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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끼를 던지다 (114/223)

미끼를 던지다

울적해 하는 이수희를 보며 민우가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

“예전에 그 사람이랑 같이 출연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러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예전에 이수희의 연기를 좋게 봤던 PD가 직접 배역을 권했다. 그녀로서는 오디션도 건너뛰고 기회를 잡았기에 최선을 다해 촬영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마음가짐은 겉으로 티가 나기 마련이고, PD는 빛이 나는 그녀를 제대로 찍어냈다.

물이 오른 연기에 시청자들은 그녀의 이름을 검색하기에 이르렀다.

하루에 1분도 채 나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씬스틸러가 된 것이다.

그녀의 이름이 인터넷에 오르내리기 시작하자 작가는 이수희의 비중을 조금 늘렸다.

드라마상 비중으로 따져보자면 약 1분 정도 된다. 거기에 대사도 한 줄 추가 되고.

누군가는 고작 그것밖에 안 되냐고 할 것이다. 하지만 60분의 러닝타임을 생각하면 1분은 매우 크다.

원래라면 드라마 중반에 이르렀을 때 출연이 끝나야 했지만, 자신의 비중을 멱살 잡고 끌어올린 셈이다.

누군가의 비중이 늘어나면 다른 쪽은 줄어든다. 하필 줄어든 쪽이 하연희였다.

이때부터 하연희의 히스테리가 시작됐다.

이름 끝 자가 같은데 마음에 안 든다며 은근슬쩍 돌려 까지를 않나, 의상 톤이 겹친다며 갈아입으라고 하거나, 메이크업이 너무 화사한 거 아니냐고 하는 등.

“기싸움을 건 거네.”

단역에 불과한 그녀는 주연배우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반짝반짝 빛이 나던 이수희가 칙칙해지자 다시 비중이 줄어들고, 종국에는 원래 예정대로 드라마에서 하차하게 되었다.

정글 같은 연예계에서는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 돌파해야 위로 올라갈 수 있다.

그게 싫다면 스폰서를 잡으면 된다. 거액의 지원을 받고, 드라마 배역과 CF를 잡아내면 쉽게 갈 수 있다.

이때쯤 이수희에게 스폰서가 접근했지만 그녀는 거절했다.

그다음 차례는 소속사였다.

신생이지만 연예인도 몇 명 소속되어 있기에 큰 의심 없이 계약했다. 그런데 소속연예인은 이름만 비슷하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예를 들어 김태현이 아니라 김태헌이고, 닮은꼴 사람이 가명을 사용해서 전국업소를 도는 그런 회사.

“회사명이 뭐였는데?”

“삼현이었어요. 삼현 엔터테인먼트.”

“삼현?”

민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선가 들어본 회사명이다. 잠시 눈썹을 찌푸리고 생각해보니 퍼뜩 기억이 떠올랐다.

“혹시 삼현 엔터랑 연관된 이름 중에 박효성도 있어?”

“맞아요. 저를 찾아와서 계약하자고 했던 사람이 박효성이었어요.”

반복되던 21일이 끝나고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하느라 홍경섭에게 일임해두었는데 깔끔하게 마무리가 되지 않았나 보다.

“조수영이랑 강미애는 알아?”

“어? 저랑 같이 중국 갈뻔했던 사람들이에요. 어떻게 아세요?”

조수영과 김미애는 ‘언더커버 파티쉐’를 촬영할 당시 잠시 만난 적이 있다. 21일이 반복될 때 소고깃집에서 보기도 했고.

“박효성은 어떻게 됐어?”

“사기죄로 구속될 뻔 했는데 합의해주고 풀려났다고 들었어요.”

“그때 일이 트라우마가 돼서 연기를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데. 하연희는 무슨 관계야?”

“공항에서 박효성과 통화하는 걸 엿들었어요. 연희라는 호칭을 붙이기도 했고요.”

“확실하게 들은 거야?”

이수희는 미간을 좁히고 기억을 더듬었다.

“그때 저도 정신이 와중이라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얼추 그 비슷한 이름을 들었어요.”

“그럼 하연희가 아닐 수도 있잖아.”

“그래서 제가 아마도라고 했던 거예요. 확신을 못 해서.”

대충 시기를 따져 봤더니 두 사람이 마찰을 일으킨 시점은 하연희가 처음으로 주연을 맡았을 때다.

이미 확실하게 자리를 잡은 상황에서 자신의 약점이 될 일을 한다? 설혹 일을 꾸민다 하더라도 차라리 대리인을 쓰는 게 낫다.

민우의 말을 들은 이수희의 안색이 밝아졌다.

“오빠 말이 맞는다면 다행이네요.”

“다행이라고?”

“네. 저 진짜 인간불신에 걸릴 뻔 했거든요. 트라우마도 됐고. 그렇게 더러운 일까지 하면서 스타가 돼야 할까, 하는 생각도 했고요.”

“보통 사람은 더러워서라도 뜨려고 하는데 생각이 특이하네.”

“제가 철이 덜 들었나 봐요.”

“세상의 때가 덜 묻었겠지. 그나저나 하연희가 개입했을 가능성도 아예 배제하지 못해.”

“그럼 박효성이라는 사람이 모든 일의 키를 쥐고 있겠네요.”

민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살을 찡그렸다.

“그래. 아무래도 놈을 만나봐야 할 것 같다.”

“아는 사람이에요?”

한숨을 훅 내쉰 민우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동창생.”

* * *

이수희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홍경섭은 이를 갈았다. 그러고는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한 변호사님, 접니다. 홍경섭. 뭐 좀 여쭤보고 싶어서요. 혹시 예전에 고소를 진행했던 박효성 기억하십니까? 그 자식 어떻게 처리됐나요? 그래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변호사와 통화를 마친 홍경섭은 마른 손으로 세수를 했다.

“네 말대로 피해자들이랑 합의해주고 끝냈다네. 한 푼이 아쉬운 사람들이라 위로금을 조금씩 챙겨주니까 합의를 안 할 수가 없었대.”

확실하게 끝을 냈어야 했는데 너무 안일했다.

민우 때문에 돈줄이 막힌 놈은 다른 방법을 모색했을 거고, 그 방법은 가짜 걸그룹을 만들어 중국으로 돌리는 것이다.

“놈이 어딨는지는 모르겠지?”

“알 수 없지. 회사 이름도 모르는데.”

“잠깐만. 나한테 녀석의 명함이 있을지도 몰라.”

21일이 끝나고 박효성에게서 ‘삼현 엔터테인먼트’의 명함을 받았다. 그때는 지갑에 대충 넣어 두고 잊어버렸는데 인제 와서 돌이켜보니 정말 잘한 일이 되었다.

낡은 지갑을 본 홍경섭이 미간을 찌푸렸다.

“너 지갑 바꿔야겠다.”

“쓸 일이 없다 보니까. 자잘한 일은 전부 너랑 병석이가 처리해주잖아.”

“하긴 그건 그러네.”

지갑을 뒤졌더니 구석에서 명함이 튀어나왔다.

홍경섭이 매니저를 맡기 전에 받아뒀기에 다행이다. 매니저 계약을 한 이후로는 모든 명함을 홍경섭이 보관했으니까.

전화번호를 확인한 민우가 피식 웃었다.

“왜 웃어?”

“이 명함 말고 다른 것도 받았거든. 삼현 픽처스라고. 거기 전화번호랑 이 번호랑 같네.”

삼현 픽처스에는 직접 전화를 걸기도 했다. 골프장이냐고 물어서 박효성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고.

곧장 명함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스피커폰으로 바꿔 홍경섭도 듣도록.

뚜르르, 딸칵.

-네.

예전의 그 목소리다.

“거기 삼현 엔터 맞습니까?”

-···누구시죠?

목소리에 경계심이 잔뜩 깔렸다.

“박효성의 동창입니다. 예전에 오디션을 보고 다닐 때 명함을 받았어요. 계약과 관련해서 생각 있으면 연락하라고.”

-아, 그렇군요. 지금 중국 출장을 가서 며칠 있다 올 겁니다. 연락처를 남겨주시면 전해드릴게요.

민우가 홍경섭을 바라봤다. 홍경섭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전화번호 하나를 재빨리 적어주었다.

“010···.”

-성함은요?

“강민우라고 합니다.”

잠시 전화를 받던 상대방의 말문이 막혔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당황한 사내가 물었다.

-혹시 배우 강민우 맞습니까?

“네.”

-계약 관련해서 문의하신 거 맞으시죠?

“맞습니다.”

-박 팀장이 돌아오는 대로 전해드릴게요.

전화가 끊기자 홍경섭이 피식 웃었다.

“좋아 죽는데?”

“호박이 넝쿨째 들어오는데 누가 싫어하겠어? 만나지 않고는 못 배길 거야.”

박효성을 만나기 전에 할 일이 있었다.

“나 차 한 대 사려고.”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어떤 거로 사게?”

“어차피 혼자 타고 다니는데 스포츠카 타입이 낫지 않겠어?”

“그럼 포르쉐 911로 사. 차가 예쁘더라고. 가격은 2억에서 왔다 갔다 할 거다.”

“나는 벤츠로 생각했는데.”

“그러던지. 어차피 선택은 네 몫이니까. 카탈로그 준비해둘 테니 골라봐. 주문은 내가 해줄게.”

홍경섭은 여러 개의 카탈로그를 준비해줬고, 민우는 몇 대를 시승해보고는 홍경섭의 의견을 따라 포르쉐로 결정했다.

차량의 출고는 한달 뒤고, 그전에 보험을 비롯한 모든 업무는 홍경섭이 처리했다.

며칠이 지나자, 박효성에게서 연락이 왔다.

전화로 나눌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만나기로 했다.

약속장소는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커피숍.

골목 안에 위치해서 단골만 받는데, 그 단골도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찾는다.

가격은 보통 커피숍의 10배가 기본이라 보통 사람은 드나들지 않는 그런 곳이다.

더군다나 주변에 CCTV는 아예 없고 입구도 여러 개라 손님끼리 마주칠 일도 없다.

출입문이 열리고 박효성이 들어섰다.

“이런 곳도 장사가 되나?”

예전보다 나이는 들었지만 여전히 뺀질거리는 얼굴을 보니 그냥 없던 일로 하고 떠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메뉴판을 바라본 그가 혀를 내둘렀다.

“커피에 금가루라도 들어갔어? 무슨 가격이 이래?”

“자릿세도 포함이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야, 나도 이런 커피숍이나 차릴까. 돈을 긁어모으겠구만.”

“그만 떠들고 커피나 시켜.”

주문은 밀실에 비치된 태블릿PC로 하면 된다. 그러면 종업원이 가져다준다.

“비싼 거 먹어도 되지?”

그러면서 7만 원짜리 캐러멜 마키아토를 골랐다. 민우는 5만 원짜리 아메리카노와 디저트로 5만 원짜리 치즈 조각 케이크 2개를 주문했다.

커피와 디저트로만 20만 원이 넘게 나오자 박효성이 눈을 빛내며 민우를 바라봤다.

“너 요즘 잘나간다더니 돈 많이 벌었구나?”

그 눈빛은 마치 호구를 보는 듯해서 언짢아졌다.

“적당히 쓰고 살 정도는 벌었지.”

“근데 내가 좀 알아보니까 너 소속사 있더만?”

의심 가득한 목소리에 민우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정산에 문제가 있어서.”

“맞는 말이야. 언제나 돈이 문제거든. 그래서, 너 조건이 어떻게 되는데?”

“너무 급한 거 아니냐? 우선 커피라도 마시고 얘기하자고.”

민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커피가 들어왔다.

맛은 솔직히 그저 그렇다.

“이게 7만 원이라니. 세상 말세네.”

커피는 한 모금, 케이크는 한입. 박효성은 음식을 테이블 한쪽에 밀쳐버렸다.

박효성의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겠지만 맛이 없다는 말에는 동의한다. 민우도 박효성처럼 한쪽에 치워두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조건 어떻게 맞춰줄 수 있어?”

“지금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 맞춰주지.”

“그래? 그럼 더이상 우리가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네.”

아무런 미련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박효성이 당황하며 발목을 잡았다.

“왜 이렇게 성격이 급해? 협상을 하려면 조율부터 해야지.”

민우의 한쪽 입꼬리가 삐죽 올라갔다.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상체를 숙이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협상? 조율? 너는 그냥 조건만 말하면 돼. 결정은 내 몫이니까.”

상체를 뒤로 물린 민우가 팔짱을 꼈다.

“모두가 탐내는 물건을 사려면 당연한 거 아냐? 내가 너만 만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참고로 조금 큰 곳에서는 9:1까지 말했어.”

“9:1?”

“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

박효성은 재빨리 머리를 굴려 계산에 나섰다.

대충 민우의 몸값은 드라마일 경우 회당 1억 정도다. 단순 계산으로 1천만 원이 소속사로 떨어진다. 세금이며 운영비며 나가는 돈이 있겠지만 자신의 회사는 그런 것 따위 없다.

민우가 벌어온 모든 돈은 자신의 호주머니로 들어가게 된다.

여기에 CF까지 더한다면? 원님 덕에 나팔 불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매니저가 해야 할 영업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알아서 일감이 들어올 테니까 연락받을 휴대폰과 다리가 되어줄 자동차만 있으면 된다.

꿀꺽.

탐욕에 마른침이 절로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9.3:0.7”

“이거 왜 이러시나. WI 엔터 이야기 못 들었어?”

놈과 WI가 연결되어있다면 분명히 반응을 보일 것이다.

단 한 조각의 미심쩍음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민우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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