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자작곡 (79/223)

자작곡

‘리벤져 온 힘’은 미국에서 고작 30개의 개봉관을 확보했다.

아무리 흥행력이 있는 배우가 주연이라고는 하지만, 중요한 조연이 할리우드에서 처음 보는 동양인 배우였기 때문.

제작사에서 온 힘을 다해 개봉관을 확보해보려고 했으나, 경쟁작들도 쟁쟁해서 밀리고 말았다.

반면, 한국에서는 상항이 달랐다.

멀티플렉스를 보유한 회사의 대표, 차원일은 영화의 판권을 사들였다.

중국인 배역 논란에 덩달아 욕을 먹을 우려도 있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영화를 개봉하자마자 마케팅을 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예고편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더니 영화가 개봉하자 관람객이 몰려들었다.

<욕하려고 봤는데 2시간이 훌쩍 사라짐.>

<보고 욕하라고 한 놈. 고맙다. 올해 최고의 영화였다.>

<잘 만든 액션 영화. 강민우의 화려하고 시원한 액션이 눈요기 제대로 시켜준다.>

<강민우의 내면 연기도 일품.>

<배우와 같이 울고, 분노하고, 웃다 보니 영화가 끝났더라.>

한 줄 평을 훑어보던 차원일이 왕 비서의 보고에 귀를 기울였다.

“첫날 개봉성적은 10만. 일주일 만에 100만을 넘겼습니다. 꾸준히 관람객도 늘고 있습니다.”

입소문이 이래서 무섭다.

처음에야 어떤 배역을 맡았는지 확인이나 해보자는 생각이었다면, 지금은 강민우의 액션을 보러 간다.

“예능은 어때?”

“다음 주 첫 방송입니다. 아마도 영화와 서로 시너지를 일으킬 것으로 예상합니다.”

“계획대로네. 알았어, 나가봐.”

고개를 끄덕인 차원일이 비서를 내보냈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들고 문자 하나를 보냈다.

-약속 지켜라.

문자를 보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답장이 왔다.

-땡큐! 원하는 모델 적어서 보내. 뭐든지 쏜다!

휴대폰을 확인한 차원일이 피식 웃었다.

사회생활을 얼마 하지 않은 티가 난다. ‘아무거나’라는 단어가 얼마나 무서운지 오빠로서 알려줄 생각이다.

-페라리 라페라리.

한화로 대략 14억 정도 하니까 가격을 확인하자마자 화를 내겠지.

원래 비는 피하고 보는 법이다. 문자를 보낸 다음 휴대폰을 꺼버렸다. 어차피 중요한 일정은 비서가 알려줄 테니까.

창밖을 내다본 차원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알아본 강민우라는 사람은 굳이 도와주지 않아도 알아서 성장한다.

지금 영화도 그렇다. 자신이 한 일이라고는 그저 개봉관을 확보해 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마케팅도 하기는 했지만 다른 영화도 다 했던 것들이다.

“오히려 도움을 받는 건 나였나?”

아마도 그게 정답인 것 같다. 아무리 대표라지만 그도 실적이 중요한건 마찬가지였으니.

“선물을 사줘야 하는 쪽은 나였네.”

그가 허탈한 웃음을 흘릴 때.

똑똑.

노크 소리와 동시에 대표실의 문이 열렸다.

모습을 드러낸 비서는 떨떠름한 얼굴이다.

“대표님, 차원희 사장님께서 잔뜩 화가 나셔서 전화를 하셨는데요. 당장 전화기 켜지 않으면 잡으러 오신다고···.”

“집에서 보자고 전해.”

“직접 연락하시는 건 어떨까요?”

“이거 왜 이래? 내가 대표잖아. 대표가 무릎 꿇으면 부하직원으로서 어떤 느낌이야?”

“책임감 있고 아주 훌륭한 사람이구나, 하고 느끼겠죠.”

차원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도 너한테는 화 안 내잖아.”

“화낼 걸 알면 그러지 마셨어야죠. 아니, 형. 아무리 보답을 받기로 했다지만 라페라리는 선 넘은 거 아닌가요?”

“여기 회사야, 왕 비서.”

“그럼 저 사직서 쓰겠습니다.”

“반려하겠습니다. 저 퇴근해야 하니까 얼른 가서 수습부터 하세요.”

“어휴. 내가 진짜 사표 쓰고 만다.”

왕 비서가 투덜거리며 대표실을 빠져나갔다.

싱긋 웃은 차원일이 외투를 집어 들었다.

“원희가 들이닥치기 전에 영화나 보러 가야겠다.”

그간 바빠서 못 봤으나 오늘은 없는 시간도 내야 할 판이다.

“사람들의 칭찬도 자자하니 적어도 실망할 일은 없겠지.”

* * *

“내 하늘이 죽었을 때···. 나도 죽었어.”

하늘을 보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과는 반대로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배어있지 않았다.

굳이 자막을 보지 않아도 어떤 대사였는지 이해됐다.

시커먼 빌딩의 입구는 지옥의 구렁텅이처럼 보였다.

지옥으로 걸어가는 민우의 등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디커슨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11:55:13

약속된 시간은 5분도 채 남지 않았다.

디커슨이 재빨리 건물의 배전시설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손목시계를 보며 초조함을 금치 못하다가 12시가 되었을 때.

철컥.

탕!

배전시설에 총을 당겨버렸다.

펑펑!

컨트롤박스에서 스파크가 튀더니 빌딩의 불이 하나씩 꺼지기 시작했다.

시설에는 문외한인 그였기에 그냥 간단한 방법을 택한 것이다. 덕분에 보조 발전기가 작동돼도 아무런 쓸모도 없게 되었다.

디커슨이 담배를 빼 입에 물었다.

“굿 럭. 브로.”

뒤가 구린 놈들의 아지트라 그런지 출입문도 중앙시스템으로만 여닫을 수 있었다.

민우에게는 오히려 잘 된 일이다.

전기가 차단되어 빌딩의 출입구를 열 수 없게 되었으니. 이제 놈들은 독에 갇힌 쥐 신세다.

“후욱, 후욱.”

야시경에 의지해서 걸음을 옮겼다.

타다다닥, 발소리가 들리며 사내 둘이 계단에서 내려왔다.

손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으로 봐서는 손전등이라도 든 것 같다.

망설이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푸슉, 푸슉.

소음기가 부착된 글록 권총이 불을 뿜었다.

“서른.”

작은 목소리로 저승사자처럼 차갑게 읊조린 민우가 탄창멈치를 눌렀다. 빈탄창이 빠져나온 자리에 새로운 탄창을 끼워 넣고 빌딩의 로비를 훑어보았다.

고요한 로비는 일말의 생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차박.

홍수처럼 흘러내린 피가 신발 밑창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빌딩의 높이는 5층. 이제 겨우 한 개의 층을 처리했을 뿐이다.

2층, 3층, 4층.

층을 하나씩 올라갈 때마다 민우는 피범벅이 되었다.

총알이 박힌 자리에 지혈제를 뿌리고, 마약성 진통제를 주사했다. 어차피 지금 총알을 뽑을 수도 없으니 이게 최선이다.

붕대로 상처를 단단히 감싸고 발걸음을 옮겼다.

마지막 5층.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던지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

다른 층과 달리 이곳에는 화려한 조각들이 양각으로 새겨진 하나의 문만 존재했다.

이때까지의 경험에 의하면 문이 열리자마자 총알이 비처럼 날아들 것이다.

조심스레 걸어가 문을 당겼다.

순간.

펑!

문이 폭발하며 터져 나갔다.

문을 당기자마자 바닥을 굴러 멀찍이 물러나지 않았다면 폭발에 휘말렸을 거다.

“큭큭. 제깟 놈이 뛰어봤자 벼룩이지.”

“혹시 모르니까 조심해.”

“네, 아버지. 어이, 너희가 가서 확인해.”

철컥.

총이 장전되는 소리와 함께 주변이 환해졌다.

광량 조명을 얼마나 끌어모았는지 주변은 전등을 켠 것보다 더 밝다.

혀를 찬 민우는 야시경을 벗었다. 어둠 속에서나 야시경이 유리하지, 지금은 오히려 족쇄다.

물러난 김에 계단까지 이동했다. 그러고는 복도 끝을 바라봤다.

SWAT들이나 착용할법한 보호구로 전신을 감싼 사내 셋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탄도 방패를 든 사람이 앞장서고, 자동소총을 든 두 명이 뒤를 따랐다.

민우는 가방에서 주먹만 한 물건을 꺼냈다.

딸칵.

스위치를 올리고 남자들을 향해 굴렸다.

조직원은 자신의 발치로 뭔가가 굴러오자 잔뜩 긴장했다. 잠시 기다려봤으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사내가 코웃음을 치며 쇳덩이를 한쪽으로 툭 찼다.

“아직 놈이 죽지 않았다. 긴장해.”

선두의 남자가 말을 끝내자마자.

삐이이익-!

남자들의 귀에 굉음이 들려왔다.

“으아악!”

조직원이 방패와 소총을 집어 던지고 귀에 꽂힌 리시버를 뽑느라 허둥대는 사이 민우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얼마나 정확하게 쐈는지 전부 목에 총알이 박혀 쓰러졌다.

탄창을 갈며 민우가 읊조렸다.

“그건 훼이크, 진짜는 이거.”

민우가 휴대폰을 바닥에 툭 던졌다.

적이 착용한 리시버를 해킹해서 굉음을 발생시킨 것이다.

놈들이 리시버를 착용하고 있어 쏠쏠하게 써먹었지만 이제는 그것도 끝이다.

문 안에는 단 두 명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둘은 가구나 책장 등을 이용하여 만든 좁은 공간에 숨어있었다.

찰박, 찰박.

흘러내린 피를 짓밟으며 그들에게 걸어갔다.

젊어 보이는 사내가 공간 사이로 권총을 내밀어 민우를 겨눴다.

“너, 이 새끼 왜 이런 짓을 벌인 거냐?”

“그 질문은 내가 하고 싶은데. 왜 그런 짓을 벌인 거냐?”

“무슨 개소리야?”

탕!

총알이 발사됐으나 민우에게 맞지는 않았다. 협소한 시야에서 정확하게 타격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칫.”

혀를 차는 놈에게 민우가 되물었다.

“왜 제니퍼를 죽였지? 그 여자가 너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하. 고작 기억도 나지 않는 여자 때문에 수십 명을 죽였다고?”

“그녀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냥 죽였다. 뭐가 잘못됐지?”

“그렇군. 그럼 나도 너를 그냥 죽이는 거로 하지. 뭐가 잘못됐나?”

덜그럭.

책상이 한쪽으로 치워지며 덩치가 커다란 중년인이 일어섰다. 그가 말했다.

“타고난 것이 다르지 않나. 내 아들 루이스는 랄프 코퍼레이션의 하나뿐인 후계자다.”

“제니퍼도 하나뿐이지.”

“좋아. 그럼 내 아들 대신 나를 죽여라. 그리고 여기서 끝내.”

“아버지! 안됩니다!”

“너는 가만히 있어. 어떤가? 내 제의를 받아들이겠나?”

민우는 고개를 저었다.

“내 목표는 당신 아들이야. 다른 놈들은 그저 내 앞을 가로막기에 치웠을 뿐.”

“그럼 어쩔 수 없군.”

탕!

총알이 날아와 가슴팍에 박혔다. 방탄조끼가 아니었다면 죽었을 거다.

가슴에서 타는 듯한 통증을 느낌과 동시에 다리에서 힘이 쭉 빠졌다. 뒤로 넘어가던 민우의 손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푸슉!

이마가 뻥 뚫린 중년인이 뒤로 넘어갔다.

루이스가 벌벌 떨며 외쳤다.

“아, 아버지!”

민우가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를 죽이려면 머리를 노렸어야지. 소중한 사람이 죽은 기분이 어때?”

“미친 싸이코 새끼!”

“닥쳐!”

영화 내내 차갑던 그가 처음으로 분노를 드러냈다.

“지금 네가 느끼는 감정을 나도 느끼고 있어! 나를 죽이고 싶겠지? 나도 그래! 만약 나를 숨겨주고 보호해 주는 놈이 있다면 죽이고 싶지? 그래서 죽였다!”

루이스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동양에는 이런 말이 있다.”

민우가 권총을 루이스에게 겨눴다.

“역지사지.”

푸슉!

루이스가 뒤로 넘어갔다.

“쿨럭!”

참고 참았던 상처가 피를 뿜어냈다.

지혈제와 마약성 진통제로 버텼지만 이제는 그것도 한계다.

가물가물해져 가는 의식을 내려놓은 그가 피로 물든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의 손목시계가 1:00을 가리킨 순간.

쾅, 콰쾅!

빌딩의 1층부터 5층까지 차례대로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뭐야! 킴! 이 미친놈!”

디커슨이 헐레벌떡 빌딩으로 뛰어갔으나 이미 늦었다.

5층짜리 빌딩이 화염과 함께 무너지고 있었으니까.

“킴!”

* * *

개봉 열흘째. 미국에서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제프리는 이번 영화를 편집하며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게 했다.

액션 영화의 본질에 다가가 그저 스크린에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덕분에 영화를 보고 나면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칭송이 뒤따랐다.

개봉관도 슬금슬금 늘려나갔다.

30개로 시작했던 영화관은 어느새 100개를 넘기더니 1,500개까지 순식간에 늘어났다.

영화가 순풍에 돛단배처럼 시원하게 나아가고 있을 때, 민우의 예능도 방송을 시작했다.

-라찬 밴드 꼭 봐라, 두 번 봐라. 오디션부터 꿀잼.

└강민우 재주가 많은 건 알았지만 밴드 악기도 다 다룰 줄 알더라.

└남예은이 기대되는 건 나뿐임?

└응 너뿐임.

아직 방송 초반임에도 시청자 게시판도 분위기가 좋았다.

현재는 오디션을 시작으로 각자 전문가에게 트레이닝을 받는 내용이다.

최경륜은 VJ들이 가져온 촬영본을 보며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간절함이 남다른 이들을 뽑았기 때문인지 하나같이 피땀을 흘려가며 악기를 배우고 있었기 때문.

굳이 편집을 하지 않고, 그들의 열정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그림이 될 정도다.

첫 방송이 나간 직후, 1차 점검을 위해 합주실에 멤버들이 모였다.

라찬 밴드의 진행자 겸 매니저로 선택된 개그맨 양민용이 멤버들에게 말했다.

“슬슬 우리가 공연할 첫 곡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야 3개월 후에 공연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저는 비틀즈가 어떨까 싶습니다.”

“저는 라디오 헤드.”

“오아시스도 빼놓을 수 없죠.”

모두가 선호하는 밴드 이름을 대자 양민용이 고개를 저었다.

“일단 노래를 녹음해서 가지고 왔습니다. 아무리 연습을 한다 해도 초보자 티를 벗을 수는 없으니 좀 쉬운 곡으로 선별해봤습니다. 공연에서 한 곡만 할 수 없으니 다양한 레퍼토리로 연습을 해야겠죠.”

앰프에서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유명한 몇 곡이 스쳐 지나가고 생전 처음 들어보는 노래가 스피커를 뚫고 튀어나왔다.

투다다다다!

경쾌한 드럼에 기타 음이 덧입혀지고, 베이스가 색채를 더했다.

연주 난도가 높지 않았기에 멤버들이 손을 움찔거렸다.

음악만으로도 절로 몸이 들썩거릴 정도로 흥겨운 전주가 지나고.

“그토록 원했던,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던, 간절했던 기회가 드디어 찾아왔어.”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노래를 불렀다.

손기환이 어리둥절하며 민우를 바라봤다.

“이거 네 목소리 아니야?”

민우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자작곡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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