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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행질주 (129/223)

흥행질주

지진이 지지부진한 사이 폐렴은 추석 특수를 맞이해서 순식간에 관객을 늘려나갔다.

덕분에 민우는 정신없이 흥행공약을 지켜내야 했다. 500만 관객 때 사인회를 조금 늦게 시작했던 탓이다.

그렇다고 800만 공약을 늦출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지금 추세대로라면 금방 천만 관객도 넘을 것으로 보였으니.

관객이 많이 들게 된 이유에 사인과 함께 나눠준 선물도 한몫했다. 주문제작이라 따로 살 수 없는 물건이라 소유욕을 자극한 거다.

사업가인 차원일은 물이 들어왔을 때 곧바로 노를 저었다.

800만 흥행공약을 지키러 전국 영화관을 돌 때 따로 준비한 선물을 나눠준다고 홈페이지에 공지를 올렸다.

이 소식은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

서울 외에 영화관에 관객이 들어차기 시작하고, 민우는 800만 공약을 지키기 위해 전국을 돌았다.

어느새 800만을 넘어 이제는 언제 천만이 되느냐가 관심 사항이었다.

그리고 추석 연휴가 끝났을 때, 두 영화의 성적표가 공개되었다.

“축하한다.”

홍경섭의 말에 민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간 예능, 드라마의 시청률은 잘 나왔지만 영화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자신과 영화가 맞지 않는 건 아닐까 걱정도 많았는데, 다행스럽게도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또 좋은 소식이 있어. 학교폭력도 IPTV로 쏠쏠하게 팔리고 있단다.”

당시 관객 동원에는 실패했지만 머리를 비우고 볼 수 있는 액션 영화라서 추천을 한다나.

“과거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스토리인지라 젊은 층보다 중년층 이상에게 어필하는 중이래.”

사무실로 시나리오도 쏟아져 들어온단다.

예전에는 드라마와 예능이 대부분이었지만 이제는 그것도 옛말이다.

영화배우라면 누구나 꿈꿀 천만 배우에 이름을 올리면서 영화 대본도 해일처럼 밀려 들어온단다.

“시나리오는 이메일로 받았더니 메일함이 터져 나갈 것 같아.”

장르별로 분류하는 것도 아르바이트를 써서 해결해야 할 정도로 인력이 모자란 상황까지 치달았다.

“유태랑 태근이. 그리고 수희까지 지금 시나리오가 장난 없다.”

폐렴에 조연으로 출연하며 가성비 좋은 배우로 소문이 난 탓이다.

아직 몸값은 낮은데 연기는 잘하다 보니 발 빠른 제작사는 사무실로 직접 찾아오는 일도 있었다.

“경섭이 꿈 하나는 이뤘네.”

“WI보다 크게 만든다는 거? 아직은 아니지.”

매출로 놓고 보자면 이제 KH 엔터도 중견급으로 덩치를 키웠으나, 보유한 스타의 숫자를 보면 WI가 앞서는 건 분명했다.

“그나저나 영화 끝나고 뭐 할 거야?”

“이번에는 진짜 쉬려고.”

“항상 쉰다고 말만 하고선 사고를 치고 다니더니.”

“이번에는 진심이야.”

“그래? 그럼 내 일 하나만 도와주라.”

“뭔데?”

“친구 부탁인데 그냥 이유는 묻지 않고 한 번쯤 들어주면 어디가 덧나?”

가만히 홍경섭을 바라봤다. 자기 생각을 감추지 못하는 타입이라 생각하는 바가 얼굴에 고스란히 떠오르기 때문이다.

‘요즘 표정관리를 너무 잘하는 것 같은데.’

회사의 위치에 걸맞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아 내심 뿌듯해졌다.

“내가 다 키웠지.”

“무슨 헛소리야? 도와줄 거야 말 거야?”

“도와줄게. 대신 내 휴식은 보장해줘야해.”

“하루 두어 시간이면 충분하니까 걱정하지 마.”

무슨 꿍꿍이를 꾸미더라도 두어 시간이라면 흔쾌히 내줄만하다.

“지진은 어때?”

“700만. 아등바등하는데 곧 영화관에서 내려갈 거라는 소문이 파다해.”

“나름 선방했네.”

“걸린 게 많은 상황이라 지니 픽처스는 그리 달갑지 않은 분위기래. 이번 폐렴의 성공으로 CHA 스튜디오만 노났지.”

CHA 스튜디오는 작가들을 공격적으로 끌어모아 좋은 조건으로 계약을 했다.

덕분에 작가 풀은 넓어지고 컨텐츠는 쏟아졌다. 문제는 드라마에만 국한된 상황이라 그 모든 시나리오를 소화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눈을 돌린 곳이 충무로였고, 성공했으니 이제는 예능까지 손을 뻗칠 예정.

“이번에 인센티브는 기대해도 될 것 같아. 대략 20억은 족히 될 거야.”

문득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계좌에 남은 금액이 얼마인지 신경 쓰고, 그 안에서만 생활하려고 애쓰던 때가.

이제는 통장에 얼마가 있는지 알 수도 없다. 알고 있는 사람은 회계사뿐일지도.

“그나저나 이제 임윤성을 만나야 하지 않겠어? 슬슬 결판도 난 것 같은데.”

“안 그래도 문자 왔어. 모레 변호사 사무실에서 보자고 하더라.”

홍경섭은 다이어리를 꺼내 메모를 했다.

“알았어. 그럼 모레는 스케줄 좀 빼둘게.”

“들어온 스케줄 많아?”

고개를 쭉 빼고 다이어리를 보려고 했더니 홍경섭이 철저히 마크하며 보여주지 않았다.

“얼마 없어.”

“진짜?”

“응. 내일은 새벽 3시에 일어나서 머리하고···.”

“잠깐만. 시작이 새벽 3시라고? 그럼 끝나는 시간은?”

“새벽 2시.”

“?”

“1시간은 빼줬다. 집에서 씻기는 해야 하니까.”

“하아···. 더 못 줄이는 거야?”

“지방은 빼고 수도권으로만 스케줄을 잡아서 이정도야. 지방까지 넣었으면 너 고속도로에서 자야 해.”

“차라리 지방을 넣지 그랬냐. 그나마 푹 자는게 낫지.”

홍경섭은 다이어리를 덮고 민우를 직시했다.

“민우야.”

“왜 목소리를 깔고 난리야? 겁나게.”

“우리 옛날 기억나?”

“언제?”

“엑스트라 할 때. 그때 너 이렇게 말했어. 만약 스타가 된다면 몸이 부서져라 스케줄을 소화할 거라고.”

미간을 좁히고 생각하던 민우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자식이 너한테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거짓말은!”

“하하. 그랬나? 아무튼 휴식기 가지기 전까지만 고생하자. 그리고 CF찍으러 가야 하니까 준비해.”

혹시라도 민우가 잡을새라 홍경섭은 재빨리 도망쳤다.

비록 꾸며낸 말이기는 했지만 뜨끔하기도 했다. 스케줄이 많아서 바빴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었으니까.

오디션 하나만 합격해도 좋겠다던 올챙이는 이제 개구리가 됐다고 스케줄이 많다며 타박을 했으니.

“벌써 배가 불렀나.”

잠시 반성의 시간을 가진 민우였다.

* * *

임윤성과의 약속은 오후 3시였다.

새벽 2시에 집에 돌아와 잠깐 눈만 붙이고 스케줄을 소화한 다음 일전에 공증을 받았던 변호사 사무실로 이동했다.

이제는 얼굴을 익혔던지 건물의 출입문을 지키던 남자는 아무런 말도 없이 길을 비켜주었다.

장민석은 여전히 꼿꼿한 자세로 그의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민우를 발견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임윤성 씨가 아무래도 오늘은 늦을 것 같으니까 잠시 기다리시겠습니까?”

“그러죠.”

“차는 어떤 거로?”

“저는 녹차로 부탁합니다.”

홍경섭은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원하는 차가 나왔다.

잔을 들어 향을 맡았더니 머리가 시원해지는 기분이다.

민우의 놀란 얼굴을 본 장민석이 슬쩍 웃었다.

“보이차입니다. 직접 중국에서 공수해온 진품이죠.”

“커피도 향이 좋네요. 은은한 꽃향기가···.”

“블랙 아이보리입니다. 코끼리가 배설한 원두죠.”

“코끼리 똥이요? 이 코끼리는 꽃을 먹었나?”

홍경섭이 기겁한 얼굴로 잔에서 얼굴을 뗐다.

“설명을 들으면 비위가 상하겠지만 원두 1kg당 1,000달러가 넘습니다.”

“그래요?”

비싸다니까 혹해서 다시금 조심스레 맛을 봤다.

아까도 느꼈지만 특유의 향은 꽃 같기도 하고, 초콜릿 같기도 해서 의외로 먹을 만하다. 코끼리 배설물에서 얻은 원두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쩌면 자본이 낳은 미각일지도 모르겠다.

사무실도 비싸더니 확실히 기호품도 명품이 아니면 쓰지 않는 것 같은 눈치다.

차를 마시며 잠시 한숨을 돌리자 임윤성과 송보선이 도착했다.

내기에서 졌으면 안색이 안 좋아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임윤성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힘들게 이겼는데 가져갈 만한 게 마땅찮아서 어쩌나.”

앉으면서 도발까지.

“혹시나 해서 말해주는데 18번 항목을 읽어봐.”

미간을 찌푸린 민우가 계약서를 들춰봤다.

18. 본인의 명의가 아닌 물건은 상품이 되지 못한다.

“이게 왜?”

“만약 내 명의가 아닌 물건을 받아 내려고 적었다면 취소된다는 뜻이지.”

“걱정 하지 마. 네 명의의 물건일 테니까.”

너무 자신만만해 보이는 표정인지라 임윤성은 가슴 한편이 서늘해졌다.

혹시나 자신이 놓치고 있던 물건이 있었는지 궁리를 해봤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자신의 주변에는 그런 물건이 없다.

“두 분 모두 바쁘시니까 빠르게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장민석은 민우와 임윤성에게 봉인을 확인시켜준 후 메모장을 꺼냈다.

“CIT코인이군요.”

임윤성의 눈이 번쩍 떠졌다.

돈이 그리 급하지도 않고, 오르락 내리락 하지만 아직은 안전자산이었기에 묻어두는 중이었다. 팔아버렸을 때 세금도 무시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잠시 기억에서 잊고 있었는데.

“자···. 잠깐만. 그게 얼마인지 알고 있어?”

“얼만데?”

“이건 말도 안 돼! 무려 500억이나 된다고! 그걸 이깟 서류 한 장으로 냉큼 삼키겠다고?”

민우는 소파에 몸을 파묻으며 팔짱을 꼈다.

“너야말로 계약서 21번 항을 확인하지 않은 거 아냐?”

부득, 이를 갈아붙인 임윤성이 재빨리 계약서를 확인했다.

21. 그 어떤 물건이라도 상품이 될 수 있다.

“어떤 물건이라도 가능하다는 것은, 그게 1원이든 1억이든 상관없다는 뜻 아닐까?”

“하지만 이건···.”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장민석이 손뼉을 쳤다.

“두 분 사이에 분쟁이 생겼을 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제가 있는 거죠. 사례금을 받는 이유기도 하고요.”

임윤성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반면 민우는 태연한 신색이었고.

“우선 CIT코인 지갑을 주시겠습니까?”

“아니···.”

“알만한 분이 이러시면 곤란한데요.”

장민석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어쩔 수 없이 임윤성은 비밀번호를 불러줬다.

민우는 속으로 잠시 놀랐다.

장민석은 과연 어떤 사람이기에 500억이라는 거금을 내놓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일까.

왠지 엮이면 곤란한 일이 발생할 것 같아 거리를 두기로 했다.

장민석이 모니터를 확인하는 사이 민우는 임윤성을 바라봤다.

넋이 나가버린 그가 민우의 시선에 정신을 차리고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풀려 주저앉으려는 것을 송보선이 부축해서 가까스로 체면을 구기는 일은 없었다.

한동안 배가 아파 죽을 거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고개를 든 장민석이 민우를 바라봤다.

“CIT코인 1,000개 확인했습니다. 지금 바로 판매하시겠습니까?”

“팔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코인을 판매할 때 세금으로 22%를 내야 합니다. 대략 지금 코인의 가치를 500억으로 잡고 22%면 110억을 내야겠군요. 그럼 남은 390억의 25%인 97억여 원이 수수료가 됩니다. 코인을 팔지 않으면 그 돈을 입금해주시면 됩니다.”

수백억이라는 단위에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된 홍경섭이 민우를 바라봤다.

“어떻게 할래?”

“팔아주세요.”

“남은 돈을 입금해드릴 계좌를 알려주시겠습니까?”

민우는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장민석을 바라봤다.

“고아원이랑 양로원에 기부해주세요. 그런 돈은 받아봤자 찜찜하기만 하니까요. 다만 어떻게 사용을 했는지는 확실하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아참. 임윤성이 원한 상품이 뭔지 알려줄 수 있나요?”

“원래라면 비밀을 지키겠지만 특별히 알려드리도록 하죠. 임윤성이 메모장에 적은 것은 강민우 씨의 아파트였습니다.”

왠지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다.

“정작 본인도 20억이 넘는 물건을 서류 한 장으로 삼키려고 해놓고서는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민우와 홍경섭도 사무실을 떠나자 장민석은 자신의 코끝을 만지작거렸다.

“수백억을 눈 깜짝하지도 않고 기부를 한다라···. 평범한 사람은 아니구만.”

사실 장민석이 수상해서 거절한쪽에 가깝지만, 내심을 모르는 장민석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중얼거리며 감탄하던 장민석이 전화기를 들었다.

“재단 하나 만들어야겠다.”

장민석의 눈이 계약서의 서명 부분에 닿았다.

“재단 이름은 KMW로 하지. 대표는 강민우. 자금은···.”

짧은 순간 장민석은 슬쩍 웃었다.

“390억.”

자신의 수수료를 쿨하게 포기해서 모두 재단에 집어 넣어버렸다.

“거금을 포기하는 것이 어떤 기분일까 했는데 이런 기분이었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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