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단계
민우의 작명 센스에 홍경섭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라찬이 뭐냐, 라찬이.”
“가제거든. 그건 그렇고 괜찮은 기자는 섭외했어?”
“벌써 섭외했지. 한수연 씨가 소개해준 기자야.”
민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수연이가?”
“응. 고영수 기자라고, MSG도 안치고 팩트만 쓰는 기자라더라. 작성한 기사도 읽어봤는데 소문대로더라고. 대신 인터뷰는 한 번 해줘야 해. 네가 워낙 인터뷰하기 힘든 연예인 중에 하나라나.”
“그럼 내일 만나자고 연락해줘. 오후쯤이면 괜찮을까?”
“갑작스러운 스케줄이겠지만 허락할 거야. 고 기자도 인터뷰하기를 간절히 바랐거든. 일단 회의실에 자리 만들어놨으니까 거기서 피디님이랑 얘기 나눠. 나는 기자한테 연락해 볼 테니까.”
“오. 홍 대표, 일 처리 마음에 들어.”
“별말씀을요. 강 배우님.”
둘이 마주 보며 킬킬 웃는 사이 최경륜이 도착했다.
“반갑습니다, 홍 대표님, 강 배우님.”
“오랜만입니다, 피디님. 이쪽에 자리를 마련해뒀습니다.”
홍경섭의 안내에 따라 회의실로 이동해서는 각자 원하는 음료를 앞에 두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민우는 자신이 구상하던 아이디어를 털어놓았다.
곰곰이 듣고 있던 최경륜이 턱을 쓰다듬었다.
“방향은 좋습니다. 강 배우님이 계시니까 흥행력은 보장됐고, 판권 판매도 충분할 겁니다. 엔플릭스에서 강 배우님은 제법 유명한 사람이니까요. 게다가 무명 연예인들이라면 스케줄에 영향도 덜 받겠죠. 악기를 배우는데 시간도 많이 투자할 수 있고요. 전부 좋습니다.”
서론이 길다. 이럴 때는 보통 뒷이야기에 부정이 따르는 법인데.
아니나 다를까 최경륜이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멤버는 오디션으로 뽑아야 합니다.”
“악기를 전혀 할 줄 몰라도 상관없는데요.”
“절실함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공연 아닙니까? 악기에 문외한이더라도 어느 정도 재능은 있어야죠. 악기 배우는 데만 1년, 2년씩 걸리면 방송은 언제 나가겠습니까. 그리고 공연을 보는 팬도 생각을 해야죠.”
민우는 그때서야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공연은 팬들을 위해서 하는 거다. 남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밴드라면 그저 자기만족밖에 되지 않는다.
“제 생각이 짧았네요.”
“아닙니다. 바둑도 훈수 두는 사람이 더 잘 보는 법이죠.”
넉넉하게 웃은 최경륜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공연 수익은 모두 기부하는 거로 하면 될 거고, 가수도 뽑을 예정입니까? 악기도 중요하지만 보컬은 밴드의 얼굴 아니겠습니까?”
“보컬은 제가 하면 됩니다.”
“오, 그렇죠. 강 배우님도 노래를 잘하시죠.”
‘유랑민’을 촬영할 당시 민우와 붙어 다녔던 최경륜이다. 그가 어떤 재능들을 가졌는지 충분히 아는 사람 중 하나이기도 하고.
“그렇다면 드럼, 기타, 베이스만 뽑으면 되나요?”
“네. 4명이 적당할 겁니다.”
메모를 마친 최경륜이 민우를 바라봤다.
“세부적인 문제는 작가들과 상의를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오디션을 개최하면 강 배우님에 대한 논란이 불거질 텐데 괜찮은가요?”
“귀국하기 전에 감독님과 얘기를 나눴습니다. 서면 인터뷰도 내일 보내주시기로 했으니 곧 기사도 나올 겁니다.”
“그래요? 흠···.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기사가 나오고 나면 그 부분에 관해서 저에게 맡겨주시겠습니까?”
최경륜의 눈동자가 영민하게 빛났다.
자신만만한 그의 모습에 민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어떻게 대처하실지 미리 저에게 알려주시는 조건이면 허락하겠습니다.”
“그건 당연하죠. 그럼 일정 나오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둘은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이야기가 끝나자 홍경섭이 회의실에 들어와 난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한수연 씨랑 같이 인터뷰를 해도 괜찮냐는데? 원래 내일 한수연 씨랑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나 봐.”
“상관없어. 내 목적은 감독의 서면 인터뷰를 전해주는 거니까. 인터뷰는 곁가지고.”
“그럼 픽스할게.”
다음날, 민우는 약속장소로 향했다.
고영수 기자는 민우와 한수연의 인터뷰 자리로 2층짜리 커피숍을 섭외했다.
가게 사장도 한수연의 팬이라 흔쾌히 2층을 몽땅 내주었다나.
2층으로 올라가려고 하니 커피숍 사장님이 민우와 홍경섭을 제지했다.
“죄송합니다. 거긴 오늘 영업 안 합···. 어? 혹시 김재수, 강민우 배우님 아닙니까?”
“드라마에서 김재수로 출연했었죠. 꽤 오래됐는데 기억해주시네요.”
“제 인생 드라마의 최애 캐릭터였는데 어떻게 잊겠습니까? 진짜 잘 봤습니다. DVD도 샀어요.”
“감사합니다.”
“오늘 강민우 씨도 인터뷰하러 오신 거죠?”
“맞습니다. 장소를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혹시 인터뷰 끝나고 사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지금은 어떠세요? 사진도 찍어드릴 수 있습니다.”
“정말요? 감사합니다! 잠시만요.”
A4 용지를 가져온 사장에게 사인을 정성 들여 해줬다. 사진도 함께 찍었고. 사장은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카운터로 돌아갔다.
2층에 올라가니 먼저 도착한 한수연과 그녀의 매니저이자 삼촌인 김남조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민우가 밝은 얼굴로 인사했다.
“형님, 잘 지내셨죠?”
김남조가 씩 웃으며 솥뚜껑 같은 손을 내밀었다.
“민우, 오랜만이네.”
그와의 만남은 오해로 시작했으나 지금은 아주 친해졌다. 특히 민우가 준 비타민 덕분에 한수연이 오디션에 합격했다며 철석같이 믿고 있고.
술자리를 가졌을 때 잔뜩 취해서는 한수연이 오디션을 제대로 못 볼 뻔했는데 민우 덕분에 합격했다며 얼마나 얼굴에 금칠을 해주던지.
김남조와 악수를 하고 한수연을 바라봤다.
“얼굴 좋아졌다?”
“오빠는 더 좋아졌네요. 할리우드는 어땠어요?”
“나쁘지 않았지. 한국이랑 달라서 새롭기도 했고.”
“부럽다···. 나도 할리우드 진출하는 게 꿈이었는데.”
꿈이었다. 과거형을 쓴다. 마치 이제는 포기했다는 어투다. 솔직히 그럴 만도 했다.
민우가 승승장구하는 사이 한수연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뭐라도 할라치면 인터넷이 발칵 뒤집히는데 어쩌겠나.
“커피는 제가 쏠게요. 뭐 드실래요?”
“몸 관리해야지. 카라멜마끼아또.”
“아니 몸 생각한다면서 하필 지방이 많은 커피를 마신다고요?”
“맛있는 거 먹고 열심히 운동하는 게 몸 관리지. 강제로 운동욕구가 생기게 만들잖아.”
“뭐지? 왜 납득되는 거지?”
“맞는 말이니까 납득이 되는 거지.”
그들이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커피숍의 주차장으로 낡은 차 한 대가 들어섰다. 문이 열리며 두 남자가 내렸다.
한 명은 허름한 재킷을 걸쳤고, 다른 한 사람은 목에 카메라를 걸고 있었다.
오늘 인터뷰 약속을 잡은 고영수 기자와 박자혁 기자다.
후배 박자혁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어리바리 타서 죄송합니다. 오늘 인터뷰가 기대돼서 어제 잠을 설치는 바람에···.”
“너 한수연 팬이냐?”
“그게 그러니까···. 흠흠. 네. 팬입니다.”
하긴 한때 한수연의 팬이 아니었던 사람이 어디 있겠나. 여배우 전체를 통틀어 압도적인 포스를 뽐냈는데.
연예기자를 하며 수많은 연예인을 만난 결과, 가식과 진심 정도는 구별할 수 있는 눈을 얻었다.
그의 기억 속 한수연은 연예인답지 않게 소탈하며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녀에 관한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그는 믿지 못했다.
반박 기사를 낸 것도 고영수였고. 하지만 수많은 스피커에서 한수연을 몹쓸 사람이라고 외쳐대니 그 혼자서 여론을 바꾸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박자혁의 어깨를 툭 친 고영수가 말했다.
“사실 나도 팬이야. 얼른 가자.”
박 기자의 얼굴이 조금은 밝아졌다.
* * *
2층 구석에는 홍경섭과 김남조가 대충 자리를 잡았고, 햇볕이 잘 드는 자리에는 민우와 한수연, 그리고 기자들이 자리했다.
고영수가 신난 표정으로 명함을 민우에게 건넸다.
“흔쾌히 인터뷰를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영수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강민우라고 합니다.”
“요즘 인터뷰하고는 싶지만 만나기는 힘든 분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그런가요?”
민우의 넉넉한 웃음에 고 기자는 눈을 빛냈다.
“우선 근황 얘기부터 시작해보도록 하죠.”
아무리 민우가 인터뷰를 안 했다고는 하지만 홍경섭이 예전에 보도자료로 뿌린 것들은 꽤 된다. 당시에는 인기가 없어 묻혔지만.
고영수는 그 자료에만 그치지 않고 민우의 과거까지 모조리 조사해서 왔다.
“그걸 다 어떻게 찾으셨어요?”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작품들을 찾아낸 고영수의 정성에 감탄했다.
“요즘 인터넷이 워낙 좋아서요. 검색만 하면 제법 나옵니다.”
인터뷰의 분위기는 편안하고 좋았다. 아마도 고 기자가 이야기를 잘 이끌어 나갔기 때문이리라.
박자혁은 인터뷰 중간중간 사진을 찍었는데, 그럴 때마다 민우는 포즈를 취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길지 않은 인터뷰가 끝나자 녹음기를 끈 고영수가 민우를 바라봤다.
“인터뷰는 여기까지 하면 될 것 같습니다. 말씀을 잘하셔서 분량도 많이 나올 것 같고요.”
“기자님 덕분이죠.”
“그런데 홍 대표님께서 저에게 부탁할 게 있다고 하시던데요.”
“부탁이라기보다는 기삿거리죠.”
민우는 휴대폰을 내밀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휴대폰을 바라본 고영수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고는 민우에게 물었다.
“영어네요?”
“네. 제프리 감독님의 서면 인터뷰입니다.”
“이번에 촬영했다는 영화 말씀이시죠?”
건성으로 휴대폰 화면을 봤던 고영수가 재빨리 휴대폰을 들고 텍스트를 읽어나갔다.
“흐음···. 핵심내용은 이거네요. 한국 팬이 우려하는 바는 알고 있다. 배역의 수정이 있었지만 아직 밝힐 수는 없다. 다만 한국 팬이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다. 영화로 확인해 달라.”
“요약을 잘하셨네요.”
“하는 일이 그거니까요. 이 인터뷰를 그대로 기사로 내보내면 되는 겁니까?”
“네. 과장 없이 그대로요.”
“그거야 제 전문이죠. 알겠습니다. 이런 기삿거리라면 저도 환영이죠.”
고영수는 기자로서의 감으로 이 기사에 대한 반응이 예상됐다.
아마 영화가 개봉될 때까지 믿고 기다리자는 사람들과 그래도 까겠다는 사람으로 갈라질 거다.
여론이 한쪽으로 흐르면 금방 식지만 둘로 갈라지면 오래간다. 그동안 자신의 기사는 트래픽이 치솟을 거고. 성과급 보너스도 두둑하게 받겠지.
“개봉까지 논란을 유지하는 게 목적입니까?”
“이제 편집을 시작했는걸요. 적어도 6개월은 걸릴 텐데 그동안 치고받고 싸우는 게 가능할까요?”
“그건 불가능하죠. 한 달이면 몰라도. 그럼 기사를 미룰까요? 대충 예고편이 나오기 전까지 미루면 될 것 같은데요.”
“아닙니다. 조만간 예능 프로그램에 들어갈 생각이라서요. 기획단계이기는 하지만.”
고영수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감독 인터뷰 기사로 잽을 날리고, 예능으로 스트레이트를 때리면 슬슬 영화의 개봉각이 잡히겠죠. 예고편은 보통 한 달 정도 전에 오픈하니까 그때가 되면? 크···. 쌍끌이 작전 좋네요.”
그럴 계획은 아니었지만 듣고 보니 의외로 괜찮은 것 같다.
민우가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는데.”
고영수는 손사래를 치며 장난스레 웃었다.
“제가 좀 음흉한 구석이 있어서요. 그 건도 제가 맡으면 안 되겠습니까?”
“피디님과 연결해드리죠.”
“약속하신 겁니다.”
흐흐, 웃은 고영수가 검지를 들어 올렸다.
“그럼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원래 선약은 한수연 씨라서요.”
“저는 먼저 가 봐도 될까요?”
“다른 스케줄이라도 있으신가요?”
‘무인도’와 ‘리벤져 온 힘’을 촬영하기 위해 국내 스케줄은 모두 정리해둔 상태다.
“아뇨,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럼 제가 저녁을 사겠습니다. 바쁜 일 없으시면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끝납니다.”
별다른 스케줄도 없으니 제안을 수락하고는 홍경섭의 옆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고영수는 한수연과 따로 구석에 자리를 마련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오랜만에 머리도 비우고 좋았어요.”
“악플은 여전하죠?”
“어쩔 수 없죠.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만 믿으니까요.”
“억울하지는 않으세요?”
“억울해도 어쩔 수가 없네요.”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처럼 보이는 한수연을 고영수는 안타까워하며 바라봤다.
사람들은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라는 변명 뒤에 숨어 혀를 놀린다.
거짓이 진실이라는 칼날을 업고 사정없이 한수연을 난도질하지만 반항조차 할 수 없다.
하지도 않은 일이지만 그저 공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의 비난을 견뎌야 하는 거다.
고영수가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드디어 배후의 꼬리를 잡았습니다.”
“중학생 아니었나요?”
“그 중학생의 배후죠.”
중학생이라 선처를 해줬는데. 알고 보니 돈을 받고 루머를 퍼트린 거였다.
“어디죠?”
“WI 엔터입니다.”
한수연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