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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아냐, 고생이야 (56/223)

힐링 아냐, 고생이야

윤동호의 눈이 데구루루 굴러 카메라로 향했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아무리 리얼 예능이라지만 연예인 이미지도 있으니 좋게좋게 진행할 거로 생각했다. 그게 오산이었지만.

“억새 자르는데 1시간이면 끝났을 거고. 나머지 시간 동안 뭐 했는데?”

“이런 일은 처음이라 시간이 오래 걸렸어.”

원래 성깔대로라면 한바탕 뒤엎고도 남을 사람이건만, 카메라가 앞에 있으니 착한 사람 코스프레에 열중한다.

이미 민우는 전투 의지가 충만한 상황이라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눈이 있으면 봐라. 조금만 있으면 해가 떨어질 건데 청소는 어떻게 할래? 여기가 도시라고 생각하면 안 돼. 해가 지면 코앞에 뭐가 있는지 보이지도 않아.”

“스태프들 조명이 있으니까 좀 빌리면···.”

“농담이지? 우리는 지금 자급자족을 해야 한다고. 스태프의 손을 빌려 가면서 누가 예능 촬영을 해?”

맞는 말이라 반박도 하지 못한다. 그가 봐도 집은 너무 더럽다.

스태프들은 딱 수리까지만 해줬다. 폐가라는 티는 내야 하니까 억새는 놔두고.

무너진 벽을 세우고, 떨어져 나간 문짝은 바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교체했다.

거기에 비가와도 괜찮도록 지붕을 새로 올렸으며, 밤에 따뜻하게 잠을 자야 하니까 아궁이도 수리해줬다.

사람이 겨우 살 만큼만 해주고 던져준 거다.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고. 당연히 집 안에 흙과 먼지도 많다. 한참 쓸고 닦아도 잘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다.

사실 이는 민우가 제작진에게 바란 거다.

원래 취지는 힐링. 출연진이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해주려고 했다.

하지만 민우는 대번에 반대하고 나섰다.

“그런 예능은 너무 많고 흔하잖아요. 우려 먹을대로 우려먹었는데 이왕 하려면 새로운 컨셉으로 해보죠.”

“어떻게요?”

“고생요.”

“!”

“생전 처음 해보는 일에서 발생하는 좌충우돌. 거기에서 파생되는 꿀잼을 촬영해보죠.”

예능에 완전 초짜인 스타 윤동호와 예능 천재 강민우의 조합만으로 판권 판매는 순항일 거라고 예상했다. 신선한 얼굴인 이석하로 단단히 재미를 봤으니까.

그러나 진정한 본편은 그게 아니었다. 민우의 고생 하자는 말에 류찬수는 세상 모든 것을 가진 얼굴이었다.

출연자와 조율을 할 때면 항상 조금이라도 고생을 덜 하려 협상을 걸어온다. 그런데 강민우는 알아서 고생해주겠단다. 어찌 예쁘지 않을까.

“역시 강민우 씨는 하늘이 내린 예능인입니다. 대충 배경만 던져주면 알아서 그림을 그려주니까요.”

“저 배우인데요.”

연기도 잘하지만 자신은 드라마 피디가 아니니까 그건 알바 없고.

재빨리 윤동호와 목원재의 계약서를 살펴보니 사전 협의에 관한 조항도 없다. 잘됐다 싶어서 민우의 제안을 덥석 수락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의 상황인 거다.

류찬수는 실실 웃었다. 이렇게 대립하다가도 민우가 알아서 잘 풀어주고 이끌어 줄 테니까. 자신은 그저 편집으로 재미만 신경 쓰면 된다.

뿌득, 하고 이를 갈아붙인 윤동호는 속으로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예능 따위 하지 않을 걸 그랬다.

좀 더 자세히 알아보지 않고 수락한 자신의 실수다.

산속 생활 예능이라기에 통나무집에서 느긋한 휴가를 보내는 줄 알았다. 소문난 강민우의 요리도 맛보면서.

이석하도 해외에 여행 다니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예능을 찍었다는 소문을 들었고.

“좋아. 내 불만은 이걸로 끝낼게.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지금부터 청소하면 되지.”

“그래? 그럼 너 혼자 청소해.”

“뭐?”

“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청소에 모든 인원을 투입해? 저녁 먹기 전까지 청소 끝내. 그래야 깨끗한 곳에서 잘 수 있을 테니까. 설마 먼지 마시면서 자고 싶은 건 아니겠지?”

연타로 들어온 공격에 윤동호가 입술을 깨물며 민우를 노려봤다.

민우는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그의 눈도 피하지 않았다. 이미 명분은 민우가 쥐고 있으니.

목원재만 안절부절못하며 갈팡질팡했다.

한숨을 내 쉰 윤동호가 숙이고 들어왔다.

“좋아. 그렇게 할게.”

“해 떨어지기 전에 체크하러 올 테니까 부탁한다.”

‘체크’라는 단어 선택에 윤동호는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그는 속으로 ‘카메라 앞이다. 참자.’ 이 말만 수십 번을 반복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빗자루랑 걸레는?”

민우의 한쪽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산속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애초에 챙겨 오지도 않았는데. 설마 주변에 편의점이라도 있길 바란 건 아니지? 만들어서 써. 원래 산에서 살면 당연히 그렇게 하는 거니까.”

“아니 빗자루를 어떻게 만들라는 소리야?”

“그런 것도 못 해?”

깔보는 듯한 시선에 차오르던 불만이 목구멍 아래로 사라졌다.

“내가 알아서 할게.”

붉으락푸르락하는 윤동호의 얼굴을 보니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다.

민우는 목원재와 남유태를 바라봤다.

“우리가 할 일이 좀 많아. 하늘을 보니까 구름이 많이 끼는 게 심상찮다. 너희들이 도와줘야 일찍 끝낼 수 있어.”

“뭐든 맡겨주세요.”

남유태는 이미 민우에게 돈을 써서 배역을 뺏었다는 윤동호와의 사연을 들었다. 이번 예능에서 고생하게 될 거란 것도 미리 귀띔 받았다.

고생 따위 손톱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다. 신인에 불과한 그가 예능에 출연하는 이런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

민우는 자신이 가져온 짐에서 쌀을 꺼냈다.

“피디님 쌀은 제가 가져온 걸 써도 괜찮나요? 양념은 챙기지 못했는데 인간적으로 양념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간도 되지 않은 음식을 먹기는 좀 그런데.”

돌아가는 상황을 흥미롭게 보고 있던 류찬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저희가 준비해서 부엌에 놔뒀습니다.”

하필 겨울에 예능을 시작해서 먹을 만한 걸 구하기 힘든 상태다. 그래서 쌀과 기본적인 양념, 그리고 가재도구 몇 가지를 미리 준비해서 부엌에 놔뒀다.

약간 작위적인 냄새가 나겠지만 그것마저 사용하지 못하게 하면 그건 고생이 아니라 고난이다.

“다행이네요. 그럼 제가 가져온 쌀은 다시 넣어두겠습니다.”

“모자라면 사용하세요. 그리고 다른 음식을 가져오신 게 있나요?”

“아뇨.”

“알겠습니다.”

편집점을 체크하고 다시 촬영이 이어졌다.

쌀을 불려야 하기에 부엌에서 냄비 하나를 챙기고, 윤동호를 제외한 셋은 계곡으로 향했다.

목원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을까요?”

“누구? 동호?”

“네.”

“남 걱정은 그만두고 우리가 할 일에 집중하자. 산에서 해가 지면 위험해서 돌아다니지도 못해.”

해를 거듭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다. 해가 진 산은 코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매우 위험하니까.

계곡은 거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금방 도착했다.

“유태야, 이제 손을 써야 하니까 그 멧돼지는 배낭에 넣는 게 낫겠다. 머리만 빠져나오면 숨이 막히지는 않겠지.”

“네.”

남유태는 배낭에 담아두었던 먹거리들을 꺼내 민우에게 넘겨주고 멧돼지를 집어넣었다.

머리만 쑥 빠져나온 멧돼지가 눈을 굴려댔다.

“지금부터 할 일을 정해줄게. 유태는 이것들 전부 깨끗하게 씻어. 껍질을 벗길 필요는 없어. 흙만 씹히지 않게.”

“알겠습니다.”

“물이 얼음장 같아서 좀 힘들 거야.”

“괜찮아요. 집에서 설거지할 때도 찬물로 하는데요 뭘. 고무장갑도 챙겨왔고.”

“준비 정신 좋네.”

이번에는 목원재의 차례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원재는 나무 좀 하자.”

“나무요?”

“응. 땔감으로 쓸 나무랑 낙엽. 땅에 떨어진 것만 걷어 오면 될 거야. 기왕이면 잘 마른 거로.”

“알겠습니다.”

그리 어려운 일을 맡지 않은 탓에 즐거워하며 움직였다.

민우는 배낭에서 어망을 꺼내 들고는 신발을 벗고 계곡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차가운 물은 칼날이 되어 무릎 아래를 사정없이 찌르는 느낌이다.

물이 흐르는 쪽에 어망을 설치했다. 안에는 미리 준비한 미끼를 넣어두었다.

이걸로는 아마 버들치 같은 걸 잡을 수 있을 거다. 물론 밤새 놔둬야 하고 내일에나 먹을 수 있겠지만.

설치를 끝내고 냄비에 물을 담아서 집으로 갔다. 쌀을 담가 불리면서 윤동호를 바라봤다.

아까 한 소리 들었다고 이를 악물고 청소한다. 머리는 나쁘지 않은지 억새를 엮어 빗자루를 만들었다. 걸레는 자신의 옷으로 대신한 것 같고.

청소는 나름 깨끗하게 끝나서 자는 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청소 잘했네. 계곡에 가서 우리 쓸 물 좀 떠와. 밥도 해야 하고 식수로도 써야 하니까. 물통은 전주인이 쓰던 거 있으니까 깨끗하게 씻어서 쓰면 될 거야.”

“지금?”

“어. 지금. 서둘러.”

윤동호는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삼켰다. 청소를 끝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잠시 땀을 식히고 있는데 나타나더니 또 일을 시킨다.

민우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뻗대보기라도 할 텐데 어느새 망가진 화덕을 손보고 있다. 어쩔 수 없이 그도 움직였다.

때를 맞춰서 남유태와 목원재가 돌아왔다.

목원재는 역시 힘이 좋은 사람답게 나무도 한 아름 껴안고 있었다.

“원재야, 나랑···.”

“원재는 장작 놔두고 이쪽으로 와줄래? 화덕 수리하는데 손이 많이 가네. 유태는 씻어온 거 정리하고. 동호는 뭐해? 해 넘어가겠다. 얼른 서둘러.”

동생들을 끌고 가서 일을 시키려던 계획이 사전에 차단됐다.

그놈의 해 타령. 쯧, 하고 혀를 찬 윤동호가 물통을 들고 계곡으로 향했다.

사실 남유태나 목원재가 할 일은 크게 없지만 윤동호를 고생시키기 위해서 빼돌린 거다.

윤동호는 한겨울에 다시금 땀을 뻘뻘 흘리며 물을 날라 왔다.

“우선 밥부터 먹고 쉬자.”

수리를 마친 화덕에 나무를 넣고 불을 피우려는 찰나.

“어? 눈이다.”

꾸익!

눈을 맞아서인지 멧돼지가 울어댔다.

강원도에 눈은 미친 듯이 내린다. 제작진들은 강원도의 날씨를 체크하느라 분주하다. 자칫 잘못하면 이곳에 고립될 수도 있다.

민우는 재빨리 화덕을 챙겼다. 장작이 눈에 젖었다가는 큰일이다. 불을 피우자마자 연기로 숨을 쉴 수조차 없을 테니까.

“원재야 전부 부엌으로 옮기자. 동호는 나랑 이거 들자.”

“네!”

목원재가 장작을 챙기고, 남유태는 씻어 온 먹을거리들을 들고 부엌으로 자리를 옮겼다.

민우는 윤동호와 함께 화덕을 부엌 근처로 옮겼다. 다행스럽게도 지붕 아래라 눈을 맞지는 않는 위치였다.

부엌은 협소한 크기라서 네 사람이 들어서니 더는 공간이 없다. 아궁이에는 가마솥이 걸려있었다.

민우는 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불을 피웠다.

“이곳에서 뭘 먹자고?”

윤동호가 인상을 쓰며 투덜거렸다. 사방천지가 흙이다.

“왜? 낭만 있고 좋구만. 그리고 여기서 왜 먹냐? 네가 청소한 마루에서 먹어야지.”

“비위생적이잖아. 이런 곳에서 어떻게 음식을 먹을 수 있지?”

“그래서 청소 열심히 하랬잖아. 거기서 음식을 못 먹을 정도로 청소한 거야? 그러면 너랑 나랑 사이좋게 먼지도 먹는 거고.”

VJ들이 후다닥 달려와 구석구석 카메라를 설치했다.

녹화를 시작하니 불만도 쏙 들어간다. 하여튼 일관성 있게 계산적인 놈이다. 그래서 더 괴롭혀 줄 생각이다. 다시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도록.

만약 카메라 앞에서 실수를 한다면? 원래 인성이 드러나게 될 거다.

요즘같이 연예인의 인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위기에서는 일감도 줄어들게 되겠지. 그럼 데릭처럼 몰락하는 거고.

“저녁 메뉴는 뭔가요?”

“더덕구이랑 도라지무침. 버섯 된장찌개를 할까 싶어. 느타리랑 목이, 노루 궁뎅이 버섯이 있어서 캐왔거든.”

가마솥에 불린 쌀과 둥굴레를 함께 넣고 안쳤다. 밖의 화덕에는 물에 버섯 된장찌개를 끓였고. 채소가 부족하지만 버섯만으로도 먹을만 할 거다.

목원재에게 더덕을 밀어주었다.

“이거 좀 두드려봐. 유태는 주전자 좀 찾아보고.”

그사이 민우는 더덕에 바를 양념장을 만들었다.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지만 윤동호는 멀뚱히 앉아있었다. 민우가 일을 안 주니 그럴 수밖에. 주도적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방송에 나가면 투명 인간이 될 거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방송에 얼굴도 나오지 않으면 볼만할 것 같다.

아궁이에서 다 타버려서 은은하게 열기가 남은 숯으로 골라 꺼냈다.

잘 두들긴 더덕에 고추장 양념을 꼼꼼하게 발라 숯불 위에 올렸다.

치이익-.

맛있는 소리와 함께 냄새가 부엌에 가득 찼다.

꾸익!

배가 고픈 건 짐승도 마찬가지인지 멧돼지가 울었다.

“쟤 괜히 데리고 온 것 같은데.”

왠지 멧돼지가 윤동호보다 존재감이 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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