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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바이, 액션 (30/223)

스탠바이, 액션

제법 많은 기사가 올라온 상태였지만 눈에 확 띄는 기사를 클릭했다.

3%까지 추락하던 좌충우돌의 시청률이 급반전을 이루어냈다.

그간 좌충우돌은 과도한 PPL에 시청자들의 이탈이 줄을 이으며 폐지설까지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이날 방영된 좌충우돌은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키며 화려하게 돌아왔다.

초창기 포맷으로의 회귀는 시청자의 이목을 끌어모으기에 충분했다.

전문가들은 간헐적 단식을 일삼는 짠 내 나는 예능에서 힐링 예능으로 거듭났다고 평가했다.

특히 일등 공신으로 꼽히는 게스트 강민우(27)의 출중한 요리 실력이 화제다.

강민우는 올 상반기 최고 기대작인 ‘녹턴 에튀드’를 촬영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중략)

사실 민우가 섬에서 한 일이라고는 거의 요리밖에 없다.

하루에 6끼씩 만들어야 했으니 다른 뭔가를 할 새나 있을까.

물론 다른 출연자들이 분량을 만들기는 했다. 하지만 민우만큼의 임팩트는 주지 못했다.

요즘 예능에서 심심찮게 나오는 요리가 무슨 신선함이 있겠냐마는 그만큼 PPL에 시청자들이 지쳐갔기 때문에 반사이익을 누린 거다.

민우의 어깨 너머로 기사의 제목만 흘깃 바라본 홍경섭이 투덜거렸다.

“시청률 8%인데 터졌다뇨?”

-우리 전에 3%였어요! 2회는 더 오를 겁니다. 분명히!

“어쨌든 고정출연은 좀 더 생각해보고 말씀드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부디 긍정적으로 생각해주세요.

전화를 끊은 홍경섭이 민우에게 물었다.

“한 피디님이 고정출연을 해달라는데 어떻게 생각해?”

“글쎄. 촬영 스케줄 때문에 고정은 힘들 것 같은데. 일단 촬영 들어가면 2박은 기본으로 해야 하니까.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일장일단이 있는 거 같아. 장점은 빠른 인지도 상승이 되겠고, 단점은 이미지 고착화겠지.”

“그래서 결론은?”

“내 생각은 그래. 지금 우리는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단계잖아? 연예인의 첫 이미지가 평생을 가는데 좀 더 고민해봤으면 좋겠어. 시간은 있잖아. 아직 촬영할 것도 남았고.”

“그러자 그럼. 내 생각도 비슷해.”

“오케이. 그럼 천천히 거절하는 방향으로 진행할게.”

민우는 기사를 좀 더 뒤져봤다.

처음으로 언론에 이름이 오르락내리락하니 기분이 묘했다.

* * *

시간은 유수같이 흘렀다.

민우의 예능 출연은 잠깐 이슈를 차지하기는 했다. 그러나 후속 프로그램에 들어가지 못하는 바람에 사람들의 뇌리에서 서서히 잊혔다.

예능 출연이 인지도 상승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남은 영화의 어두운 이미지를 생각하면 차마 밝게 웃고 떠들 수는 없었다.

나중에 영화가 개봉하면 알게 모르게 괴리감을 느끼게 될 테니까.

‘녹턴 에튀드’에서의 김재수 씬은 모두 끝났다.

공항에서 캐리어를 끌고 가는 김재수와 남게 된 선우윤의 애틋함을 담아내는 게 마지막이었다.

조연을 맡은 첫 드라마라 그런지 감회가 새로웠다.

왠지 조금 찡하기도 했고.

민우의 내심을 눈치챘는지 홍경섭이 어깨를 두드려주며 위로했다.

“어차피 끝이 아닌 시작이잖아. 이제 달릴 일만 남았어.”

큰 산 하나를 넘었지만 빡빡한 촬영 스케줄은 이어졌다.

1월 말에는 ‘돈보다는 사랑’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드라마의 진행 상황으로 봤을 때, 처음 중간 끝. 그러니까 2회, 9회, 14회에 투입될 예정이다.

‘녹턴 에튀드’와는 달리 4회까지만 사전제작하고 곧바로 편집에 들어갔다.

방영 일자는 3월 초.

2월 초에는 ‘프로파일러’가 크랭크인에 들어갔다.

‘프로파일러’ 같은 경우에는 목소리만 나오므로 촬영장보다는 녹음실에서 주로 상주할 수밖에 없었다.

주어진 대본대로 녹음을 하고, 나중에 싸이코패스 역을 맡은 배우의 연기에 맞춰서 추가로 후시녹음도 해야 한다.

얼굴을 비추는 건 수갑을 차고 검찰청으로 들어가는 장면과 교도소에서 아내와 면회하는 장면뿐이다.

‘녹턴 에튀드’의 방영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

남은 작품은 영화 ‘학교폭력’ 뿐.

이제는 온전히 여기에만 집중하면 된다.

민우의 체중 증가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석 달 전의 민우와 비교하면 체격 자체가 달라졌다.

특히 매일같이 체육관에 들러 운동을 하면서 기억에만 있던 격투기 기술을 몸에 새겼다.

김호석이 민우를 격투기 선수로 꾀었지만, 배우라는 것을 알고 난 후로는 마음을 접었다.

“제가 관비는 공짜로 해드릴 테니 우리 체육관에서 운동을 한다고 홍보 좀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민우는 김호석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21일이 반복되던 때 김호석에게 배웠고, 언제나 여기서 훈련도 했으니 거짓말도 아니지 않나.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나갈 무렵, 학교폭력의 촬영 날이 성큼 다가왔다.

* * *

부웅-.

홍경섭이 모는 차에서 내린 민우는 세트장을 둘러봤다.

강원도의 폐교를 개조한 곳이었는데, 거의 모든 컷은 여기서 촬영한다.

바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 사이로 감독 박윤중이 보였다.

“나는 스태프들한테 커피 돌리면서 얘기 좀 듣고 올게.”

“응. 이따 봐.”

홍경섭이 캔커피가 든 박스를 들고 스태프들 사이를 누볐다.

민우는 박윤중에게 걸어가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아, 강 배우. 어서 와. 촬영 준비는 잘했어?”

“물론입니다.”

박윤중은 오디션 중에 민우를 일진의 짱으로 쓸 것처럼 말했다. 그런데 고사장에서 왕따당하는 전학생을 맡으란다.

혹시나 배역을 뺏긴 건 아닌지 물어봤더니 음흉하게만 웃었다.

배역을 맡는 거야 문제가 없다. 가장 큰 문제는 힘들게 찌운 살이다.

왕따당하는 학생은 비교적 약하고 만만해 보여야 한다. 학교의 먹이사슬 제일 아래에 위치하도록. 그래야 쉽게 건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근육까지 만들었기에 난처함을 피력했으나.

“강 배우의 연기로 커버해 줘. 맡길 사람이 강 배우밖에 없네.”

박윤중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민우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감독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

건장해진 상태로는 완벽한 연기를 보일 수 없었기에 특단의 대책을 세웠다.

우선 굶었다. 물과 간단한 견과류로 촬영 날까지 버텼다. 어제는 꼬박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덕분에 초췌한 외모를 겨우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고사장에서 음흉하게 웃었던 의미는, 오늘 박윤중이 건네준 수정 된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알 수 있었다.

내용을 확인한 민우의 눈이 확 커졌다.

“어? 이거···.”

윤수찬의 정체는 서울 일진들의 우두머리였다.

“쉿! 남들 들을라.”

본래 스토리는 주인공이 괴롭힘을 당하다가 각성하는 거였지만 민우가 혜성같이 등장함으로써 시나리오가 바뀌었다.

정의로운 것은 이대한에게 주고, 윤수찬이라는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내서 빌런 역할을 몰아주는 것으로.

“강 배우를 보고 필이 딱 왔거든.”

사회적 메시지 어쩌고는 휴지통에 던져버렸다.

선과 악의 대립.

이미 수많은 매체에서 마르고 닳도록 써먹은 구도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강 배우만 따로 촬영 좀 하자고. 전학가는 과정이라 거나, 왕따를 당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표정 같은 거나. 관객들이 납득 할 수 있는 장면을 삽입해야 할 거야.”

“알겠습니다. 스케줄 조정해 볼게요.”

박윤중이 촬영장을 살피며 물었다.

“다른 배우들하고 사이는 어때?”

“고사장에서 뒤풀이할 때 통성명은 했습니다. 그렇다고 친해질 수는 없더라고요. 걔들한테 당해야 하는 배역이라.”

“그렇지. 어휴 아직 어린애들이라 손이 너무 가네. 내가 늙는다 늙어. 내가 학원물을 다시 찍으면 손에 장을 지진다.”

주연인 이윤호와 하상환은 21살이다.

그 외 학생으로 출연하는 배우의 연령대도 낮은 편이라 민우는 나이로 윗줄에 속했다. 물론 성인 배역을 맡은 배우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건 그렇고, 강 배우한테 미안해. 갑자기 배역을 바꿔서 대사 외우랴, 캐릭터 연구하랴, 고생이 많았겠지만 잘 부탁해. 이번 컷은 중요한 거 알지? 윤수찬이 교실에서···.”

박윤중은 어떻게든 주눅 든 모습을 표현해 달라고 주문했다.

“유념하도록 하겠습니다.”

“오케이. 그럼 동선 체크를 해보자고. 첫 등장은 학교 복도잖아. 이렇게 걸으면서···.”

박윤중에게 동선 설명을 듣고 나서, 촬영장을 누비며 스태프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었다.

인사를 하며 걷다 보니 익숙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예전 ‘봄은 언제 오나’를 촬영할 당시 음향감독을 맡았던 황성배였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응? 누구··· 어어? 그러니까 이름이 무슨 우였는데.”

“강민우입니다, 감독님.”

황성배가 손을 내밀었다.

“그래, 맞아 강민우. 이야 이게 얼마 만이야?”

민우가 황성배의 손을 맞잡으며 대답했다.

“5년 정도 된 것 같네요.”

“아, 그래 기억난다. 그때 판성이랑 소주 마시면서 너 아깝게 됐다고 막 그랬거든.”

이판성은 ‘봄은 언제 오나’의 감독이었다.

민우에게 조연에 도전해보라고 조언을 해줬던 바로 그 피디.

“이 피디님은 잘 계시나요?”

“판성이? CP 됐다는 소식은 들었어. 잘 사는 그놈 얘기는 됐고. 넌 어때? 그때 조연에서 미끄러졌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황성배가 조심스레 민우의 눈치를 살폈다. 민우에게는 예민한 문제였으니까.

좋게 말해서 미끄러진 거지 진실은 배역을 뺏긴 거다.

민우가 씩 웃었다.

새옹지마라고 했다.

배역을 돈으로 뺏은 윤동호 덕분에 엑스트라를 전전하게 되었고, 21일을 반복하게 되는 행운을 얻은 셈이었으니까.

“저는 요즘 좋아요.”

대인배같은 모습에 황성배는 속으로 감탄했다.

만약 자신이 그런 상황에 부닥쳤다면 억울함을 참지 못해 언론에 터트리고 온갖 난리를 쳤을 거다.

돈 많은 집 자식인 윤동호가 눈 하나 깜짝 안 하겠지만 적어도 억울함은 덜한 것 아닌가.

“그래. 여기서 또 이렇게 만나니까 반갑네. 이번에는 조연?”

“네, 과분하게도 조연을 주시네요.”

“잘됐네. 심지가 굳은 걸 보니 넌 잘될 거 같다. 다음에 촬영 없을 때 술 한잔하자.”

“네, 감독님.”

작별 인사를 한 민우는 만나는 스태프마다 먼저 인사를 하며 배우들에게로 걸어갔다.

그때도 그랬다.

스태프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 촬영이 미뤄져도, 대기시간이 길어져도 불만 한번 내색하지 않았다. 연기를 할 때는 모든 열정을 쏟아 혼신의 힘을 다했고.

그래서 모든 스태프가 민우를 높게 쳤었다.

반짝반짝 빛나 보이는 그의 재능이 시궁창에 처박히기 전까지만 해도 언젠가는 스타가 될 거라고 예상했었다.

긴 터널을 지나 이제 드디어 재기하는 것 같아 괜히 마음이 뿌듯해졌다.

“자식이 몇 년이나 지났는데도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네. 분위기도 좀 달라진 것 같고.”

꼬박꼬박 감독님이라고 불러주는 것도 고맙지 않은가.

인지도가 낮을 때는 한없이 자신을 낮추던 사람도 급이 높아지면 목에 깁스라도 한 것처럼 뻣뻣하게 변한다.

물론 모든 연예인이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러는 연예인도 흔히 있다.

왠지 강민우라면 스타가 되어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민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배우들과 인사를 나누다 보니 분위기가 묘하다는 것을 느꼈다.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리다가도 민우가 오면 조용해졌다. 그리고 민우가 떠나면 수군거리기 일쑤였다.

왕따당하는 것 같은 분위기라 민우는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배우들에게 배포된 최종대본에서의 민우는 전학 오자마자 왕따를 당하니까.

‘덕분에 리얼한 연기를 할 수 있겠네.’

대기실에서 교복으로 의상을 갈아입었다.

민우의 덩치를 가리기 위해서 조감독이 직접 한 치수 큰 걸로 가지고 왔다.

교복을 입고 뿔테안경을 썼다. 헤어도 수더분하게 만지고, 메이크업도 생기가 없도록 했다.

다 끝내고 나니 어수룩한 학생이 거울 속에 있었다.

민우가 준비를 하는 동안 주연 배우들을 필두로 촬영을 시작했다.

조용한 성격의 이윤호와 적극적인 성격의 하상환이 영화를 이끌어 나간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고 평화로운 교실.

이곳에 이질적인 전학생 민우가 등장해야 한다.

교실 밖에서는 붐 마이크와 카메라가 민우의 곁에서 출발할 준비를 마쳤다.

탁-!

스태프가 슬레이트를 쳤다.

박윤중이 메가폰을 들고 목소리를 높였다.

“스텐바이!”

동시에 민우의 머릿속에서 스위치가 켜졌다.

만들어 둔 왕따 당하는 학생 윤수찬의 캐릭터에 순식간에 몰입했다.

불안한 시선은 땅으로 향한다.

떡 벌어졌던 어깨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거북목처럼 살짝 숙여진 목과 꾸부정하게 굽혀지는 허리.

거기다 등에 매고 있는 백팩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축 처진 어깨까지.

몸 전체를 최대한 웅크리니 키가 확 작아 보인다.

이 모든 과정을 모니터로 보고 있던 박윤중은 혀를 내둘렀다.

자신의 요구를 120% 충족시키는 모습이다.

아니, 시나리오를 쓰면서 구상했던 캐릭터가 눈앞에 있다.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박윤중이 힘차게 외쳤다.

“액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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