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도 청산유수
우승자 발표가 있자마자 프랭크는 수프가 담긴 보온물통을 민우에게 주었다.
“축하합니다, 미스터 강. 토마토 수프입니다. 천천히 드시죠.”
프랭크의 목소리는 오랜만에 듣는 것 같다.
“감사합니다. 이건 선물?”
보온물통을 들어 올리며 익살스럽게 묻자 프랭크가 피식 웃었다.
“그간 고생하셨습니다. 날이 밝으면 탈락자를 먼저 촬영하고 미스터 강의 순서가 될 겁니다.”
민우는 보온물통의 뚜껑에 수프를 따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섬을 떠나기 전에 할 일이 있다면 미리 해두시길 바랍니다.”
“그냥 한 바퀴 돌며 경치나 감상하죠.”
시큼한 맛의 수프인데 설탕이라도 탔는지 달콤하다. 아마 우승하지 못했다면 쓰게 느껴졌을지도.
날이 밝자 로버트가 섬을 떠나고 민우의 차례가 되었다.
“가자, 파트너.”
민우는 조커를 챙겨 들고 배에 올랐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그리고 선상.
짝짝짝짝.
민우가 모습을 드러내자 제작진이 손뼉을 쳤다.
“축하합니다, 챔피언.”
“벨트는 안 주시나요?”
민우의 농담에 마크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저희는 벨트 대신 상금을 드리죠. 우선 저희가 섭외한 호텔에서 며칠 쉬시면서 병원 진료를 받으세요. 이후 일정은 따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먼저 배에 올라있던 로버트가 민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지막에 실수만 안 했어도 내가 이겼을 거야.”
“실수는 나도 했어.”
“10포인트짜리?”
“저런. 큰 거 맞았네.”
“뭐라 하는 건 아니고 그냥 아쉬워서 그래. 배에 음식도 많던데 같이 뭐라도 먹지.”
민우는 로버트와 제작진이 준비한 가벼운 음식으로 속을 달랬다.
“로버트. 뭐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
“뭔데?”
“자정에 탈락 문자가 오고 나서 VJ가 수프를 주던가?”
“줬지.”
“맛이 어땠어?”
잠시 기억을 떠올리는지 미간을 찌푸린 그가 대답했다.
“탈락해서 속은 쓰린데 수프는 더럽게 맛있더라고. 내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그런 맛이었어. 너는?”
“나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달콤하더라고. 이런 게 우승의 맛. 이런 느낌?”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너는 섬에서 잘 먹었나 보네. 배고픔이 최고의 소스인데.”
시장이 반찬이라는 우리나라 속담과 비슷한 영어 표현이다.
로버트가 매쉬드 포테이토를 한 스푼 뜨며 투덜거렸다.
“그 말 외에는 딱히 생각나는 게 없기도 하고. 지금도 그래. 평소에 이 엿 같은 감자는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네 덩치를 보니까 그럴 거 같다.”
“당연하지. 고기가 최고야! 편식하는 놈을 잡아다가 일주일만 저기서 살게 하면 그딴 식성은 단번에 고치게 될걸.”
일행을 태운 배는 태평양을 건너 뉴질랜드에 도착했다.
로버트가 명함을 내밀며 말했다.
“상금이랑 출연료는 세금 처리를 해야 될 거야. 변호사가 필요하면 연락해. 싸게 해줄 테니까.”
* * *
“미쳤다. 긴가민가했는데 진짜로 우승을 해버릴 줄이야.”
민우의 연락을 받고 한달음에 날아온 홍경섭은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그러다 아직도 남아 있는 배구공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얘는 반납 안 했어?”
“선물이라던데. 카메라는 회수해갔지만.”
“어우야. 너는 그 배구공이랑 잘도 잤다. 밤에 보면 무서울 거 같은데.”
“뭘 모르는 말씀이네. 무인도에 조명이 있냐? 코앞도 제대로 안 보이는데.”
사실 민우도 자정에 온 문자를 확인하기 위해 스마트워치를 켤 때마다 흠칫하기는 했다.
“건강검진 결과는? 안 나왔어?”
“며칠 더 걸린대. 그동안 호텔에서 푹 쉬라더라.”
“프로그램의 반응이 좋다더니 인심 팍팍 쓰네.”
그러면서 설명해주기를, 500만으로 시작한 시청자 수가 현재 950만을 넘었다고 한다. 1천만 명 정도를 대박으로 간주하니까 거의 근접한 셈.
“이제 12회가 방송 중이거든. 시청자 수는 점점 더 오를 거야. 특히 아시아 쪽 OTT에서 인기 폭발이래. 레딧에서 평하기를 아시아인이 두 명이나 TOP 5에 남아서 그렇다나.”
“나는 아시아인 아니냐?”
“너는 그냥 현지인이라던데? 이건 내 생각이 아니라 커뮤니티의 평가야. 오해하지는 말고. 아무튼 다들 먹는 거 때문에 피똥 싸는 데 너는 아니었잖아. 아주 그냥 섬에 있는 생명체는 다 잡아먹을 기세더만.”
만약 섬에 동물이 살았다면 그것도 잡아먹었을 거다. 특히 코코넛 크랩을 잔뜩 기대했는데 거기에는 없더라.
“12회에서 하오란이랑 타케시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끝났거든.”
두 명이 동시 탈락했는데 그 둘이었나 보다.
민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동양에서 특히 인기가 있다며? 그 두 놈은 동양인을 배신했는데? 화내면서 안 봐야 맞는 거 아냐?”
“얘가 뭘 모르네. 그 두 놈이 언제 탈락하는지를 욕하면서 보게 되는 거야. 그렇게 편집도 잘했고. 마크가 능력이 있더라. 특히 출연자들이 들고 다니는 배구공이 신의 한 수였지. 현장의 리얼함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으니까.”
출연자는 배구공에 넣어둔 카메라의 존재를 잊어버렸다. 그렇기에 배구공에 숨긴 카메라는 출연자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찍었다.
마크는 VJ가 촬영하는 화면에 배구공의 시점을 절묘하게 섞어 더 리얼한 현장감을 만들어냈다. 마치 그들과 함께 호흡하는 듯한 느낌에 시청자는 더 몰입할 수 있었고.
“내가 볼 때 타케시가 음흉한 게 마음에 안 들던데. 먼저 탈락했지? 아니면 하오란이 또 뒤통수를 쳤던가.”
“그게···.”
습관적으로 대답하려면 민우가 가자미눈을 떴다.
“너 점점 능숙해진다.”
“뭐가 능숙해져?”
“나한테서 정보를 뜯어내는 방법이.”
“쳇. 이래서 눈치 빠른 놈은 싫다니까.”
건강검진의 결과는 깨끗했다. 컨디션의 저하도 없이 아주 건강해서 의사가 놀랐다나.
거의 모든 출연자는 약한 탈수증과 영양실조 증상까지 있다고 했으니.
특히 오래 살아남은 출연자일수록 이런 증상은 초반 탈락자보다 심한 편이었다.
미리 건강한 사람들을 섭외했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며칠 잘 먹고 마시면 털어낼 수 있을 정도.
“마지막 촬영 일정은 3주 후래. 상금수여식과 실시간으로 팬들과 소통을 할 예정이고. 어떻게 할래? 여기서 휴가를 보낼래?”
“아니. 이제 한국 음식이 그립다. 한국에서 쉬다가 다시 넘어오자.”
“오케이. 그럼 나는 비행기표 예매부터 할게.”
“엘리도 LA에 올 테니까 그때 그림을 그려주면 되겠지.”
민우는 한국으로 떠나 섬에서 푹 쉬고는 일정에 맞춰 다시 LA로 넘어왔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걸어가던 민우에게 한사람이 다가왔다. 백발에 검은 수염을 기른 중년 남자였다.
“혹시 미스터 강? 강민우, 맞나요?”
한국인이었다면 누구인지 생각이라도 해보련만 외국인이다.
“맞습니다. 실례지만 누구신지요?”
“아, 저는 제프리라고 합니다. 무인도 잘 보고 있어요. 실례가 안 된다면 사인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정중한 물음에 민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첫 외국인에게 하는 팬서비스다. 사진도 함께 찍어주었다.
“고맙습니다. 다음에 또 봅시다.”
제프리가 즐거워하며 떠나자 홍경섭이 민우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저번에 왔을 때는 아무도 몰라봤는데 지금은 알아보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생겼네.”
“그러게. 근데 다음에 또 보자는 건 무슨 의미일까?”
“팬이니까 또 보고 싶다, 그런 의미겠지.”
“그런가?”
생각을 털어버릴 때, 또 다른 사람이 다가왔다.
“혹시 무인도에 나오는 분 맞나요?”
“아. 맞습니다.”
“어머! 잘 보고 있어요! 저도 사인 좀 부탁드려도 돌까요?”
근데 한 명이 아니다.
모인 사람은 대략 스무 명 정도?
동양인의 구분이 어려워 혹시나 하다가 사인을 받는 모습에 하나둘 다가온 것이다.
순식간에 즉석 사인회가 열렸다.
홍경섭이 흐뭇하게 웃었다.
“우리 민우 많이 컸네. 미국에 팬도 생기고.”
“내 팬이라기보다는 무인도 팬 같던데.”
“원래 다 그렇게 시작하는 거지. 그러다가 우리 민우 매력에 풍덩 빠지는 거고.”
“호들갑은. 늦겠다, 얼른 가자.”
팬서비스를 마친 민우는 렌터카를 타고 마크의 사무실로 이동했다.
출연자 30명이 모두 출연하는 건 아니다. 그나마 비중이 있었던 TOP 8만 따로 모았다.
한데 모인 출연자는 6명뿐. 하오란과 타케시는 각자 사정이 있어서 참석을 못 했다고 한다.
스튜디오로 꾸며진 곳은 이미 촬영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민우를 발견한 엘 리가 손을 흔들었다.
“민우! 우승 축하해.”
“네 도움도 컸지.”
“그럼 그림값 50유로는 안 받는 거로 그 신세를 갚는 건 어때?”
“놉. 정당한 가치를 지불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귀중함을 잊게 돼. 혹시 그러기를 바라?”
“어휴, 예술가들이란. 알아듣기 힘든 말을 잘도 하지.”
“쉽게 말해서 공짜 밝히면 대머리 된다는 뜻.”
민우의 말에 엘리가 깔깔 웃었다.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정해진 자리에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참가자는 스태프의 안내에 따라 의자에 적힌 이름대로 앉았다.
배치는 우승자인 민우가 센터를 차지했고, 등수에 따라 좌우로 퍼졌다.
정장을 입은 마크가 입을 열었다.
“공지했던 대로 오늘은 생방송으로 진행됩니다. 미리 나눠드린 큐시트는 숙지하셨기를 바랍니다. 그대로 진행할 테니까 말실수하지 않도록 충분히 생각하고 답변하시고요. 아시겠습니까, 마이클?”
“왜 저만···. 명심하겠습니다.”
마크의 험악한 눈빛에 마이클이 온순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을 확인하던 마크는 방송 시간이 되자 사인을 보내고 마이크를 쥐었다.
“안녕하십니까, 시청자 여러분. 오늘은 무인도의 비하인드 스토리와 하이라이트를 비롯한 간단한 인터뷰를 여러분과 함께 진행해보고자 합니다.”
스태프는 모조리 시청자 반응을 살피는 데 투입되었다. 시청자가 5만을 넘어 10만을 향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 언어로 떠들어대는 채팅창은 도저히 혼자서 감당하기 힘들다.
그래도 눈이 빠져라 채팅창을 보며 질문을 수집하는 데 집중했다. 2부에서 Q&A 시간이 있는 탓이다.
참가자의 반대편 스크린에도 채팅을 볼 수 있게 해두었지만 웬만한 동체 시력으로는 채팅을 읽기 힘들 정도.
“우선 참가자들과 인사부터 나눠보도록 하죠. 반갑습니다, 여러분. 모두 잘 지내셨습니까? 마이클은 어때요? 지금 여기 모인 분 중에 가장 먼저 탈락하셨는데.”
“방송을 보니까 루팡이 고맙게 느껴지더군요. 어우 막판에는 아주 그냥 사람 사는 게 아니던데. 다들 어떻게 버텼는지 모르겠어요.”
“상금이 걸려있으니 잘 버텼겠죠. 그럼 마이클은 이제 루팡에게 원한이 없나요?”
“네. 쿨하게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이길 자신이 없어서는 아니고?”
장난기 가득한 로버트의 물음에 마이클이 헛기침을 터트렸다.
“크흠. 진 적 없다.”
“그렇다고 하네요. 사실인지는 비하인드 스토리에서 만나보기로 하고 다음 분 만나보죠. 엘리?”
“반가워요, 여러분. 엘리자베스예요. 저는 좀 아쉬웠어요. 일주일 더 있었으면 다이어트 확실하게 했을 텐데.”
“거기서 뺄 게 남았나요?”
“여자에게는 숨겨진 살이 많답니다.”
마이클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어디?”
“숨겨진 살이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혹시 제 변호사와 만나고 싶으세요?”
정말 궁금해서 물은 건데. 마이클은 내심 억울했으나 입술을 말아서 물었다.
참가자들의 가벼운 인사가 지나가고 가장 마지막은 민우의 차례였다.
“지금부터 우승자를 만나볼 시간이군요. 한국에서 온 미스터 강, 강민우입니다.”
“안녕하십니까, 강민우입니다.”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맛있는 것도 먹고 휴식도 취하고 왔습니다.”
-의외로 매력적으로 생겼네?
-몸매가 섹시했지.
“감사합니다.”
“네?”
뜬금없는 민우의 인사에 마크는 어리둥절했다.
민우가 시청자 채팅이 올라가는 스크린을 가리켰다.
“방금 어떤 분께서 제 칭찬을 해주셔서요.”
“그게 보였습니까?”
“네. 보이더라고요.”
민우는 외국인이다. 글씨가 크다지만 영어로 된 글자를 순간적으로 읽어 대답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당장 영어를 언어로 사용하는 참가자를 보라. 스크린에서 글자를 읽을 엄두도 못 내고 있다.
‘채팅에 반응해주면 시청자는 더 몰입할 수 있지. 이거 오늘 방송 재미있겠는데.’
마크는 속으로 싱긋 웃고, 겉으로는 헛기침과 함께 스크린을 가리켰다.
“크흠. 그럼 시청자가 뽑은 하이라이트 장면부터 함께 보면서 이야기하죠.”
주요 장면들이 빠르게 흘러갔다. 정신없던 채팅창이 잠시 드문드문해졌다.
-여기서부터 승리가 갈렸다고 본다. 남보다 빠르게 포인트를 수집해서. 셸터 구축, 피쉬 트랩, 불 피우기까지. 초반 포인트를 독식하고 출발했잖아.
-물고기를 맨손으로 가볍게 잡아버리네.
-저렇게 잡는 게 쉽나요?
-어려움. 당장 다른 출연자도 맨손으로 잡지는 못했잖아.
-손재주도 좋고. 요리도 잘하고. 이미 준비된 우승자 후보였음.
-하아, 시작한다.
-난 이 장면이 제일 좋더라.
-나 이제부터 빌런이 될 거다. 긴장해라. 딱 이런 느낌을 줌.
민우가 살벌하게 웃는 장면에서 마크가 화면을 멈추자 채팅창 폭발했다.
-얘들아 숨 쉬어, 숨.
-저 장면은 진짜 영화를 보는 듯했다.
-나는 혼자 보다가 팬티 갈아입음.
-입은 웃는데 살인자의 눈이야.
“살인자요? 제가 그만큼 연기를 잘했다는 거겠죠? 칭찬 감사합니다.”
-뭐지? 나 영어로 적은 거 아닌데 어떻게 알았지?
민우가 싱긋 웃었다.
“제가 독일어도 해서요.”
갑자기 채팅창에 독일어가 범람하기 시작하자 VJ들이 비명을 질렀다. 영어도 읽기 힘든데 독일어를 어찌 읽겠는가.
이번에는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지금 스태프들이 여러분의 질문을 수집하고 계십니다. 영어가 아니면 질문 채택이 힘들 테니까 참고해주세요.”
순식간에 독일어가 자취를 감추고 영어만 판을 친다.
마크는 속으로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제 보니 진행도 수준급이네. 시청자를 아주 들었다 놨다 하는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