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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인사 (125/223)

무대인사

민우는 새벽에 스케줄이 없으면 꼭 조깅을 하려고 노력한다.

날씨가 좋지 않으면 러닝머신이라도 타려고 노력한다.

최근에는 영화촬영 때문에 운동을 걸렀지만, 지금은 촬영도 끝났기에 오랜만에 달리기로 했다. 가볍게 옷을 차려입고 집을 나섰다.

민우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는 산책로가 있다. 이곳을 한 바퀴 돌고 한강변을 가볍게 달린 다음 집으로 돌아오면 대충 1시간 정도 된다.

“후욱, 후욱.”

오랜만에 땀을 뺐더니 온몸이 상쾌해지는 기분이다.

띠리리릭-.

한참 달리고 있으려니 홍경섭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잠시 멈춰 서서 전화를 받았다.

“어.”

-오늘 무대인사 가야하는데 너 어디야? 집에 없는데?

민우는 헐떡이는 숨을 가다듬으며 답했다.

“조깅 중이었어.”

-난 또 오늘 스케줄 까먹고 있는 줄 알았네.

“후우···. 걱정도 팔자다. 내가 갈 데가 어딨다고.”

-그러고 보니 그건 또 그러네. 언제 올 거야?

손목을 들어 스마트 워치로 시간을 확인해봤다.

“이제 돌아가야지. 대략 20분 걸릴 거 같다.”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 집에 있는 거 대충 먹어도 되지?

집에는 장기 보관이 가능한 식재료만 있다. 채소나 과일 같은 신선한 재료는 그때그때 구입하는 편이다.

“네가 먹을 만한 게 없을 텐데? 식재료뿐이라 네가 그동안 요리를 배우지 않은 한.”

-뭐야? 라면 없어?

요리를 잘하는 민우가 인스턴트식품을 구비해둘 이유가 없지 않은가.

“조금만 기다려. 같이 대충 먹게.”

-오, 해주려고?

“너한테 맡겼다가는 내 장기에게 미안해질 일이 발생할 것 같으니까 내가 해야지.”

-흐흐. 아침은 황제처럼 먹어야 되는 거 알지?

“무대인사 가야 하니까 거창하게 만들 시간 없어. 그냥 샌드위치나 먹어.”

-쳇.

집 근처에 일찍 문을 여는 마트에 들러 호밀빵과 그릭 요거트, 키위와 바나나를 샀다.

이곳의 단골인지라 주인도 민우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 계산대의 눈치를 살피던 사장이 슬쩍 민우의 곁으로 다가왔다.

“오늘 사과가 좋아요. 가져가서 드셔보세요.”

그러면서 사과를 소매넣기 해주자 슬쩍 웃음이 나왔다. 분명히 자신에게만 주는 게 아닐 터다. 단골들 모두에게 나눠주는 중일테지.

“서비스로 사람들한테 퍼주다가 또 사모님께 혼나는 거 아니에요?”

“크흠.”

사장의 아내도 사람이 좋아서 서비스를 주기도 한다. 그러나 사장은 그 도가 지나치다는 것이 문제다. 이제는 아내도 그러려니 하지만 따가운 눈총은 잊지 않는다.

“먹어보고 괜찮으면 몇 박스 주문할게요.”

“그러라고 드리는 거 아닌 거 아시면서.”

“저는 그러려고 받는 거라서요.”

민우는 곧장 계산을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섰는데 사람의 기척이 없다.

위이잉-.

오히려 로봇 청소기만 민우의 귀가를 반겨주었다.

고개를 갸웃한 민우는 사온 물건들을 주방에 올려두고 홍경섭을 찾아봤다.

방이고 화장실이고 아무리 살펴봐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버릴 녀석이 아니라 의아하던 와중.

“드르렁.”

코고는 소리를 따라가니 그새 소파 한쪽에 웅크려 자고 있는 홍경섭을 찾을 수 있었다. 하필 옷도 소파와 같은 색깔이라 한눈에 발견하지 못했던 거다.

“짜식이 마음 약해지게.”

어떻게 보면 민우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건 모두 홍경섭 덕분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대충 과일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으려고 했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계획적이라면 성공한 거고.”

피식 웃고 주방으로 향했다.

푸짐하게 차릴 시간이 없는 것은 매한가지다. 빠르게 만들 수 있으면서도 든든하게 먹을 수 있는 메뉴로 정했다.

우선 냄비에 물을 부어 끓이고, 샌드위치그릴을 예열했다. 예열이 끝나면 호밀빵을 올리고 타이머를 맞춰두면 알아서 구워준다.

버터는 중탕으로 녹이고 계란 노른자에 소금, 후추, 레몬즙을 넣어 풀었다. 여기에 중탕한 버터를 부어가며 잘 섞어주면 홀랜다이즈 소스가 만들어진다.

소스를 찍어 먹어보니 잘된 것 같다. 이건 한쪽에 치워두고 가스레인지에 팬을 올렸다.

팬이 달궈지자 올리브오일을 두른 다음 보관 중이던 시금치를 꺼내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하고 구웠다. 먹기 좋게 구워진 시금치는 따로 빼두고 베이컨도 구웠다.

지금 만드는 것은 에그 베네딕트다.

잉글리쉬 머핀으로 만들어야 하지만 사둔 게 없는데다가 갑자기 메뉴가 바뀌었기에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밥을 곁들이면 더 이상하니까.

띵.

때 맞춰 호밀빵이 잘 구워졌다.

보글보글.

물도 딱 적당한 시간에 끓어올랐다.

여기에 소금과 식초를 붓고 휘저어 회오리를 만든 다음 조심스럽게 계란을 깨서 넣었다. 계란이 풀어지지 않도록 계속 회오리를 만들며 흰자를 익힌 다음 꺼내면 수란이 된다.

접시를 꺼내 호밀빵을 놓고, 그 위에 구운 시금치와 베이컨, 수란을 올린 다음 홀랜다이즈 소스를 붓고 파슬리 가루도 살짝 뿌려주면 완성이다.

“이것만 먹기에는 아쉬우니까 다른 것도 하나 만들까.”

문득 마트 사장이 찔러준 사과가 떠올랐다.

샌드위치를 만들려고 샀던 요거트와 키위, 그리고 바나나도 있다.

재료를 보니 아침에 먹기 좋은 메뉴가 생각났다.

유리그릇을 준비해두고 사과는 깨끗하게 씻어 반으로 갈랐다. 씨와 꼭지를 잘라내고 한입에 먹기 편하게 썰었다.

키위와 바나나도 엄지손가락 크기로 잘라서 준비를 마쳤다.

유리그릇에 편으로 썬 사과를 깔고 위에 그릭 요거트를 부어넣고, 키위, 바나나, 다시 그릭 요거트, 냉동블루베리와 크랜베리, 그래놀라를 올리면 요거트볼이 완성된다.

만든 요리들을 테이블에 올리고 고개를 돌렸더니 홍경섭이 음흉한 웃음을 입가에 매달고 앉아있었다.

그 웃음을 보자마자 민우는 불길함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다 된 거야?”

“너 자고 있었던 거 아니었냐?”

그렇다고 보기에는 너무 멀쩡해 보인다.

“강민우 사용설명서라고 있는데. 너도 보여줄까?”

역시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다. 아마도 약한 모습을 보여서 그럴싸한 음식을 만들도록 유도했겠지.

곰 같던 놈이 언제 여우가 된 건지 모르겠다.

소파에서 부스스 몸을 일으킨 홍경섭은 주방으로 걸어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계획적이라면 성공했다는 말에 뜨끔했지 뭐야. 들킨 줄 알고.”

얄미워진다. 점점. 조금씩.

“그러나 들키지 않았다는 게 중요하지. 샌드위치 하나가···.”

민우의 어깨너머로 테이블을 훑어보고는 흡족하게 웃었다.

“요리 2개로 변했으니까 성공적이기도 하고.”

흐흐거리며 웃는 모습을 보니까 도저히 못 참겠다. 결국 폭발한 민우는 곧장 몸을 돌리고 음식들을 입에 퍼 넣기 시작했다.

“어? 얌마! 아무리 그래도 치사하게 혼자 먹냐!”

다급히 매달리는 홍경섭을 등으로 밀쳐냈다. 평소 운동을 게을리 한 홍경섭이 피지컬로 민우의 상대가 될 리가 만무.

민우가 엉덩이로 홍경섭의 옆구리를 쳐버렸다.

퍽!

“어이쿠! 이제 사람도 치네!”

우걱, 우걱. 꿀꺽.

툭 쳐버린 엉덩이 공격에 비틀거리며 물러나는 홍경섭을 보며 민우는 입안의 음식을 씹어 삼켰다.

“이런 상황에 관한 건 강민우 사용설명서에 없나봐?”

“야야! 내거 달라고오오!”

자꾸만 줄어가는 음식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홍경섭의 절규가 아파트를 뒤흔들었다.

* * *

다 큰 남자의 삐진 표정을 보는 건 매우 짜증나는 일중 하나다.

“좋은 말로 할 때 표정 풀어라.”

“자식이 먹는 거로 치사하게.”

“누가 먼저 시작했는데.”

“아무리 그렇다고 딱 한입만 남겨주냐? 고작 한입인데 드럽게 맛있으니까 더 짜증나잖아.”

“아뮤즈부쉬 몰라? 그거 먹었다고 생각해.”

홍경섭이 억울한 눈으로 민우를 째려봤다.

“아뮤즈부쉬 먹었으면 이제 코스요리가 시작돼야 하잖아. 전채요리는 그 요거트로 퉁쳤다고 치고, 이제 메인요리 내놔.”

피식 웃은 민우가 운전 중인 박병석에게 대고 말했다.

“병석아, 미안한데 가까운 분식집 있으면 김밥 좀 사다줄래?”

“식사 못하셨어요? 대표님이 오늘 형한테 얻어먹는다고 일찍 가신댔는데.”

역시나 계획이 다 있었던 거다.

“나 김밥 안 먹어!”

“반찬투정이냐?”

“아니거든.”

실실거리고 있던 박병석이 물었다.

“그런데 두 분은 어쩌다 또 싸우셨어요?”

민우가 대답하기에 앞서 홍경섭이 냅다 질문을 가로챘다.

“병석아. 누가 네 밥을 다 먹고 한 숟가락만 남겨 주면 어떨 거 같아.”

“그걸 가만히 놔둬요? 명치를 두들겨 패서 토하게 만들어야죠. 어디 감히 밥을 뺏어 먹고 난리야. 차라리 돈을 뺏어가지.”

농담이 아니라 진심의 기색이 역력한 대답이었다.

홍경섭이 민우에게 눈을 흘겼다.

“들었지? 일루와. 명치 두들겨 패야 되니까.”

그 말에 대충 상황을 짐작한 박병석이 껄껄 웃었다.

“하하. 민우 형이 음식 뺏어 드신 거예요?”

엉겨 붙는 홍경섭을 가볍게 제압한 민우가 물었다.

“그럼 병석아, 네가 만든 밥을 누가 강탈해 가려면 어떻게 할래?”

박병석은 상황을 떠올려 보고는 울컥했던지 부드득, 이를 갈았다.

그 기세에 홍경섭이 움찔했다. 음식에 진심인 그의 대답에 따라 자신의 안위가 걸리게 된 셈이니.

박병석이 대답하기 전에 재빨리 선수쳐야 한다. 우선 화해부터. 민우의 손을 잡아 악수하는 시늉을 했다.

“왜 갑자기 친한척이야?”

민우가 손을 털어냈다.

“강 배우님. 내가 양보할게. 여기까지 하자.”

“병석이 대답부터 듣고.”

“에이, 왜 이러실까. 그냥 내가 먹은 거로 하자니까?”

“그럼 내가 아침밥 해준 거다. 두말하기 없어.”

“암요, 암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헤헤.”

내시처럼 양손을 비벼가며 굽실거리던 홍경섭은.

“제 밥을 뺏어간다니까 잠깐 화가 났는데요. 제가 요리를 드럽게 못하거든요. 그거 먹고 고생할 놈을 생각 하니까 아무렇지도 않네요.”

이어진 박병석의 말에 얼굴을 와락 찌푸려야했다.

히죽 웃은 민우가 홍경섭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다 왔으니까 이제 인상 풀어라.”

CHA ENM에서는 ‘폐렴’의 무대인사를 용산에서 하기를 원했다.

김 감독은 대뜸 찬성하고 나섰다. 그에게 CHA ENM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었으니까.

미리 일정을 공개해뒀기에 이미 관객은 가득 차있었다.

오늘 참가하는 배우들은 KH 엔터 소속은 모두 왔고, 윤기준과 문시안도 참석했다.

선두는 윤기준의 차지였다. 비록 연기는 못했지만 쇼맨쉽과 입담은 나쁘지 않았다.

의외로 낯을 가리는 김동월이 윤기준의 꽁무니를 따라 쪼르르 걸어갔다.

윤기준을 필두로 비중이 낮은 순서대로 배우들이 일렬로 늘어섰다.

“꺄악! 민우 오빠!”

“여기 한번만 봐주세요!”

“문시안 예쁘다!”

관객들의 소란이 잦아들자 마이크를 넘겨주며 인사가 시작되었다.

“안녕하십니까, 윤기준입니다. 이렇게 직접 뵈니까 정말 좋네요. 여러분도 그렇죠?”

“네에!”

“하하. 감사합니다. 그럼 이번 영화의 감독을 맡으신 김동월 감독님의 인사말씀 듣겠습니다.”

아직 인지도가 낮은 배우들의 인사에는 박수소리만 들리더니 문시안과 민우에 이르러서는 콘서트장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의 반응이 터져 나왔다.

“안녕하십니까, 강민우입니다. 귀한 시간 내서 저희 영화를 보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관객 여러분을 위해서 특별한 선물을 마련했습니다. 모두 드렸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관계자께서 결정한다고 하네요.”

한 관객이 외쳤다.

“저 두 번 볼게요. 선물 주시면 안 되나요!”

민우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며 농담을 던졌다.

“세 번 보면 드릴게요. 저 500만 관객이면 명동 거리에서 사인회 하는 거 아시죠? 만약 천만 관객이 들어온다면 오늘 여기 모인 배우들이 감염자 코스프레를 하고 명동거리를 활보하겠습니다. 물론 사진도 함께 찍어드리고요.”

다른 배우들이 뜨악한 얼굴로 민우를 바라봤다.

그 모습에 관객들이 폭소를 터트렸다.

사실 이 모든 것은 민우의 아이디어로 사전에 협의된 사항이다.

공약이나 배우들의 리액션까지 모두.

“그럼 영화 재밌게 즐겨주세요.”

영화관에서 빠져나온 문시안은 민우의 말대로 진행된 무대인사에 감탄했다.

“관객들 반응 좋던데요? 천만 공약은 기자회견때는 공개하지 않더니 일부러 무대인사때 공개한 거예요?”

“응.”

“잘하면 입소문으로 빠르게 퍼지겠네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어요?”

“그거야···.”

싱긋 웃은 민우가 답했다.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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