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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로 향하다 (105/223)

벨기에로 향하다

민우는 재빨리 주변을 둘러봤다. 룸으로 된 공간이라 다행이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만 입을 다물면 된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폭로할 것 같지도 않고.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남을 상처 입히려면 자신의 팔다리도 잘릴 각오를 해야 한다.

물론 민우는 털어도 먼지가 나지 않도록 행동거지를 조심해왔지만.

아무튼 누군가가 봤다면 여자 아이돌이라는 위치상 막말 논란으로 큰 곤욕을 치렀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서로 처음 보는 사이일 텐데 어째서 심한 말을 했던 걸까.

문득 김여울이 한국어보다 영어를 잘한다는 게 떠올랐다. 그래서 영어로 물어봤다.

“나 대신 한소리 해준 건 고마운데 말이 너무 심했던 거 아니었어요? 누가 봤으면 큰일 났을 건데.”

“응? 말을 너무 심하게 한다. 생긴 거로 한소리 하기에는 당신도 잘 생긴 건 아니다. 이렇게 말을 해줬는데 큰일이 나나요?”

그 말을 어떻게 해석하면 비속어로 가득한 한국어가 되는지 미스터리다.

“한국어를 어디서 배웠어요?”

“유티비에서 인터넷 방송을 보면서요.”

민우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도대체 어떤 BJ의 동영상을 봤는지 모르겠지만 다시는 보지 마세요. 연예인일수록 비속어를 조심해야 하는데···.”

미처 민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경옥이 인상을 구기며 투덜거렸다.

“뭐야? 당신들 왜 영어로만 말하는 거야? 지금 내 욕하는 거지?”

“뭐래?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지금 어딜 봐서 욕을 하는 것처럼 들린다는 거지?”

“지금 상항에서 그런 말을 하면 싸우자는 것밖에 안 되니까 저한테 맡기세요.”

발끈하는 김여울을 만류하며 안경옥에게 물었다.

“영어 조금도 할 줄 모르세요?”

“한국인이 한국어만 잘 쓰면 됐지. 코쟁이 말을 잘해서 어따 쓴다고?”

“우리가 어디를 간다고 생각합니까? 외국에 가서 외국인을 상대하는데 외국어를 전혀 못 한다고요? 제가 피디님께 듣기로는 적어도 영어는 가능한 출연자를 섭외한다고 들었는데요.”

“거 입 아프게 했던 말 또 하게 하지 맙시다.”

“말이 통하지 않는군요.”

민우는 곧장 휴대폰을 들었다.

-네, 민우 씨.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전화를 다 하셨어요?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혹시 오늘 모임에 오십니까?”

-모임이라뇨?

“주막 출연자들끼리 모여서 얼굴도 익힐 겸 술 한잔하는 자리입니다. 남 PD님은 안 오시나 보죠?”

PD라는 말에 안경옥의 얼굴에 불안감이 감돌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민우는 전화통화에만 열중했다.

-저는 금시초문이네요.

“그럼 PD님도 별일 없으면 이곳에 오시는 건 어떤가요? 장소는 문자로 보내드릴게요. 이야기는 그때 하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한잔할까 했는데 잘됐네요. 금방 가겠습니다.

안경옥은 입을 벌리고 민우를 바라봤다.

지금 시간에 PD를 오라 가라 할 수 있는 스타가 얼마나 되겠는가.

지금 상황과는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적어도 자신은 그럴 능력이 없는 쪽이다.

“저기···. 아까는 제가 말이 조금 심했던 거 같습니다.”

남세영에게 장소를 문자로 보내던 민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강한 사람 앞에서는 약해지는 이중적인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탓이다.

때맞춰 차규화가 선술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한소리 했을지도 모른다.

“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아무것도 아닙니다, 선배님. 민우 씨랑 조금 사소한 오해가 있었어요. 얼른 이쪽으로 앉으세요.”

안경옥이 재빨리 나서서 차규화를 상석으로 안내했다. 손을 들어 안경옥을 만류한 차규화가 민우를 바라봤다.

“뭔데? 강민우. 네가 말해봐.”

“곧 PD님도 오시기로 했으니까 그때 함께 말씀드릴게요.”

“뭔가 있긴 있구나?”

“출연진에게 문제가 조금 있는 거 같아서요.”

“그래? 이번 프로그램의 핵심 인물이 너니까 PD랑 잘 조율해봐. 그런데 문제 있는 출연자가 나는 아니지?”

차규화가 농담을 던지자 안경옥의 안색이 핼쑥해졌다.

이 프로그램의 제목은 주막이다. 주막의 주인이 누구겠는가? 바로 주모다.

프로그램의 기획 의도도 외국에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거다.

고로 잘 보여야 하는 대상은 주인공으로 예상되는 차규화쪽이 아니겠는가. 그랬기에 민우의 기를 꺾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강민우는 평범한 출연자가 아니었다.

남자들끼리 하는 흔한 기싸움 한번 걸었다가 되로 주고 말로 받게 생겼다.

그도 민우에 관한 소문은 들었다. 민우가 출연했던 예능들이 대체로 좋은 시청률을 기록했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그런 건 안경옥에게 고려 대상이 아니다.

드라마가 작가놀음이듯 예능은 PD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던 탓이다.

출연자는 그저 재료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소 생각했다. PD에게 잘 보여서 이때껏 살아남아 왔고, 이번에도 다름없을 것이라고 봤다.

입담은 자신 있으니까. 시청자를 빵빵 터트릴 수 있는 출연자를 어느 예능 PD가 싫어하겠는가.

첫 단추는 잘못 끼웠으나 아직 PD가 남아있다.

모든 결정권은 그가 가지고 있으니까 역전의 기회도 남았으리라 생각했다.

“영어를 못한다고요? 저한테는 할 줄 안다고 했잖아요. 저를 속인 겁니까, 안경옥 씨?”

“그게 그러니까···. 제가 잘은 못하지만 손짓 발짓을 곁들이면 어느 정도 의사소통은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걸 말이라고···. 죄송합니다, 민우 씨. 제가 좀 더 확실하게 알아보고 섭외를 해야 했는데 미흡했던 거 같습니다.”

이내 나타난 남세영의 태도는 안경옥을 충격에 빠트렸다.

안경옥에게 PD는 언제나 갑의 위치에 있었다. 갑이 을에게 사과하는 장면은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지 않은가.

민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외국어가 필수는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녹화를 하다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기 때문이죠. 당장 제가 아파서 자리를 비울 수도 있고. 안경옥 씨. 요리는 잘하십니까?”

안경옥은 아까와 달리 각이 잡힌 자세로 공손히 대답했다.

“제가 항상 집에서 만들어 먹는 편입니다.”

“대답을 이상하게 하시네요. 저는 요리를 잘하느냐, 못하느냐를 물어본 건데요.”

“잘 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저는 주방 보조라고 들었는데요. 주방 보조를 할 정도는 됩니다.”

남세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 저한테 했던 말과 지금 대답이 다른 겁니까? 저한테 요리는 자신 있다고 했잖습니까?”

안경옥은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캐스팅되려면 무슨 말을 못 하겠나.

일단 녹화를 시작하기 전에 학원도 다니면서 속성으로 요리를 배우면 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지금 학원에 다니고 있으며, 주방 보조의 포지션이니까 시키는 것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고.

“외국어도 못해, 요리도 못해. 제가 안경옥 씨를 섭외해야 하는 이유를 말씀해보세요.”

“그야 당연히 예능의 재미를 위해서 저 같은 사람이 꼭 필요하리라고 생각···.”

“우리 프로가 농담이나 하면서 웃음을 유발하는 거로 생각했습니까?”

‘주막’은 외국인에게 ‘Do You Know’ 하는 게 포인트다. 모른다고 하면 알려주는 것도 있고.

“내가 내 프로에 손수 똥칠을 할뻔했군요. 내일 오전 중으로 매니저 오라고 전하세요.”

남세영의 선언에 안경옥이 펄쩍 뛰었다.

이번 프로는 예능국장이 관심을 가진다고 들었다. 실제로도 그러했고. 국장은 PD보다 위다. 그에게 잘 보이면 철밥통을 차게 될지도 모른다.

연예계 생활이 잘 풀리냐 마느냐가 걸렸다고 생각했기에 사활을 걸었는데 모든 것이 수포가 될 위기에 처했다.

“피디님. 제가 최선을 다할 테니까 기회를 주십시오. 저 요리 학원도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 결정은 변함없습니다. 그리고 안경옥 씨가 저를 속였던 거니까 계약 해지에 따른 위약금은 오히려 제가 받아야 한다는 데 동의하시죠?”

안경옥은 참담한 표정으로 어금니를 깨물었다.

편협한 사고방식을 가진 그였기에 민우를 원망했다.

배우상이 아니라고 한마디 했다고 PD까지 불러서 계약을 취소시키다니.

정작 민우는 그런 의도로 PD에게 말을 꺼낸 건 아니었는데.

자신을 비난하거나 비하하는 거?

그런 헛소리에 흔들릴 정도로 정신수양이 낮은 민우가 아니다.

그러나 영어와 요리를 못하는 건 문제가 있지 않은가. 이번 프로그램의 기본이기도 하고.

기본이 안 된 출연자와 함께 외국에 가봤자 고생만 하게 된다.

“더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남세영의 축객령에 안경옥은 입술을 깨물며 선술집을 떠났다.

“제가 좀 더 알아봤어야 했는데. 거듭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괜한 분란을 일으킨 것 같군요.”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미리 알게 돼서 다행이죠. 녹화 들어갔는데 못한다고 해보세요. 끔찍합니다.”

김여울과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던 차규화가 물었다.

“그럼 자리 하나가 남는 거지?”

“네, 그렇습니다.”

“그럼 내가 한 명 추천해도 될까? 외국어도 가능하고 혼자 살아서 요리도 잘해. 한식, 양식이 전문이고.”

“그런 인재라면 저도 환영입니다.”

민우는 차규화가 추천하려고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대충 예상이 됐다.

“강필 형님이신가요?”

“독거노인 구제는 해줘야지. 나 아니면 집에서 방바닥만 긁고 있을 텐데.”

허강필은 40년 차 배우지만, 그의 공중파 데뷔 자체가 10살 때라서 이제 쉰을 조금 넘긴 나이다. 차규화와 몇 살 차이 나지도 않고.

민우가 볼 때 차규화가 허강필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은데, 아내를 사별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허강필이 그녀를 외면하는 중이다.

“형님이라면 저도 환영입니다.”

남세영이 눈을 굴리다 물었다.

“혹시 그분이 허강필 선생님인가요?”

“맞습니다.”

“허강필 선생님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오케이죠! 근데 선생님께서 예능도 출연하십니까? 한반도 출연하지 않은 거로 아는데요.”

“이제 노후준비도 해야 하는데 찬밥 더운밥 가릴 때야? 기력 있을 때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지.”

그녀의 말과 달리 허강필은 이미 건물주다. 차규화 그녀도 마찬가지고.

둘 다 물려줄 자식도 없으니 노후준비를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데 익살스럽게 농담을 하는 중이다.

“남 PD가 찬성한다니까 여기로 나오라고 해야겠다.”

냉큼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다.

차규화가 술 마시자고 하니까 거절하더니 민우도 있다는 말에 냉큼 나왔다.

허강필을 문 앞에서 반긴 차규화가 눈을 흘겼다.

“알고 지낸 건 내가 훨씬 긴데 나보다 민우가 좋다 이거지?”

“너도 오스카상 받고 와. 그럼 반겨줄게.”

“그 상 쟤가 직접 받은 거 아니거든?”

“상을 누가 받느냐가 중요한가? 상에 누구 이름이 적혀있는지가 중요하지.”

“흥!”

삐진 차규화가 고개를 홱 돌리자 허강필이 털털하게 웃고는 남세영을 바라봤다.

“그런데 이 분은 처음 뵙는 것 같은데.”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인사가 늦었습니다. 남세영이라고 합니다. 피디고요.”

“아, 그래요. 반가워요. 그런데···.”

룸에 모인 인원 구성이 이해하기 힘들다.

피디에 배우에 아이돌까지.

고개를 갸웃한 허강필은 곧 무언가를 깨닫고는 자신의 무릎을 철썩 내려쳤다.

“저를 섭외하려고 부른 거군요?”

“그렇습니다. 괜찮으시면 출연해주시겠습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이 출연자죠?”

“그렇습니다.”

“그럼 출연하죠.”

“어떤 프로그램인지 확인하시지도 않고요?”

“규화랑 민우가 고른 프로그램이라면 적어도 이상한 건 아니겠죠. 그리고 얘들이 이상한 걸 추천할 리도 없고.”

왠지 모르게 끈끈함이 느껴지는 말이다.

남세영은 안경옥을 보내고 허강필을 받아들이는데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적어도 출연자끼리 케미가 좋아서 나쁠 일은 없으니까.

게다가 예능에 단 한 번도 출연하지 않은 허강필의 화제성까지 등에 업는다면 시청률도 잘 나올 거다.

왠지 느낌이 좋았기에 양손을 꾹 쥐며 끓어오르는 희열을 애써 참아냈다.

출연자가 확정되자 본격적으로 준비를 시작했다.

우선 요리. 민우는 허강필과 함께 메뉴를 선정하고 연습하며 손을 맞춰갔다.

차규화와 김여울도 손님 응대에 관한 교육을 받았고.

준비를 위해 구슬땀을 흘리며 시간을 보내던 와중.

벨기에에서 주막이 완성됐다는 연락이 왔다.

준비를 마친 촬영팀이 먼저 벨기에로 넘어갔다.

현지에서 촬영 준비가 끝나자 출연자도 공항으로 향했다.

과연 외국인이 한식을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비행기에 오른 민우는 현지에서 하게 될 음식점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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