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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판정승 (93/223)

가벼운 판정승

중요한 조연은 연기파 배우로 캐스팅을 했고, 신선한 마스크가 필요한 단역은 오디션에서 뽑았다.

민우는 대본을 이유로 심사위원에 참가하지 않았다.

‘산속 생활’로 인지도를 쌓았던 남유태도 이번에 합류하게 됐다.

끼워 넣기로 논란이 생길까 봐 서류접수를 할 때 소속사도 적지 않았음에도 용케 합격한 것이다.

“형. 대사 한 번만 봐주세요.”

최종 합격한 이후 대본을 들고 따라다녀서 귀찮을 지경이었다.

딴에는 열심히 해보려는 게 기특하지 않은가. 귀찮아 하면서도 매번 남유태의 연기를 봐주는 민우였다.

“해봐.”

헛기침과 함께 목을 푼 남유태가 자신의 대사를 읊었다.

“대표님! 얼른 나와 보세요. 급해요!”

양손을 휘적거리며 다급한 표정도 지었다. 연기는 나쁘지 않았다. 다만 개성이 너무 부족할 뿐.

대본을 통째로 외우는 민우다. 대사만 들어도 장면이 떠올랐다.

“캐릭터의 성격은 어떻게 잡았어?”

“좀 호들갑스럽게요. 대사도 그렇고 좀 가벼운 성격 같더라고요.”

선택을 잘 한 것 같다. 60분짜리 드라마에서 많아야 두어 번 등장하는데 평범한 연기를 해서는 눈길을 끌 수 없다.

“동작만 호들갑스러워서는 안 돼. 행동과 대사가 일치해야지.”

“그럼 대사 톤을 더 올려야 할까요?”

“아니. 대사를 바꿔야지.”

“네? 제 마음대로 바꿔도 되나요?”

의외의 대답에 남유태가 화들짝 놀랐다.

민우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사를 네 마음대로 바꾸라는 게 아니라, 상황에 맞게 바꾸라는 뜻이지. 시범을 보여줄게.”

그러고는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대표님, 대표님, 대표님! 얼른 나와 보세요. 급해요, 급해!”

연속으로 대표님을 부를 때는 양손을 파닥거리며 빠르게 대사를 쳤다.

남유태는 입을 쩍 벌렸다. 그저 대사를 반복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그리던 캐릭터를 순식간에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 정도는 작가와 감독도 허용하니까 캐릭터 연구를 해봐. 캐릭터에 몰입할수록 상황에 맞는 대사가 저절로 튀어나올 거야.”

“감사합니다!”

민우는 남유태의 상대역을 자처해서 합을 맞춰주었다.

시간은 흘러, 프리프로덕션을 거친 ‘내일도 오늘’은 대본리딩과 제작발표회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촬영 현장에 나온 임세희의 매니저 최경수가 툴툴거렸다.

“출연진이 자꾸만 걸리네. 주인공들 커리어가 영···.”

“오빠. 자꾸 이상한 소리 할 거면 집에 가. 겨우 상대역이라도 맡게 됐는데 초치지 말고.”

“여배우 혼자 놔두고 가는 매니저가 어딨어? 그리고 겨우 라니? 상대역을 맡기로 했던 배우가 맹장이 터지는 바람에 감독이 우리한테 부탁 한 건데.”

“그걸 믿으라고? 오빠가 오 피디님한테 질척거렸다는 거 이미 소문도 다 났는데. 내가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

최경수는 극성스러운 매니저로 유명하며, 담당 연예인을 자신의 계획대로 케어 해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다.

작품 보는 안목은 좋아서 담당 연예인을 스타로 만들어내지 못했다면 이미 매장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도.

최근에 담당하게 된 임세희도 자신의 스타일대로 케어 하려고 했으나 자꾸만 엇나가는 통에 눈살을 찌푸리는 중이다.

“나를 위해서 그런 거야? 다 너를 위해서 내가 두 눈 딱 감고 매달린 거잖아. 덕분에 봐라. 올 기대작중 하나에 떡하니 주조연이라도 캐스팅됐잖아. 내가 뒷짐 지고 있었어 봐. 이런 자리가 생겼을 거 같아?”

사실 그가 아니라 윤인화의 강력한 요청에 임세희가 캐스팅된 거지만.

둘 다 자세한 내막을 몰랐기에 이렇게 자랑을 할 수 있는 거다.

한숨을 내쉰 그녀는 대본으로 눈을 돌렸다.

임세희는 무명이 길었다. 단역부터 차근차근 밟고 올라가 조연으로 인지도를 쌓고, 주연을 맡은 영화와 드라마가 히트하면서 몸값도 크게 올랐다.

무명일 때 소속사는 그녀에게 신경을 써주지 않았다.

차량 지원은 꿈도 꿀 수 없어서 오디션을 볼 때면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가서 봐야했다.

수중에 돈이 없어서 굶는 날도 허다했다.

그녀가 제대로 된 지원을 받게 된 것은 처음으로 조연 자리를 따냈을 때였다.

방치하고 있던 소속사는 돈이 될 낌새가 보이자 은근슬쩍 지원을 해주기 시작했고, 재계약을 앞두고 결실을 보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임세희가 소속사와 재계약을 하고 싶겠나?

당연히 재계약을 거부했더니 이를 괘씸하게 여긴 소속사는 남은 기간 CF만 뺑뺑이 돌려버렸다.

그게 무려 3년이다.

물론 임세희도 CF로 큰돈을 벌었지만 그녀는 연기가 하고 싶었다.

지금 몸담게 된 소속사 ‘한 엔터’와 계약할 때도 자신의 작품 활동을 우선한다는 조항을 넣을 정도였다.

“내 복귀작은 반드시 성공시키고 말겠어.”

대본을 외우는 그녀의 눈빛이 새파랗게 빛났다.

그 눈빛은 그녀가 물로 배를 채우며 단역 오디션을 보러 다니던 때와 흡사했다.

* * *

설연주는 발레 유망주였다.

그녀의 꿈은 ‘키예프 국립 발레단’에 들어가는 거였지만, 발목을 다치는 바람에 꿈을 접어야 했다.

그녀가 부상 소식에 먹을 거 아끼고, 입고 싶은 옷도 사지 않으며 뒷바라지했던 홀어머니는 긴장이 풀리면서 쓰러졌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건강을 되찾아 재활 중이고.

소녀 가장이 되어버린 그녀는 돈을 벌어야 했다.

발레만 하느라 공부도 뒤처졌으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르바이트가 고작이었다.

낮에는 커피숍, 밤에는 편의점에서 일하면서 돈을 벌어야 겨우 병원비와 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우연히 커피숍에서 그녀를 발견한 지금의 매니저가 아니었다면 아직도 고생하면서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해보지도 않은 연기를 해야 한다는 것에 걱정도 많이 했다.

그러나 발레도 연기력이 필요하다. 천만다행으로 거기서 갈고닦은 연기력이 드라마로까지 이어졌다.

단역에서 조연까지 빠르게 올라설 수 있었으나 주연을 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번 드라마도 여배우들이 고사하면서 자리가 나지 않았다면 그녀가 주연을 맡게 되는 일은 없었을 거다.

설연주의 매니저 박성수가 수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연주야. 상대역에 임세희가 캐스팅됐단다.”

연예계에 무지했던 그녀는 경력이 쌓이며 눈과 귀가 트였다. 이제는 이름만 들어도 대충 프로필을 읊을 정도는 된다.

“너 여배우 기싸움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 여주는 초짜인데 톱스타가 주조연이다. 모르긴 몰라도 각오 단단히 해야 할 거야. 절대 밀리면 안 돼.”

사람들은 연예계의 뒷모습을 알지 못하니 동경만 한다. 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로 밟고 올라가기 위해 아등바등하며 치사한 짓도 서슴없이 저지른다.

특히 여배우는 드레스 신경전이 대단하다.

아역도 아역끼리 경쟁을 하는데, 의상 협찬이 겹치면 더 예쁜 옷을 입으려고 다투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의상 톤이 겹칠 경우 먼저 찍는 배우에 맞춰 다른 배우가 의상변경을 한다. 그러나 거의 후배가 양보하는 편.

시상식 의상도 몇 달 전부터 유명한 스타일리스트를 찾아가 섭외를 하고.

의상이야 그러려니 한다. 화면에서 바로 눈에 띄니까. 그러나 반사판 가지고 기싸움을 할 때도 많다.

혹시라도 누구에게는 반사판을 비춰주고, 누구에게는 안 비춰주면 비교당하는 기분이 들고 빈정 상한다.

심지어 엔딩 크래딧에 먼저 이름이 올라가는 거로 기싸움을 할 때도 있으니.

이게 모두 한정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다. 여기에서 밀리면 꼭대기를 차지할 수 없다.

꼭대기가 모든 것을 차지하니까 어떻게 해서든 기어 올라가야한다.

설연주가 배우 생활을 시작하면서 항상 듣던 말이 있다.

‘조연 여배우는 주연 여배우 보다 돋보이면 안 된다. 의상도 수수한 것으로 입어라. 화장도 대충 해라.’

이제는 자신이 주연이다. 갑질을 당했던 만큼 되돌려줄 생각은 없지만, 당하고만 있을 생각도 없다.

“기싸움을 걸어오면 피하지 않을 거야. 병원비도 필요하고, 고생한 우리 엄마 좋은 집에서 살게 해드려야 해. 이번 드라마에서 절대로 밀리지 않겠어.”

발레 공연의 주인공을 맡기 위한 경쟁도 치열하다. 힘든 경쟁도 버텨냈던 그녀다. 호락호락 져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번 드라마의 연기에 혼신의 힘을 다 할 생각이다.

설연주의 눈빛이 새파랗게 빛났다.

* * *

언제나 촬영장에 가장 먼저 오는 민우다.

엑스트라 생활을 할 때부터 몸에 배었던 습관인데, 이제는 이른 시간 촬영장에 나와 대사를 곱씹는 것이 루틴처럼 되어버렸다.

촬영을 위해 바쁜 스태프와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대기실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은 각 주요 배역의 스토리를 촬영한다. 민우의 분량은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사용할 장면.

우선 시나리오를 보며 설정을 머리에 새겨 넣었다.

자신이 겪은 상황과 다른 점이 두 가지 있다.

첫 번째. 새벽 12시가 되기 전에만 하루를 되돌릴 수 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아님에도 왠지 모르게 감정이입이 됐다.

매주 토요일을 반복해서 복권에 당첨돼도 돈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 얼마나 좋은 설정인가. 하루가 강제로 반복되는 게 아니라 선택할 수 있다니.

실제로 남자주인공 원호도 복권과 코인, 주식을 이용해서 부자가 됐고.

두 번째. 하루를 되돌리면 시간이 초기화되는 것이 아니라 육체가 하루 전으로 돌아간다.

상처를 입으면 그대로 가지고 돌아간다. 만약 죽으면 거기서 끝이다.

이 설정은 좀 안 좋다.

상처는 둘째 치더라도 하루를 되돌리면 다른 사람과 달리 하루를 더 사는 거니까.

모두 합쳐서 1년을 되돌리면 자신만 2살을 먹는 거다.

덕분에 드라마의 설정상 원호의 나이는 20대 후반이지만, 외모는 30대 초반으로 보인다.

민우는 전정희에게 이번 드라마의 컨셉을 설명해줬다.

“메이크업은 의상이나 헤어는 20대인데, 얼굴은 좀 삭아 보이게 해줘.”

“오빠. 요즘 TV는 배우들 땀구멍까지 다 보여요. 조금이라도 더 어려 보이게 하지는 못할망정 나이가 들어 보이게 하라뇨?”

“어쩔 수 없어. 캐릭터 설정이 그런걸 어떡해?”

작품에 한해서는 자신의 고집을 절대로 꺾지 않는 민우다. 그걸 알기 때문에 전정희도 투덜거리며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고.

“최대한 클로즈업은 피해달라고 하세요. 가까이서 보면 화장인 거 다 티 나니까.”

“그래, 고맙다.”

그가 준비를 마치고 촬영장으로 나왔더니, 오늘 촬영이 있는 배우가 모두 도착해있었다.

조단역과 주요배역을 맡게 된 설연주와 임세희, 그리고 남자 주조연 배인태까지.

짐승남이라는 별명을 가진 배인태는 헬스로 다져진 탄탄한 몸매의 소유자다.

대한민국의 많은 남자들이 배인태의 몸매를 워너비로 꼽는다. 그와는 대본리딩 장에서는 스치듯 인사한 것이 전부였다.

민우가 자신의 지정석에 앉아 대본을 펼쳤다.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최종점검을 하기 위함이다.

배인태가 그런 민우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그의 인사에 엉거주춤 일어나 답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지.”

남자 배우의 기싸움 중 가장 대표적인 게 바로 나이로 찍어 누르려고 하는 거다.

배인태의 의도가 훤하게 보여서 민우는 피식 웃었다.

“제 이름 검색해보면 프로필에 나와 있어요.”

“그거야 알죠. 근데 프로필 나이는 다들 조금씩 속이니까 믿을 수가 있어야죠. 키도 그렇고.”

그러면서 슬쩍 민우의 머리 쪽을 바라봤다.

이 정도는 애교 축에도 못 낀다. 민우가 주연을 맡은 건 이제 고작 두 번째지만 촬영장에서 산 세월만 10년이 넘는다.

온갖 인간군상을 봤는데 이런 애송이쯤이야.

“저는 프로필과 같습니다. 올해 서른.”

“빠른년생?”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제가 빠른이라 서른한 살이랑 친구거든요.”

“그런데요?”

“괜히 나중에 족보 꼬일 수도 있으니 미리 정리해두자는 뜻이죠.”

배인태가 뿌듯한 표정을 짓자,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씀이네요. 그럼 저도 배인태 씨 친구분이랑 친구 하면 되겠군요. 그럼 정리 됐죠?”

혹 떼려다 도로 붙이게 생긴 배인태가 두 눈을 끔벅거렸다.

“그리고 키는···.”

민우가 허리를 펴고 섰다.

순식간에 배인태와 눈높이가 달라졌다.

“제가 더 큰 것 같습니다.”

배인태의 얼굴이 똥 씹은 것처럼 떨떠름해졌다.

첫 대결은 가벼운 민우의 판정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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