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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된 설마 (59/223)

현실이 된 설마

집으로 돌아온 윤동호는 곧장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야. 산속 생활 계약서 확인 좀 해봐. 위약금 조항 있는지.”

-잠시만. 어···. 있네. 이건 왜?

“그 위약금 1억 5천 준비해. 혹시 모르니까 변호사랑 계약서도 꼼꼼하게 살펴보고. 독소조항은 없는지, 아니면 뭐라도 걸 수 있는 거 있으면 다 걸어버려. 나만 손해 볼 수는 없잖아.”

-또 무슨 일인데?

매니저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와인 한 잔을 들고 푹신한 소파에 앉으니 그간의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다.

“예능도 잘하면 돈이 되는데 아쉽구만. 다른 곳이라도 알아봐야겠어.”

원래 윤동호의 1억 몸값 중 절반은 그의 아버지 회사가 비밀리에 제작비를 보태는 형태로 뻥튀기했던 거다. 그 작업을 도와준 사람이 차상열이고.

그가 인기를 얻으면서 아버지 회사의 주식도 올랐기에 일거양득이었다.

이후 서브주연을 거쳐 주연까지 성장했다. 출연한 작품들도 적당한 흥행을 하며 승승장구.

하지만 그의 운도 다했는지 최근 작품들이 연거푸 물을 먹었다.

이제 정체된 몸값을 다시 뻥튀기하려면 지금보다 흥행력을 높여야 한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예능이었다.

이석하가 하는 꼴을 보니 거저먹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결과는 돈만 날렸다.

쓰린 속을 와인으로 달래는데.

띠리리링!

벨소리에 발신자를 확인하니 본가다.

“네, 아버지. 돈요? 돈은 왜요?”

윤동호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발목을 붙잡고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얼마가 필요하신데요? 어음 10억만 막으면 돼요? 알겠습니다.”

뒤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윤동호는 돈을 보냈다. 아버지 회사가 없으면 그의 힘도 반감되기 때문이다.

“위기를 벗어나면 주식을 처분해서 손해를 메꿔야겠네. 후···. 일 더럽게 꼬였어. 이렇게 되면 믿을 건 달콤한 선율의 해외 방송뿐인가.”

잘 풀리면 해외에서 인기를 얻을 수 있을 거다. 그럼 해외로 진출할 수 있을 테고. 한류스타는 거액을 벌 수 있다. 거기까지만 가면 그의 위치는 확고하게 다져질 터.

“조금만 더 버텨보자. 조금만.”

그의 눈은 간절함으로 가득했다.

* * *

의외로 고라니 고기는 냄새가 많이 난다. 냄새를 확인한 민우가 말했다.

“그냥 구워서 먹기에는 힘드니까 고추장 불고기로 해 먹죠.”

“좋지!”

김기주가 군침이라도 흘릴 기세로 민우의 의견을 반겼다.

“유태는 불 피우고, 원재는 쌀 좀 불려줘.”

“네, 형.”

마른 나뭇가지들을 끌어모으고 있자 김기주가 한쪽 구석을 가리키며 물었다.

“장작은 없어? 원래 저기 장작을 쌓아뒀었는데.”

“글쎄요. 거기는 올 때부터 텅텅 비어 있었어요.”

“그래? 그럼 잠깐 기다리고 있어 봐. 얼른 집에 다녀올 테니까.”

김기주는 말리기도 전에 바람처럼 달려갔다. 이내 외발 수레를 끌고 나타났는데, 수레에는 세로로 절반이 잘려 나간 드럼통과 참나무 장작이 잔뜩 실려 있었다.

“이건 내가 직접 만든 거야. 그릴은 스테인레스 봉이고.”

옆에서 드럼통을 내리던 목원재가 고개를 갸웃했다.

“손재주도 좋으신 거 같은데 왜 요리는 못하세요?”

“그러게 말이다. 이참에 민우한테 좀 배워야겠다.”

드럼통을 눕히고 안에 장작을 채웠다. 그 위에 그릴을 올리니 조립이 끝났다.

“유태랑 원재가 장작을 잘게 쪼개서 불 좀 피워줘.”

둘이 일을 하는 동안 김기주는 칼을 들었다.

“고기는 얇게 썰어야겠지?”

“네. 부탁드릴게요.”

그가 고라니 뒷다리에서 살을 얇게 발라내는 동안 민우는 양념을 준비했다.

고추장에 간장을 붓고 다진 마늘과 양파 등 각종 재료를 넣고 섞었다.

고추장 불고기만 먹으면 물릴 수도 있으니까 간장을 베이스로 한 양념도 만들었다.

양념에 고기를 잠시 재워두고 다른 것들도 준비했다.

자고로 캠핑에는 감자와 고구마, 옥수수를 구워 먹는 게 제격이 아니겠나.

김기주가 가져다준 것 중에 실한 것으로 골랐다. 그것에 젓가락으로 서너 번 찔러서 준비해두고, 가마솥에 밥도 안쳤다.

모든 준비가 끝나니 캠핑 온 기분이 든다.

“그럼 슬슬 시작해보도록 하죠.”

민우의 선언에 모든 사람의 이목이 쏠렸다.

아직 타고 있는 불은 한쪽 구석으로 치우고 은은한 열기가 남은 숯은 반대편으로 몰았다.

숯 위에 감자와 고구마를 털어 넣고, 그릴 구석에는 옥수수를 올렸다.

마지막으로 은은한 열기가 남은 숯 위의 그릴에 양념 된 고기를 올리는 순간.

치이익-!

소름이 돋는 소리와 함께 맛있는 냄새가 사방에 퍼져나갔다.

컵라면에 햇반만 먹으며 버티던 스태프들이 군침을 꿀꺽 삼켰다.

“고기는 많으니까 컷 넉넉하게 따고 나면 같이 드시죠.”

스태프라고 해봤자 6명이 전부다. 출연자와 김기주까지 합쳐도 10명. 준비한 음식은 충분했다.

고슬고슬하게 잘 된 가마솥 밥에 불고기, 거기에 후식으로 군감자, 고구마, 옥수수까지.

류찬수가 헛웃음을 흘리며 고라니 고기를 집었다.

한입 깨무니 매콤달콤한 양념이 입맛을 사로잡고, 이내 고소한 육즙이 입안에 확 퍼졌다.

“윤동호가 이런 상황을 바랐었겠지. 조금만 버텼으면 원하는 대로 됐을 텐데 고작 반나절을 못 참다니.”

“먹을 복이 없는 거죠.”

열심히 배를 채우던 김기주가 커다란 병을 들어 올렸다.

“여기서 술이 빠지면 안 되겠지! 내가 산에 들어오자마자 하수오를 캐다가 담근 술이야. 다들 한 잔씩 하자고!”

모든 사람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가 서른 즈음에 입산했다고 들었으니, 10년은 족히 넘은 술이다.

겨울 산의 밤은 맛있는 음식과 함께 깊어가고 있었다.

* * *

겨울 산이 힘들기는 했으나 현지인 김기주 덕분에 힐링하고 돌아왔다.

사흘 쉬고 다시 일주일을 더 촬영했더니 시즌 1의 녹화가 끝났다.

시즌 1의 컨셉은 겨울이고, 시즌 2는 봄이라 4월이나 5월쯤에 다시 녹화를 시작한단다.

류찬수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과 칭찬을 하고 다닌 덕분에 방송가에서는 민우에 관한 소문이 돌았다.

그 소문은 바로 예능 천재.

예능계의 블루칩이 된 민우에게 많은 피디가 선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 찾아왔다.

“저 배우예요. 이번에 드라마 할 생각입니다.”

“좋은 재주를 왜 썩히려고 그러세요? 예능 합시다. 시청자들이 원한다니까요?”

“이번에 마음에 드는 시나리오를 발견해서요. 거기 들어갈 겁니다.”

“좋습니다. 그럼 아이디어라도 들어보세요. 만약 별로라고 하시면 포기할게요.”

도무지 그냥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인다. 민우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 알겠습니다. 어떤 예능인가요?”

“혼자서 하루를 보내는 겁니다. 강민우 씨의 다양한 재주로 혼자 놀기를 하는 거죠.”

“안 합니다. 살펴 가세요.”

21일을 수백 년간 보냈는데 또 그 비슷한 경험을 하라니. 안 한다. 죽어도.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로.

민우가 드라마와 영화 대본을 살펴보며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드디어 ‘엔플릭스’에서 ‘언더커버 파티쉐’가 방영을 시작했다.

“민우야!”

“왜 호들갑인데?”

“터졌다, 터졌어!”

“이제 네가 터졌다 그러면 불안하다. 뭔데?”

홍경섭이 홍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일본 5위!”

“뭐가 5위? 설마?”

“그래, 드라마! 우리 드라마에는 한류스타가 없잖냐. 그래서 시작은 미미했거든? 그런데 어느 순간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하더니 일본에서 갑작스레 5위에 들어가 버린 거야. 지금도 순위는 계속 오르는 중.”

“일본에서만?”

“아시아권은 모조리 5위 안에 들어갔다. 이제 한류스타라고 불릴 날도 머지않았다는 거지.”

“과장이 너무 심한 거 아냐? 드라마 하나 떴다고 한류스타 되면 우리나라에 한류스타 아닌 배우가 없겠다.”

“진짜 나쁘다. 꿈은 꿀 수 있는 거잖아!”

“내 꿈도 그거다. 내 말은 현실을 직시하자는 거지. 근데 기사는 좀 나왔어?”

신문 기사를 살펴봤으나 아직 이렇다 할 기사는 없었다. 하나가 있기는 했지만 짤막한 단신쯤으로 치부되었고.

기사를 클릭해봤다. ‘엔플릭스’에서 자체적으로 광고를 하며 밀어준 것도 있지만, 배우들의 연기력도 대단하다며 호평이라나.

홍경섭이 실실 웃으며 물었다.

“그건 그렇고 너 윤동호 소식 들었어?”

“전에도 말했던 거 같은데. 그 사람 소식을 굳이 찾아볼 리가 없다고.”

“큭큭큭.”

“뭔데? 웃지 말고 말을 해.”

“엔플릭스에서 성적이 저조하단다. 특히 까이는 게 바이올린 연주와 음악이 싱크가 맞지 않아서 몰입감이 떨어진다는 거고. 아니, 바이올린 드라마인데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게 실제 같지 않으면 어쩌란 거야?”

“우리나라에서도 시청률이 별로 아니었어?”

“그것도 컸지. 자국에서 별 볼 일 없던 드라마가 해외에서 먹히는 경우가 전혀 없는 건 아니거든. 근데 그 예외에 들어가지 못한 거지.”

민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판권 판매도 포기하고 계약금도 깎아서 들어갔다며? 그거 감당 돼?”

“안되지. 그리고 가장 즐거운 게 뭔 줄 알아? 윤동호가 해외에서 먹히지 않는다는 걸 증명한 꼴이 됐다는 거야.”

윤동호의 최근 작품 3개가 어중간한 성적을 거뒀다.

쇼 비즈니스 세계는 미신에 민감하다. 영화를 찍기 전에 고사를 지내는 것도 그렇고.

외국이라고 다를 바 없다. 오죽하면 타이타닉도 바다를 무대로 한 영화는 망한다는 속설 때문에 투자자가 붙지 않았으니까.

상승하던 기세가 떨어지는 모양새에 마지막 기회라 생각한 OTT까지 실패했으니. 제작사에서는 이제 윤동호 쓰기를 꺼릴 거다.

혹시나 작감(작가와 감독)이 간절히 원한다면 또 모르고. 그런데 그들도 미신을 믿는 건 매한가지라 과연 어떨지.

“걔 아버지 회사도 힘들다더라.”

“무선통신장비 만든다던?”

“응. 아들 인기만 믿고 무리하게 확장하다가 자금이 말랐다더라고. 윤동호가 집이며 차며 돈 될만한 건 싹 내다 팔아서 어찌어찌 막았다는데. 앞으로 어떻게 될지.”

“넌 그런 걸 잘도 안다?”

“관심을 가지고 보고 있으니까. 너도 관심 좀 가져라. 니 인생에 똥칠 한 놈인데. 그리고 놈의 고난은 이제 시작이야. 나 촉 좋은 거 알지?”

민우는 손사래를 쳤다.

“그 이야기는 내리막의 끝에 가서 다시 듣기로 하자.”

“아참! 내 정신 좀 봐. 너한테 제일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는 게 깜빡했네.”

“뭔데 그래? 설마 안 좋은 소식은 아니지?”

“그런 거 아냐. 마크 코튼이라고 알아?”

“외국인이라는 건 알겠다.”

“미국의 버라이어티쇼 프로듀서인데, 이번에 전 세계 사람을 대상으로 오디션을 열었어. 역시 나라가 크니까 스케일도 남다르다니까.”

“좋아, 흥분 그만하고. 어떤 내용인데?”

“너한테 딱 맞는 버라이어티쇼야. 출연료 회당 10만 달러. 탈락하기 전까지 누적 지급. 이게 끝이 아냐. 우승상금은 100만 달러.”

역시 천조국. 억 소리가 절로 나온다.

원래 세상에 공짜점심은 없다. 민우는 고민에 빠졌다. 그런데 마냥 거절하기에는 너무 큰 돈이다.

“돈을 많이 준다는 건 힘들다는 뜻인데.”

“대신 통장을 확인하면 뿌듯하겠지. 그리고 지금 그렇게 고민하지 않아도 돼. 서류접수부터 해야 하거든. 거기서 떨어지면 기회도 없는 거지.”

“올해 산속 생활 계속 촬영해야 하지 않아?”

“우선 서류심사부터 통과하고 보자고. 일정이야 맞추면 되고.”

“무슨 예능인데?”

“별거 아냐. 그냥 무인도에서 끝까지 살아남으면 이기는 거야. 영화 캐스트 어웨이 알지? 그걸 오마주 한 포맷이야. 거기에 경쟁 시스템을 도입한 거지.”

민우가 어처구니없어하며 홍경섭을 바라봤다.

“그게 별거 아니라고? 그럼 어떤 내용이 별건데? 지옥에서 기어 올라오기 정도는 돼야 별거야?”

“무인도에서 살기는 안 배웠어?”

“그런 거 가르쳐 주는 곳은 없더라. 아무튼 그 섬은 어디 있는 건데?”

“태평양 어디래.”

21일을 반복하면서 수많은 재주를 익혔지만 태평양에서 서바이벌은 해보지 못했다. 거기까지 가는데 만해도 하루가 넘게 걸리는데 어떻게 경험을 해보겠나.

산과 섬은 식생 자체가 다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산뿐만 아니라 국내 섬에서도 서바이벌을 해볼 것을.

“너무 걱정하지 마. 서류 통과가 먼저잖아. 떨어질 가망성도 높아.”

“그래. 설마 통과하겠어? 아시아의 그저 흔한 연예인인데.”

혹시 모르니까 생존 다큐멘터리도 꼼꼼하게 시청했다.

그리고 그 설마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민우야 오디션 준비하자. 서류심사 통과했다.”

민우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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