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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강민우 (43/223)

화가 강민우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미셸이에요. 미셸 무어.”

“예쁜 이름이네요.”

“고마워요.”

칭찬은 누구든 기분을 좋게 하는 법이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밝게 웃던 미셸은 마음 한편이 조금 불편했다.

그녀는 SNS에서 나름 유명한 편이다.

이내 고개를 흔들며 떨쳐낸 생각이지만, 혹시나 이 남자가 수작을 거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름을 물은 건 둘째 치고, 자신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우는 미셸에게서 괜찮은 표정을 발견하자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뗐다.

대화를 유도하며 얼굴을 본 것은 그녀의 다양한 표정을 보고 싶었을 뿐. 별다른 생각도 이유도 없었다.

이제 머릿속에 사진처럼 남은 얼굴을 스케치북에 옮기기만 하면 된다.

스스스슥.

민우의 손이 유려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소를 유지하고 있던 미셸은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초상화를 그리는데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지도 않고 스케치북에만 코를 박고 있으니.

그뿐만이 아니다. 손은 또 얼마나 빠른지 대충 그리는 건 아닐까 의심까지 들었다.

이곳도 복불복이라 화가를 잘못 뽑으면 예고 입시생만도 못한 그림을 받게 된다. 자칫 잘못하면 피카소의 자화상을 받게 될 때도 있고.

만약 풍경화를 그리던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당장 환불받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거다.

미셸의 복잡한 내심은 아랑곳하지 않고 민우의 손은 빠르게 스케치북을 누볐다.

사삭, 사삭.

그림을 완성하는 데 걸린 시간은 10분가량.

완성한 그림이 왠지 모르게 허전한 느낌이다.

“실례지만 여기에 사인을 해드려도 될까요?”

“해주시면 감사하죠.”

구석에는 직인 대신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민우의 사인도 남겼다.

이제야 좀 그럴듯한 초상화 같아 보인다.

“다 됐습니다. 여기.”

그림을 건네받은 미셸의 입이 함지박처럼 벌어졌다.

마치 사진으로 찍은 것처럼 정밀하게 그려낸 소묘다.

대충 그렸다고 생각했건만 주변 화가들과 차원이 다른 그림이 스케치북 안에 있었다.

미셸은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맞기는 한데 어딘지 묘한 느낌이다.

분명히 그림을 그릴 동안 미소만 짓고 있었는데 어떻게 환하게 웃는 모습을 그린 걸까?

그건 둘째 치고라도.

“내가 이렇게 예뻤나?”

왜 그런가 싶어 자세하게 그림을 살피던 그녀가 탄성을 토했다.

“어머 눈이···.”

자신의 콤플렉스였던 처진 눈꼬리를 눈웃음으로 그려준 거다.

보통 초상화를 의뢰하면 화가는 당연히 예쁘게 그려준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라.

마치 흑백 사진을 보는 것처럼 정교하지 않은가.

그림을 보고 있으면 실제로 자신인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단점이었던 눈초리가 살짝 접혀 눈웃음을 치는데, 그 웃음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자신도 모르게 따라 해 봤을 정도.

도톰한 입술과 가지런한 치아가 자신의 자랑이었는데 그것도 잘 표현했고.

그림을 확인하고는 놀라운 마음을 금치 못하고 화가를 바라봤다.

민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빙그레 웃고 있었다.

“똑같이 그리느라 힘들었습니다.”

“정말요?”

말도 예쁘게 해준다.

남들이야 어디가 똑같냐며 의문을 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게 뭐 어때서?

화가의 눈에 그렇게 보인다는데 그러려니 하고 믿어야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본인의 마음에 드는 것 아닌가.

“그림 잘 간직할게요.”

미셸은 더 예쁘게 그려진 자신이 마음에 들었는지 20유로를 추가로 지불했다.

옆에서 대기하던 이석하가 동그란 그림통을 미셸에게 주었다.

“서비스입니다.”

20유로나 추가로 지불했는데 3유로짜리 그림통 쯤이야.

“고마워요!”

미셸은 그림통에 자신의 초상화를 소중히 담고 떠났다.

정용수는 재빨리 문구를 수정했다.

사삭사삭.

30유로 -> 50유로

그림통 서비스

역시 마수걸이가 중요한 법이다.

그렇게 민우의 초상화는 단 한 번에 50유로가 되었다.

50유로가 비싸다고 생각한 사람은 자리를 떴다.

그런데도 의외로 많은 사람이 남았다.

미셸이 과하게 좋아하는 모습을 봤기 때문에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버티는 사람도 다수 있었다.

다음 여자 손님이 민우의 앞자리에 앉았다.

방금 미셸의 초상화를 어깨너머로 봤기에 흔쾌히 이석하에게 50유로를 지불했다.

“저는 코가 좀 불만이에요.”

그러고는 아예 대놓고 자신의 콤플렉스를 드러낸다.

민우는 상대가 편하게 느껴지도록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질문을 던졌고, 여자도 성실히 대답해주었다.

미소가 매력적인 사람이다. 그 부분에 중점을 맞춰 초상화를 그려나갔다.

불만이라는 코는 익살맞게 찡긋하듯 귀엽게 표현하고, 입가에 맺힌 미소를 스케치북에 담았다.

초롱초롱한 눈빛과 속눈썹이 인상적이었기에 그 부분은 더 잘 살리고.

완성된 초상화를 받아 들자 여자는 감탄하고 말았다.

“너무 예쁘게 그려주신 거 아닌가요?”

“제 특기가 사진처럼 그리기입니다. 실물과 차이가 없죠.”

여자는 그림이 마음에 꼭 들었다.

“50유로가 아깝지 않네요. 고마워요!”

줄이 천천히 줄어들수록 이석하는 정신없이 연필을 깎았다. 요금도 받고, 그림통을 나눠줘야 했다.

슬프게도 톱스타의 체면이 말도 아니다. 그러나 불만은 내비치지 못했다.

당장 옆에서 민우가 땀을 뻘뻘 흘려가며 더 고생하고 있었으니까.

정용수는 다양한 외국인 손님을 관리하느라 넋이 나간 모습이고.

“차라리 내가 편하지.”

몸은 고될지 모르지만 지금 상황이 너무 만족스러운 이석하였다.

손님은 민우의 앞에 앉자마자 자동으로 자신의 콤플렉스를 털어놓았다.

민우는 그 콤플렉스를 오히려 살려서 본인도 모르던 매력을 스케치북에 옮겨주었다.

손님들은 하나같이 초상화를 확인하고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다양한 표현으로 예쁘게 포장해준다.

이런 화가에게 어찌 초상화를 맡기지 않을까.

민우의 초상화 판매는 호황이었다.

특히 여자들에게.

* * *

사람이 많이 몰리는 바람에 늦은 점심을 먹어야 했다.

정용수는 마시듯 음식을 해치우고는 오늘 번 돈을 헤아리기 시작했다.

민우가 연주로 번 300유로에 초상화를 그려주고 받은 돈이 1,000유로. 거기에 즉석에서 경매를 부친 풍경화가 500유로에 팔렸다.

“미쳤다. 지금까지 번 돈이 1,800유로다.”

한화로 250만 원이 조금 안 되는 돈.

시간을 계산해봤더니 몽마르뜨 언덕에 입성한 지 고작 5시간 정도가 지났을 뿐이다.

“그럼 대충 시급이 50만원이라고요?”

이석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용수가 가자미눈을 뜨고 이석하를 바라보았다.

“영화 한 편에 수억 원을 버는 사람이 시급 50만원에 놀라나?”

“그거랑 이거랑 같나요? 와, 나 진짜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걱정 많았는데. 민우가 약속을 지키는구나.”

“무슨 약속?”

“저 촬영하는 동안 럭셔리하게 생활하면서 힐링하게 해준다는 약속요. 이 기세를 유지해서 보름 동안 벌면 도대체 얼마야?”

여기서 이벤트 격인 풍경화 가격 500유로를 빼야하지만 그래도 한화 170만 원이 넘는다.

정용수가 민우를 향해 양손을 비비며 말했다.

“나는 우리 민우 의심은 손톱만큼도 안 했다. 좌충우돌 찍을 때 이미 민우를 겪어봤지. 내가 괜히 이 프로그램에 얘를 추천한 줄 알아? 내 생각이지만 얘는 맨몸으로 여기 던져놔도 살 수 있을걸?”

“그건 저도 인정이에요.”

이석하가 격하게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래면 노래, 연주면 연주, 그림이면 그림. 도대체 못 하는 게 무엇인지 궁금할 정도다.

민우는 천천히 점심을 먹고 커피로 입가심을 하며 휴식을 취했다.

정용수가 조심스레 물었다.

“근데 민우야. 풍경화를 파는 게 더 수익이 높지 않겠어?”

30분 그려서 500유로다.

초상화는 30분에 3점 정도를 그렸고 150유로를 벌었다.

수익은 풍경화가 훨씬 나은 상황.

그러나 민우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건 경쟁이 붙는 바람에 운이 좋아서 그렇게 팔린 거예요. 만약 줄만 서서 구할 수 있다면 500유로를 지불하지 않을걸요.”

“그런가?”

“그리고 작품 하나 그리는 데 너무 오래 걸리면 사람들은 기다리지 않고 떠나요. 저도 풍경화보다 초상화가 더 편하고요.”

“초상화도 기다리는 사람은 오래 기다리던데.”

“그 시간이 지루하지 않도록 해야죠. 석하 형. 기타 코드만 알면 치는 데 무리는 없죠?”

“나도 클래식 기타 연주는 꽤 했으니까 칠 수는 있지. 잘 칠 수 있냐는 별개고.”

“잘됐네요. 레퍼토리를 좀 바꿔야겠어요. 잠시.”

민우는 스케치북을 찢어서 코드를 그려가기 시작했다.

버스킹도 그저 음악만 즐기는 부류가 있지만, 노래를 따라 부르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

민우는 관객들과 같이 노래를 부르는 쪽을 더 마음에 들어 했다. 그래서 선곡 리스트도 유명한 곡들로 짜왔고.

“우리나라 노래도 좋지만 외국 사람들에게는 생소해요. 아무래도 아는 노래도 중간중간 들어야 몰입도 할 수 있겠죠.”

관객과 함께 부를 수 있는 곡들로 여러 개를 골라 코드를 그려주었다.

스케치북을 들여다보던 이석하가 감탄했다.

“넌 이걸 다 외우고 다니냐?”

“네. 다 외우니까 악보도 없이 연주했죠.”

“맞는 말이라 반박도 못 하겠네.”

작전도 짰겠다, 오후는 더 열심히 돈을 긁어모을 예정이었다.

고생하리라 생각했던 2팀의 선전에 2팀 피디, 최경륜은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좋은 그림을 많이 건졌다.

특히 찍는 대로 그림이 되는 강민우는 그들에게 선물과도 같은 존재다.

그림을 그려달라는 사람이 영어만 쓰는 건 아니다.

독일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등, 다양한 언어로 자신들의 요구를 말했지만 민우는 모두 알아들었다. 심지어 대답도 해줬다. 현지인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유창하게.

문득 몇 개 국어가 가능한지 궁금해졌다.

짧은 휴식이 끝나고 다시 공연과 초상화 그리기를 재개했다.

이제는 이석하가 기타 연주를 해야 한다.

점심을 먹기 전 자신이 하던 일을 정용수에게 넘겨주었다.

기타를 잡고 관객 앞에 서자, 영화를 찍을 때도 떨리지 않던 심장이 긴장으로 벌렁거렸다.

심호흡을 하고 기타 연주를 시작했다.

연주는 어설펐다. 그래도 진땀을 흘려가며 열심히 연주했다.

아마추어의 느낌이 강했으나 이런 게 또 버스킹의 묘미가 아니겠는가.

관객들은 아는 노래가 나오면 함께 부르며 즐거운 분위기를 이어갔다.

공연이 한창이던 때, 마스크를 하고 여리여리한 사람이 기타 케이스에 슬쩍 지폐를 넣었다.

무려 500유로짜리 지폐다.

상황을 살피고 있던 VJ가 황급히 그 사람을 붙잡았다.

가까이서 보니 한눈에 알아보겠다. 한국 여성이다.

지폐를 챙겨 돌려주었다.

“죄송하지만 지금 촬영 중이라 이 금액은 곤란합니다.”

적당한 금액의 돈을 받으면 상관없다. 그러나 고액이라면 문제가 생긴다. 수백, 수천만 원을 한 번에 쾌척할 수도 있으니까.

갑작스러운 소란에 이석하도 그들에게 다가갔다.

여자가 안절부절못하며 도망치려고 했다.

“무슨 일인가요?”

이석하의 물음에 VJ가 주저하다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셨구나. 감사하지만 마음만 받을게요. 그런데 제 팬이신가요?”

우물쭈물하던 여자가 고개를 젓고는 민우를 가리켰다.

“강민우 씨 팬이에요.”

어째서인지 민우의 팬은 국내보다 해외에 많은 것 같다.

외국인이 아닌 게 함정이지만.

잠시 짬을 내서 민우의 사인을 받고, 사진까지 찍었지만 은근슬쩍 초상화 줄 맨 끝에 발을 담갔다.

정용수는 대충 시간을 고려해서 줄을 끊었다.

민우의 팬이라는 사람이 마지막이었다.

해 질 녘이 되어서야 모든 초상화를 그려준 민우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고생했다.”

정용수가 민우의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기분 좋은 뻐근함에 싱긋 웃은 민우가 이석하를 바라봤다.

“한인 마트 위치 아신다고 했죠?”

“어제까지 한식 먹다 왔는데 다른 거 먹지. 미식의 나라 프랑스 아니냐.”

“우리만 먹을 게 아니라서요.”

알쏭달쏭한 말이라 의미를 물어봤지만 민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VJ들도 함께 먹겠거니 생각할밖에.

정용수는 렌트한 차를 타고 가며 돈 계산에 들어갔다.

점심 먹고 난 후 초상화로 750유로, 이석하가 기타 연주로 200유로를 추가했다.

그림통으로 개당 3유로씩 총 105유로를 사용했다.

오늘 몽마르뜨 언덕에서의 수입은 2,645유로. 한화 350만 원가량.

숫자만 봐도 배가 부른지 정용수가 흐뭇하게 웃었다.

창밖을 보던 민우도 미소를 지었다.

매일 하루가 반복될 때는 지겹게 느껴지던 것들이다.

그때와 같이 그림을 그리고 있음에도 어째서인지 지금은 그저 즐기만 했다.

“어? 형. 얘 지금 웃는데요?”

“웃어?”

“네.”

“민우는 웃어도 돼! 마음껏 웃어!”

“하하하!”

“니가 왜 웃어!”

하루를 충실하게 보냈음인지 차 안에 흥이 흘러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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