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No.9 추격 (37/223)

No.9 추격

민우는 몰입상태에서 천천히 깨어났다.

그나마 격한 감정씬이 아니라 금방 김재수의 캐릭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마가 빨개진 한수연이 다가와 물었다.

“오빠 모니터링하러 가실 거죠?”

촬영을 하면서 친해진 둘은 오빠, 동생 하는 사이가 되었다.

민우는 그녀의 이마를 보고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너무 연기에 몰두하는 바람에 사고를 쳤네. 이마는 괜찮아?”

“이 정도쯤이야 괜찮아요. 얼른 가요.”

민우와 한수연은 조영규의 곁으로 가서 모니터를 확인했다.

화면 속의 둘은 눈을 꼭 감고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 있었다.

간질간질한 분위기에 손발이 오그라지려는 찰나, 김재수가 급발진했다.

“어이쿠!”

조영규가 양손으로 눈을 가리며 익살스럽게 놀라는 리액션을 보였다.

민망함을 참지 못하고 민우가 중얼거렸다.

“눈을 너무 감아서 실수했습니다.”

작중 김재수와 선우윤 둘 다 모쏠이라 키스를 해본 적이 없다.

눈을 감고 서툴게 입맞춤을 하라는 지시문대로 따랐다가 일어난 사고다.

NG가 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한수연이 잘 받아주었다.

대본에도 없는 애드립이 날아왔고, 민우도 애드립으로 받아쳤다. 덕분에 즐거운 분위기로 마무리 할 수 있었다.

한수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는 키스도 못 해봤어요? 그나마 깜짝 놀라는 감정을 그대로 이어갈 수 있어서 다행이지 다시 찍을 뻔.”

유자영도 눈을 가늘게 뜨고 민우를 바라봤다.

“그러게요. 아니 어떻게 입술보다 이마부터 박을 수 있지?”

“크흠. 감독님. 다시 찍어야 할까요? 후반부는 아예 애드립으로만 연기했는데요.”

“아뇨. 오히려 이게 더 풋풋하고 좋네요. 피아노밖에 모르는 모쏠을 잘 연기 했어요. 왜요? 다시 찍고 싶어요? 설마 키스를 못 한 게 아쉬워서?”

“아닙니다! 다음씬 준비하겠습니다!”

민우가 빨개진 얼굴로 도망쳤다.

남겨진 셋이 킬킬대며 웃었다.

스태프와 인사를 나누던 허강필이 민우를 발견했다.

단역인 허강필의 출연분은 아까 끝났다. 그래도 촬영장에 남아 민우의 연기를 보고 이제야 집에 가려는 거다.

촬영 전만 해도 차갑기 그지없던 그는 활짝 웃으며 민우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아까는 내가 심했지? 미안해. 내가 촬영 전에 심하게 몰입하는 편이라 그래. 너무 마음에 두지 마.”

“아닙니다, 선생님. 오히려 깨달은 게 있어서 더 좋았습니다.”

“그래? 그러면 다행이고.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제가 잘 부탁드려야죠, 선생님.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내 씬은 별로 없지만 같이 힘내보자고.”

맞잡은 손을 두드려준 허강필이 촬영장을 떠났다.

* * *

박치기 키스씬이 있는 10회가 방송되었다.

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달라진다고 했던가.

민우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제법 생겼다.

커피숍에서 커피를 주문해도, 편의점에서 먹거리를 사도. 심지어 헤어숍에서 머리를 만져도.

“드라마 잘 보고 있어요!”

비록 드마라의 팬으로써 알아보는 수준이지만, 언젠가는 드라마의 팬이 아니라 자신의 팬이 생길 거라 믿었다.

“오늘 피아노 치는 씬이지?”

홍경섭의 물음에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빈은 김재수의 수상 소식에 자극을 받아 피아노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의 드라마를 두고 이런 말을 한다.

의사가 주인공인 드라마는 의사가 연애하고, 판사가 주인공이라면 판사가 연애를 한다고.

“과연 유명희 작가님이다. 소빈이 손가락에 피가 나도록 피아노에만 집중하는데, 연애 분량은 또 어떻게든 찍어내네.”

김재수와 선우윤의 풋풋한 연애에 비해 소빈과 은리아는 애틋한 연애를 이어나갔다.

시청자들은 김선커플, 소은커플이라 부르며 애정을 보였다.

선우가 성이라 김선우 커플이 맞는 말이겠지만, 김재수가 늘 입버릇처럼 우윤이라 불러서 시청자들도 따라 한다.

“너는 좀 아쉽겠다. 불타오르는 연애가 아니라서. 아직 스킨십도 없지? 소은 커플은 이미 키스도 했다던데.”

홍경섭의 비죽거리는 웃음에 민우는 발끈했다.

“나도 있었어, 키스씬.”

“한수연이랑 이마도 맞대보고. 강민우 많이 컸네.”

“···봤냐?”

“그럼. 내 친구이자 소속사 배우가 키스를 한다는데 어떻게 그냥 지나치겠냐? 근데 너는 피아노도 잘 치는 놈이 키스는 왜 못해? 솔직히 피아노보다 키스가 더 쉽지 않냐?”

놀림이 분명했기에 민우는 부들부들 떨며 억울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반응은 좋더라. 어제 불판 열렸을 때 가보니까 김재수 귀엽다던데. 혹시 실제로 키스를 못 해본 건 아닐까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고.”

잠시 민우의 반응을 살피던 홍경섭이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내 배우가 현실에서도 모쏠···.”

“좋은 말로 할 때 그만 놀려라.”

“아참. 오늘 오피스텔 월세로 계약하기로 했어. 보안에 신경 쓰는 곳이라 가격은 좀 쎄.”

민우는 이제 수입도 많아질 테니까 조금 더 기다렸다가 차라리 집을 사자고 했고, 홍경섭은 안전을 이유로 거부했다.

결국 둘의 합의점은 언제든 계약을 해지 할 수 있는 무보증 월세가 되었다.

“버릴 짐이 한가득이던데. 어떻게 할래?”

짐이라고 해봤자 거의 다 옷이다. 다른 가전제품은 중고로 업어온 1인용 냉장고밖에 없으니.

“다 정리해야겠지?”

“옷은 전부 낡고 유행도 지났으니 버리고 새로 사야 해. 가전제품이야 풀옵션 원룸이니까 몸만 가서 생활하다가 집 사면 거기서 새로 사는 게 낫다고 본다, 난.”

“그래, 그러자.”

“그럼 너 세트장에 내려놓고 나는 이사해둘게.”

“고마워. 부탁할게.”

“별말씀을.”

오늘 처음으로 세트장에서 촬영한다.

원래는 필하모닉 홀을 본떠서 제작했다는데, 지금 보니 예술의 전당처럼 보이기도 한다.

구조를 조금만 바꾸니 내부의 모습도 바뀐 거다.

‘소빈’이라 적힌 종이가 붙어있는 의자에 이석하가 앉아있었다.

그의 나이는 올해 딱 서른.

데뷔도 민우보다 빠르고, 나이도 많다. 당연히 존중해야 마땅하다. 그와 약간의 인연이 있기도 했고.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대본을 넘기는 그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강민우입니다.”

민우의 인사에 이석하가 고개를 들었다.

“반가워요.”

“오늘 촬영 잘 부탁합니다, 선배님.”

오늘 촬영할 씬이 대결이라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는 없다.

배우마다 다르지만 허강필처럼 미리 몰입을 하는 배우도 많기 때문이다.

인사를 마친 민우가 자신의 자리로 가려 하자 이석하가 말렸다.

“우리 잠시 얘기 좀 나눠도 될까요? 혹시 미리 몰입하는 스타일?”

“선배님께 방해가 되지 않으면 저는 상관없습니다.”

민우야 감독의 큐사인에 곧바로 몰입하니까.

이석하가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형. 나야. 커피 사서 오는 중이지? 지금 김재수랑 같이 있거든. 우리 것도 좀 사다 줘. 넉넉하게. 응, 고마워.”

보통 촬영장에서는 호칭이 마땅치 않기 때문에 배역의 이름을 부르는 편이다.

이석하가 대본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붙잡았어요. 시간 괜찮나요?”

“물론입니다. 아, 말씀 편하게 하세요.”

“말 쉽게 놓는 성격은 아닌데 그게 편하다면 그렇게 할게.”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그저 말 놓으라고 해서 놓은 것뿐인데.”

장난스레 웃는 이석하를 보며 민우도 풀썩 웃고 말았다.

“아무튼, 이번에 수정된 대본을 보면 소빈의 능력이 나와.”

“네. 저도 봤습니다. 작곡의 천재라고 돼 있더군요.”

“맞아. 그리고 연주에 감정을 싣는 능력이 탁월해서 사람들을 감동케 한다더라고.”

피땀을 흘려가며 피아노에 몰두한 결과, 소빈의 능력이 개화했다.

이제부터 두 천재의 대결 구도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소빈이 창조적인 인물이라면, 김재수는 다른 쪽으로 천재다.

한 번 들은 음은 모두 기억하며 그대로 연주를 해낼 수 있는 특출난 능력을 가진.

“피아노 연주에 감정을 싣는다는 게 어떤 걸까? 그게 궁금해서.”

“선배님께서도···.”

“형이라 불러 그냥.”

“아, 네. 형도 피아니스트를 찾아가서 교습을 받았다고 들었는데요.”

“그분들 말씀은 곡의 스토리를 이해하고 건반 하나하나에 정성을 들여서 치라고 하시던데. 내가 피아노를 배운 적이 없어서 좀 이해하기 어렵네.”

곰곰이 생각하던 민우가 턱을 쓰다듬었다.

“그럼 악보를 구해서 셈여림표에 집중해보시는 건 어때요?”

“음? 포르테 뭐, 이런 거 말하는 거지?”

“네. 악보의 지시문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거예요.”

“잠시만.”

이석하가 휴대폰을 꺼내 검색했다.

그 사이 이석하의 매니저가 커피를 들고 나타났다.

“강 배우님도 계셨네요. 요즘 연기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석하가 귀찮게 하나 보죠?”

“어유, 그런 거 아닙니다.”

휴대폰에 시선을 두고 있던 이석하가 투덜거렸다.

“형은 내가 아무나 귀찮게 한다고 생각해?”

“말씀 나누세요. 저는 바빠서 이만.”

매니저가 앗 뜨거라, 줄행랑을 놓자 이석하가 눈을 빛내며 민우를 바라봤다.

“곡의 스토리에 셈여림표를 이용해서 감정을 만들라는 뜻이지?”

“맨땅에 헤딩하는 것보다 그게 편하지 않을까요?”

“고맙다. 덕분에 뭔가 잡히는 거 같아. 이 신세는 꼭 갚을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오늘 촬영 잘 해봐요.”

“그래. 있다 봐.”

이석하와 헤어진 민우는 오늘 촬영에서 혼신의 힘을 다 하기로 마음먹었다.

‘소빈 : (김재수의 연주에 좌절하며) 도대체 어떻게 해야 저 녀석을 뛰어넘을 수 있는 거야... 도대체 어떻게!’

대본에도 나와있지 않은가.

소빈이 좌절하는 연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 연주를 보이리라.

* * *

연미복을 입은 민우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스태프는 마이크와 카메라를 세팅하느라 분주히 움직였다.

조영규가 소리를 질러 카메라 방향을 수정하고, 배우들은 지정된 좌석에 앉아 스테이지 위로 관심을 두었다.

그들의 시선 끝에는 주위의 소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요히 눈을 감고 있는 민우가 있었다. 왠지 모르게 주목하도록 만드는 힘이 그에게 있었다.

그냥 넘기기에는 아까운 장면이라 조영규는 핸드 캠으로 촬영장의 비하인드 컷을 찍는 스태프를 불렀다.

“강 배우님을 주목해서 찍도록 해.”

“네, 피디님.”

차분하게 배역에 몰입중이던 민우가 조영규에게 물었다.

“손 좀 풀어도 될까요?”

“아, 물론입니다. 편하게 하세요.”

어차피 촬영이 시작된 것도 아니다. 스트레칭을 할 시간은 충분하다.

감독의 허락에 민우는 두 손을 깍지 끼고 앞으로 쭉 뻗었다.

뚜뚝, 뚜둑.

손가락 마디와 어깨에서 뼈마디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다.

민진서가 이석하에게 속삭였다.

“손을 푼다는 게 스트레칭이었나 봐.”

“글쎄? 민우가 피아노 연주도 잘한다며? 건반을 두드려 보는 걸 두고 한 말 아닐까?”

“언제 저 사람이랑 친해졌어?”

이석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을 대신했다.

그 사이 민우는 천천히 손을 뻗어 피아노 위에 올렸다.

‘녹턴 에튀드’를 촬영하기 위해서 피아노를 배울 때 가장 먼저 배운 곡은 쇼팽의 음악이었다.

그중 난해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곡이 있다.

쇼팽 에튀드 Op.10 No.4 추격

민우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따라라란-!

건반을 누르는 순간부터 그의 연주가 휘몰아친다.

민우의 양손가락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피아노를 누볐다.

스테이지에서 작업을 하던 스태프는 일손을 놓아버렸고, 연주를 구경하려고 앉아있던 배우들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음표가 사람들의 심장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팼다.

제목 처럼 누군가 쫓아오는 듯한 느낌에 가슴이 죄어온다.

딴, 다단-!

질주하던 짧은 연주가 끝났다.

그때서야 음표의 추격에서 풀려난 사람들이 멈췄던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숨 쉴 틈을 주지 않는 현란한 속주에 넋을 놓았던 민진서가 중얼거렸다.

“이게 손을 푼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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