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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 (34/223)

바르샤바

홍경섭은 한달음에 민우의 집으로 향했다. 얼른 좋은 소식을 전하고 싶어서였다.

차를 주차하고 집으로 들어갔더니 민우가 심각한 얼굴로 그를 반겼다.

“너 뉴스 봤어? 큰일 났다. 이러다가 드라마 엎어질지도 모르겠어.”

“흐흐흐.”

홍경섭의 묘한 미소에 민우는 눈매를 좁히며 그를 바라봤다.

“뭐야? 너 뭔가 알고 있는 거지?”

“여기 오기 전에 피디님한테서 전화 왔었다.”

“피디님이 전화를 했다고?”

“응. 오늘 일정 잡지 말고 좀 만나자던데. 상당히 급한 뉘앙스였어.”

“어? 그럼 그 말은···.”

“섭외하려는 거겠지. 흐흐흐.”

민우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아직 8회까지 방송된 건 아니지?”

“이번 주에 방송이잖아. 혹시 다시 찍으려고 그러나?”

“그건 아닐 거 같아. 아무래도 스토리를 좀 수정하겠지. 재편집으로 유경신을 들어내야 할 텐데 방송 시간을 생각해보면 다시 찍는 건 무리야. 잘하면 10회부터 비중을 조금씩 늘려가며 출연할 수 있겠네.”

“그렇구만. 얼른 준비해. 늦기 전에 만나봐야지. 급하다던데.”

“이거 쉴 틈을 안 주네. 그나저나 정희는?”

“오늘부터 휴가. 어차피 촬영도 없으니까 쉬라고 했지. 일이 이렇게 될지는 몰랐지만.”

“잘했어. 쉴 땐 쉬어야지. 누구와는 다르게.”

“크흠!”

외출 준비를 마친 민우는 홍경섭의 차를 타고 제작사로 향했다.

오랜만에 만난 조영규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다크서클은 기본이요, 제대로 수염도 깎지 못한 모습이다.

“오랜만이네요. 두 분 다 유경신 씨 사고 소식은 들으셨죠?”

“네. 좋지 않은 일이 벌어져서 유감입니다.”

“아닙니다. 대책 방향은 이미 정해졌어요. 유명희 작가님이 10회부터 대본 수정 하기로 했거든요. 작업도 시작했고요. 우선 수정 방향부터 확인해보세요. 이야기는 그 뒤에 하는 게 맞는 거 같습니다.”

조영규가 A4 용지 한 장을 밀어주었다.

민우가 페이퍼를 확인하는 사이 홍경섭은 조영규에게 질문을 던졌다.

“촬영은 어떻게 하고 있나요?”

“박두열 분량은 모두 쳐냈고, B팀이 내용의 얼개를 맞추기 위해서 급하게 재촬영 중입니다. 디졸브 근무를 안 하려고 사전제작을 했던 건데. 결국 한 사람 때문에 일정이 꼬여버리네요.”

디졸브 근무란 밤샘 촬영을 하고 잠깐 눈만 붙인 다음 오전부터 촬영을 시작하는 걸 말한다.

한 화면이 사라지자마자 다른 화면이 서서히 나타나는 장면 전환 기법이 디졸브인데, 업무 형태가 그것과 비슷하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이로 인해 과로로 죽는 스태프도 속출한다.

조영규가 허탈한 웃음과 함께 툴툴거렸다.

“사전제작마저 해두지 않았으면 이번 주 방송은 펑크 날 뻔했어요.”

수정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개연성도 따져야 하고, 서사의 흐름도 생각해야 한다.

유경신과 함께 화면에 나오는 씬은 무조건 새로 찍는다고 보면 된다.

그나마 서브 주연이라서 다행이지, 만약 주연이었다면 끔찍한 상황이 발생했을 것이다.

서브 주연보다 주연이 더 많이 등장하니까.

수정된 내용을 확인한 민우가 물었다.

“박두열 자리에 제가 들어가게 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유학 대신 콩쿨에 참가하는 겁니다. 거기서 상을 타고 화려하게 귀환. 대신 추가 촬영은 해야 합니다. 특히 8회에서 유학 간다며 떠나는 씬이 제일 시급합니다.”

그냥 서브 주연 하나를 날린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그 배역 하나가 빠짐으로써 서사의 볼륨이 줄어든다.

배역 교체를 위해서 대체 배우를 넣어야 한다.

긴급회의 결과 외부에서 찾기보다 차라리 김재수를 끌어올리기로 결정한 거다.

어차피 8회에서 하차하려고 대본에서도 빠진 상태라 배우 찾는 수고를 덜었다. 이야기도 더 매끄러워졌고.

“분량은 확실히 예전보다 많아지겠네요.”

“나쁘지 않죠?”

민우가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기는. 좋아 죽을 것 같다.

수정될 내용만 보면 소빈의 라이벌 포지션인 박두열 자리를 자연스럽게 김재수가 차지한다.

이렇게 되다 보니 김재수가 박두열보다 더 좋은 배역이 되어버렸다. 소빈의 경쟁자치고는 박두열의 존재감이 떨어지는 편이었으니.

소빈으로서는 날벼락이 떨어졌다.

하루아침에 해외 콩쿨 입상자가 경쟁자로 부상하게 되었지 않은가.

“김재수랑 소빈이랑 실력 차이가 너무 나게 되는 거 아닙니까? 국내 콩쿨도 간신히 우승하는 소빈이 국제 콩쿨에서 상을 탄 김재수의 상대가 될는지···.”

민우의 우려에 조영규는 입맛을 다셨다.

“오히려 유 작가님은 잘됐다고 하시더군요. 김재수에게 맞춰서 소빈의 연주 실력도 급상승시키면 된다고.”

고개를 주억거리던 홍경섭이 입을 열었다.

“피디님. 잠시 상의를 하고 결과를 말씀드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옆 사무실이 비었으니 편하게 이야기 나누세요. 부디 좋은 결과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홍경섭과 민우는 자리를 옮겼다.

자리에 앉자마자 홍경섭이 물었다.

“내용은 다 읽었지? 네 생각은 어때?”

“좋지. 시청률 좋은 드라마에 서브 주연으로 들어가는 건데 싫을 리가.”

“너 출연하게 해달라고 대본 몇 개가 왔는데.”

“주연은 아닐 테고. 조연?”

“아직 니 급이 서브 주연까지는 아닌가 보다.”

“반짝 시청자의 눈길을 끈 정도로 급이 올라가면 스타 아닌 사람이 없겠지. 나는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그래, 그런 마음가짐 좋아. 마음에 들어.”

“됐다. 너도 이거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거지?”

“물론이지. 서브 주연이면 비교가 안 되지. 여기서 자리만 잘 잡으면 서브 주연 자리도 들어올 거다.”

“그럼 수락하는 거로 하자.”

둘은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눈 후, 사무실을 나섰다.

조영규가 기대감 가득한 시선을 보내왔다.

“결론은 내셨습니까?”

“강 배우가 적극적으로 출연하자고 하네요.”

“휴! 다행입니다. 고마워요, 강 배우님.”

“아닙니다. 저한테도 좋은 기회라 잡았을 뿐입니다, 피디님.”

“하하. 좋게 말씀해주셔서 더 고맙네요. 잠시만요, 계약서 가지고 오겠습니다.”

조영규는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계약서를 가지고 왔다.

예상대로 민우의 재등장은 10회부터이며 16회까지 출연한다.

출연료는 무려 회당 1,000만 원. 그 사이 무려 5배가 올라버렸다.

계약서를 확인한 홍경섭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조영규를 바라봤다.

그의 시선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던 조영규가 씩 웃었다.

“유경신의 출연료를 그대로 계승하는 겁니다.”

“아!”

그거라면 이 금액이 납득된다.

“단발성 계약이나 마찬가지라 이후 강 배우님의 출연료 상승에는 영향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반응이 워낙 좋으니 금방 올라갈 거로 생각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피디님.”

“제가 잘 부탁드려야죠, 강 배우님. 아참, 여권은 있으시죠?”

“네. 있습니다.”

홍경섭이 민우의 매니저를 맡은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여권 만드는 거였다. 언젠간 쓰게 될 거라고. 그 언젠가가 금방이 될 줄은 몰랐다.

“그럼 내일 공항 씬 빠르게 찍고, B팀이랑 야간비행기로 폴란드의 바르샤바로 가시면 됩니다. 시나리오는 내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내일 바로요?”

“음? 매니저님께서 스케줄 다 끝났다고 들었는데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민우가 고개를 홱 돌려 홍경섭을 바라봤다.

홍경섭은 헛기침과 함께 그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내일. 알겠습니다.”

“몸 건강히 다녀오세요. 제가 배웅이라도 가야 도리겠지만 아시다시피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요.”

“괜찮습니다. 그럼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제작사를 나서자 민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홍경섭을 바라봤다.

“좀 쉬라더니?”

“나도 오늘 아침에 연락받았다고 했잖아. 쉬는 거야 나중에라도 할 수 있지만 스케줄은 들어왔을 때 안 하면 나중에 없을 수도 있어.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으라는 말, 알지?”

“이럴 줄 알았으면 어머니 여권도 만들어 두는 건데.”

“모시고 가려고?”

“응.”

“여권은 내가 저번에 모시고 가서 만들어뒀어. 근데 아직 체력이 안 되셔서 해외여행은 무리다. 건강해지시면 그때 모시고 가.”

놀란 민우가 홍경섭을 바라봤다.

“내가 매니저 하나는 잘 둔 거 같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강 배우님. 그런 의미로 보너스?”

“오케이. 기분이다. 편의점에 들러서 맘대로 골라! 내가 쏜다!”

홍경섭과 민우는 서로 마주 보고 킬킬대며 웃었다.

* * *

공항 씬을 촬영하고 테이프는 스태프에게 맡겨 조영규에게 전하도록 했다.

일정을 끝내고 쉴 시간도 없이 곧바로 야간 비행기에 올랐다.

자리에 앉으니 B팀의 감독이 시나리오를 전해줬다.

“가시면서 읽어두세요.”

우월해진 기억력으로 순식간에 모두 머릿속에 저장했다.

비행기가 떠오르고, 창밖을 내다보니 구름이 발밑에 깔려있었다.

생애 첫 해외여행이다. 100% 여행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오빠! 저 해외여행 처음이에요.”

“나도 처음이야. 와, 살다 살다 내가 비행기를 다 타보네.”

전정희도, 홍경섭도 민우와 마찬가지다.

21일의 반복을 겪으며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경험한다는 각별한 느낌은 예전보다 더 강해진 것 같았다.

‘그때 해보고 싶었던 건 다 해봤으니까.’

이제는 삶을 살면서 다른 이들처럼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겠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일이 이제는 민우에게도 당연한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거의 15시간가량을 비행해서 도착한 곳은 ‘바르샤바 프레드릭 쇼팽 국제공항’이다.

시차는 약 7시간.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충분히 잠을 잔 덕분에 그리 피곤하지는 않았다.

주변을 구경할 시간도 없이 렌트한 차량에 타고 곧바로 쇼팽 국제 콩쿨이 열리는 필하모닉 홀로 이동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이국적인 풍취가 외국에 왔다는 것을 실감 나게 했다.

우선 늦은 점심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바르샤바에서 제법 유명하다는 레스토랑에 들렀다.

“주문하시겠습니까?”

폴란드어가 모국어지만 영어가 기본적으로 다 통하는 나라다.

웨이터의 물음에 메뉴판을 바라보던 민우가 물었다.

“제가 폴란드는 처음이라서 그런데 혹시 추천메뉴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피에로기를 에피타이저로, 사슴고기 스테이크를 메인으로 추천해드리고 싶군요. 피에로기는 양파와 감자, 양배추를 속 재료로 만든 겁니다.”

“그럼 저는 그걸로 하죠.”

민우가 주문을 마치자 다른 일행들도 각자 먹고 싶은 요리를 주문했다.

홍경섭이 민우의 유창한 영어에 의문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영어는 언제 배웠어? 하루 이틀 배운 게 아닌데?”

“시간이 남아서 배웠지.”

“뭐든 시간이 남아서 배웠대.”

“그게 사실인데 어쩌냐.”

만두와 비슷하게 생긴 피에로기는 바삭하게 구워져서 나왔다.

속 내용물은 과일이 들어간 것도 있어 애피타이저로 손색이 없었다. 맛도 물론 좋았고.

사슴고기는 누린내가 나지 않게 조리가 되어 흡족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팁 문화가 없는 곳이기에 따로 돈을 주지는 않았다.

대신 거스름돈을 받지 않도록 반올림해서 지불하고 필하모닉 홀로 이동했다.

주변에서 촬영을 끝마치자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나머지 촬영은 내일 하기로 하고 숙소로 자리를 옮겼다.

호텔은 나쁘지 않았다.

민우의 룸으로 홍경섭이 찾아왔다.

“술 한 잔 어떠냐? 촬영에 방해될 정도로 마시지는 말고, 간단하게. 외국에서 첫날밤이잖아.”

민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정희는?”

“잔대. 걔는 낭만이 없어, 낭만이.”

펍에서 맥주 한잔을 하는데, 관광객처럼 보이는 커플이 다가왔다.

“혹시···. 김재수 맞죠?”

여자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민우는 어리둥절했다.

“김재수가 드라마 배역을 뜻하는 거라면 맞습니다.”

“어머! 팬이에요. 저기 죄송한데 사인이랑 사진 좀 부탁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민우가 환하게 웃었다.

민우와 함께 찍은 사진은 곧바로 그녀의 SNS에 업로드되었다.

#녹턴 에튀드 #폴란드 #바르샤바 #김재수 #강민우

이 게시물 하나로 인해서 녹턴 에튀드의 팬들이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발단은 애송이 기자의 신문 기사 하나였다.

[김재수가 폴란드에 간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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