으니까.”
어차피 회사의 절반 이상이 민우 것이니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그럼 일정 픽스해서 알려줄게.”
잠시 생각해보던 민우가 의견을 꺼냈다.
“토크쇼에 나가는 건 어때? 써먹을 수 있는 건 다 써봐야지. 성공할 확률이 1%라도 올라간다면 뭐가 됐든.”
수고로움도 마다치 않는 민우가 고맙기 그지없다.
홍경섭이 벌떡 일어나 민우의 손을 잡았다.
“형님!”
“형님은 무슨, 징그러워 저리 가 임마!”
“감사합니다, 형니이임!”
“꺼져!”
자꾸만 매달리는 홍경섭을 밀쳐내고 재빨리 도망쳤다.
낯간지러운 건 딱 질색이었으니까.
* * *
민우는 예능에 출연은 많이 했지만, 토크쇼는 해본 적이 없다.
홍경섭이 아는 PD들에게 연락을 돌렸더니 서로 모셔가려고 난리다.
영화까지 천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이제는 완전한 흥행 제조기라고 불리는 민우다.
그의 첫 토크쇼에 시청률 노예인 PD가 군침을 흘리지 않을 리가.
홍경섭은 민우의 토크쇼 출연에 애트라의 음악방송 데뷔무대를 협상 카드로 내밀었다.
이 소식에 최경륜이 불만을 내비쳤다.
좋은 예능이라면 민우가 직접 출연하기로 하고 그를 달랬다.
이제는 갑의 위치에 오른 민우라도 PD와 사이가 틀어져서 좋을 일은 없으니까.
민우의 토크쇼를 낚아챈 방송국은 일전에 재능 검증 프로로 재미를 봤던 DBS였다.
애트라의 공중파 방송을 무려 한 달 동안 내보내는 조건을 내밀었기에 거절할 수 없었다.
게다가 DBS의 음악방송이 타 방송국보다 인지도가 제법 높아서 결정했다.
고 기자의 기사는 토크쇼 녹화 전에 내보냈는데, 이는 기사와 토크쇼의 시너지 효과를 내기 위해서다.
기사가 포털에 뜨자 애트라는 데뷔 전부터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었다.
-강민우가 프로듀서를 맡았다고? 그냥 이름만 올린 거 아냐?
└작곡, 작사, 편곡까지 전부 했다니까 합리적 의심이 든다.
└너희들 라찬 밴드 안 봤나 보네. 이미 연예계 사기캐로 유명한데.
└리얼 예능이 리얼이 아니라는 거 모르나? 다 짜고 치는 건데. 아직도 순진한 사람이 많네.
└애트라 기대되는 건 나뿐인가?
댓글의 반응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목을 끌 목적은 성공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라디오에도 출연해서 애트라에 관한 썰을 토크 중에 자연스럽게 조금씩 풀었다.
덕분에 애트라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조금씩 늘어났다.
홍경섭도 공홈에 애트라의 영상을 올리면서 사람의 관심이 식지 않도록 유지했다.
데뷔했는지도 모르는 아이돌이 수두룩빽빽한 상황에서 이 정도면 성공했다고 봐도 되리라.
이제 마지막 서포트인 토크쇼만 남았다.
민우는 녹화날에 맞춰 DBS방송국의 대기실에 도착했다.
대기실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넓은 곳이다.
이번에 함께 출연하게 된 남유태가 대기실을 둘러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우와. 형은 이런 대기실을 쓰세요?”
“나도 대기실은 오랜만인데 이렇게 큰 곳은 처음이네.”
“역시 인기는 많아지고 봐야 하는 거네요.”
“기왕 여기 왔으니까 그냥 여기서 준비해.”
“그럴까요?”
남유태는 민우의 대기실에 눌러앉아 메이크업과 헤어를 받았다.
두 사람 모두 촬영 준비가 끝났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이열! 이게 누구신가!”
오랜만에 만나는 정용수였다.
한때 유랑민을 같이 찍기도 했던 그는 이제 예능계에서 A급으로 통한다.
그렇게 되기까지 민우의 덕이 컸기에 가끔 밥을 먹기도 하는 사이다.
“유태야, 인사드려.”
“안녕하십니까, 남유태입니다.”
“반가워요. 나는 정용수. 내가 형이니까 말 편하게 해도 되죠?”
“물론입니다.”
“이번에 주연배우 맡는다면서?”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내 별명이 ‘순풍이’거든. 천 리 밖의 소리도 들을 수 있지. 근데 시청률은 좀 불안해 보이던데. 괜찮겠어?”
PD는 이번 작품으로 입봉한다. 작가도 새끼 작가 시절 동고동락하면서 함께 컸고. 그래서 둘의 케미는 좋지만 입봉작이라는 단점 때문에 주연배우를 섭외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물론 홍경섭은 민우의 선례도 있었기에 냉큼 물어버렸고.
“성공한다면 주연배우로 자리를 굳힐 수 있으니까 열심히 해봐야죠.”
“그래. 이 바닥이 어떻게 터질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곳이니까 열심히 하면 될 거야. 바로 옆에 산증인도 있고.”
“저 형은 열심히 한 건 둘째치고 재능 자체가···.”
“어? 너 옛날 강민우 모르는구나?”
“네? 그런 게 있어요?”
“크흐흐. 더 자세한 썰은 녹화 때 풀자고.”
음흉한 정용수의 미소에 민우가 뜨악한 얼굴로 외쳤다.
“용수형. 그거 제 흑역사는 아니겠죠?”
정용수는 슬그머니 민우의 시선을 피했다.
“크흠. 그럼 이따 보자고.”
“형, 아니 형님! 제가 비싼 거 살게요.”
다급한 민우의 외침에 정용수가 줄행랑을 놓으며 한마디를 남겼다.
“이미 PD가 사주기로 했다!”
민우는 허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모르는 사람이 진행하는 토크쇼에 출연하는 건데.”
이번 토크쇼 왠지 모르게 벌써 불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