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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여지는 올가미 (117/223)

조여지는 올가미

너구리를 굴에서 끌어냈으니 다음 단계를 실행할 차례다.

고영수는 하연희에 관한 찌라시를 슬쩍 흘렸다.

<톱스타 H양. 그녀는 자신이 스타가 되기 위해서 다른 연예인을 괴롭혔다. 같이 출연한 배우 중에서 그녀의 괴롭힘을 견디지 못해 소리 소문도 없이 은퇴한 사람도 있다.>

증거가 없으면 루머일 뿐이다. 그러나 증거가 있다면 찌라시는 진실이 된다.

친한 기자에게 찌라시를 전해 들은 오희석은 깜짝 놀라 하연희를 찾았다.

“연희야. 이 루머가 사실이야?”

“오빠. 유명한 사람들을 따라다니는 루머가 한두 개야? 그리고 자극적인 단어를 사용했지만 내용은 기싸움하는 거잖아. 까놓고 말해서 기싸움 안 하는 여배우 있어?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그럼 너는 이거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는 거지?”

하연희는 보던 시나리오를 팽개치더니 오희석을 노려봤다.

“아니라고 했지.”

“사실 여부를 내가 알고 있어야 대처를 할 수 있으니까 물어보는 거야.”

“아니라고!”

“그래, 알았다.”

오희석을 쫓아낸 하연희는 엄지손톱을 깨물었다.

“경쟁자가 될 사람을 밟는 게 뭐가 어때서. 나만 그래? 다들 그러잖아.”

찌라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조금 더 구체적인 내용으로 돌기 시작했다.

<톱스타 H양. 경쟁자가 될 것 같은 배우를 댄스팀으로 계약해서 강제로 중국 진출시켜. 댄스팀은 총 4개며 인원은 십여명으로 추정.>

오희석보다 먼저 찌라시를 접한 하연희는 박효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연희 씨.

“중국일 어떻게 되고 있어요?”

-그게, 그러니까···.

상대방이 말꼬리를 흘리자 가슴이 철렁했다.

루머가 지날 때까지 그냥 중국에 처박혀있으면 모든 일이 해결된다. 하지만 중국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꼬투리라도 잡히면 일이 복잡해진다.

“대답하세요. 제가 주기적으로 보내주는 돈이 부족해서 튕기는 거라면 지금 말하세요. 50% 추가해드릴 테니까.”

-미리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중국 활동은 접었습니다. 댄스팀은 계약 해지했고, 새로운 계약을 맺었습니다.

뿌득.

하연희는 이를 갈아붙이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누구 마음대로요?”

-이거 왜 이러십니까? 이제 연희 씨도 스타가 됐으니까 더는 잡아둘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우리도 탈 나기 전에 끝내야죠.

“만약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이 밖으로 새어나간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당연하죠. 우리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누가 알겠습니까? 그리고 애들은 연희 씨에 관해서 모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하연희는 무언가 방도를 마련해둬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장 좋은 것은 이필성에게 모두 씌우는 거다. 사실 그가 모든 지시를 했으니 틀린 말도 아니지 않은가. 자신은 이필성에게 부탁했을 뿐이고.

이 일을 성사시키려면 박효성과 말을 맞춰둬야 할 필요성이 있다.

“만나서 얘기하죠. 제안할 것도 있고요.”

언제나 제안은 돈이 따라오는 법이다. 박효성의 목소리가 확 밝아졌다.

-제가 최근에 아주 좋은 장소를 물색해뒀습니다. 거기서 뵙죠.

박효성은 일전에 민우와 만났던 커피숍으로 하연희를 불러냈다.

“이런 곳이 다 있어요?”

꽁꽁 싸매고 나타난 하연희가 실내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벽도 툭툭 두드렸는데, 전해져오는 단단한 느낌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 맛은 보장 못 합니다. 더럽게 맛없더라고요.”

“커피 마시려고 온 건 아니니까 상관없어요.”

“우선 제안부터 들어보죠.”

커피 주문을 마친 후 하연희가 입을 열었다. 내용은 이필성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씌우자는 것이다.

박효성은 팔짱을 끼고 곰곰이 생각했다.

실무자였던 자신과 구동운은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그로 인한 이득은 오롯이 하연희만 보게 된다.

하연희도 이러한 사정을 알고 있으니 제안을 하려고 했을 터다.

“입을 맞추려면 제법 큰 비용이 들 텐데요. 괜찮습니까?”

“큰 거로 열 장 드릴게요.”

구린내를 덮어주는 대가로 10억이면 남는 장사다.

박효성은 입꼬리가 씰룩거리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새로 만들 소속사의 지분과 강민우의 수입에 관한 정산금에 하연희에게서 얻는 돈까지 합친다면 그야말로 대박이 터진 거나 마찬가지다.

“깔끔하게 정리해두겠습니다. 근데 구 실장한테는 금액에 관해서 비밀로 좀 해주십쇼.”

하연희가 박효성을 벌레 보듯 바라봤다.

그 시선이 기분은 나빴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깟 시선 대수롭지 않게 넘기면 몇억은 생기니까.

“그러죠.”

하연희는 핸드백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박효성에게 밀어주었다.

“부디 이 수표를 도난신고 하는 일은 없도록 해주세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러고는 커피가 나오기도 전에 자리를 떠버렸다.

박효성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달래며 봉투를 열었다.

1,000,000,000원짜리 수표를 보자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동그라미가 도대체 몇 개냐? 크흐흐.”

수표를 손에 쥐자 자린고비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으니.

박효성은 구동운에게 전화를 걸었다.

“구 사장님. 보너스가 들어왔네요. 금액은 5억입니다. 아이고 당연히 사장님한테 3억을 드려야죠. 어떤 일인지는 지금 만나 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 * *

-둘이 만났어.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예상은 되네.

홍경섭은 모든 일을 매니저들에게 맡겨두고 이번 일에만 매달렸다.

미끼를 물지 않을까봐 걱정했는데, 상대가 덥석 물어버리니 민우는 이제야 한시름 놓았다.

“다행이네.”

-댄스팀은 만나봤어?

“오늘 얼굴 보기로 했어.”

-괜찮겠냐? 괜히 긁어서 부스럼 만드는 거 아냐? 증언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

“어떻게든 설득해봐야지”

-아무튼, 몸조심해라.

“설마 별일이야 있으려고.”

-조선족 조폭을 데리고 왔을지 어떻게 알아?

구동운 혼자서 모든 인원을 관리하는 건 불가능하다. 당연히 사람을 써야 하고, 그들이 조폭이 아니라는 보장은 없지 않은가.

“그래, 조심할게. 끊자. 구동운 온다.”

여전히 뺀질거리는 낯짝의 구동운은 민우를 발견하자 실실 웃었다.

“이야, 이게 누구신가. 요즘 아주 잘나간다고 들었는데.”

“아직 멀었지 뭐. 이제 겨우 자리를 잡은 정도?”

민우의 반말에 구동운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의 기색이 고스란히 느껴지자 민우는 피식 웃었다.

“내가 반말을 하니까 기분이 상하나 보네.”

“회사 대표에게 말까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경섭이랑도 말 트고 지냈는데. 그래서 불만이 있으신가? 경섭이한테 들어보니까 우리 동갑이라더만. ”

“이봐. 지금 누가 칼자루를 쥐고 있는지 몰라서 그렇게 막 나가는 거야?”

“누가 쥐고 있는데.”

“나지. 회사 대표감이 없어서 요청했다고 들었는데. 아니야?”

근거도 없는 자신감 넘치는 말에 민우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웃어?”

“어처구니가 없으니까 웃음만 나오네.”

웃고 있던 민우의 얼굴이 삽시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대표를 맡아 줄 사람을 구하는 게 쉬울까, 아니면 회사를 굴려줄 연예인을 구하는 게 쉬울까.”

입안이 까끌까끌해진 구동운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대표 직함을 주겠다고 하면 나설 사람은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강민우를 대체할 스타를 구하려면 어림도 없다.

설혹 구했다고 치더라도 7:3이라는 정산비율은 머리에 총을 맞지 않은 이상 허락하지도 않을 거고.

“상황파악이 되지? 그러면···.”

말을 잠시 멈춘 민우가 구동운의 눈을 직시했다.

“알아서 처신해. 곤란한 상황 만들지 말고. 알겠지?”

구동운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당신이 데리고 있는 연예인부터 보자고. 계약의 성패는 거기에 달려있으니까.”

“뭐? 계약은 이미 사인 하기로 이야기 끝난 상황 아닌가?”

“내 요구조건 못 들었어? 효성이한테 알아듣도록 말해줬었는데.”

“끌어주겠다는 연예인과 회사의 대표가 필요하다고 했지.”

“그래. 당신은 만났으니 연예인도 봐야지. 시간 없으니까 얼른 처리하자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구동운이 등을 돌렸다.

“따라와.”

구동운의 차를 타고 이동했다. 경기도 남양주에 도착하자 휴대폰을 들었다.

“여빈아, 나다. 표 실장에게 전해. 애들 데리고···.”

잠시 말을 멈춘 구동운이 민우를 바라봤다.

“어디서 보게?”

“밥이라도 같이 먹는 게 낫겠네. 저기 고깃집으로 오라고 해.”

구동운은 민우가 가리킨 간판을 읽었다.

“내가 육즙팡팡 삼겹살집으로 오랬다고.”

차에서 내려 고깃집에 들어갔다.

대충 실내에 자리를 잡았다. 4명이 앉을 수 있는 기다란 테이블 4개가 실내 중앙에 놓여있었다.

‘대충 끼어 앉으면 표 실장이라는 사람의 자리는 없겠네.’

구동운의 눈만 피하면 될 것 같다.

고기를 주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가게로 들어섰다.

대충 헤아려보니 여자 15명에 남자 5명이다.

“이봐요, 사장님!”

“네, 뭐 필요한 거라도 있으신가요?”

“여기 테이블 다 붙이고 남는 자리에 테이블 하나 더 넣어줘요. 보니까 얼추 맞겠네.”

“네? 죄송하지만 그러면 다른 손님들이 불편할 텐데요.”

“다 일행이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말고. 테이블을 옮길 사람이 없으면 우리가 대신해주리다. 원래대로 돌려놓는 일도.”

단체 손님을 받게 됐으니 사장은 두말하지 않고 허락했다.

구동운의 지시에 따라 남자들이 움직여 테이블 하나를 실내에 들여놓았다.

테이블 5개를 놓자 실내를 절반으로 갈라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출입문 반대쪽에 앉은 사람은 테이블을 넘어가야 한다.

“왜 이렇게 불편하게 해?”

“이게 불만이라면 더 넓은 곳으로 가든지.”

구동운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을 배치했다.

민우의 좌우로 남자를 자리하게 하고, 맞은편에는 구동운이 앉았다.

테이블 하나당 시커먼 남자 하나를 꼭 넣는 치밀함을 보였다. 이러한 자리 배치에 민우는 직감했다.

‘여자들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한다라···. 뭔가 구린 구석이 있구나.’

주문한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같이 일하게될 사이일지도 모르는데 같이 한잔합시다.”

민우가 술을 돌렸으나, 구동운만 마셨다.

말도 없이 묵묵히 고기만 삼켜대는 남자들을 보자 숨이 턱턱 막혔다.

여자가 화장실을 갈 때면 꼭 남자가 경호하듯 따라다녔다. 도저히 이야기를 나눌 틈이 보이지 않는다.

민우는 화장실을 가면서 가게 사장을 몰래 만났다.

“아무 여자에게나 이 쪽지 좀 전해주세요.”

5만 원권 2장을 함께 쥐여주자 사장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기로 배를 채우고 있으려니 술이 살짝 오른 구동운이 물었다.

“우리 애들 보니까 어때? 진행해도 되겠어?”

“어차피 스타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상관없었어.”

“그건 보장하지. 중국에서도 먹혔던 애들이거든.”

“좋아. 대충 배도 채운 것 같으니까 이만 일어나자고.”

어떻게든 놈들에게서 가게주인의 시선을 가려야 한다.

“계산은 내가 할게.”

“아냐, 내가 할게. 돈 벌어줄 연예인에게 밥을 사게 하면 쓰나.”

무언가 눈치라도 챘는지, 오늘따라 의도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다.

구동운이 계산하는 사이 남자들은 양 떼를 몰 듯 여자들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하려면 기회는 지금뿐이다.

민우는 가게를 나가려다 근처의 여자와 툭 부딪혔다.

“어어!”

일부러 놓친 휴대폰을 아슬아슬하게 잡아내자 모두의 시선이 이곳에 쏠렸다.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먼저 나가세요.”

계산을 마친 구동운도 가게의 출입문 쪽으로 걸어왔다.

고개를 돌려 사장을 보니 남들 몰래 엄지를 쓱 올려 보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데 구동운이 민우의 어깨를 잡았다.

흠칫한 민우가 그를 바라봤다.

“그럼 이른 시일에 계약하도록 하자고.”

다행히 들킨 것 같지는 않다.

“며칠 후에 변호사 사무실에서 보도록 하지.”

그날 저녁 민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휴대폰으로 건 전화가 아니라 031로 시작하는 번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네, 강민우입니다.”

-저 임다연이라고 해요. 쪽지 보고 전화했어요. 내일 오전 11시. 아까 그 가게로 오세요.

뚝.

속사포처럼 말을 마친 그녀가 전화를 끊었다.

“일이 잘못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잘됐네.”

이제 다연이라는 사람을 설득해서 계약서를 받아내면 된다.

소파에 등을 파묻은 민우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올가미가 단단하게 조여지고 있었다.

결코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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