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행의 기억 (28/223)

여행의 기억

밤이 깊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오늘 촬영은 여기까지 하죠.”

한 피디의 선언에 스태프들이 분주해졌다.

출연자들은 캠프파이어를 했던 장작더미에는 물을 부어 불을 완전히 껐다.

“청소는 내일 깔끔하게 하자.”

“아뇨, 저 혼자 지금 다 치울게요. 제가 하자고 했던 거니까요.”

‘카메라가 꺼졌는데도 나서서 일을 한다고?’

민우는 이때껏 봐왔던 시차준과는 다른 모습이라 내심 고개를 갸웃했다.

시차준은 젖은 장작부터 치웠다. 그리고 양동이에 물을 퍼 와서 빗자루로 재를 쓸어내며 청소를 시작했다.

민우가 시차준을 거들어 양동이로 물을 퍼주었다.

시차준이 민우를 흘긋 보고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고맙습니다.”

민우는 시차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 삼자가 나서기에는 좀 그렇지만 한 가지 물어봐도 됩니까?”

“물어보세요.”

“경섭이 왜 배신했어요?”

시차준의 비질이 우뚝 멈췄다.

주위에 엿듣는 사람은 없다. 스태프들은 모두 철수했고, 출연자도 숙소로 들어간 후다. 이미 민우가 확인하고 질문한 거였다.

“휴우···. 무슨 변명이 필요하겠어요? 그냥 제가 욕심이 많았다고 생각하세요.”

“개인적인 욕심이라···. 알겠습니다.”

시차준은 울적한 얼굴로 비질만 집중했다.

민우도 양동이에 물을 담아 말없이 날랐다.

찌르륵, 찌르륵.

풀벌레만이 둘의 침묵을 방해했다.

청소가 끝나자마자 시차준은 간단하게 씻고 숙소로 들어가 버렸다.

홀로 남은 민우는 평상에 앉아 저 멀리 밤바다를 바라봤다.

비록 일을 하기 위해 왔다지만 그래도 여행은 여행이다.

그것도 생애 첫 여행.

여행이라면 왠지 모르게 낭만적인 느낌인데 일과 병행하니 그 느낌이 살지 않는다.

“내 감동 물어내.”

씁쓸하게 웃은 민우는 휴대폰을 꺼내 김라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았는지 곧바로 전화를 받는다.

“엄마 안 주무셨어?”

-응, 이제 자려구.

“병원은요?”

-경섭이가 와서 도와줬어. 요즘 너 없어서 할 일도 없고 심심하다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집안일까지 도와주고 있나 보다.

“치료 잘 받으세요. 드시는 거도 잘 드시고. 경섭이한테 맛난 거 사달라고 하세요.”

-그래, 알았어. 너도 조심해서 촬영하고.

짧게 서로 안부를 묻는 통화가 끝났다.

홍경섭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울 어머니 도와드렸다며? 고맙다.”

-뻘소리 할 거면 끊어! 지금 시간이 몇 시냐!

띠리링.

전화 끊어지는 소리에 어리둥절한 민우가 휴대폰의 액정을 바라봤다.

“뭐야? 고맙다고 했더니 왜 화를 내? 자식이 부끄러웠나?”

피식 웃고는 강민아에게 복학 잘하라고 문자만 한 통 보냈다.

병원비 때문에 휴학했던 강민아는 오는 2월에 복학한다.

등록금은 민우가 보태주기로 했다.

‘녹턴 에튀드’의 출연료는 회당 200만 원. 무명의 조연치고는 높은 대우다.

원래라면 출연료가 최하로 책정되어야 하지만, 조영규와 유명희가 제작사에 요청해서 높게 책정해주었다. 그만큼 기대를 하고 있다는 뜻이다.

8회까지 출연 예정이라 총 출연료는 1,600만 원.

거기에 예능 2회 출연료로 200만 원까지.

세금 떼고 홍경섭과 분배를 하면 절반 정도는 너끈히 남을 거다.

거기다 2월이 되면 드라마와 영화도 촬영에 들어갈 테니 수입은 계속 늘어나게 될 거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던 예전과는 비교조차 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아직은 바닥이지만 언젠가는···.”

‘저 하늘의 별처럼 스타가 되고 말겠다.’라는 뒷말은 속으로 꿀꺽 삼켰다.

* * *

전날 민우의 음식솜씨를 맛본 노국태는 꼭두새벽이 되자마자 출연자들을 깨웠다.

민우야 아침 일찍 깨기에 가뿐한 모습이었지만 윤다예나 시차준은 얼굴이 팅팅 부어있었다.

“쯧쯧. 어젯밤에 많이 먹더라니. 꼴좋다.”

스타일리스트가 따라오지 않기에 메이크업과 헤어는 본인들이 해야 한다.

민낯이 자신 있는 연예인은 대충 비비만 바르고.

윤다예도 민낯에 자신이 있는 쪽이었나 보다.

“넌 도대체 연예인이라는 애가 꼴이 그게 뭐니? 너 어제랑 오늘이랑 얼굴이 다른 거 알아?”

노국태의 핀잔을 윤다예는 쿨하게 받아쳤다.

“별로 다르지도 않을걸요?”

“너 비포 에프터 뜰 거다. 나중에 후회하지 마.”

윤다예는 노국태의 놀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머리를 뒤로 질끈 묶었다.

“산에 가는데 화장하고 가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요? 땀나면 다 지워져서 난리 날건데.”

“워터 프루프 모르냐?”

“에이 귀찮아요. 그냥 가요.”

깔깔 웃으며 하는 말에 노국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동녘으로 해가 뜬다.

그제야 산행 준비를 마친 정용수가 밖으로 나왔다.

“그물 챙겼어?”

“준비 다 끝냈어요. 얼른 갑시다!”

몸이 달은 노국태가 앞장서서 산으로 향했다.

동네 야트막한 산이라 그리 힘들지 않게 올랐다.

“그물은 나랑 국태가 잘 잡고 있을 테니까 젊은 너희가 몰아와.”

시차준은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겠다고 다짐했다.

매일같이 헬스장에 다니며 체력 단련을 한 보람을 느낄 찬스다.

“출발!”

VJ를 대동한 출연자들은 각자 닭을 그물로 몰아오는 임무를 맡고 사방으로 달려갔다.

“몰아! 몰아!”

“차준아, 임마! 그쪽으로 간다! 여기로 몰아!”

푸드덕!

하늘을 나는 닭을 본 적이 있는가.

뿔닭이 하늘을 난다고 동영상으로 본적은 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닭은 뿔닭이 아니다.

그냥 토종닭인데 미친 듯한 체력을 뽐내며 사람들을 피해 날아 다닌다.

나무 위로 올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라볼 때는 마치 놀리는 것 같아 기분도 나빴다.

체력만 소모하고 모두가 허탈해할 때 민우는 예전 동영상으로 봤던 것을 떠올렸다.

‘분명히 기다란 쇠로 낚아채서 잡았던 거 같은데.’

그러고 보니 텃밭에 주변에 울타리를 쳐둔 철망이 있었다.

민우는 급하게 산을 내려가 철망을 확인했다.

용접 철망이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제법 굵은 쇳덩어리다.

“이 정도면 되겠네.”

집주인에게 허락을 받고 펜스 기둥 하나를 뽑았다. 그러고는 한쪽 끝을 약 한 뼘 정도 구부려 갈고리처럼 만들었다.

닭발이 걸려야 하므로 되도록 공간이 조금만 남도록 바짝 붙이다시피 접어야 한다.

순수 쇳덩이라 굽히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인력으로 될 일이 아니라 돌로 두들겨가며 겨우 완성했다.

“과연 동영상대로 잘 잡힐까?”

21일을 반복하면 웬만한 일은 다 해봤다고 생각했지만, 닭을 잡는 일은 해본 적이 없다.

새로운 일을 경험한다는 생각이 들자 기대감을 감추지 못하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결과는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꾸에엑!”

푸드덕, 푸드덕!

거꾸로 매달린 닭이 홰를 치며 거칠게 비명을 질러댔다.

“우와!”

윤다예는 흡사 신을 영접한 것처럼 반짝거리는 눈으로 민우를 바라봤다.

못하는 게 없다. 요리도 잘해, 기타도 잘 쳐, 게다가 닭도 잘 잡는다.

“잡았다! 잡았어!”

노국태는 얼마나 감격했는지 금방 눈물이라도 쏟을 기세로 펄쩍펄쩍 뛰었다.

정용수가 노국태의 어깨를 두들기며 껄껄 웃었다.

“쟤가 내 동생이야! 내 동생이라고!”

닭 한 마리에 모두가 행복해졌다.

아, 한 명은 빼고.

‘졌다. 졌어. 도저히 이길 수가 없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시차준은 민우를 이겨 먹는 일을 완전히 포기해버렸다.

갈고리를 이용하는 게 숙달되자 수월하게 닭을 잡을 수 있었다.

노국태와 윤다예, 시차준은 민우에게 갈고리를 빌려 닭 잡기에 도전했다.

비록 겁을 잔뜩 먹어서 실패하기는 했지만.

“더 잡아! 1인 1닭 해야지!”

정용수의 강요 때문에 닭을 무려 10마리나 잡았다.

집주인에게 닭 5마리를 가져가자 놀란 나머지 곰방대를 툭 떨어뜨렸다.

“이놈을 다 어떻게 잡았대?”

“이걸 이용해서요. 이렇게···.”

민우는 갈고리를 보여주며 잡는 요령을 일러주었다.

노인이 스태프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카메라 든 사람들도 먹어야 할 거 아냐. 나도 이따 얻어먹으러 갈 테니까 그냥 자네가 이놈들도 다 요리해주게.”

“감사합니다. 오늘은 온종일 닭요리를 할 테니까 건너오세요.”

“그러세.”

민우가 닭을 손질하는 사이 다른 출연자들은 산을 뒤지며 먹거리를 조달했다.

의외로 시골 출신인 윤다예가 더덕이며 도라지, 거기다 칡까지 캐왔다.

금수저 출신 정용수는 잡초만 뽑아서 왔다가 거하게 잔소리를 듣고는 계란만 줍고 다녔다.

모두가 한 아름씩 먹거리를 챙겨서 복귀했다.

그사이 민우는 이미 닭 손질을 끝낸 후였다.

때맞춰 집주인이 직접 기른 거라며 인삼을 가지고 왔다.

재료를 살핀 민우가 씩 웃었다.

“아침은 백숙으로 하죠.”

닭 5마리가 가마솥에 들어갔다.

* * *

민우는 마지막 날 점심으로 계란 스페셜을 만들었다.

산에 지천으로 널린 게 계란이라 마음껏 사용했다.

삶은 계란에 계란찜을 더 하고, 저장고의 토마토를 이용해서 볶음 요리도 만들었다.

파를 넣은 계란말이도 밥반찬으로 딱 맞았다.

언니들은 ‘좌충우돌’에 출연하면 다이어트하고 온다고 했는데 윤다예는 살이 찌지 않았는지 걱정부터 들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가만히 이때껏 먹은 음식을 헤아려봤다.

“이틀째 아침은 백숙, 간식 비빔면, 점심은 닭볶음탕, 다시 간식으로 닭꼬치. 닭꼬치는 맛있었지. 그리고 저녁은···.”

시차준이 돔을 한 마리 잡아 왔었다.

“포기하니까 기회를 주는구나!”

이해하기 힘든 말을 하면서 잡아 온 돔으로 회를 뜨고 매운탕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회도 잘 뜨실 줄이야. 도대체 못 하시는 게 뭘까?”

민우의 또 다른 재능을 발견한 것 같아서 두근거릴 지경이었다.

그리고 야식으로 치킨을 만들어 먹기로 했다.

치킨을 만들 닭이 없어서 해가 지기 전에 민우가 산에 올라 5마리를 더 잡아 왔다.

산에 닭이 얼마나 많은지 아직도 근처에 가면 푸드덕거리는 소리로 정신없을 지경이다.

닭 5마리로 치킨을 만들었는데 배불리 먹을 수 없었다.

“피디가 뺏어 먹지만 않았어도···!”

윤다예가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더덕도 구워 먹었다.

민우가 양념장을 얼마나 잘 만들었던지, 더덕이 입에서 살살 녹아 없어지는 것 같았다.

캐온 칡과 말린 칡을 집주인이 교환 해줘서 차를 만들어 마시기도 했고.

추억을 떠올리며 군침을 흘리던 윤다예는 그동안 먹은 끼니를 손가락으로 꼽아보았다.

“어디보자 오늘 점심까지 먹었으니 총 열한 끼 먹었네. 이제 네 끼 남은 건가.”

그런데 오늘 저녁 섬을 떠나야 한다.

“어? 열다섯 끼 다 못 채우겠는데?”

당연히 저녁은 먹지 못할 거고, 먹어봤자 이제 간식 한 끼 남은 상황.

그녀도 안다. 15끼라는 숫자는 그저 예시일 뿐이라는 걸. 그래도 왠지 손해 본 기분에 울상을 지었다.

마지막 간식은 짜장면이다.

정용수가 간절히 원해서 고른 메뉴다.

춘장은 챙겨오지 못했는데 피디가 미션으로 던져주다시피 했다.

이제는 피디도 민우표 요리의 노예가 된 것이다.

점심을 먹자마자 면을 만들고 간식 때를 맞춰 짜장면을 먹고 나니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

민우는 작별 인사라도 하기 위해서 노인이 있는 집으로 향했다.

“어르신 계십니까?”

민우의 부름에 노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도 촬영장에 자주 들르기에 상황을 훤하게 꿰고 있었다.

“이제 가나?”

“네. 배가 오면 가야 됩니다. 어르신 덕분에 잘 먹고 잘 쉬다 갑니다.”

“내가 해준 게 있나? 다 자네가 음식을 만들어줘서 나도 입이 호강했는데. 아참, 잠깐만 기다려봐.”

집으로 들어간 노인이 노란색 기다란 병을 안고 나타났다.

병 안에는 인삼이 가득 들어있었다.

“인삼주야. 오래됐어. 이제 술이 아니고 거의 약이니까 마셔.”

“감사합니다, 어르신.”

“내가 고맙지. 또 놀러 와. 원하면 집 한 채 내줄 수도 있고.”

노인의 말에 민우는 그간 가졌던 궁금증을 슬며시 해결하기로 했다.

“혹시 이 섬이 어르신 겁니까?”

“응, 내껀데. 여기 집들도 다 내 소유고.”

“역시 그렇군요. 아무튼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오겠습니다.”

“그래. 이별은 짧게 하라고 했어. 어여가.”

노인과 헤어져 숙소로 돌아왔다.

짐을 보따리로 싸고 윤다예와 시차준과 함께 선착장으로 이동했다.

노국태가 민우의 뒤를 졸졸 따르며 아쉬워했다.

“우리 15끼 먹기로 했는데 덜 먹은 거 아시죠?”

“10끼면 된다면서요.”

입심으로는 민우도 지지 않는다. 그런데 노국태의 편이 더 많은 게 문제였다.

“오빠 나머지 끼니는 다음에 해줘요.”

정용수도 거들었다.

“그래 나는 일기장에 적어둘 거다.”

결국 다음에 요리해주기로 약속 하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출연자들과 연락처를 나눈 건 당연한 일이었고.

배에 오르며 민우는 섬을 바라봤다.

첫 여행의 기억으로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니, 좋았다.

다음에 꼭 다시 들르고 싶을 만큼.

배가 접안시설을 벗어났다.

다시 일상으로 복귀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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