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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41/223)

프랑스

“그런데 배틀 투어라고 들었는데요.”

“맞습니다. 3명씩 2팀이 서로 경쟁을 합니다. 승자는 더 많은 생활비를 남긴 쪽이 되고요.”

이제야 배틀 투어라는 뜻이 이해됐다.

“이긴 팀은 시즌 2에 자동으로 출연할 수 있습니다. 멤버의 이름으로 제작사에서 1억 원의 기부금을 내고, 생활비로 지급한 돈과 수입을 정산해서 남은 금액도 기부금에 포함합니다.”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겠네요.”

“괜찮습니다. PPL이 많이 붙었거든요”

“관광 비자로 가나요?”

“그렇습니다. 돈 버는 것 때문이라면 제작진에서 지급하는 형태가 될 겁니다. 손님이 지급한 금액을 저희가 따로 돌려주는 거죠.”

“한 팀당 몇 명씩인가요?”

“세 명입니다. 강민우 씨와 정용수 씨가 한 팀이고, 마지막 한 분은 아직 비어있습니다. 정용수 씨가 강력하게 강민우 씨를 추천하시더군요.”

동료 연예인 중에 잘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덕 볼 일이 생긴다더니 지금이 딱 그 짝이다.

‘좌충우돌’도 그랬고, 이번 ‘유랑민’도 그러하고.

“녹화는 언제부터 시작하나요?”

“캐스팅이 끝나는 대로 제작발표회를 하고 녹화를 시작할 겁니다. 강민우 씨 팀만 아직 한 자리가 남았거든요.”

“혹시 우리 팀에 주연급 배우가 합류해도 되나요?”

“당연히 되죠! 혹시 예능에 자주 얼굴을 비추지 않으신 분이면···.”

신선한 마스크를 캐스팅하면 화제가 된다.

출연료야 투자자가 오케이하면 더 타낼 수 있고.

주연급 배우라면 판권을 팔 때도 유리하다.

“잠시 실례할게요.”

민우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이석하의 죽어가는 목소리가 수화기로 흘러나왔다.

-형 살아있는지 확인 전화했냐?

“속은 괜찮으세요?”

-어제 너무 달렸나 봐. 속 쓰려 죽겠다. 시간 있으면 형이랑 해장국이나 먹자.

“그러죠. 그건 그렇고 혹시 형 앞으로 스케줄 있나요?”

-나? 작품 하나 하면 6개월은 쉬는데. 왜?

“저랑 예능 하나 하실래요?”

-힘든 거냐?

민우는 잠시 생각했다.

과연 힘들까? 오히려 힐링하다 오게 되지 않을까?

“딱 한 마디로 정의 할 테니까 듣고 판단해보세요.”

-그래. 별로면 거절이다.

“보름 동안 해외에서 살 겁니다. 럭셔리하게.”

류찬수가 기겁한 얼굴로 민우를 바라봤다. 재빨리 양손으로 가슴에 교차해서 아니라고 소리 없이 아우성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민우는 말을 바꾸지 않았다.

-그거 솔깃한데? 근데 그런 예능이 다 있어? 보통 좀 고생하는 게 일반적이지 않아?

“제가 일반적인 예능을 추천하겠습니까? 저만 믿고 가시죠.”

-네 말대로라면 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오케이. 그럼 출연하시는 거죠?”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일을 진행하면 되냐. 미팅도 하고 피디랑 이야기도 나눠봐야지.

“그럼 여기로 오세요. 위치는 문자로 보낼게요.”

민우가 전화를 끊자 류찬수가 창백해진 얼굴로 물었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하신 겁니까? 저희 예능은 황제투어가 될 수 없는데요.”

“그거야 나중에 보면 알겠죠.”

“휴···. 그래서 방금 전화하신 분은 누구신가요?”

“석하 형요.”

“석하라면···. 이, 이석하요?”

“네.”

“영화만 찍다가 이번에 드라마 찍은 그 이석하요? 예능은 한 번도 하지 않은?”

“네.”

잿빛이던 류찬수의 얼굴에 홍조가 깃들었다.

현재 가장 핫한 연예인이 이석하다. 민우도 반응이 매우 좋지만 이석하에 비할 바는 아니다.

섭외됐다는 소식만으로도 대박이 터진다.

민우의 거짓말에 동조해서라도 반드시 잡아야 할 카드다.

“반드시 섭외 성공시키죠.”

“저도 그럴 생각입니다.”

류찬수의 입담은 상당했다.

홀라당 속아 넘어간 이석하와 구두 계약까지 끝낸 후, 저녁을 함께 먹었다.

며칠이 지난 후, 이석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컨셉이 힐링 아니라던데! 계약하고 나서 사실을 말해주는 건 사기 아니냐?

“형. 컨셉은 힐링이 아닐지라도 힐링하도록 만들면 힐링 아니겠어요?”

-그게 무슨 궤변이야! 아오, 내가 어쩌다 너랑 친분을 쌓아서 이 고생인지.

“너무 걱정 마세요. 힐링하게 될 테니까.”

-휴식기에 고생만 해봐라. 내 팬클럽 카페에 너 욕하는 글 올리고 만다.

“힐링 못 하고 오면 제가 형 동생입니다.”

-지금도 동생이잖아 임마! 아 이거 진짜 불안한데.

“형도 언제까지 배우만 할 건 아니잖아요. 이참에 예능에도 눈을 돌려봐요.”

-그래. 이제 무를 수도 없으니까 해봐야지. 아무튼 너만 믿는다.

한숨만 퍽퍽 내쉬던 이석하가 전화를 끊었다.

민우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보던 대본을 다시 들췄다.

* * *

이석하의 캐스팅을 끝으로 진행 상황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제작발표회 현장.

잘차려 입은 연예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민우의 위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현장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예전에 쫓기듯 사진만 찍고 사라져야 했던 민우가 아니다. 무려 질의응답 자리에도 함께했다.

그러나 가장 많은 질문은 받은 것은 역시나 이석하였다.

기획 의도라거나 프로그램에 임하는 태도 등, 여러 가지 다양한 질문이 쏟아졌다.

“강민우 씨께 질문드릴게요. 강민우 씨는 다른 프로그램에서 출중한 요리 실력과 기타실력을 선보이셨어요. 혹시 또 다른 재주가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민우가 마이크를 잡고 싱긋 웃었다.

“죄송합니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방송으로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몇 차례 다른 질문들이 오가고 질의응답 시간이 끝났다.

민우와 정용수, 이석하는 따로 회식 자리를 가지고 친분을 쌓았다.

성격 좋은 둘이었기에 금방 친해졌다.

출국은 5월 중순.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민우는 섬으로 향했다.

어머니만 섬에 살면 적적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이참에 우리 부모님도 은퇴하기로 했다. 섬에 다녀오시더니 마음에 든다고 하시더라고.”

그의 부모님은 소일거리 삼아 이곳에서 슈퍼를 인수했단다.

근래 섬을 찾는 사람이 제법 많아져 수익도 늘었다나.

슈퍼 주인이 너무 나이가 들어서 쉽게 내줬다고.

홍경섭의 행동력이 재빠른 건 아마도 부모님에게 배운 듯하다.

섬 크기에 비해 인구는 약 50명가량, 33세대가 살고 있고, 서남해라 기후는 따뜻했다.

슈퍼가 하나뿐인 데다가 하루에 1번 점심나절에 배가 드나들어 불편한 부분은 분명히 있을 거다.

그러나 섬에 사는 주민 중에 선주가 대부분이라 급할 때 그들의 배를 얻어 타고 나간단다.

이제 김라희도 6개월에 한 번 정도 병원을 가면 된다.

섬 주인인 노인에게 집의 가격을 물었다.

“아니 내가 공짜로 주기로 했잖아!”

노인이 우겼지만 전망 좋은 곳으로 골라 제값을 주기로 하고 겨우 설득했다.

대신 텃밭을 끼워주겠다는데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러나 성의 무시하냐고 펄펄 뛰어서 어쩔 수 없이 받았다.

섬 중턱에 있는 집을 골랐다. 마당에 있는 평상에 앉으면 한눈에 바다가 보였다.

“여기 너무 좋은 거 같아.”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다.

김라희도 스트레스 때문에 암에 걸렸다고 한다.

워낙에 평화로운 곳이라 적어도 이곳에서 스트레스 받을 일은 없을 것 같다.

다만.

“심심하지는 않겠어요?”

“정 심심하면 생선 손질이라도 돕지 뭐. 텃밭도 가꾸고.”

“저도 쉴 때마다 들를게요.”

“그래. 얼른 가봐. 다음 주에 출국이라며?”

“응. 몸조리 잘하시고. 병원 꼬박꼬박 가세요.”

“잔소리 그만하고 얼른 가기나 해.”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가야 했다.

떠나는 배 위에서 섬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에 꼭꼭 담아 두었다.

* * *

‘유랑민’의 첫 녹화가 시작되었다.

멤버들은 SBC 방송국의 예능 스튜디오에 모였다.

류찬수가 말했다.

“대표로 한 분씩 나오셔서 룰렛을 돌리면 됩니다.”

1팀의 대표는 연주가 문우민이었고, 2팀은 정용수가 나섰다.

룰렛에는 세계 각국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원래는 한국도 있었는데 연예인들이 경비를 쉽게 얻을 수 있어서 외국으로만 정했단다.

1팀의 요리사 임승민이 외쳤다.

“형님! 동남아도 좋아요!”

한류스타 뉴커머의 데릭이 1팀에 있다.

그의 인지도라면 오히려 동남아에서 수월하게 살아남을 수 있을 게다.

문우민도 동남아를 바라며 룰렛을 돌렸으나, 걸린 곳은 이탈리아였다.

“괜찮아, 괜찮아. 이탈리아면 나쁘지 않아.”

예술로 유명한 도시인 데다가 거리공연 같은 것도 많이 한다.

문우민의 실력이라면 끼니는 거르지 않을 수 있을 거다.

다음은 정용수의 차례다.

“우리는 원하는 곳 없나?”

“아무 곳이나 괜찮아요. 굳이 골라 보자면 중국은 어때요?”

“어, 나쁘지 않다. 중국이면 석하가 거기서 인기 많잖아.”

“거기라면 꽤 유리하다고 볼 수 있겠죠.”

“오케이, 접수. 내가 또 금손이거든.”

정용수가 호쾌하게 룰렛을 돌렸다.

촤르륵-.

룰렛이 멈췄다.

“프랑스네?”

“금손이라면서요. 똥손인데 색깔 비슷하다고 금손이라고 우기는 거 아니에요?”

“야야 잘 봐. 프랑스 반대편에 중국이 적혀있다. 어떻게 근처도 아니고 정반대래?”

건수를 잡은 김에 정용수를 물어뜯으며 방송 분량을 만들어나갔다.

충분히 시간을 줬다고 생각한 류찬수가 손뼉을 치며 이목을 끌어모았다.

“출발은 일주일 뒤입니다. 소지하고 갈 수 있는 물건은 오직 옷뿐입니다. 미리 준비 해서 저희 스태프에게 넘겨주시고요. 그 외에 다른 소지품은 일절 금지입니다.”

“거리 공연에 필요한 준비물은요?”

“필요한 물건은 현지에서 사서 써야 합니다. 생활비에서 차감됩니다.”

문우민의 안색이 흐려졌다.

값비싼 악기는 꿈도 꿀 수 없게 되었다.

“휴대폰도 못 씁니까?”

“네. 공항에서 반납하시고 저희가 따로 준비한 구형 휴대폰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휴대폰으로 결제하는 것을 막기 위함인 것 같다.

녹화가 끝나자 1팀이 다가왔다.

문우민이 씩 웃으며 말했다.

“저희가 너무 쉽게 이기는 거 아닐지 걱정되네요.”

말은 겸손인데 속내는 아니다.

민우가 빙긋 웃었다.

“저희가 질 것 같지는 않네요.”

“우리 팀에는 한류스타도 있는데요. 자신 있으세요?”

“요즘 KPOP이 유럽에서도 먹히는 거 알죠?”

올해 스물셋인 데릭이 콧대를 높이며 으스댔다.

민우는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한류스타? 그게 어땠다고?

뉴커머의 인기가 있는 거지 데릭 혼자만 유명세를 떨치는 건 아니지 않나.

그리고 인기가 영원하지도 않다.

대한민국을 뒤흔들던 아이돌도 나이가 드니 잊혔다.

홀로서기를 위해서 이번 예능에 목숨 거는 것 같은데 어차피 승리는 민우의 몫이다.

‘한 톨의 관심도 가게 두지 않겠어.’

짧은 신경전이 끝나고 멤버별로 흩어졌다.

* * *

일주일 후, 민우 일행은 비행기에 올랐다.

“왜 하필 프랑스를 골라서.”

정용수가 기내식을 먹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영어는 자신 있었지만 프랑스어는 배운 적도 없다.

“거기도 영어 되는 사람 많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석하의 다독거림에 정용수는 조금 편해진 얼굴이 되었다.

“석하는 참 성격이 좋단 말이야. 누구와는 달리.”

“누구가 누군데요?”

“있어. 집에 돈 좀 있다고 깝치던 놈.”

말을 마친 정용수가 민우를 흘깃 바라봤다.

민우의 집안 형편은 별로였다고 들었으니 그와 얽힌 사람이라고 직감했다.

“자세히 말해주세요.”

“민우가 싫어할 텐데.”

흘깃 바라본 민우는 수면안대를 끼고 잠에 빠져있었다.

“혹시라도 민우가 기분 나빠하면 제가 책임질게요.”

“그렇다면야, 말해주지 못할 것도 없지. 사실은···.”

정용수가 언급한 윤동호는 이석하도 안다. 그와 같이 영화를 찍기도 했고.

젠틀한 태도와 바른 이미지를 가져서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역시 사람은 겉만 봐서는 모른다는 말이 딱 맞다.

이후에도 둘은 멈춤 없이 속닥거리며 친분을 쌓아갔다.

어쩌면 긴 비행 시간을 버티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고.

‘파리 샤를 드골 국제공항’에 도착한 것은 오후 10시가 넘어서였다.

“우선 숙소로 이동하시고 내일 오전부터 녹화가 시작됩니다. 오늘까지는 저희가 숙소를 준비해뒀습니다. 이동하시죠.”

민우가 입을 열었다.

“그 전에 준비할 물건이 좀 있습니다. 내일 사용할 것들입니다.”

“말씀해주시면 내일 수배해두겠습니다.”

“클래식 기타와 이젤, 스케치북, 연필은 4B로 준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용수가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너무 많이 준비하는 거 아니냐? 너 실패하면 우리 굶어야 돼. 알지?”

민우는 웃었다.

이석하는 그 웃음이 너무도 자신만만해 보여서 반대하려던 말을 꿀꺽 삼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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