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도 오늘
의도하지 않았는데 마지막 등장은 민우였다.
“역시 주인공의 자질을 타고났어.”
어쩐 일인지 이석하가 먼저 와있었다.
대충 예상은 된다. 요즘 엘리에게 공을 들이고 있었으니까.
정작 엘리는 그리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밀어내지도 당기지도 않는 애매함이 느껴졌다.
민우가 계속 거절당하는 이석하를 놀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백번 찍으면 된다.”
“백번 찍어도 안 되면요?”
“천 번 찍으면 되지.”
실로 대담한 계획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면 스토커 아닙니까?”
“당연히 들이대지 말라고 진심으로 말해주면 포기해야지. 여지를 남겨주니까 도전하는 거야.”
그러고 보니 이석하가 부담스러웠다면 회식 자리도 거절했을 거다.
‘설마? 에이, 설마.’
내심 고개를 저으며 이석하를 외면하고는 고깃집을 둘러봤다.
디커슨이나 엘리를 비롯한 연예인들은 스태프에게 사인을 하느라 바빠 보였다.
민우를 발견한 탁광준이 손을 흔들었다.
“할리우드 스타분도 사인해주셔야죠!”
피식 웃은 민우도 사인대열에 참가해야 했다.
디커슨이나 엘리는 처음 겪는 회식문화에 감동한 눈치다.
외국인이라면 싫어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삼겹살에 불고기를 메인 메뉴로, 소주와 맥주에 와인까지.
그간 민우 덕분에 한식에 익숙해진 둘은 소맥을 만들어 마시며 회식 자리에 녹아들었다.
“가끔 오늘이 그리울 거야.”
입가심을 한다며 와인 잔을 든 디커슨의 감상이었다.
그는 방송에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는 사람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엘리는 이석하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조만간 둘이 열애설이 터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배가 살살 아파졌다.
“사인하느라 힘들지는 않았어?”
“전혀. 이럴 줄 알았으면 한국어를 연습해둘걸. 왠지 한국이랑 나랑 잘 맞는 거 같은데. 음식이 맞으면 생활하는데 지장이 없다잖아. 한식도 많이 좋아졌고.”
“다 떠나서 수입에서 차이가 크게 날걸?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돈은 이미 많아.”
왠지 디커슨이 이렇게 센치해진 이유를 알 것 같다. 그의 경쟁자인 앤드류 때문이겠지.
친구의 상처는 들쑤시는 게 아니므로 침묵으로 배려했다.
한동안 와인만 마시던 디커슨이 물었다.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다시 미국?”
“글쎄. 굳이 따지자면 당분간 한국에서 작품을 할 것 같아.”
“왜? 할리우드에서 상도 탔잖아. 이제 작품도 많이 들어올 건데.”
“그렇긴 하지만 나도 나름의 목표가 있어서.”
할리우드는 다시 조연 롤을 맡아야 하겠지만 한국에서는 다르다. 미국을 경유한 덕분에 인지도가 과거와 몰라볼 정도로 달라졌다.
홍경섭에게 듣기로 사무실에 쌓여가는 대본이 상상 초월이라고. 그것도 주연으로만.
사무실 인원이 모두 달려들어 제목과 주제, 소제를 정리하는 중이라고 들었다.
디커슨이 와인 잔을 내밀며 물었다.
“또 볼 수 있겠지?”
그의 잔에 컵을 부딪치며 답했다.
“언젠가는. 그리 멀지 않을 수도 있고.”
방송이 끝나자 최경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단체 사진 찍읍시다!”
* * *
회식이 끝나고 디커슨과 엘리는 미국으로 떠났다.
비교적 멀쩡했던 엘리는 회식 다음 날 떠났고, 과음한 디커슨은 술병이 제대로 나는 바람에 며칠 더 한국에 머물러야 했다.
다음에 미국에 가면 신세를 갚는다는 말을 남기고 식충이 둘을 방생시켰다.
콘서트 방송은 최고 시청률이 무려 30%까지 올랐다.
대체 무슨 콘서트기에 오스카 시상식마저 포기했나. 시청자의 궁금증이 폭발했기 때문이라나.
기자회견에서 오스카 시상식의 대리 수상에 관한 이야기도 풀었다.
덕분에 경쟁자인 ‘컴백 싱어’를 압도적인 성적으로 따돌리고 올해 최고의 예능 자리를 차지했다.
콘서트를 끝으로 ‘라찬 밴드’는 에필로그 작업에 들어갔다.
녹화의 마지막 인터뷰는 주인공 격인 민우였다.
최경륜이 민우를 은인처럼 보며 물었다.
“장기 프로젝트가 끝났는데 기분이 어떠신가요?”
사실 은인이지. 그가 아니었다면 프로그램을 시작도 하지 못했을 테니.
민우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작품을 끝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시원섭섭합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요?”
“처음으로 합주를 성공시켰을 때가 아닐까 싶네요. 뭔가 마음이 하나로 모였던 기분이랄까.”
“인상적이군요.”
“어떤 부분에서요?”
“다른 멤버 모두가 그 장면을 꼽았거든요. 감상도 비슷하고. 확실히 마음이 하나로 모였나 봅니다. 이런 걸 두고 이심전심이라죠.”
자신도 모르게 픽, 하고 웃음이 나왔다.
“이제 마지막 인터뷰인데 하고 싶은 말씀이라도 있나요?”
“힘들어도 꿋꿋이 따라와 준 멤버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모자란 실력임에도 끝까지 응원해준 팬분들 덕분에 마지막까지 힘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가 마무리되자 최경륜을 비롯한 스태프 모두가 손뼉을 쳤다.
“수고하셨습니다.”
“피디님도 고생하셨습니다.”
“이건 개인적인 질문인데 앞으로의 일정은 어떻게 되시나요?”
“작품 준비해야죠.”
“다음 작품은 정해졌나요? 아니라면 저랑 예능 하나 더 하는 건 어떠신지···.”
“좋은 작품이라면 생각해보겠습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으니까요. 우선 회사에서 만들어주는 리스트를 보고 결정할 겁니다.”
이제 아이디어를 모으는 단계인데 민우를 잡아 둘 수 없다. 이미 미팅 한번 하려고 피디들이 줄을 섰다고 들었으니.
깔끔하게 포기한 최경륜은 민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민우씨 덕분에 입봉도 할 수 있었네요. 시청률도 잘 나왔고요.”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앞으로도 승승장구하시길 바랄게요.”
민우가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피디님도요.”
* * *
민우는 섬에 들어가서 며칠간 놀고먹었다.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만들고 수영도 하고. 그간 뜸했던 유티비 채널에 동영상도 업로드했다.
해가 지면 홍경섭이 가져다준 시나리오를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눈에 들어오는 작품은 있어?”
부모님이 하는 슈퍼에서 먹을거리를 잔뜩 챙겨온 홍경섭이 물었다.
“하나 눈에 들어오는 게 있긴 해. 근데 이게 미국 가기 전에도 시나리오가 돌던 건데 아직도 제작하지 못했나?”
“뭔데?”
“내일도 오늘.”
“잠깐만.”
홍경섭이 휴대폰을 조작했다.
“타임 패러독스네?”
“맞아. 따져보자면 타임 루프지.”
이 작품에 한해서는 민우보다 더 연기를 잘 할 수 있는 배우는 없을 것이다. 이미 자신은 겪었던 일이니까.
사실 혼자서 하는 예능도 고사했던 민우다. 그런데 이번 ‘라찬 밴드’에서 자신이 작곡한 곡을 들었을 때 울컥했던 걸 떠올렸다.
어쩌면 다음에도 똑같은 일을 겪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 드라마를 계기로 극복할 마음을 품은 거다.
고개를 갸웃한 홍경섭은 떨떠름한 얼굴이다.
“최근 타임 패러독스의 성적이 전부 시원찮아서 외면받은 것 같아. 스타 작가도 흥행시키지 못했던 장르인데 전작이 망한 작가의 작품이라 더 그런 거 같고.”
“전작이 망했어?”
“응. 시청률은 지상파에서 2.3%쯤 나왔네. 지상파에서 이 정도면 거의 전파 낭비 수준인데···.”
말꼬리를 흐리던 그가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많이 생각해 보고 결정한 거지?”
“내 성장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작품 같아서.”
“오케이. 우선 연락부터 해볼게. 네가 출연하겠다고 하면 아마도 쌍수를 들고 환영할 거다.”
홍경섭이 휴대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내일도 오늘’은 윤인하라는 작가의 작품이다.
서른이 넘어 드라마 작가에 뛰어든 그녀는 보조 작가 노릇을 10년 가까이 겪은 후, ‘피날레’라는 작품으로 가까스로 입봉을 했다.
홍경섭이 미팅 약속을 잡는 동안 민우는 망했다는 전작을 검색해봤다.
“과도한 PPL 때문에 시청자가 떠났다···.”
보통 모자란 제작비를 보충하기 위해 PPL을 받는다. 제작비가 모자란 가장 큰 이유는 출연료고.
주연배우의 이름을 보니 곧바로 떠오를 정도의 톱스타도 아니다.
여주에 예시안, 남주는 서정태.
이름을 검색해보니 둘은 아이돌 출신이었다. 피날레에서 처음으로 주연을 맡았고.
“아이돌 연습생들의 이야기라서 아이돌 출신을 선택했던 건가.”
시도는 참신했지만 극을 이끌어 가는 주인공은 흥행력이 검증된 배우로 캐스팅해야 한다. 그래야 시청자를 끌어모을 수 있고.
최근 드라마는 1, 2회를 놓치면 따라붙기 힘들다. 괜히 몸값 비싼 배우를 쓰는 게 아니다.
그런 배우들은 연기력이 검증되기도 했고. 드라마를 보며 손발 오그라드는 연기를 보고 싶은 시청자는 없지 않은가.
1, 2회에서 시청자의 이목을 끌었다면 쭉 따라가는 경향이 없지 않다.
“PD도 입봉이었네.”
첫 주연인 배우들에게 초짜 작가와 PD를 끼얹었다.
‘언더커버 파티쉐’ 때와 흡사한 상황이라 남 일 같지 않다. 다행히 자신은 잘 풀렸지만, 주연 둘의 근황은 걱정될 정도.
“에이, 연예인 걱정 하는 거 아니지.”
고개를 저으며 잡념을 떨쳐냈다.
사실 시청률이 낮다고 해서 돈을 못 버는 건 아니다. 다시 보기를 비롯해서 2차 판권도 판매할 수 있으니까.
아마도 방송국 입장에서는 신인으로 구성된 드라마라 시청률이 낮은 걸 보고 PPL을 때려 박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통화를 마친 홍경섭이 다이어리를 펼쳤다.
“모레 오후 1시. 점심 같이 먹기로 했어.”
“그럼 그동안 드라마라도 봐둬야겠네.”
“그래라. 나는 모레 선착장으로 너 마중 나갈 테니까.”
“섬에서 나가려고?”
“너도 내가 붙어서 케어 하면 귀찮잖아. 이달 말에 소속사 오디션도 해야 하고 일이 많다.”
“수고가 많네, 홍 대표.”
“대주주께 잘 보여얍죠. 녜녜.”
내시처럼 손바닥을 비비던 홍경섭이 피식 웃었다.
“몸 관리 잘하고. 간다.”
홍경섭을 배웅하고 태블릿PC를 손에 쥐었다.
엔플릭스에 접속해서 ‘피날레’를 결제했다.
드라마는 나쁘지 않았다. 취향을 많이 타는 하이틴 장르라서 뜨지 못했을 확률도 높아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주연배우의 연기도 탄탄하다.
“요즘 아이돌은 만능엔터테인먼트라더니 대단하네.”
서사의 흐름도 나쁘지 않지만 툭하면 맥을 끊는 PPL이 심하게 거슬린다.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은 연습실을 돌아다니는 로봇 청소기를 5초간 잡아 주는 거였다.
로봇청소기가 청소를 잘한다며 칭찬하는 대사도 압권이었고.
PPL이 무슨 뜻인가. 간접광고다. 노출 방법에 따라 좋은 광고가 될 수도 있는데 저건 선을 넘었다.
“PD가 문제인거야 작가가 문제인거야?”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민우는 계속해서 드라마를 감상했다.
* * *
미팅 자리에 나온 윤인하는 커리어 우먼을 연상케 했다.
깐깐해 보이는 인상이 흠이었지만, 그녀가 입을 열자 차도녀 같았던 첫인상은 산산이 부서졌다.
“강민우 씨 정말 팬이에요! 미팅 약속을 잡고 기대감 때문에 밤잠을 설쳤지 뭐예요?”
굳어 있던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환한 웃음이 인상적이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정말 제 작품에 출연하고 싶으신 거 맞죠? 거짓말 아니죠?”
“시나리오는 재미있게 봤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되나요?”
윤인하가 수심 가득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감정의 변화가 얼마나 빠른지 따라가기 힘들 정도.
“제가 맞춰볼까요?”
“퀴즈는 아니었는데요.”
“피날레의 PPL은 누구 아이디어인가요? 이게 질문 같은데, 맞나요?”
뜨끔한 민우의 표정을 보며 윤인하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그 질문만 벌써 백번은 받아본 것 같아요.”
“제가 실례했네요. 죄송합니다.”
“아뇨, 아뇨. 민우 씨가 사과할 건 아니죠. 제가 질문을 맞춘 거니까.”
그러면서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이제 그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하자면, PPL에 관한 것은 모두 제가 썼어요. 5회부터는 대놓고 써야 했죠.”
기억을 떠올려보니 그런 것 같다. 4회까지는 노골적이지는 않았으니까.
“4회까지 시청률이 반등하지 못하니까 피디님이 압박을 주시더라고요. 방송사에서 PPL이라도 넣으라고 한다나.”
역시나 민우의 예상대로다.
방송사도 땅 파서 장사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드라마 앞뒤로 붙는 광고에서 돈을 벌지 못하면 다른 쪽에서라도 보충해야지.
“갑자기 PPL을 가져와서 끼워 넣으라는데 어떻게 해요? 보조 작가들이랑 머리를 쥐어짜다가 급하게 넣어버렸죠. 그 대표적인 게 로봇청소기였고.”
어디를 가던 돈이 문제 같다.
작가가 생각 없이 PPL을 받은 건 아닌 것 같다.
가장 큰 걱정거리도 해소됐으니 결심을 굳혔다. 고개를 끄덕인 민우는 윤인하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일도 오늘. 출연하겠습니다.”
“물론 그래야죠! 내가 오스카 남우조연상 수상자와 함께 작업을 하게 되다니.”
과하게 감격스러워하는 윤인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선택 잘못한 거 아니야?’
민우는 고개를 휘저어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냈다.
그녀의 수다스러운 성격과 달리 시나리오는 재미있었으니까.
만약 대본이 이상하다면?
드라마는 작가놀음이라고 하는데, 그 말이 쏙 들어가게 만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