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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 계약 (70/223)

출연 계약

제프리가 유쾌하게 껄껄 웃었다.

“하핫! 제가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했죠?”

그런 적 없다. 또 보자고 했지.

행인들이 제프리를 보며 입을 가리고 웃었다. 솔직히 민우도 제프리의 앞에 앉아 있지 않았다면 저들 틈에 끼어 웃었을 거다.

“섭아 고맙다.”

“뭐가?”

“마스크를 굳이 챙겨줘서.”

“저기 나는 좀 떨어져서 앉아도 되지 않을까? 작품 얘기에는 내가 낄 데가 없을 거 같은데.”

민우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돼.”

입맛을 다신 홍경섭은 민우에게 줘버린 마스크를 탐욕스럽게 바라봤다.

대화를 나눠야 하기에 마스크는 벗었다. 햇볕이 따가워서 끼고 온 선글라스가 이렇게 고마워질 줄 몰랐다.

적어도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그게 아니면 사람들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아서 안심되는 걸지도 모르고.

민우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그런데 그 복장은 뭔가요?”

“미스터 강의 연기에 감명받은 제 마음을 표현한 거죠. 어떻습니까? 메이크업도 맞춰서 하고 올 걸 그랬나요?”

알록달록한 광대 옷을 펄럭이며 활짝 웃는 제프리다. 너무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차마 거기에 대고 한마디 할 수 없었다.

왜 부끄러움은 자신의 몫인지 모르겠다. 민우는 얼굴을 감싸 쥐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괴짜라고 말만 들었지 상상을 초월하는 사람이다.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커피잔을 들었다.

“제가 미스터 강을 만나고 싶었던 이유는 배역을 권하기 위함입니다.”

“마크에게 들었습니다. 그냥 수락할 수 없다는 건 아시죠?”

“물론입니다. 제가 시나리오를 준비해 왔습니다. 우선 읽어 보시고 이야기 나누면 좋을 것 같습니다.”

웨이트리스에게 커피와 베이글, 크림치즈를 주문하고 시나리오를 펼쳤다.

전체적인 스토리가 아니라 배역에 관한 스토리 위주라 금방 읽을 수 있었다.

한동안 종이에 시선을 두고 있던 민우가 물었다.

“제가 맡을 배역의 국적이 중국이군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거기가 시장이 크거든요.”

시나리오를 덮어 제프리에게 밀어주었다. 그러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출연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네? 아니 왜요?”

“저는 공인입니다. 팬들의 사랑을 먹고 살기 때문에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조심해야 하는 사람이죠. 그런데 제가 중국인을 연기한다? 조금만 찾아보셔도 중국, 한국, 일본의 관계에 대해서 알게 되실 겁니다. 좋은 배역도 아니고 조폭이니.”

당황한 제프리가 검지를 들어 올렸다.

“저에게 잠시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민우는 커피잔을 집어 들었다.

“커피 향이 좋네요.”

다 마시고 일어나겠다는 뜻이다. 제프리도 의미를 알았기에 재빨리 휴대폰으로 검색을 시작했다.

날씨는 청명하고 맑았다.

베이글에 치즈 크림을 발라 한입 깨물었다. 베이글과 치즈가 한데 어우러져 짜고 고소한 맛이 혀를 희롱했다.

“섭아, 베이글 먹어봐라.”

“나 하나 더 시켜도 돼?”

“···벌써 다 먹은 거였냐.”

“시킨다?”

“하나로 되겠어? 두 개 시켜서 먹어.”

희희낙락한 홍경섭이 베이글을 추가로 주문하고, 민우의 커피가 바닥나게 되었을 때쯤 제프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광대 모자를 벗더니 민우에게 정중하게 사과했다.

“제가 사전 조사를 너무 게을리했군요.”

“과한 사과를 할 정도는 아닙니다. 다만 제가 중국인이나 일본인의 연기를 하면 시끄러워지겠죠.”

“국적은 한국으로 바꾸겠습니다. 내용 수정도 하고요.”

“중국 시장은요? 포기하시게요?”

“우선 미국에서 살아남는 게 먼저입니다. 그 가능성을 미스터 강에게서 봤으니 배팅을 해야죠.”

미간을 좁힌 민우가 생각에 잠겼다.

“일단 전체 시나리오를 봐야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 그렇죠.”

제프리는 서류 가방을 뒤져 두툼한 시나리오를 건네주었다.

“편하게 보시고 연락해 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네, 살펴 가세요.”

제프리가 떠나자 홍경섭이 민우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왜? 스토리가 별로야?”

“아니. 비중도 그렇고 조연치고는 나쁘지 않아.”

“그런데 왜? 주연이 아니라서?”

민우는 피식 웃었다.

“아무런 인지도도 없는 동양인이 주연을 맡으면 투자자가 어떻게 생각할까?”

“당장 투자금을 빼겠지.”

“알면서 묻냐. 조연도 과해. 메인 빌런이라 비중도 클 것 같고.”

“그런데 왜 수락 안 했어? 이번 무인도에서 메인 빌런으로 활동하는 바람에 연기 변신할 절호의 찬스인데.”

“곧장 수락하면 없어 보인다며?”

“자식, 다 배웠네. 이제 하산해도 되겠어.”

민우는 시나리오를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거 다 먹고 갈 거지?”

“당연한 거 아냐? 다 먹어야지.”

“그럼 난 먼저 간다.”

“연예인을 어떻게 혼자 보내냐? 잠깐만 기다려.”

베이글 하나를 입안에 욱여넣은 홍경섭이 일어섰다.

“살이 찌는 이유가 다 있다니까. 그냥 포장해서 가면 되지.”

째려보는 홍경섭의 눈을 헛기침과 함께 회피하며 호텔로 걸어갔다.

* * *

영화는 한 여자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남편은 경찰관이고, 여자의 어릴 적 친구는 민우가 맡을 예정인 미국 흑사회 보스.

제프리가 수정을 한다고 했으니 어떤 방향으로 바뀌게 될지는 모르겠다.

“그러니까 경찰관은 자신의 신념 때문에 아내를 죽인 놈을 법의 심판에 맡기려고 하고, 너는 죽여 버리려고 하는 거네.”

“내가 죽이려고 한다니까 어감이 이상하잖아.”

“맞는 말이잖아. 그래서? 그냥 일차원적인 복수가 끝이라고?”

“여기서 이야기를 꼬았지. 여자를 죽인 놈이 마피아거든.”

“그럼 마피아랑 흑사회랑 싸우게 되나?”

“나는 손가락 하나를 내주고 흑사회를 탈퇴해.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서 모든 걸 버리는 거지.”

“남편은? 살인범을 법정에 세우면 너무 시시하잖아.”

“나한테 감화 당해서 함께해. 경찰관이라는 지위를 철저히 이용해서.”

“결말은?”

홍경섭의 물음에 민우는 시나리오를 탈탈 털었다.

“그게 끝. 제프리가 준 시나리오에는 절정과 결말이 빠져있네. 마피아와 한판 할 거 같긴 한데.”

“배역은 맡고 싶어?”

“글쎄다. 할리우드 진출의 발판이라고 생각하면 나쁘지는 않은 거 같은데 동양인 조폭이라니까 걸리기도 하고.”

할리우드에서 영웅적인 역할은 백인의 몫이다. 흑인이 좋은 배역을 맡게 된 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그게 왜?”

“할리우드의 편견이랄까, 그런 게 있잖아. 거기다 영화의 영향력이 좀 크냐? 불편한 사람은 ‘동양인이 나쁜 사람이다’라는 고정관념을 심어줄 수 있다고 주장하겠지.”

홍경섭이 입맛을 다셨다.

“그럴 수도 있겠네. 영화는 영화일 뿐인데.”

“미디어의 파급력을 생각하면 아무 배역이나 덥석 맡을 수 없어. 아무튼 수정된 시나리오부터 확인하고 결정하자고.”

며칠이 지나 제프리가 직접 수정된 시나리오를 가지고 호텔로 찾아왔다.

“음···.”

시나리오를 확인한 민우가 침음을 흘렸다.

“이 정도면 거의 갈아엎은 수준 아닙니까?”

“미스터 강에게 줬던 부분만 바꾸면 되는 거였으니 어렵지 않았습니다.”

암흑가 보스에서 평범한 IT 회사원으로 바뀌었다.

확실히 스태프들이 한국에 대해서 조사한 티가 난다.

민우가 맡을 배역은 ‘킴’이고, 군대도 전역했다. 총기류와 첨단 IT 기계를 능숙하게 다룬다.

아무래도 한국인의 이미지를 배역에게 씌운 듯하다. 그런데 오해한 부분도 크다.

군대를 전역했다고 모든 총기를 잘 다루는 건 아니지 않나. 첨단 IT 기계도 마찬가지고. 모두가 얼리어답터가 아닌데.

시나리오만 보면 킴이 극을 이끌어 가야 한다고 봐야 한다.

극을 이끌고 가는 사람이 누군가? 바로 주연이다. 고작 조연이 주연보다 더 눈에 띌 게 분명하다. 과연 이러한 상황을 주연배우가 용납할까?

이런 의문에 제프리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주연을 맡을 배우가 거절하더군요. 사람을 잔인하게 고문하고 죽이는 건 자신의 필모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그래서 빌런이 필요했고, 그 역할을 무인도의 미스터 강에게서 발견했던 겁니다.”

“그럼 굳이 그 배우를 쓸 이유가 있습니까?”

“연기는 잘하는 배우입니다. 흥행력도 인정받았고. 거기다 돈줄인 제작사가 간절히 원하니까요.”

“그렇군요. 이 정도 배역이라면 당연히 수락해야겠네요.”

제프리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감사합니다.”

“아직 감사할 단계는 아닌데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출연에 관련한 문제는 우리 홍경섭 매니저와 협상하셔야 하거든요.”

“아···. 그렇죠. 부디 함께했으면 좋겠군요.”

* * *

“10만 달러에 러닝개런티?”

“러닝개런티는 요즘 할리우드의 유행이래. 망해도 같이 망하고, 흥해도 같이 흥하자는 거지. 게다가 할리우드는 터지기만 하면 상상초월이잖아.”

조연임에도 10만 달러면 나쁘지 않다. 첫 주연을 맡은 영국 출신 영화배우도 25만 달러 정도를 받았다고 들었다.

러닝개런티의 비율이 문제겠지만 한국에서의 수입보다 확실히 많을 것은 분명했다.

“크랭크인은 언제래?”

“3개월 후.”

“그럼 맞춰서 넘어오는 방향으로 진행하자.”

민우의 계약소식은 한국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무인도로 인해 일거수일투족에 시선이 집중되는 상태였던 탓이다.

이러한 사정은 꿈에도 모르고 한국에 도착하자 공항에 기자가 잔뜩 깔려있었다.

게이트를 빠져나오자마자.

파파파팍!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지 않았다면 흑역사 짤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뭐해? 손이라도 흔들어.”

홍경섭의 말에 정신을 차린 민우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강민우 씨!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 계약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한 말씀만 부탁드립니다!”

기자들의 아우성에 홍경섭이 앞으로 나섰다.

“승객분들께 민폐니까 자리를 옮기시죠. 간단하게 기자회견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기자회견 자리는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홍경섭이 마이크가 설치된 곳을 보며 흐릿하게 웃었다.

“언젠가 LA 공항도 이렇게 난리가 나겠지?”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

“내 배우가 공항을 뒤집을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중이지.”

민우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뻔한 질문에 평범한 대답이 오가던 와중, 한 기자가 손을 들었다.

홍경섭이 지목하자 기자가 입을 열었다.

“시네이슈 매거진의 윤민형입니다. 출연하기로 하신 작품의 동양인은 한 명 뿐인걸로 알고 있습니다. 국적은 중국에 직업은 흑사회 조폭이죠. 굳이 이런 배역을 맡아야 했는지 궁금합니다.”

민우가 마이크를 쥐었다.

“확실히 영화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매거진이라 그런지 정보에 밝으시네요. 우선 그 부분에 관해서는 감독님과 대화를 나누었고, 시나리오 수정도 했습니다. 제 생각보다 더 배려를 해주셔서 놀라기도 했고요.”

“어떤 내용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죄송합니다. 그 부분은 영화의 스토리와 관련된 내용이라 여기서 밝히기는 힘듭니다.”

윤민형의 자극적인 질문은 모든 기자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트래픽에 죽고 사는게 기자 아닌가. 이를 알고 있는 윤민형도 먹잇감을 놓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경악! 할리우드 진출작의 배역이 중국 국적의 흑사회 보스 라오량?]

그의 기사를 시작으로 기자들의 기사가 포털 사이트를 잠식했다.

[강민우, ‘리벤지 온 힘’ 출연 계약]

[할리우드 진출에 눈이 먼 배우, 이해하기 힘든 그의 행보]

[아무리 할리우드라지만 굳이 이 배역을 맡았어야 했나? 네티즌 분통]

[한국인이 중국인을? 중화 픽쳐스 투자금 회수 결정]

[악재가 연이어 겹친 리벤지 온 힘]

홍경섭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기사 보기가 겁나냐.”

“하루 이틀 일이야?”

“배역 수정된 거 기자한테 알리면 안 되겠지?”

“한국 영화였으면 논란거리를 정리하고 갔겠지. 그런데 할리우드 영화잖아. 미국 극장가를 노리는 게 목표인데 한국에서 내용에 관해서 스포를 해버리면 좋아하겠어?”

“하긴 요즘은 우리나라 기사도 외국에서 즉각 볼 수 있으니까.”

“어차피 영화가 개봉하면 손바닥 뒤집듯 바뀔 여론이야. 너무 신경 쓰지 말자. 그런데 애들은 괜찮아?”

“지금 다른 녀석 신경 쓸 때냐?”

“나 때문에 앞길 막히면 안 되니까.”

“걱정도 팔자다. 근데 산속 생활에 출연하는 건 보류해야겠지?”

“그래야지. 류 피디님한테도 잘 말해주고. 류 피디님이야 괜찮다고 하겠지만 괜히 불똥 튀지는 말아야지. 그리고 시간도 없어. 캐릭터도 만들어야지.”

“내가 도와줄 건?”

“없어.”

“그래, 알겠다. 수고해.”

홍경섭이 떠나자 넓은 집에 혼자 남았다.

민우는 시나리오를 펼치며 눈을 빛냈다.

“배우라면 연기로 말하는 법이지.”

오랜만에 연기를 할 생각에 흥분되는 감정을 가까스로 억눌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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