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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를 하다 (27/223)

요리를 하다

어느덧 해가 서쪽 바다 위로 넘어가려고 한다.

이맘때 서해의 일몰 시간은 대충 5시 30분 정도다.

저녁을 서둘러야 하는데 많은 양의 짬뽕을 만들기에는 가스레인지의 화력이 너무 약했다.

“용수 형, 장작도 많던데 마당 구석에 화덕을 만들어도 되나요?”

“그건 집주인한테 물어봐야 되는 거 아냐?”

한 피디도 독단적으로 결론을 낼 수 없어 난감한 표정이다.

“제가 주인 어르신을 만나서 허락받아 올게요.”

집주인을 찾아가 물었더니 의외로 흔쾌히 허락을 해줬다.

대신 깔끔하게 치우는 조건이 붙었지만.

집주인의 허락까지 받으니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힘쓰는 남자들은 굴러다니는 벽돌을 쌓아서 순식간에 임시로 화덕을 만들고, 민우는 반죽을 넓게 밀어서 썰었다.

대충 양을 가늠해보니 6~7인분은 될 것 같다.

화덕을 확인해보니 급하게 만든 것 치고는 나쁘지 않아 보였다.

종이에 불을 붙이고 짚에 옮겨 붙인 다음 가는 나무로 불을 키웠다. 장작이 잘 마른 덕분에 순식간에 불이 커졌다.

만든 화덕은 두 개.

한쪽에는 해감 된 바지락을 넣고 육수를 끓였다.

나머지 하나에는 가마솥 뚜껑을 올렸다.

웍도 없고, 많은 양을 소화해낼 커다란 팬도 없었기 때문이다.

잘 마른 장작은 무시무시한 화력을 뿜어냈다.

윤다예가 가까스로 문제를 맞힌 덕분에 총 획득한 돼지고기는 200그램.

구워 먹기에는 모자라지만 짬뽕을 하기에는 적당한 양이다.

“재료가 좀 부실할거 같아서 걱정했는데 잘됐네.”

아마도 제작진이 돼지고기를 준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민우가 짬뽕을 준비하는 모습을 봤으니까.

가마솥 뚜껑에 기름을 넉넉하게 두르고 돼지고기를 넣었다.

촤아악-!

수분 때문에 기름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민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질한 채소들을 넣었다.

간장을 조금 둘러 간을 하고, 고춧가루를 넣고 볶다가 후추로 향을 더했다. 그러고는 옆에서 끓이던 육수를 약간 붓고 잘라둔 돌게를 추가했다.

이대로 면을 넣고 볶으면 ‘볶음 짬뽕’이 된다. 하지만 쌀쌀한 날씨라 국물이 먹고 싶었다.

원래라면 웍에 육수를 넣어서 끓이겠지만 가마솥 뚜껑은 국물을 담기에는 너무 얕다.

재료에 양념이 잘 배도록 볶아주다가 옆 화덕의 육수를 먹을 만큼만 남기고 바지락과 함께 덜어냈다. 그러고는 먹을 만큼만 남긴 육수에 볶아낸 재료를 넣었다.

이제 간을 맞추고 재료가 익을 때까지 끓이면 국물 준비는 끝이다.

비어있는 화덕에 덜어낸 육수를 올리고 거기에 면을 삶았다.

정용수가 어느새 나타나서 간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민우가 국물을 국자로 떠서 건네자 한입 먹었다.

“크으! 간이 됐네. 맛있다야.”

짬뽕 냄새에 출연자들이 몰려들었다.

인심 쓰는 김에 민우는 국물을 조금씩 나눠줬고, 모두가 엄지를 들어 올렸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눈치만 살피던 정용수와 노국태가 대접과 수저를 인원수대로 재빨리 가져왔다.

이제 대접에 면을 담고 국물을 부어주면 짬뽕이 완성된다.

“잘 먹겠습니다.”

“대접은 여유분이 있나요?”

“네. 부엌 싱크대에 보면 있을 겁니다.”

민우는 짬뽕 한 그릇을 더 만들어서 텃밭 옆의 집으로 향했다.

“어르신 계십니까?”

대문이 열리고 꾸부정한 노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야밤에 또 무슨 일인데?”

해는 졌지만 밤은 아니다.

아니, 해가 졌으니 밤이라고 하는 건가?

알쏭달쏭해 하던 민우가 가져온 대접을 내밀었다.

“식사 전이면 이거 드세요.”

민우를 물끄러미 보던 노인이 대접을 받아들었다.

“고맙네, 잘 먹을게.”

“어르신께서 재료를 내주셔서 만들 수 있었던 건데요 뭘.”

“자네는 먹었나?”

“아뇨, 얼른 가서 먹어야죠.”

“어여 가봐. 그릇은 가지러 오지 않아도 돼. 여기 놔둬도 되니까.”

“알겠습니다, 어르신. 쉬세요.”

후다닥 숙소로 돌아가는 민우의 뒷모습을 보던 노인이 대접을 바라봤다.

“짬뽕이라···. 몇 년 만에 먹어보는구먼.”

* * *

설거지는 윤다예가 맡았다.

그녀가 저녁 준비 때 한 게 없다는 이유를 내세웠기에 아무도 거부할 수 없었다.

정용수와 시차준은 화덕을 만들었으니까.

“이야 맛있게 잘 먹었다.”

“내가 촬영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 항상 중국집 음식이 아른아른 떠올라서 시켜 먹었는데 이번에는 다른 걸 먹어야겠어요. 웬만한 맛집 뺨치던데요?”

“별거 아닙니다.”

“별거 맞아요. 근데 다른 요리도 좀 합니까?”

“재료만 준비되면 할 수 있는 음식이야 많죠.”

노국태는 결심했다.

내일 무슨 일이 있어도 닭을 잡고 말 거라고.

기왕이면 풀떼기보다 고기가 낫지 않겠는가.

이 섬에서 고기가 나올 곳이라고는 닭뿐이다.

듣기로는 흑염소도 있다는데 그놈은 절벽도 평지처럼 뛰어다니는 놈이라 애초에 포기했다. 게다가 잡았다 치더라도 손질할 사람도 없고.

겨울의 해는 짧아서 순식간에 사위가 어두워졌다.

아직 촬영이 끝난 건 아니었기에 조명을 설치해서 주위를 밝혔다.

뭘 해서 분량을 채울까 걱정했지만 의외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내일 뭘 먹을까, 무엇을 할까, 그런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다.

찌르륵, 찌르륵.

조명에 잠이 깼는지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의 기후가 제법 따뜻해서 아직 풀벌레가 남아있는지도 모르겠다.

시차준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존재감 없이 있다가는 그냥 묻히는 거다. 뭐라도 해야 했다. 그런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때, 시차준의 눈에 구동운이 들어왔다.

스탭 사이에서 촬영을 보고 있던 그는 장작을 들고 흔들고 있었다.

해가 진 이때 분위기를 끌어 올릴 수 있는 것이 퍼뜩 떠올랐다.

“캠프파이어 어때요? 장작도 있던데.”

한 피디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화면이 밋밋해서 촬영을 접을까 생각 중이었는데 좋은 건수를 얻었다.

그런 한 피디를 흘긋 본 정용수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럼 불 좀 피우고 얘기나 나누자. 아직 자려면 멀었잖아?”

허락이 떨어지자 시차준은 장작과 벽돌을 모아왔다.

노국태나 정용수가 도우려고 했지만 시차준이 거절했다.

비디오를 독점할 수 있는 이런 기회를 놓쳐서야 되겠는가.

장작을 쌓아두고 주위에 벽돌을 둘렀다.

캠핑 생활을 자주 해봐서 불 피우는 일도 자신 있다.

찌르륵, 찌르륵, 따닥, 따닥.

풀벌레 소리와 장작 타는 소리가 어울리자 놀러 온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불 하나 피웠다고 분위기가 확 사네요.”

시차준은 왠지 뿌듯함이 느껴져서 으스대듯 말했다.

“그러게. 분위기 좋은데?”

모두가 홀린 듯 장작불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민우가 일어나 숙소로 들어갔다.

저녁은 면으로 먹어서인지 금방 배가 꺼졌다. 슬슬 야식을 준비해야 적당한 때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미리 준비해둔 잡어의 내장을 손질하고 깨끗이 씻은 다음 커다란 냄비에 물과 함께 담아 나왔다.

민우를 발견한 정용수가 물었다.

“그건 뭐야?”

“어죽이나 끓여볼까 해서요.”

음식 얘기에 노국태가 펄쩍 뛰었다.

“어, 나 그거 좋아하는데! 근데 어죽은 민물고기로 만드는 거 아니에요?”

“바닷물고기로 하기도 해요. 아까 가져온 물고기가 망둥이더라고요. 매운탕으로 끓여 먹기도 하니까 괜찮을 겁니다.”

시차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기껏 캠프파이어를 만들고 주위의 이목을 끌어모았는데 고작 냄비 하나로 홀라당 뺏어갔다.

민우는 캠프파이어에서 장작을 조금 덜어 화덕으로 옮기고는 그 위에 냄비를 올렸다.

노국태가 재빨리 화덕에 장작을 추가했다.

화력이 강하니 금방 익을 거다.

여기에 마늘, 대파, 양파를 썰어 넣고 다시 푹 삶아줘야 한다.

부엌으로 돌아가 양념장을 미리 만들었다.

양념장도 숙성시켜야 맛이 좋아지니까.

된장과 고추장을 베이스로 다진 마늘과 다진 파, 고춧가루를 넣고 잘 섞었다.

소면을 넣어도 되겠지만 왠지 수제비로 먹고 싶어졌다.

밀가루를 반죽해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채소를 손질했다.

1시간 정도가 지난 후 삶아진 생선을 체에 걸러냈다.

잡담을 나누던 게스트가 어느새 홀린 듯 민우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생선을 완전히 으깨서 뼈를 걸러낸 다음 육수에 양념장과 채소를 함께 넣고 밀가루 반죽을 뜯어서 던져 넣기 시작했다.

“저도 해봐도 되나요?”

윤다예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손 깨끗하게 닦고 와서 하시면 돼요.”

민우의 허락에 윤다예가 바람처럼 움직였다.

“엄지 크기로 최대한 얇게 뜯어서 넣으면 돼요.”

밀가루가 들어간 탓에 국물이 끈적끈적하게 변해갔다.

침을 꿀떡꿀떡 삼키며 바라보던 정용수가 노국태의 옆구리를 툭 쳤다.

“소주 까자.”

“차준이가 가져온 거요?”

“아껴봤자 뭐 하겠어? 분위기 좋을 때 먹어야지.”

“그럼 한 병만 마셔 볼까요?”

완성된 어죽은 양이 넉넉했다.

“크흠. 나도 먹어도 되나?”

구경하고 있던 집주인 노인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생선을 제외한 거의 모든 재료가 노인의 것이다.

“오셔서 같이 드세요.”

“촬영하는 데 방해해서야 쓰나. 내건 따로 떠주면 고맙겠네.”

완성된 어죽을 한 대접 덜어서 건네주었다.

출연자들이 한 그릇씩 떠가고 남은 냄비는 스탭의 손으로 넘어갔다.

남은 양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권력의 순서대로 분배되었다.

막내 스탭은 고작 두어 숟가락만 손에 쥐게 되자 울분을 삼켜야 했다.

소주 한 잔과 어죽 수제비를 먹으니 이곳이 천국인 것 같아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국태야, 오늘만 같으면 즐겁게 촬영할 거 같지 않냐?”

“저는 항상 즐거웠는데요?”

한 피디의 눈치를 살피는 척하면서 아부를 떨자 정용수가 낄낄 웃었다.

“너는 조선시대에 태어났으면 간신이었을거다. 아니면 전생이 간신이었거나.”

배도 부르고 분위기는 좋고.

여기에 음악이 빠질 수 있나.

민우는 숙소로 돌아가 클래식 기타를 가지고 나왔다.

자리를 잡고 앉아 현을 튕겨봤다.

띵, 띵, 띵.

예상은 했지만 집주인이 장식 삼아 놔둔 것인지 조율은 되어있지 않았다.

페그를 돌려가며 기타를 조율했다.

“그거 칠 줄 알아?”

정용수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그가 기억하는 민우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몇 년 만에 만난 민우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다.

기사로 접하기로는 피아노도 피아니스트 뺨칠 만큼 잘 친다고 했다.

거기에 요리와 기타까지.

웬만한 재능이 있지 않고서야 가능한 일일까?

민우는 태연한 얼굴로 기타를 만지며 대답했다.

“그냥저냥 분위기 살릴 정도는 돼요.”

원래라면 기타 튜너의 도움을 받아야 하겠지만 민우는 어렵지 않게 조율을 끝냈다.

디리리링.

전체적으로 음을 확인하고 자세를 잡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모두가 자신만 바라보고 있다.

민우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물었다.

“왜 다들 저만 보고 있으세요?”

“얼른 쳐봐. 다들 기다리잖아.”

“그럼 한 곡 쳐볼까요?”

모두의 기대감을 품고 민우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솔솔라라솔솔미 솔솔미미레···.

따라란 따라란 하는 기타음 중간에 귀에 익숙한 음이 들린다.

“이거 학교종 아냐?”

시차준이 풉, 하고 웃었다.

또 무슨 짓으로 주목을 받으려고 하나 걱정했는데 괜한 기우 같다.

살짝 마음을 놓는 찰나, 민우가 본격적으로 연주를 시작했다.

손가락으로 현을 튕기는 핑거스타일의 유명한 곡이다.

탄현 중간중간 탭도 능숙하게 한다.

감수성을 자극하는 기타음에 윤다예가 눈을 크게 떴다.

“어? 이거 저 아는데. 황혼 아니에요?”

빙긋 웃은 민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연주를 이어나갔다.

시차준이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갑자기 세상이 불공평하게 느껴진다.

왜 한 사람에게만 재능을 몰아 줬는지 질투심이 가슴 한구석에서 들끓었다.

노국태가 정용수의 옆구리를 툭툭 찔렀다.

“형님, 분위기 좋은데 소주 남은 거 마저 까죠?”

“내일은 뭐 먹고?”

“없으면 안 먹는 거죠. 이런 분위기를 그냥 넘어갈 수 있습니까?”

“없지! 얼른 가져와.”

풀벌레 소리, 장작 타는 소리, 기타 소리가 한데 어우러지자 환상적인 분위기가 연출된다.

불 피우느라 고생은 시차준이 했는데 받아먹은 건 민우가 된 셈이다.

“흐흐흐흐.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왔어.”

한 피디만 좋은 장면을 건졌다며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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