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자회견 (60/223)

기자회견

미국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주변 정리부터 해야 했다.

민우는 류찬수와 미팅 자리를 가졌다.

사정 설명을 들은 류찬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쩔 수 없죠. 좋은 기회가 왔으면 잡아야죠. 그건 그렇고 미국 가시면 바로 촬영하는 겁니까?”

민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절었다.

“오디션부터 봐야 해요.”

“에이. 선수끼리 왜 이러실까. 합격은 떼놓은 당상이고, 우승하느냐 마느냐가 문제 아닙니까?”

“어? 제가 출연하는 프로에 대해서 아세요?”

“물론이죠. 이 바닥에서는 소문이 짜 한데요. 그리고 마크 코튼이랑은 친한 사이예요. 걔가 한국에서 예능 배워간다고 설쳐댔는데 결국 메인 피디도 되고. 성공했나 보네요.”

“아무튼 죄송하게 됐습니다. 산속 생활 반응도 좋아서 기세를 이어가야 할 텐데요.”

“별말씀을.”

손사래를 친 류찬수가 히죽 웃었다.

“정 죄송하시면 좋은 아이디어라도 좀···.”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고민을 좀 해봤거든요. 기주 형님이 계시니까 산속 생활을 배우는 방향으로 잡으면 어떨까 싶어요. 폐가 주변도 좀 꾸며가면서.”

“그럼 민우 씨처럼 능숙하지 않은 출연자를 섭외해도 되겠네요. 고생과 힐링을 함께 한다라.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네요.”

“그럼 이제 빚은 없는 거로?”

“그럼 제가 손해죠. 나중에 미국에서 촬영이 끝나면 제 프로에 다시 출연해주세요. 그럼 빚은 없는 거로.”

민우는 흔쾌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알겠습니다.”

“어디 다치지 말고 오세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프로 출연하시려면 몸이 건강해야죠.”

“하하.”

서로 덕담을 나누고 헤어지려는 찰나.

띠리링.

류찬수의 휴대폰이 울었다.

“잠시만요, 전화 좀 받을게요. 네, 류찬수입니다.”

-저 윤동호입니다.

“아, 네. 동호 씨. 어쩐 일로 전화를 다?”

-제가 드렸던 위약금, 돌려주셨으면 해서 전화했습니다.

류찬수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걸 왜 돌려 드려야 하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말씀해주시겠어요?”

-제가 다쳐서 하차했잖습니까. 계약서의 위약금 조항은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을 경우라고 돼 있습니다. 그럼 계약 위반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거 보세요, 윤동호 씨.”

-네. 듣고 있습니다.

“제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기자한테 다쳐서 하차했다고 기사를 냈어요. 실제로 윤동호 씨가 다쳤습니까?”

-네. 제가 다친 건 팩트거든요. 진단서도 끊어놨습니다.

“제 손에는 증거가 없으리라고 봅니까?”

수화기 건너편에서 흐흐,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류찬수는 속이 뒤틀림을 느끼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나자 겨우 속이 진정되었다.

-제가 하차하겠다고 했을 때 근처에 카메라가 있었습니까? 없었죠? 그럼 어디에 증거가 있습니까?

“오디오는 생각 안 하십니까?”

-제가 마이크를 벗어두고 갔으니까 없겠죠. 혹시 요즘은 스태프도 마이크 차고 촬영합니까? 그럼 할 말 없고요. 아, 주변에 VJ도 없었으니까 딴소리 마세요.

오디오를 확인해 봐야 알겠지만, 윤동호의 말이 맞을 거다. 편집할 동안 특이점은 발견하지 못했으니까.

그가 태업을 한 적은 없다. 다만 더럽게 존재감이 희미해서 살릴만한 그림이 없었을 뿐. 무슨 활약을 해야 방송에 내보내지.

아, 하나 있긴 했다. 물에 빠지던 장면.

스태프가 가지고 있는 비하인드 영상도 민우와 말싸움을 했던 정황뿐이다. 이거로는 인성 논란은 부추길지언정 위약금을 받을 정도까지는 아니다.

영상을 까봤자 안 그래도 인성 나쁘다고 소문이 난 놈이라 그리 큰 타격도 없다. 그렇다고 팬덤이 단단한 것도 아니고.

데릭 때와는 달리 공개했을 때 오히려 이쪽이 손해다.

-방송 보니까 아주 즐겁게 지내시던데. 마치 제가 가기를 기다렸단 듯이 말이죠. 제가 입을 열면 다칠 사람 많을 겁니다. 그러길 바라시는 건 아니겠죠?

“아무리 떼를 써도 위약금은 못 돌려드립니다. 억울하면 소송하세요.”

-좋습니다. 그럼 제 하차는 철회하고 시즌 2부터 출연하는 거로 퉁치죠.

류찬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놈이 바라던 상황이 바로 이것이다.

출연료 500만 원에 남은 3시즌, 총 30회 출연이니까 딱 1억 5천만 원이 떨어진다.

위약금을 돌려달라고 했던 건 이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 분명하다.

“일단 끊읍시다. 사무실 가서 다시 통화하죠.”

민우는 거칠게 전화를 끊는 류찬수를 걱정스레 바라봤다.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보죠?”

“네. 더러운 진상한테 걸린 기분이네요.”

곁에서 류찬수의 목소리만 들었지만 돌아가는 상황은 유추할 수 있었다.

“피디님. 위약금 관련해서는 차일피일 미뤄보세요.”

“위약금 대신 하차를 번복하겠다네요.”

“그 출연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일단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류찬수와 헤어진 민우는 홍경섭과 만났다.

“섭이 너 윤동호 소식 들었어?”

“어쩐 일이냐? 네가 관심을 다 가지고. 그놈이야 이제 망했지. 가진 재산 다 처분해서 아버지 회사 도왔는데 결국 부도났고. 그 바람에 주식은 휴짓조각 됐고. 잘나갈 때 건방이 하늘을 찔러서 불러주는 곳도 없고. 대충 이런 상황이지. 근데 왜?”

“산속 생활에 다시 출연하게 해달라고 류 피디님한테 떼를 썼단다.”

“유태가 시즌 2도 계약했는데. 거기에 끼겠다고?”

남유태는 요즘 멧돼지 아빠로 이름을 알리는 중이다. 이제야 빛을 보려고 하는데 거기에 똥물을 끼얹으려고 하니 홍경섭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자식 안 되겠네.”

“너 뭐 가진 거 있지?”

민우의 물음에 움찔한 홍경섭이 딴청을 부렸다.

“어? 아니. 없는데?”

“너 저번에 촉 좋다고 그랬잖아. 뭔가 알고 있으니까 그런 소리 했던 거 아냐?”

“촉은 니가 좋구나. 제길. 사실은 윤동호한테 피해받은 배우들을 만나고 다녔어.”

“왜?”

“내 친구 인생에 태클을 걸었으면 적어도 옐로카드는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

민우의 한쪽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기왕이면 레드카드로 주자.”

홍경섭도 민우와 비슷한 웃음을 지었다.

“노란 거보다 빨간 게 낫긴 하지.”

우선 준비를 해야 한다. 둘은 할 일을 나눴다.

“너는 배우들한테서 증거를 얻어와.”

“증거?”

“내가 알기로 차상열은 오디션에 합격하면 자기가 직접 문자를 보내거든. 나도 그랬고. 혹시라도 그 문자를 보관하고 있다면 받아 오면 돼.”

“차상열이라···. 둘을 한꺼번에 건드리게?”

민우가 고개를 저었다. 만약 둘이 손을 잡게 되면 이기기 힘들다.

“아니. 둘을 갈라놓을 생각이야.”

“윤동호의 수중에 돈이 말랐으니 충분히 가능하겠네.”

돈으로 인간관계를 사고 유지하던 사람이다. 분명히 지금쯤이면 그의 주위에 사람이 남아있지 않을 거다.

있다 하더라도 불리한 상황에 부닥치게 되면 냅다 꽁무니를 뺄 게 뻔하고.

“나는 차상열을 만나 볼게.”

차상열의 연락처를 받아 약속을 잡았다. 그도 민우를 섭외하기 위해 애태우던 상태라 쉽게 수락했다.

약속장소는 수유동. 주인이 건물주라 장사에 관심이 없고 취미로 운영하는 호프집이다.

약속한 날짜가 되자 민우는 먼저 도착해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평일 저녁이라 손님은 없었다.

캡 모자에 마스크를 해서 의심스러운 복장이지만, 이곳의 손님 대부분이 민우와 흡사한 차림새로 들른다.

문이 열리며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민우가 손을 번쩍 들어 그를 불렀다.

“여깁니다.”

어리둥절한 차상열이 민우의 맞은편에 앉았다.

“수유리에 이런 곳이 있었네요.”

정확하게는 ‘수유동’이지만 ‘수유리’라고 부르는 사람도 많다.

“안녕하셨습니까, 피디님.”

“정말 오랜만이네요. 한 육 년 됐나요?”

정확하게 따지자면 5년이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대꾸하지 않았다.

“뭐라도 드시겠습니까?”

“여기는 처음이라. 뭐가 있습니까?”

“간단하게 맥주로 하죠. 이곳 수제 맥주가 제법 괜찮습니다.”

수제 맥주와 안주로 소시지구이를 주문했다.

그리 오래 걸리는 안주가 아니기에 술과 안주는 금방 나왔다.

“그럼 이야기를 들어보죠. 왜 저를 만나려고 하셨는지. 혹시 제가 연출하는 드라마에 출연하실 생각이라도?”

“그런 거 아닙니다.”

단호하게 잘라낸 민우는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소시지도 한입 깨물고 우물우물 씹어 삼켰다.

“혹시 윤동호와 요즘도 연락하십니까?”

“이번 드라마 말아먹고 연락 끊겼죠. 녀석도 사정이 안 좋은 상태고.”

예상대로다. 대답의 뉘앙스나 얼굴 표정에서 윤동호와의 불편함이 느껴진다.

이 정도라면 계획대로 진행해도 될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렇군요.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기자회견을 생각 중입니다.”

민우의 말에 차상열은 맥주를 뿜을 뻔했다.

“기, 기자회견을요? 갑자기 기자회견은 왜···.”

“오 년 전, 제 오디션에 관해서 기억하시죠?”

“크흠.”

“그냥 넘어갈까도 생각했는데, 자꾸만 저를 이용하려 들어서 말이죠.”

이번 ‘산속 생활’ 예능도 그렇다. 사람이 양심이 있다면 사과부터 해야 도리 아닐까.

그래, 사과는 성격상 못했다고 치자. 온전한 정신 상태의 사람이라면 자신이 피해를 준 사람에게 쉽게 낯짝을 들이밀지 못할 거다.

“저한테 원하는 게 뭡니까?”

“윤동호를 손절할 타이밍을 재고 있죠?”

“허허. 오해하기 딱 좋은 말씀이신데요.”

“기자회견이 그 타이밍이 될 겁니다.”

차상열이 자세를 바꿔 앉았다. 팔꿈치를 탁자에 올린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감당해야 할 피해는요?”

민우의 눈썹이 꿈틀했다. 차갑고 냉정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걸 제가 왜 신경 써야 합니까? 저한테는 윤동호나 피디님이나 마찬가지인데.”

“크흠흠.”

“선택은 피디님이 하시기 바랍니다. 버릴 건지 같이 빠져 죽던지.”

더 있어봤자 역효과만 난다. 민우는 일부러 화난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가게를 빠져나갔다.

차상열을 흔들었으니 결과는 금방 나올 거다. 탐욕스러운 그라면 분명히 윤동호를 버릴 거다.

아니나 다를까, 민우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딱 이틀이 지나자 차상열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앞으로 좋은 관계 유지하기를 바랍니다.

“좋은 관계는 무슨.”

어차피 차상열도 같은 놈이다.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이 자도 결코 빠져나가지 못하게 할 거다.

문자를 확인하고는 코웃음을 친 민우가 홍경섭에게 말했다.

“섭아, 기자들 모아줘.”

준비는 끝났다.

이제 긴 악연을 끝낼 때가 왔다.

* * *

민우의 기자회견 소식에 류찬수가 비하인드 영상으로 돕겠다며 연락이 왔다.

“참으세요. 연속으로 영상 터트리면 피디님만 곤란해질 겁니다. 이번에는 저한테 맡기세요.”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세요.

도움은 필요 없을 것 같다. 워낙 지은 죄가 많은 사람이라.

기자회견 당일.

“우선 바쁜 시간을 내주신 기자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십여 명의 기자들이 민우의 입만 바라보고 있다.

“제가 이렇게 기자회견을 하게 된 이유는 미리 자료를 배포했다시피···.”

거기까지 말했을 때, 기자회견장의 문이 벌컥 열리며 윤동호가 난입했다. 예전의 여유 넘치고 부티나 보이던 그는 어디로 갔는지 초췌한 모습.

“이거 다 거짓말입니다!”

민우는 어처구니가 없어 코웃음을 쳤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공식 석상이라 존대를 해야 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아무튼 저 사람이 하는 말은 모두 날조입니다!”

민우가 기자들을 보며 물었다.

“기자회견이 엉망이 됐네요. 윤동호 씨와 이야기를 나눠도 될까요? 아무래도 진솔하게 대화를 나눠야 할 것 같은데요.”

딱 봐도 싸움이 일어날 분위기다. 어떤 기자가 거절하랴. 기자회견이 아니라 이 장면을 활자로 내보내는 게 조회수도 더 높을 거다.

기자들이 격하게 반기고 있는데,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한 기자 하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기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기자회견에 집중을 해주셨으면···. 읍읍!”

“쟤 누구야! 끌어내!”

기자 하나가 끌려나가는 해프닝이 있고 나서야 어수선한 분위기가 정리되었다.

윤동호를 보며 민우가 물었다.

“아까 제가 하는 말은 모두 날조라고 했죠? 날조가 아니라 증거가 있다면 어쩌겠습니까?”

“가짜증거겠죠. 제가 다친 건 팩트고, 그것 때문에 하차했으니까.”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민우는 A4 용지 한 장을 들어 올렸다.

“여기에 제가 5년 전 오디션에 합격했다는 문자와 합격이 취소됐다는 문자를 옮겨 적었습니다.”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됩니까? 가끔 일어나는 일 아닙니까. 제작사나 작감의 사정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렇죠. 일어날법한 일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저와 같은 일을 겪은 사람이 무려 4명이나 더 있습니다. 그것도 똑같은 피디에게서. 그중 두 분은 은퇴하셨고, 두 분은 아직 현역이시고요. 그분들이 물러난 자리에는 하나같이 윤동호 씨가 들어갔더군요.”

홍경섭이 종이를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페이퍼를 확인한 윤동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윤동호가 눈을 번쩍 떴다.

“이 증거가 사실이라고 증명할 수 있습니까? 본인이 옮겨 적었다고는 하지만 지어냈는지 어떻게 압니까?”

“휴대폰 화면을 공유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거로는 증거라고 할 수 없죠.”

“그래요? 그렇다면 직접 당사자와 통화를 해봐야겠네요. 제가 나눠드린 종이에 전화번호가 있을 겁니다. 중간 번호가 빠졌지만 알아보는데 어려움은 없을 거로 생각합니다.”

어쩐지 눈에 익다 싶었더니 차상열의 전화번호다. 이 멍청한 놈이 스태프에게 시킬 것이지 본인이 직접 문자메시지를 보낸 거다.

“그럼 전화를 걸어서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범인이 범죄 사실을 밝힐 리가 없지 않은가. 윤동호는 조금 안심한 얼굴로 비릿하게 웃었다.

민우는 스피커폰으로 차상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루, 딸칵.

-네, 차상열입니다.

“안녕하십니까, 피디님. 강민우입니다.”

-아! 알지, 알지. 강 배우님 오랜만입니다.

차상열이 오랜만에 연락을 받은 척 연기를 한다. 배우를 해도 될 정도로 능청스럽게.

“지금 기자회견 중에 스피커폰으로 통화하는 중입니다.

-네? 왜요?

“제 앞에 윤동호 씨도 와있고요. 우리 둘 사이에 꼬인 사정이 있어서 풀려고 합니다.”

-그래요? 저에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길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거 같고, 짧게 한 가지만 여쭤볼게요. 5년 전, 제가 오디션에 합격했다는 문자를 피디님이 보내셨죠?”

-그···랬죠. 보통 합격자에게는 제가 직접 문자를 보냈으니까요.

“갑자기 합격 취소 통보도 일방적으로 하셨죠. 아무런 이유도 설명해주지 않으셨고요.”

민우가 윤동호를 바라봤다. 그는 여유로운 얼굴로 태연하게 앉아있었다. 곧 저 느긋한 표정은 박살 나게 될 거다.

“저는 물론 다른 배우님들의 불합격에도 윤동호 씨가 개입했습니까?”

잠시 침묵을 지키던 차상열이 말문을 열었다.

-음···. 대답부터 드리자면, 네. 맞습니다. 당시 윤동호 씨가 아버지를 대리해서 드라마에 제작비를 지원했거든요. 만약 강민우 씨의 합격을 취소하고 자신을 넣지 않으면 제작비를 빼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차상열은 모든 것을 윤동호에게 뒤집어씌웠다.

-다른 배우님들은 약점을 쥐고 계속 협박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합격을 취소시켜야 했습니다.

윤동호의 느긋한 표정이 와장창 깨져나갔다.

“무슨 개소리야!”

“대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통화를 끝낸 민우가 윤동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돈을 현금으로 주는 게 아니었어. 계좌이체라도 했다면 증거가 남아 있었을 텐데. 빌어먹을!”

“자, 날조가 아니라는 증명은 했고. 날조라는 증명이라도 하겠습니까?”

윤동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궁지에 몰렸던 쥐새끼가 빠져나갈 구멍을 발견한 것처럼 안색도 환해졌다. 그는 곧바로 스피커폰으로 차상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왜?

“형 솔직히 말해. 내가 제작비로 협박했다고? 왜 거짓말을 하고 그래? 내가 출연료를 반납했고, 그건 작가랑 형이 나눠 가진 거잖아! 그 대가로 강민우 배역을 나한테 줬던 거고!”

궁지에 몰리니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함께 죽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당연히 차상열은 오리발을 내밀었다.

-무슨 돈? 나한테 돈을 줬다고?

“진짜 이러기야? 당장 사실대로 말하라고!”

-나는 사실만 말했어. 더는 이런 일로 통화하기 껄끄럽다. 끊는다.

기자들의 타이핑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모든 일은 의심할 여지 없이 윤동호의 잘못으로 드러났다.

전투 의지를 잃고 넋이 나가 버린 윤동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누구 하나 그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없다.

빅 매치를 관람하던 기자가 민우에게 물었다.

“왜 문자를 남겨뒀나요? 혹시 이런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뇨. 다들 영원히 남겨두고 싶은 순간이 하나쯤은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 문자를 받았을 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감격스러운 순간이었거든요. 미래를 꿈꿀 수 있다는 기대감도 있었고요. 비록 결과는 시궁창이었지만.”

기자회견이 끝나자 수많은 기사가 인터넷에 떠돌기 시작했다.

「추악한 윤동호의 민낯이 까발려졌다. 피해자만 무려 5명!」

마지막 기회를 노려 재기를 꿈꾸던 윤동호는 모든 것을 잃고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차상열 당신이 나한테 그러면 안 됐어. 나 혼자 죽기에는 너무 억울하거든.”

두 눈을 번들거리며 이를 악문 윤동호는 복수를 다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