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블랑과 에클레르
# 본점 주방. 밤
제임스는 매일 디저트를 만든다. 폐점한 뒤에도 혼자 남을 때가 많았다.
그날그날 만들고 싶은 디저트를 만드는데, 오늘은 몽블랑 타르트와 에클레르가 만들고 싶어졌다.
밑 준비를 하고, 에클레르는 오븐에 집어넣었을 때. 구경만 하던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제임스, 그림 못 그리죠?”
피식 웃은 제임스가 작업대로 양손을 펼쳐 보였다.
“보시다시피. 제가 외관 꾸미는 거에 좀 약해요.”
“맛은 좋은데 모양이 너무 흔해. 좀 예쁘게 만들면 더 잘 팔릴 텐데. 단골손님도 안타깝다고 그러더라고요.”
“그건 저도 어쩔 수 없네요. 페렝디에서도 저를 포기했어요. 천국의 맛, 지옥의 껍데기가 제 디저트의 별명이거든요.”
“결론은 맛있다는 뜻이죠? 본인 입으로 자기 자랑을 자연스럽게 하시네요.”
“프랑스에서는 당연한 일이라.”
“뭐든 프랑스로 넘어가시지.”
윤소라가 귀엽게 눈을 흘겼다.
“제가 미술 좀 가르쳐 줄까요? 저 학교 다닐 때 미술은 항상 만점이었는데.”
“공짜는 아닐 거고. 원하는 게 뭐예요?”
“디저트 만드는 거. 가르쳐줘요.”
윤소라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이 열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열정이 자신에게 옮아 붙는 느낌이다. 이제는 모두 타버려서 재만 남게 된 줄 알았는데.
흐릿한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디 한 번 해보세요. 가망성이 없어 보이면 포기할 거예요.”
제임스가 레시피를 읊어줬다. 윤소라는 얼른 노트를 가져와서 불러주는 대로 적어나갔다.
“우선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시범을 보여드리죠.”
“오케이, 컷! 지금부터는 손에 포커스를 맞추겠습니다.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셔도 되지만 손 연기에는 집중해주세요.”
어질러져 있던 작업대를 정리하고 큐 사인을 기다렸다.
“스텐바이, 큐!”
민우의 손이 현란하게 움직이며 재료를 계량했다.
사람이 워낙 많으니 틈날 때마다 만들어둬야 모자라지 않는다. 사실 따지고 보면 피곤할 수도 있는데 민우는 오히려 즐거웠다.
힘들게 쌓은 실력을 뽐낼 수 있고, 그걸 즐겨주는 사람이 있는데 어찌 즐겁지 않을까.
써먹지 않으면 그 긴 세월은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먼저 몽블랑부터 시범을 보여줬다.
바삭하게 만든 타르트지에 폭식한 머핀을 올렸다. 짤주머니로 짜가며 몽글한 산을 표현한 크림은 먹기 아까울 정도다. 마지막으로 슈가 파우더를 뿌려서 마무리했다.
몽블랑은 파스타 면을 말아놓은 것처럼 생긴 게 대부분인데 민우는 조금 다르게 만들어봤다. 작게 만든 크림을 여러 개 쌓아 올린 형태다. 하얀 슈가 파우더는 마치 눈이 내린 것처럼 보였다.
완성된 몽블랑을 보며 안태연이 눈을 빛냈다.
산맥을 형상화한 외관은 차마 손을 대기 힘들 정도다.
“우와. 사 먹는 거보다 더 예쁜 거 같아.”
안태연은 민우와 동갑이었다. 같이 촬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말도 놓고 친해졌다.
“그래? 그럼 네가 만든 것처럼 편집할 건 이거로 하자.”
극 중 윤소라의 재능은 미술적인 감각이다.
맛은 있지만 감정이 메마른 제임스와 감각적인 윤소라가 손을 합치도록 재능을 나눈 거다.
결과물은 준비됐으니 이제는 윤소라가 재능을 발휘하는 과정을 찍을 예정.
대충 흉내만 내도 되는데 직접 해보겠다며 나섰다.
짤주머니를 손에 들고 몽블랑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안태연이 물었다.
“난 언제쯤 이렇게 만들 수 있을까?”
“글쎄다. 몇 년 동안 디저트만 계속 만들다 보면 될 거야. 요리에 재능이 없다면 더 걸릴 수도 있고.”
시간을 잊기 위해서 뭔가에 꽂히면 그것에 심하게 몰입했던 민우다. 요리를 하다가 아기자기하고 예쁜 디저트에 꽂히자 그대로 몇 년간 디저트만 만들었다.
안태연이 혀를 빼물었다.
“몇 년간 디저트만? 다른 건 안 하고?”
“응. 그 정도면 될 것 같네.”
“어유, 지겨워서 사람이 그걸 어떻게 해?”
그러게. 사람이 못 할 일을 했네.
“막상 닥치게 되면 너도 할걸?”
“놉. 나는 죽으면 죽었지 못할 거야.”
죽어도 벗어나지 못하던데. 아무튼 사실을 말했는데도 믿지 못하는 눈치다. 하긴 어찌 믿을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일인데.
“그런데 왜 오늘은 몽블랑이야? 너무 달아서 밤에 먹기에는 너무 과하지 않아?”
“이걸 간절하게 원하는 녀석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
“그렇구나. 근데 내가 한 건 왜 이리 못생겼지? 네가 한 거랑 너무 차이 나잖아.”
“몽블랑이 프랑스어로 하얀 산이라는 뜻이거든. 크림으로 산을 만든다고 생각하고 쌓으면 돼.”
“말은 쉽지. 사실 네 유티비 채널의 동영상을 보면서 예습도 해봤거든. 볼 때는 쉽게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실제로 해보면 주방만 엉망이 되더라.”
민우도 소매를 걷고 거들기 시작했다. 안태연에게만 맡겼다가는 오늘 밤새 만들어도 스태프들이 먹기에 부족할 거다. 넉넉하게 주지 않으면 폭동이 일어난다.
조심스레 마론 크림을 올리던 안태연이 민우의 손동작을 흘끔거리며 물었다.
“예쁘게 만드는 팁이라도 있어?”
“팁이라···. 나는 그냥 대충하는 거라서 딱히.”
이제는 마음 가는 대로 손이 가는 경지에 이르렀다. 따로 팁 같은 게 있을 리가.
“대충 하는 게 이렇다고? 와, 그럼 자막들이 전부 과장이 아니었어?”
“어떤 자막?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써줬으니까 사실이겠지.”
“그럼 그 노을 그림은 어떻게 그렸어?”
“간단해. 노을을 보며 느낌 가는 대로 유화물감을 골라. 원하는 색이 나오도록 섞어. 물감이 준비되면 쓱쓱 그리면 돼. 막상 해보면 쉬워.”
“피아노 연주는?”
“악보 보고 치면 되지.”
“요리는?”
“레시피대로 만들면 되고.”
안태연이 핼쑥해진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컨셉인줄 알았는데 컨셉이 아니라 사실이었다니.”
“사람이 있는 그대로를 보여줘야지. 컨셉으로 꾸미면 쓰나.”
“그게 더 컨셉 같거든!”
민우까지 거들어서 몽블랑 수십 개를 만들었다.
안태연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이 정도면 될 것 같지않아? 감독님. 더 만들어야 해요?”
“아뇨. 충분할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에클레르 구워지는 냄새가 너무 향긋해서 뱃속이 난리가 났거든요. 얼른 먹고 퇴근하죠.”
스태프가 환호성을 지르며 주변 정리에 들어갔다.
정리를 끝냈을 때, 민우도 디저트의 준비가 끝났다. 아까 박병석을 시켜 사 온 우유와 음료수도 잔뜩 내놨다.
“강 배우님 잘 먹을게요!”
“맛있게 드셔 주시니 제가 더 감사합니다. 오히려 더 많이 만들지 못해서 죄송하네요.”
“아유, 이 정도면 충분해요.”
다 먹을 수 있을까 걱정될 정도의 양이었지만 한창 배고플 시간이라 그런지 모두 먹어 치웠다.
몽블랑을 먹으며 소원 성취한 조명팀 막내가 가장 즐거워했다.
# 고시원 앞. 밤
제임스가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같은 재료를 썼는데 어떻게 그런 맛이 날 수 있지?”
“그래도 모양은 예쁘다면서요?”
“그건 인정. 천국의 껍데기와 지옥의 맛이었어요. 그 정도면 사기지. 엄청 맛있어 보여서 먹었는데 아무 맛도 안나.”
“솔직히 아무 맛도 없었던 건 아니다.”
“아무튼 좀 더 연습해 봐요. 언젠가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맛이 될지도 모르죠.”
“저기···. 그때는 고마웠어요.”
“그때?”
“환불해달라던 손님이 왔을 때요.”
“아. 그때. 별거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요.”
“그래도 정식으로 고맙다는 인사는 드려야 할 거 같아서요. 사실은 그때 참 멋졌···.”
윤소라가 볼을 붉히며 어렵게 말을 꺼내던 순간이었다.
“오, 그림 좋아.”
“어머 깜짝이야! 아, 놀랐잖아요!”
“내가 더 놀랐다! 그리고 내가 먼저 여기 있었거든? 너네가 와서 꽁냥거린 거잖아.”
“꽁냥은 무슨. 그냥 이야기 한 거구만. 난 또 귀신인 줄 알았네.”
“뭐? 귀신? 살아있는 사람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아유 손님만 아니면 콱 그냥.”
“됐거든요!”
얼굴이 빨개진 윤소라가 후다닥 고시원에 들어가 버렸다.
30대 초반의 고시원 사장, 연대호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넌 연애할 시간도 있냐? 나는 똥줄 빠지게 조사하고 다니게 만들어놓고?”
“연애 아니야.”
“뭐래는 거야? 현장을 딱 들켜놓고. 아무튼 그건 됐고. 너희 누나랑 접촉 중인 직원이 본점에 있어.”
제임스는 기억을 떠올려봤다.
“점장, 임기동, 안우철, 윤소라, 김지희.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를 제외하고 나까지 직원은 6명이야. 그중에 누군데?”
“둘 중 하나야. 임기동이랑 안우철.”
연대호가 품속에서 서류 봉투를 꺼내 제임스에게 건네주었다.
“둘 다 일수도 있고. 감안하고 봐.”
“그럴게.”
“그럼 이제 이 건물 임대료 10%는 할인해주는 거다.”
제임스가 서류 봉투를 흔들며 말했다.
“이 증거가 사실이라면.”
“어유, 있는 놈들이 더 한다니까.”
# 제임스 방.
제임스는 서류 속에 있던 사진들을 꺼내 책상 위에 펼쳤다. 전부 임기동과 안우철이 누나 최노윤과 만나는 사진들이다.
제임스가 덩치가 큰 남자의 사진을 톡톡 두드렸다.
“우직한 성격의 안우철.”
이내 마르고 신경질적으로 생긴 사진을 집어 들었다.
“높은 사람한테 아부 잘하는 임기동.”
뒤로 돌았다. 벽에는 사진과 메모가 빽빽하게 붙어있었다.
30대 초반의 여자 사진 옆에 안우철과 임기동의 사진을 붙였다.
“주방 직원만 만났다? 그럼 주방과 관계된 일인데.”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런 일이라면 하나뿐이니까.
바로 본점의 점장인 김동욱의 비밀 레시피.
그는 자신의 모든 레시피를 본사에 공개했는데, 딱 2가지의 레시피만은 공개하지 않고 꽁꽁 감춰두었다.
첫 번째는 본점에서 개당 10,000원에 판매하고 있는 스페셜 마카롱. 하루 300개 한정 판매하는데, 오전에 모두 팔려나갈 정도로 인기다.
두 번째는 한 개 100,000원짜리 초콜릿 브라우니 케이크. 하루 20개 한정 판매를 하며 마카롱만큼 인기라 없어서 못판다.
모든 가맹점의 기본이 되는 빵의 반죽은 제임스의 아버지 최호영과 김동욱이 함께 만든 것이다.
김동욱은 매일 공장으로 나가 손수 빵 반죽을 배합한다. 만들어진 생지는 냉동처리 되어 전국 가맹점으로 배달된다. 이를 ‘휴면 생지’라고 하는데, 빵을 발효시키는 효모를 죽이는게 아니라 잠깐 재웠다가 다시 깨우는 거다.
최노윤의 생각이 훤히 보인다.
“레시피를 차지해서 김동욱을 치우고 싶은 거지.”
누나의 동선이나 체크하려고 연대호를 붙였다. 그런데 의외로 대어가 걸려들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어···. 호랑이 굴로 가야지.”
제임스의 한쪽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좋았어. 이번에는 안 틀렸어.”
* * *
“너 진짜 운전해 본 적 있냐?”
홍경섭이 불안해하며 물었다. 그가 알기로 민우는 장롱 면허다. 면허증은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땄지만 운전을 해볼 기회가 없었던 탓이다.
“걱정도 팔자다. 너보다 더 많이 운전해 봤을걸?”
“장난하지 말고. 이거 비싼 외제 차란 말야. 사고 나면 골치 아파진다. 그냥 대역 쓰자.”
“사람 말 좀 믿어라.”
면허증은 있지만 운전을 못 했던 민우는 자동차를 렌트해서 연습했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강원도 도로부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강남까지 진출했다. 퇴근 시간의 강남은 지옥이더라.
처음 운전을 할 때 그가 겪은 도로는 전쟁터였다. 깜빡이를 켜고 끼어들려고 하면 절대로 비켜주지 않았다.
마치 자동차가 코웃음을 치는 느낌이랄까? 결국 끼어들기를 하지 못해 고속도로를 타기도 했다.
과거를 반추하던 민우가 진저리를 치며 물었다.
“너 서킷에서 운전해 봤어?”
“대역 쓰자니까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안 해봤으면 말을 말아.”
“강 배우님! 준비 다 되셨나요?”
“네! 야야, 촬영 시작한다. 얼른 비켜.”
이번 씬은 본사 건물에 제임스가 등장하는 장면이다. 대역을 써도 되지만 느낌을 잘 살리기 위해서 직접 나섰다.
도로가 그나마 한가할 때 재빨리 촬영하고 빠져야 한다.
“카메라가 설치된 트럭 뒤를 쫓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현시환의 큐 사인과 함께 도로를 달렸다.
한동안 홍경섭과 박병석에게 운전을 맡겼는데 직접 운전대를 잡으니 색다른 느낌이다.
멋지게 운전해서 건물 앞에 멈췄다.
조마조마하며 따라가던 홍경섭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딸칵.
문이 열리고, 길쭉한 다리가 쑥 빠져나왔다.
수트를 깔끔하게 차려입은 제임스가 선글라스를 고쳐 쓰며 우뚝 섰다. 그러고는 멋들어지게 건물을 향해 몸을 돌렸다.
“컷! 오케이! 바로 세트장으로 이동할게요!”
민우는 곧바로 홍경섭의 차에 올라타고 세트장으로 이동했다.
이번 씬은 본사의 사무실에서 누나 최노윤과 마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