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힐링이야
한파가 휘몰아칠 것만 같은 민우의 목소리에 윤동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순간 자신이 긴장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다.
발끈해서 원래 성격대로 싸울 수도 있다. 그러나 주변의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아니지만···.”
“너는 아랫목에서 따뜻하게 쉬고 있을 동안 우리는 일하고 왔어. 일당으로 먹을거리를 얻어 왔다고.”
민우가 폭발한 것처럼 보이자 윤동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 정도면 자신이 피해자임을 충분히 어필했다.
눈치가 비상한 편인 그가 이때껏 당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찍소리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인가. 모두 카메라를 이용하기 위함이었다.
거기다 요즘 기세가 좋은 강민우도 까내리고, 그의 인지도를 고스란히 흡수하는 것. 그게 바로 윤동호가 노리는 것이었다.
자신이 당하던 모든 장면이 방송에 나가면 시청자는 자신의 편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으면 된다. 선즙필승. 먼저 사과를 해버린다.
“미안하다. 내가 좀 예민했어.”
말은 사과인데 표정은 아니다. 민우의 눈썹이 꿈틀했다. 놈의 성격상 이렇게 숙이고 들어온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던 탓이다.
‘평소와 다르다는 것은 뭔가를 노리고 있다는 거지.’
그게 무엇인지는 길게 생각하지 않아도 파악이 가능했다.
팬들 사이에서도 윤동호의 인성은 유명하다. 값이 싼 선물은 버린다거나, 비싼 선물만 SNS에 올린다거나 하는. 팬 서비스가 별로 좋지 않다는 소문.
이런 이미지를 한 방에 없애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건 바로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 매개체로 예능을 선택한 것이리라. 사실은 꾸며진 자신의 모습을 진실처럼 보여줄 생각이었겠지만.
그러나 민우도 연기라면 자신 있는 사람이다. 놈이 지금 연기를 하고 있다면 연기로 받아치면 될 뿐.
“우리끼리 먹고 왔다니까 서운할 수도 있지. 몸은 좀 어때? 괜찮아?”
방금까지 차갑던 그가 갑자기 얼굴 가득 걱정을 담고 묻는다. 당황한 윤동호가 두 눈을 끔벅거렸다.
“뭐?”
“일단 저녁거리는 구해왔으니까 쉬고 있어.”
자신의 의도가 빗나간 듯 보이자 윤동호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자존심마저 내려놓았는데 아무런 소용도 없으니 오죽할까.
더군다나 리얼 버라이어티에서 쉬고 있으면 방송에 얼굴을 비추지 못한다.
이미 오늘 점심때까지 카메라 앞을 떠났었다. 오후까지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하루를 모두 날리게 된다.
민우는 부엌으로 걸어가며 목원재를 불렀다.
“원재, 뭐해? 그거 들고 다닐 거야?”
“아닙니다, 갑니다! 죄송합니다, 동호 형님.”
목원재가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고 민우를 뒤따랐다.
홀로 남겨진 윤동호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는 굶고만 있을 수 없어서 스태프에게 컵라면과 햇반을 얻어먹었다.
뒤에서 스태프가 탄수화물 안 먹는다더니 라면에 햇반까지 먹는다며 투덜거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에 남았던 스태프는 VJ다. 피디나 카메라 감독도 아닌데 신경 쓸게 무언가. 설령 감독들이었다고 해도 당당하게 요구했을 거다. 굶다가 쓰러질 수는 없으니까.
‘오랜만이네. 이런 취급을 받는 것도.’
까마득한 예전, 단역을 전전할 때나 받았던 수모를 지금 다시 겪고 있는 기분이다.
‘목원재 이 자식도 은혜를 원수로 갚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참아본다.’
가까스로 화를 억누르고 멤버들이 있는 부엌으로 향했다.
“텃밭을 좀 갈아 엎어둬야겠다. 비료는 기주 형님한테 얻어 오고.”
남유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땅이 얼어 있을 텐데 힘들지 않을까요?”
“어차피 우리가 당장 할 일도 없으니까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 그래야 방송 분량이 나올 것 같은데.”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다.
얼어있는 밭이니 무사히 갈기는 힘들 거고, 움직이다 보면 무슨 일이 생겨도 생길 거다. 그건 에피소드가 될 테고.
“유태는 나랑 농기구 가지고 가자. 원재는 눈부터 치우고 나서 우리 돕고.”
“네, 형님.”
“나도 도울게.”
윤동호가 부엌문에 기대고 서 있었다.
“나도 돕는다고. 놀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
“몸이 불편하다며? 괜찮겠어? 언 땅이라 갈아엎는 일이 쉽지는 않을 건데.”
“괜찮아. 쉬고 났더니 좀 괜찮아졌어.”
“일하다가 다치면 안 되니까 쉬운 거 해. 네가 눈 치우고, 원재가 괭이질하자.”
“내가 괭이질을 하지.”
민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놈이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파악하기 위함이다.
“해본 적은 있고?”
“눈썰미가 있는 편이라 시범만 보여주면 할 수 있어.”
미덥지는 않았지만 그도 출연자다. 계속 열외 시켜둘 수는 없기에 데리고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
기다란 나무 자루에 직각으로 꺾인 쇠가 달린 도구를 윤동호에게 넘겨주었다.
“이게 괭이다. 이걸로 땅을 파는 거야.”
남유태는 나무로 만들어진 커다란 도구를 들고 있었고, 민우는 이제 빈손이 되었다.
또 의심병이 도진 윤동호가 물었다.
“너는?”
“왜? 나랑 바꿀래?”
아까 계곡에서 당한 게 있는지라 잠시 주춤했다. 두 번은 속지 않으려고 먼저 물어봤다.
“네가 할 일은 뭔데?”
“유태랑 같이 일할 거야.”
같이 한단다. 비록 남유태가 들고 있는 도구가 크기는 했지만, 뭐가 됐든 혼자 하는 것보다 편할 거다. 그렇게 판단한 윤동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네가 할 일은 내가 하지. 괭이질은 네가 해.”
“말 바꾸는 건 아니지?”
아까와 같은 상황이다. 또다시 불안감이 스멀거리며 기어 올라왔다. 윤동호가 민우를 바라봤다.
민우의 두 눈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얼른 바꿔 달라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자신의 눈을 맹신하는 윤동호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난 했던 말 바로 바꾸고 그러는 사람 아냐.”
민우가 조금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확실해?”
표정을 보니 자신의 예감이 맞았다. 윤동호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의 허세에 민우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미끼가 너무 먹음 직했나?’
어째 미끼를 던지면 족족 낚이는 것 같다.
“그럼 그렇게 해. 우선해야 할 일을 설명해주도록 할게. 잘 들어.”
잠시 헛기침을 한 민우가 입을 열었다.
“유태가 가지고 있는 걸 쟁기라고 해. 본적도 없겠지? 원래 소를 매달아서 끄는 농기구거든. 그런데 우리는 소가 없잖아? 그럼 어떻게 해야 하겠어?”
“!”
윤동호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소가 할 일을 사람이 한다고? 듣기만 해도 엄청 힘들 거라고 예상되지 않는가.
“정답은 인력을 사용한다. 뭐 하고 있어? 얼른 가서 쟁기 둘러매야지. 네가 끌면 유태가 따라가면서 쟁기로 밭을 갈 거야. 내가 할 일은 네가 하기로 했으니까 유태가 할 일을 뺏지는 않겠지?”
이쯤 되니 일부러 이러는 건 아닌지 의심이 간다. 그래서 물었더니 민우가 코웃음을 쳤다.
“내가 계곡에서도 말했지? 남한테 힘든 거 시키고 편한 일 하는 스타일 아니라고. 내가 힘든 걸 맡았으면 맡았지 미루는 성격 아니다.”
대신 미끼를 던지기는 하지만.
“뭐하고 서 있어? 유태 기다리잖아.”
마지막까지 참고 있던 윤동호의 인내심이 결국은 툭 하고 끊어졌다.
“하아, 더러워서 못 해 먹겠네.”
“그럼 깨끗하게 치우면 되겠네.”
“너 앞으로 조심해라.”
“협박이냐?”
“주의라고 하자.”
“내가 아주 길고 긴 하루를 보냈거든.”
“······.”
“너 한테 주의받고 몸을 사릴 정도라면 내일을 맞이하지도 않았어. 그랬다가는 길고 길었던 내 하루가 아까워질 테니까.”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두고 보자고.”
“두고 보자는 놈은 무섭지 않다더라.”
“흥!”
윤동호는 숙소에 들러 짐을 챙겨 들고는 곧장 류찬수를 찾아갔다.
“피디님 처음 이야기와 너무 다른 거 아닙니까?”
“어디가 어떻게 다른가요?”
“힐링하는 예능이라고 하셨잖습니까? 지금 이게 힐링입니까? 노동만 죽어라 하고.”
“산속에서 좋은 공기 마시고 맛있는 음식 먹으면 힐링 아닙니까? 몸 조금 움직이는 거야 예능이면 당연한 거고요.”
“맛있는 음식? 저 어제오늘 더덕 한 뿌리 먹었습니다.”
류찬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요. 강민우 씨가 음식을 만들어준 거로 기억하는데요. 저희 제작진은 컵라면에 햇반만 먹고 촬영 중입니다. 그리고 아침에 스태프들 먹을 음식도 가져가서 드셨다면서요.”
“그러니까 제가 잘못했다는 말씀이신가요?”
“잘잘못을 따지시니 드리는 말씀 아닙니까. 팩트만 놓고 보자고요. 강민우 씨가 굶겼습니까? 윤동호 씨가 굶었습니까? 제가 볼 땐 후자 같은데요.”
“말이 안 통하는군요. 저 하차하겠습니다.”
이미 하루 분량이 녹화된 상황이다. 중간에 빠져버리겠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붙잡을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류찬수는 여느 피디와 다른 사람이다.
“그게 윤동호 씨의 선택이라면 존중해드리죠. 계약은 기억하시죠? 중간에 임의로 하차하면 출연료의 3배를 위약금으로 내야 하는 조항요.”
예전에 제작 발표회에서 빈정 상한 사람이 갑자기 하차 선언을 해버린 적이 있다.
그 때문에 류찬수는 항상 계약서에 이러한 조항을 넣어둔다. 한사람 때문에 일정이 개판 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윤동호의 출연료는 회당 500. 10회 분량의 3배면 1억 5천. 그의 드라마 출연료가 회당 1억이 넘는다. 윤동호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여기서 그만두도록 하죠. 이유는 계곡에서 다쳤다고 합시다. 그게 깔끔하겠죠?”
“그렇게 합시다. 저희 스태프가 산 아래까지 모셔드릴 겁니다. 변호사 연락 잘 받으시고요.”
피식 웃은 윤동호가 한마디 남겼다.
“그깟 푼돈 1억 5천 때문에 피한다고요? 농담도 심하시네. 그럼 저는 이만.”
마지막까지 자신감을 챙긴 윤동호가 떨어뜨려 놓았던 담당 VJ와 산을 내려갔다.
류찬수는 어금니를 깨물고 화를 삭였다.
스태프 한 명이 조심스레 물었다.
“비하인드 스토리 풀까요?”
“미쳤어? 안 그래도 데릭 그 새끼 때문에 출연자들이 몸 사리는 판국에. 내 예능 출연했다가 이미지 망친다는 소문 돌면 니가 대신 출연할래?”
폭탄도 계속해서 터트리면 문제 PD로 찍히는 건 순식간이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 하더라도 출연자가 거절하면 어떻게 녹화를 하겠는가.
“어차피 있으나 마나 했잖아. 그냥 대충 편집해야지. 그리고 기자한테 연락해서 윤동호가 다쳐서 하차하는 방향으로 기사 좀 써달라고 그래.”
마치 이렇게 될 것을 알기라도 했는지 민우와 같이 찍은 컷은 거의 없다.
“하아. 이번 주만 어떻게든 버텨보자고.”
이번 예능은 1주일 촬영, 3일 휴식, 다시 1주일 촬영으로 일정을 잡았다.
고작 하루 지났는데 벌써 머리가 아프다. 그래도 김기주의 등장과 예능 천재 민우 덕분에 분량 걱정은 없을 것 같다.
지금도 보라.
민우는 쟁기를 둘러매고 힘차게 밭을 갈고 있다. 몸에서 허연 김을 풀풀 피워 올리면서.
목원재가 안절부절못하며 그를 졸졸 따라다녔다.
“민우 형님, 제가 하겠습니다.”
“너는 그냥 괭이로 거들기나 해.”
해가 질 때쯤 류찬수가 멤버들을 모았다.
“윤동호 씨는 하차하기로 했습니다.”
크게 마찰을 일으켰기에 어느 정도 예상을 했던 멤버들이다.
“촬영은 계속하나요?”
“그렇습니다. 다음 시즌은 제가 한 명을 추가할 테니 이번 시즌은 세분께서 진행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류찬수가 물러나자 민우는 목원재에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할 거야? 계속 촬영할 거야?”
“물론입니다. 동호 형님 그만뒀다고 저도 그만둘 수는 없죠. 그리고 위약금 낼 돈도 없어요, 저는.”
그리 친한 사이까지는 아니었나 보다. 처음 예상대로 이용해 먹기 위해 꽂아 준 듯.
땀을 닦아내고 잠시 쉬려니 김기주가 커다란 자루를 두 개나 둘러매고 나타났다.
“뭐야? 네 명이라며?”
“네. 여기 멧돼지까지 포함해서요.”
“잠깐 못 본 사이에 개그가 늘었네?”
허허 웃은 김기주가 자루를 내려놨다.
“여기 집 뒤에 가보면 음식 저장고가 있거든? 거기에 이거 넣어둬.”
민우는 김기주가 밀어주는 자루를 열어봤다.
“뭘 이렇게 많이 가져오셨어요?”
“파랑 감자 이런 건 있어야 음식을 해 먹을 거 아냐. 가을에 월동준비 하느라 캐둔 거 대충 가지고 온 거야.”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그리고 이거는 고라니.”
“고라니요?”
“고라니 몰라? 사슴처럼 생긴 놈. 며칠 전에 얼어 죽은 거 손질해서 말려뒀거든. 오늘은 이거로 요리나 해 먹자고.”
자루에서 커다란 짐승 다리 두 개가 튀어나왔다.
민우가 피식 웃었다.
“동호가 떠나니까 단백질이 생겼어.”
꾸익?
새끼 멧돼지가 납작한 코를 벌름거리며 자루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민우가 멧돼지를 안아 들며 피식 웃었다.
“고생하는 예능을 찍으려고 했는데 힐링하게 생겼네.”
왠지 불운을 몰고 오던 토템이 사라지면서 행운이 찾아오게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