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만공약
홍경섭은 백미러로 민우를 흘끔 바라봤다. 시선을 느낀 민우가 물었다.
“왜? 할 말 있어?”
“아깝지 않냐?”
“뭐가? 돈?”
“지금 물어볼게 돈밖에 더 있겠어?”
“전혀. 그거 받는다고 어디다 쓸 건데. 어차피 지금도 마음껏 써도 될 정도로 풍족한 상황인걸.”
“너희 어머니 계시는 섬을 사도 되고.”
“어. 그럴 걸 그랬나?”
진심이 아님을 알기에 농담으로 받았다. 백미러 속의 홍경섭이 피식 웃는 게 보였다.
“그걸 떠나서 혹시라도 그 계약에 관해서 문제가 생긴다면 난처한 상황이 생길지도 모르고.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해.”
“그건 그렇지. 뭔가 그 변호사도 수상한 구석이 많아 보이기더라고. 솔직히 임윤성이 계약은 무효라고 길길이 날뛸 줄 알았거든. 근데 찍소리도 안 하고 가더라고. 뭔가 쎄한 게 느껴졌지.”
“나도 그랬어. 아무튼 아까 있었던 일은 그냥 뇌리에서 지우자. 임윤성 밤잠 이루지 못하게 해준 것만 해도 만족하니까.”
홍경섭은 운전대를 탕 내려치며 경쾌하게 말했다.
“그래! 잊자, 잊어.”
두 사람이 탄 차량은 점점 속도를 높였다.
민우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쏜살같이 사라지는 풍경이 어쩐지 서울로 가는 방향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스쳐 지나가는 표지판도 서울의 반대편이다.
“길 잘 못 들었어?”
“아닌데.”
“근데 왜 서울 방향이 아니야?”
“지금 촬영장에 가니까.”
“응? 또 스케줄이야?”
“그냥 당분간은 너 밥 먹고 싸는 시간 빼고는 스케줄 있다고 생각하는데 마음 편할 거야. 잠깐 잠이라도 자둬. 여기랑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금방 도착할 것 같긴 하지만.”
자투리 시간마저 알뜰하게 챙기는 홍경섭이었다.
* * *
화무십일홍이라, 끝 간 데 없이 관객을 불러들이던 폐렴의 뜨겁던 기세도 어느새 한풀 꺾였다.
1,100만 명에서 아등바등하다가 다음 영화에게 개봉관을 내주며 끝을 맺었다.
“고생했다. 스케줄은 다 정리했으니까 오늘 천만 공약 이벤트만 끝내면 푹 쉬어.”
“드디어 쉬는구나.”
“솔직히 쉬는게 쉬는거겠어? 다음 작품도 준비해야하고. 비워냈으니까 채워둬.”
“나쁜놈. 내 꿈과 희망을 짓밟다니.”
킬킬거리며 웃은 홍경섭은 민우를 남산타워에 내려주었다.
이번 이벤트는 CHA ENM에서 주관하고 나섰다. 꽤 많은 수익을 올렸기에 자금도 아낌없이 풀어서 서포트 하기로 한 거다.
원래는 천만 공약을 명동에서 하기로 했었으나, 남산공원으로 장소를 변경했다.
명동이 사람은 많겠지만 민우 혼자가 아니라 다른 주연급 배우들도 함께한다. 규모가 커진 만큼 너무 복잡하고 사람들이 다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대신 이벤트의 규모는 키우기로 했다.
우선 홈페이지에 장소와 일정을 공지하고 일반 시민을 참여시키기 위해서 상품도 걸었다.
이벤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스태프들이 주소를 받아서 선물을 보내주기로.
사인과 사진을 받으면 감염된 것으로 간주하고 다른 시민들에게 소식을 전파하면 이벤트에 참여하게 된다.
혹시라도 미연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 경찰을 투입할 정도로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CHA ENM에서 남산타워에 대기실을 마련해줬기에 배우들은 편하게 분장을 할 수 있었다.
영화를 촬영할 당시 특수분장팀이 모두 투입되어 배우들을 꾸몄다.
영화의 감염자들이 순한 맛이었다면, 오늘 분장은 거의 매운맛에 가깝다.
“이 정도면 좀비라고 봐도 되겠는데요?”
민우가 고개를 흔들자, 볼에 붙은 실리콘이 덜렁거리며 따라 흔들거렸다.
원래 볼에는 빨간 속살을 그렸기에 멀리서 보면 실제로 찢어진 것처럼 보일 것이다.
“특별히 신경 쓰라고 대표님이 그러셨거든요.”
확실히 마지막 이벤트까지 신경을 쓰는 게 눈에 보여 흐뭇한 웃음이 나왔다.
다음 작품을 함께해도 괜찮을 만큼 좋은 인상을 주는 게 목적이었다면, 성공했다고 말해주고 싶을 정도다.
분장이 거의 끝나갈 무렵, 민우의 대기실로 남유태와 반태근이 들어왔다.
전면거울로 둘을 본 민우가 실소를 터트렸다.
“큭. 너넨 뭐냐? 특히 유태. 너 소시지 달고 다녀?”
남유태는 복부에 뭔가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는데, 영화에서의 리얼했던 것과 달리 어설픈 분장이었다.
“이건 너무 리얼하면 혐오스러울 것 같다면서 이렇게 해주셨어요.”
“그렇다고 너무 대충 한 느낌 아냐? 태근이는 리얼 좀비인데.”
정작 당사자인 남유태는 오히려 즐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혹시라도 달려야 할 상황이 생기면 최고죠. 내장이 튀어 나와서 저는 배 잡고 천천히 뛰어도 될 것 같으니까.”
듣고 보니 그렇다.
반태근이 민우에게 분장을 해주던 스태프에게 자신의 다리를 슬쩍 내밀었다.
“여기에 상처 좀 내주시면 안 되나요? 기왕이면 뼈가 보이게.”
민우에게 분장을 해주던 스태프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영화를 찍을 때는 접근하기 힘들던데 사석에서는 의외로 개그 감이 있으시네요.”
뜬금없는 칭찬에 반태근은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그는 진심이었는데 아무래도 오해한 것 같다. 그렇다고 정정해주기도 뭐한 상황이라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밖에.
“다른 분들은 모두 준비 끝났대?”
“다들 일찍부터 준비했으니까 시간은 맞출 수 있을 거예요.”
“언제부터지?”
“1시부터요.”
“너무 무리하지 말고 적당히 해. 사람들 다치면 큰일 난다.”
“어유. 덩치를 보세요. 제가 경차면 형은 덤프트럭이구만. 조심은 우리가 아니라 형이 해야 할 거 같은데요.”
“그래서 나도 설렁설렁 뛰려고.”
반태근이 고개를 저었다.
“큐 사인만 들어가면 눈 돌아가는 사람이 설렁설렁한다는 게 가능할지.”
“그건 그렇고, 너희 둘은 어때? 요즘 꽤 바쁘다고 들었는데.”
민우가 스타가 되기 전부터 함께했기에 잘됐으면 하는 마음이 강했다. 알게 모르게 캐스팅이 되도록 뒤에서 도와주기도 했고.
반태근이 머쓱한 얼굴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저야 예전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죠. 찾는 곳도 많고.”
“앞으로도 긴장 늦추지 말고. 한 방에 훅 가는 애들 많이 봤지?”
어떤 상황이 발생하기 전에 미리 조심하는 게 최고다. 적어도 수습하느라 진땀 빼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근데 민우 형은 다음 작품 정하셨어요?”
“아직. 이번에 좀 쉬려고.”
“그럼 저 작품 고르는 거 좀 도와주실 수 있나요? 저는 아무리 봐도 그게 그거 같아서···.”
“나쁠 건 없지. 담당이랑 충분히 얘기한 다음에 시나리오 들고 찾아와.”
“저도 가도 되죠?”
“물론이지.”
다른 연예인이었다면 자신의 시간을 써가며 돕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민우는 다르다. 도와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들이 열심히 활동하면 주머니도 두둑해지니까.
분장을 끝내고 12시 55분이 되자 스태프가 대기실의 문을 열었다.
“다들 여기 계셨네요. 슬슬 준비하셔야 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문을 열고 나서자 하얀색 가운을 걸친 김동월이 일행을 반겨주었다.
김동월은 백신이라 쓰고 선물이라고 읽는 기념품을 시민들에게 나눠줄 예정이다.
“가시죠.”
민우를 비롯한 세 명의 배우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김동월의 뒤를 따랐다.
입구 쪽으로 걷던 스태프가 물었다.
“경로는 대충 들으셨죠?”
남산타워에서 출발해서 아래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복귀하면 된다.
“안전요원이 한 분씩 따라붙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혹시라도 위해를 가하는 사람이 있으면···.”
말을 하던 스태프가 헛기침을 하며 남유태를 바라봤다.
“안전요원이 보호해 줄 겁니다.”
“그걸 왜 저를 보면서 말씀하세요?”
키득거리며 웃던 김동월이 대신 대답했다.
“민우 씨는 덩치가 있어서 괜찮을 것 같고, 태근이는 인상으로 먹고 들어가고. 그런데 유태 너는···.”
남유태는 좀 여리여리한 미소년 인상이다. 늘씬한 체형도 그렇고.
“제가 억울해서라도 이번에 몸 키웁니다.”
“그러지 마. 배우가 전부 민우 씨 같으면 어떻게 되겠어? 유태 너 같은 체형도 다 경쟁력이야.”
연예인의 이미지는 한번 굳어지면 깨기 힘들다. 이미지를 바꾸려면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단순해 보이던 이미지의 연예인이 갑자기 퀴즈 프로그램에 나가서 우승을 해버리면 어떻게 될까.
원래 똑똑했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짜고 치는 건 아닐까 의심부터 할 것이다.
미리 떡밥을 깔고 시청자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진행하고 난 후에 이미지를 바꾸는 것이 최선이다.
그 방법중 하나가 바로 열애설이기도 하고.
소녀나 소년의 이미지를 벗기 위해서 열애설을 이용하는 것이다.
물론 진짜 연애를 했을 경우가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남산타워의 입구에는 이미 준비를 마친 배우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수희와 문시안은 간호사복을 입고, 윤기준은 경찰복을 입고 있었다.
문시안이 민우를 발견하고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오빠 진짜 좀비 같네요.”
“그거 칭찬이지? 힘들게 분장했는데 비슷하지도 않으면 낭패잖아.”
“물론이죠. 저도 좀비 같나요?”
“너나 수희나 제복이 잘 어울리네.”
정각 1시가 되자 핸디캠을 든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스태프의 선언에 배우들은 남산타워를 나섰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그들을 신기해하는 눈초리로 바라봤다.
“자, 이제 슬슬 흩어져 보자고. 5시에 남산에서 모이는 거 잊지 말고.”
배우들은 팬서비스를 하기 위해서 흩어졌다.
이제 완연한 가을에 접어들어 날씨는 쾌청했다.
공기가 상쾌하다보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산책하는 기분으로 걷고 있을 때, 드디어 첫 손님이 다가왔다.
“혹시 강민우 씨?”
“맞습니다. 분장도 열심히 했는데 용케 알아보셨네요.”
“어머! 지금 폐렴 천만관객 공약 지키시는 건가요?”
“맞습니다.”
“꺅! 저 사인 좀 부탁드릴게요.”
기뻐하는 팬을 보며 민우는 백팩에서 사인지를 꺼냈다.
사인지에 일필휘지 사인을 해주고, 사진도 함께 찍었더니 이곳에서의 이벤트 사실을 모르던 이들도 슬슬 모여들었다.
원래는 사인을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소식을 전파하는 이벤트였는데 어디 사람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던가.
사실 이벤트 내용이 무리수기는 했다.
아무리 좀비 분장을 했다지만 실체는 연예인이다. 오히려 접근했으면 접근했지 사람들이 도망갈 리가 있나.
졸지에 사인회가 되었지만,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저기 남산타워에 가시면 의사처럼 입은 사람이 있을 거예요. 그분이 감독님이신데 선물도 나눠주시니까 꼭 가보세요.”
그리고 오후 5시를 기점으로 민우의 스케줄은 모두 끝났다.
드디어 긴 휴식을 맞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 *
한동안 집에서 빈둥거리던 민우는 심심함을 참지 못하고 여행을 시작했다.
어머니가 계시는 섬에도 들르고, 큰맘 먹지 않으면 가기 힘든 곳도 다녔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먹고, 쉬고 싶으면 쉬고.
“신선놀음이 따로 없네.”
놀아본 사람이 잘 논다고, 평소 워커홀릭에 가깝던 민우는 한 일주일을 그렇게 쉬었더니 할 게 없다.
좀이 쑤신 민우는 홍경섭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야? 푹 쉰다더니.
“나야 더 놀고 싶지만 혼자 바쁠 네가 생각나서.”
-핑계는. 이제 다 쉬었으면 전에 말했던 일 좀 도와주라.
“그러지 뭐. 무슨 일인데?”
-내일 회사로 나오면 알 거야. 준비는 해둘게.
무슨 일인지 캐물어도 아직 알려줄 마음은 없나 보다. 어차피 하루만 지나면 알게 될 일이라 캐묻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그럼 내일 보자.”
전화를 끊고 나니까 이제 휴가가 반나절도 남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방금까지만 해도 지겹던 반나절이 왜 그렇게 아깝게 느껴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냥 며칠 더 미룰까?”
민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만약 며칠 더 미룬다면 다시 남은 반나절이 지겨워질 테니까.
다음날, 회사에서 만난 홍경섭은 민우를 끌고 대뜸 연습실로 향했다.
“내가 전에 아이돌 만든다고 말했나?”
“오디션도 봤다고 했지.”
“그래, 걔들. 근데 아이돌은 5년씩도 준비하는 게 보통이잖아. 그런데 얘네는 빨라도 너무 빨라.”
“그럼 데뷔하면 되겠네. 내가 도울 게 어딨어?”
“너 작곡해둔 곡이 제법 된다고 했지? 그중에 괜찮은 것 좀 쓰자.”
잠시 걸음을 멈춘 민우는 턱을 쓰다듬었다.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노래가 얼마나 많던가.
“일단 애들부터 확인하자. 보고 어울리는 곡으로 줄게.”
연습실에 가까이 다가가자 쿵, 쿵, 하는 비트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늘씬한 아이들이 춤에 열중하고 있었다.
열심히 춤을 추고 있던 아이가 민우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대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