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랑플라스 광장에서
첫 개시는 순조롭게 끝났다.
한꺼번에 주문한 단체 손님이었기에 머릿수대로 조리하면 되니까 편한 것도 있었고.
이번에는 주문을 나눠서 받기로 했다.
약간씩 텀을 줘서 한 팀씩 주문을 받으면 난이도가 상승한다.
각자 원하는 음식도 다르니까 오더도 복잡해질 수밖에 없고.
아니나 다를까, 주방은 물론이거니와 홀에서도 실수가 나왔다.
“오빠. 3번 테이블은 요리가 5개예요. 불고기 2개, 닭갈비 1개, 잡채 2개. 한 분은 배탈이 나서 못 먹는다고 했어요.”
“응? 오더는 달랐는데.”
민우가 빌지를 보여주었다. 자세히 보니 잡채 뒤에 숫자 2를 흘려서 쓰는 바람에 3으로 보였다.
“이래서 헷갈린 거구나.”
“죄송해요. 제가 똑바로 썼어야 했는데.”
“아냐. 나도 테이블마다 6명이니까 아무 의심 없이 6인분을 준비한 거지.”
바쁘니까 서로 소통을 하지 못해 실수가 생겼다.
게다가 허강필은 주방일 자체가 처음이다. 그의 가장 큰 문제는 조리 순서를 헷갈려 하는 것이다.
먼저 주문이 들어온 손님의 요리를 만들어야 하는데, 깜빡하고 나중에 들어온 주문을 먼저 뽑기도 하고.
나중에 들어온 주문을 먼저 처리하면 먼저 온 손님이 기분 나쁠 수밖에 없다.
실전과 똑같은 연습을 하는 중이라 차규화와 김여울은 수시로 스태프들에게 양해를 구해야 했다.
이대로 계속 진행해봤자 실수는 계속 발생할 터다. 그래서 민우는 자신의 요리를 끝내고 잠시 허강필을 살펴봤다.
잠시 살펴본 것만으로도 몇 가지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형님. 빌지를 좌측부터 하나씩 꽂으세요. 요리할 때도 좌측부터 하면 헷갈리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다른 테이블과 요리가 겹친다고 같이 해버리면 꼬이게 돼요.”
“같이 조리해서 나누면 빠르지 않아?”
“덕분에 형님은 실수를 하시죠. 천천히 하세요. 차라리 자신의 요리가 조금 늦어지는 게 낫지, 나중에 온 테이블에서 먼저 요리를 받으면 더 참기 힘든 법이에요.”
허강필은 민우의 피드백을 받아들여 여유를 갖고 요리를 했다.
손이 느려진 대신 민우가 더 서둘렀기에 주문이 밀리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어차피 허강필이 익숙해지면 속도도 빨라질 것이다. 그때까지만 조금 더 고생하면 된다.
스태프를 배불리 먹이고 출연자들도 밥을 먹었다.
“와. 맛이 어떻게 이럴 수가···.”
서빙을 하느라 힘들었던 김여울은 허겁지겁 밥을 삼켰다.
차규화는 입맛이 별로 없는지 깨작거렸고. 그녀의 나이도 곧 쉰이다. 김여울이 초짜라 신경을 쓰다 보니 너무 지쳐버린 거다. 그러다 보니 입맛이 떨어질 수밖에.
허강필이 불고기 접시를 슬쩍 그녀에게 밀어주었다.
“이거 내가 만든 거야. 먹어봐.”
“고마워.”
싱긋 웃어 보인 차규화는 허강필의 정성을 생각해서 불고기에 밥을 비벼 겨우 먹었다.
힘든 저녁이 끝나고 모두가 쉬러 갔지만, 민우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막걸리를 빚기 위함이다.
미리 출연자의 식사를 준비하며 체에 밭쳐 물기를 뺀 쌀로 밥을 지었다.
가마솥을 열어보니 잘 쪄진 고두밥이 고소한 냄새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누룩을 섞기 위해서는 우선 고두밥을 식혀야 한다.
밥을 퍼내 빨리 식도록 넓게 펴뒀다.
누룩 덩어리는 절구를 사용해서 가루로 만들고 건조 이스트를 넣어 섞었다.
밥이 식을 동안 잠시의 짬이 생기자 휴식도 취할 겸 게스트하우스를 빠져나갔다.
밖으로 나오니 쌀쌀한 바람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벨기에는 온대 해양성기후로 여름철은 13~23℃, 겨울은 1~10℃로 쌀쌀한 편이다.
한동안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건물도 게스트하우스였다.
창문마다 모든 불이 켜져 있는 거로 봐서는 손님이 많은 듯 보였다.
적어도 손님 걱정은 덜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주방으로 돌아갔다.
뭉쳐있는 고두밥의 밥알 하나하나를 다 떼어낼 정도로 정성을 들여야 한다. 잘 떼어내고 누룩과 함께 섞었다.
이것을 뜨거운 물로 소독한 항아리에 넣고, 물을 부은 다음 뚜껑을 덮었다.
이대로 밀봉을 하고 일주일 정도 발효시키면 완성이다.
발효 시 온도는 22~25℃ 내외. 높은 온도로 발효시키면 누룩이 죽어버린다.
준비가 끝난 항아리는 모두 세 개.
민우는 이것을 자신의 숙소로 옮겼다. 따로 챙겨온 온도계도 설치하고 보일러도 켜서 온도를 맞췄다.
이대로 발효가 끝날 때까지 잘 저어주면 된다.
걸러내는 시기는 거품이 없어질 때다. 대충 6일 정도가 되면 거품이 없어지는데 이때 걸러서 먹으면 된다.
주막의 출연 멤버들은 끼니때마다 구슬땀을 흘렸다.
대충 사흘 정도의 시간을 손님 받을 준비를 하는 데 사용했다.
땀의 결실을 본 것인지 시간이 갈수록 출연자들의 손발이 맞아 들어갔다.
이제는 손님을 받아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겨났다.
상황을 살피던 남세영이 출연자들을 불러 모았다.
“홀은 이제 안정된 것 같고. 주방 상황은 어떤가요? 제가 봤을 땐 이제 허강필 씨도 익숙해지신 것 같던데.”
“다 민우 덕분이죠.”
“좋습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난 것 같으니까 모레 오픈하도록 하겠습니다.”
막걸리를 확인해보니 거품이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체에 발효가 끝난 막걸리를 붓고 남은 건더기에 다시 물을 부어 걸러준다. 막걸리를 거르면 쌀은 녹아서 사라지고 누룩 술지게미만 남게 된다.
술지게미는 다양한 곳에 활용할 수 있으므로 잘 챙겨두었다.
체에 거른 막걸리를 면포로 다시 한번 걸러주면 완성이다.
이 막걸리는 조금 독한 편인데 대략 16도 정도 된다고 한다.
발효를 시작한 지 3일 정도에 걸러 먹으면 단맛도 나고 순하지만 좀 텁텁한 맛의 막걸리를 얻을 수 있다.
두 가지 막걸리를 모두 사용하기 위해 다시 발효를 시작했을 때 ‘주막’의 오픈 날이 밝았다.
* * *
심심함을 참지 못한 김여울이 테이블을 긁으며 물었다.
“원래 오픈 빨이라는 게 있다던데 우리는 왜 이렇게 조용한가요?”
“아무런 홍보도 하지 않았는데 장사가 되면 그게 이상하지 않을까?”
“그럼 홍보를 해야죠.”
“하려고 했지. 그런데 미션을 준다고 하지 말라더라고.”
허강필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못 들었는데.”
“나도.”
민우를 제외한 모두가 금시초문이다.
“저도 어제 물어보고 들은 이야기라서요.”
때를 맞춰 남세영이 통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예능이면 예능답게 미션도 있고 그래야겠죠. 그래서 제비뽑기를 준비했습니다.”
“왠지 모르게 불안한데.”
“그냥 흔한 홍보 방법들을 적어둔 제비입니다. 물론 함정도 있습니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듯 음흉하게 웃는 남세영이었다.
민우가 멤버를 보며 물었다.
“누가 뽑을까요?”
“이런 건 원래 막내가 뽑는 거야.”
“제가요? 저 이상한 거 뽑으면 어떻게 해요? 행운 이런 거에 약한데.”
“이상한 거 뽑으면 또 어때? 열심히 하면 되지.”
“제가요?”
“당연하지.”
민우의 농담에 김여울이 울상을 지었다.
“전 가슴이 두근거려서 못하겠어요.”
농담이 아니라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안색도 창백해 보인다. 어쩔 수 없이 김여울은 제비뽑기에서 제외했다.
그녀가 아니라면 뽑을 사람은 두 번째로 어린 민우다.
“뽑을 사람이 정해진 것 같네요. 강민우 씨?”
어차피 뭐가 걸리든 최선을 다하면 된다.
민우는 부담 없이 제비를 뽑아서 펼쳤다. 글귀를 읽은 그가 재빨리 제비를 덮었다.
민우의 당황함에서 나온 돌발행동에 일행도 덩달아 긴장했다.
“뭐가 나왔길래 그래?”
“안색도 별로 안 좋은데. 뭔가 안 좋은 거 뽑은 거야?”
민우가 굳은 얼굴로 남세영을 바라봤다.
“PD님 다른 것도 확인해봐도 되나요?”
“물론이죠.”
싱글벙글 웃은 남세영이 제비통을 넘겨주었다. 모든 제비를 펼쳐봤다.
“유티비, SNS 이런 것도 많은데 하필이면···.”
민우가 뽑은 제비를 펼쳐 테이블 위에 올렸다.
“인형 탈?”
모두의 시선이 민우에게 닿았다.
“죄송합니다. 최악을 뽑았네요.”
“어쩔 수 없지. 그럼 인형 탈을 쓸 사람을 정해야겠네. 공평하게 가위바위보 어때?”
인형 탈은 생각 외로 무겁다. 쓰고 있다 보면 당연히 목이 아플 수밖에 없고, 두꺼운 옷을 입어야 하기에 매우 덥다.
나이가 많은 허강필이나 차규화는 1시간도 버티기 힘들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탈진이나 몸살로 영업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고.
그럼 남은 사람은 김여울과 민우뿐인데, 인형 탈 알바를 하면서 성추행을 당했다는 후기도 제법 봤었다.
사건은 미리 방지하는 것이 최선이다.
“제비를 뽑은 사람은 저니까, 그냥 제가 할게요.”
“너 혼자 고생하잖아. 그럼 돌아가면서 하도록 하자.”
“어차피 홍보를 하려면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과 대화를 해야 하는데 그걸 제대로 해낼 사람은 저뿐인 거 같아서요.”
“그건 그렇지만···.”
“이뿐만 아니라 인형 탈 알바에 관한 후기들이 좀 안 좋기도 하고요.”
민우의 설명에 그제야 모두가 이해하며 물러섰다.
“그럼 가시죠, 강민우 씨.”
싱글벙글 웃은 남세영이 민우를 데리고 숙소로 올라갔다.
준비된 인형 탈은 곰이었다. 갈색의 곰 인형 탈을 본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다.
“인형 탈을 쓰고 홍보를 오래 할수록 보상이 주어집니다. 10분씩 최고 30분까지입니다.”
결론은 30분간 인형 탈을 쓰고 있으라는 뜻.
협상을 걸어왔으니 협상으로 받아 쳐줘야 수지가 맞는 법.
“좋은 보상이 아니라면 오늘 저녁밥에 문제가 생길 겁니다. 반찬 없이 맨밥을 먹을 수도 있고요.”
민우의 협박에 남세영이 당황했다.
민우가 미리 알아본 남세영의 예능 스타일은 출연자들을 고생시키는 쪽이다. 협상도 자주 하는 편이고.
지금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보상을 걸고 고생을 시키고 있으니.
남세영이 좋은 보상이 어떤 보상인지 머리를 쥐어짜며 고민하는 사이, 민우는 인형 탈을 쓰고 거리로 나왔다.
홍보를 하려면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야 한다. 그래서 민우는 주막의 위치가 적힌 팻말을 들고 브리쉘의 그랑플라스 광장에 가기로 했다.
거기야말로 여행객들이 많으니 노다지나 다름없다.
스태프의 밴을 타고서 도착한 그랑플라스 광장은 그 명성에 걸맞게 수많은 여행객이 관광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들을 유혹하는 거리의 악사는 물론이거니와 화가들도 자리를 잡았고.
“저희는 최대한 멀리서 촬영하겠습니다. 힘들면 포기하셔도 됩니다.”
“30분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죠.”
호기롭게 말한 민우가 밴을 떠났다.
홍보를 하기 위해서는 눈길을 끌어야 한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걱정할 게 없었다.
사람들 틈에 갑자기 동물이 등장했으니까 시선이 쏠릴 수밖에.
물론 홍보가 목적임을 알게 되자 금방 관심이 시들해졌지만.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듯 팻말에 관심을 가지고 연락처를 적어가는 사람도 제법 있었다.
이들이 모두 찾아오지는 않겠지만 반응이 나쁘지는 않았다.
다양한 언어로 말을 걸어오면 대답을 해주며 광장을 누볐다.
민우와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었다.
하다 보니 의외로 재미도 있다. 30분을 버티는 게 힘들 뿐이지.
그렇게 광장을 누비던 민우는 이상한 광경을 보고 멈춰섰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마스크를 한 사람이 여자의 핸드백에서 지갑을 꺼내는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유럽을 가면 의외로 많이 만나는 범죄자가 소매치기다.
“이봐. 그거 다시 넣어 둬.”
그때서야 이상함을 감지한 여자가 핸드백을 잡아당기며 비명을 질렀다.
“꺄악!”
소매치기는 지갑을 챙긴 후, 여자를 밀쳐버리고는 얼른 도망치려 했다.
슬쩍 움직인 민우가 남자의 경로를 막아서자.
“꺼져!”
잭나이프가 뽑아져 나왔다.
위협에 겁먹고 비켜주려면 막아서지도 않았다.
사람들의 이목이 쏠린 상황이다. 지체하고 있을 수 없었던 소매치기가 잭나이프를 휘둘렀다.
타이밍을 맞춘 민우는 상체를 틀었다가 냅다 팻말을 휘둘렀다.
빠각!
정확하게 손목에 공격이 들어가자 충격을 이기지 못한 소매치기가 주저앉고 말았다.
“으악!”
비명을 지르는 소매치기의 등을 타고 들어가 리어 네이키드 초크를 걸었다.
“끄억! 꺽!”
숨이 막혀 쉴 새 없이 탭을 쳐댔지만 이곳은 링이 아니다.
기술이 제대로 들어갔기 때문에 순식간에 소매치기는 의식을 잃었다.
커다란 소용돌이 막대사탕을 핥아 먹던 아이가 그 모습을 보고는 소리쳤다.
“엄마! 곰이 사람 잡아먹어!”
흠칫한 민우는 슬그머니 일어나 딴청을 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