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촬영
해도 뜨지 않은 새벽.
민우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골목 끄트머리에 홍경섭의 낡은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운전석으로 다가가 노크를 했다.
“좋은 아침.”
“아직 새벽이다만.”
“실 없기는.”
피식 웃으며 보조석의 문을 열었더니 처음 보는 여자가 앉아있었다.
당황한 민우가 뒷좌석에 올라타자 홍경섭이 비실비실 웃으며 말했다.
“서로 인사해. 오늘부터 스타일리스트를 맡아줄 전정희. 정희야 쟤는 우리 회사 유일의 연예인 강민우.”
“반가워요, 민우 오빠.”
“네. 앞으로 잘 부탁해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저 어려요.”
“그래? 그게 편하다면 그러자. 빨리 말 트고 빨리 친해지는 게 낫겠지?”
전정희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연예인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종자가 많다.
성격 나쁜 사람은 아닐까 걱정도 했으나 직접 만나본 민우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어색한 인사를 마치자 홍경섭은 민우의 머리를 흘긋 봤다.
“너 머리해야 될 거 같은데. 첫 촬영이라 서둘러서 여유가 있으니까 샵에 들렀다 가도 충분하겠다.
“나 매일 가던 곳 있어. 거기로 가자.”
“매일? 매일 간 머리야 그게? 너 머리 많이 길었는데?”
아차, 너무 오랜 시간을 반복했더니 가끔 이렇게 말실수를 하게 된다.
“단골이라는 뜻이지. 역 근처에 머리 잘하는 곳 있어. 새벽에 문을 여는 곳이라 지금도 영업 중일 거야.”
익숙한 스타일로 깔끔하게 머리도 하고, 전정희가 준비한 의상 중에 원하는 스타일을 골라내기도 했다.
전정희는 민우가 하는 모습을 보며 감탄만 할 수밖에 없었다.
옷뿐만 아니라 액세서리의 선택까지 어느 하나 깔 게 없다.
전정희 탄식했다.
“섭이 오빠. 나 곧 실직자 될 거 같은데.”
“왜? 무슨 일 있어?”
“일은 무슨. 민우 오빠 같은 연예인만 맡으면 소원이 없겠구만.”
“그런데 왜 실직자가 돼? 나나 민우나 짜를 생각은 없는데. 민우야 정희 짜를 거냐?”
민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람 막 자르고 그러는 거 아니지.”
“거봐. 그렇다잖아.”
“내가 할 게 없어서 그래. 일도 안 하는데 월급도둑질은 할 수 없잖아.”
“아.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나? 내가 이것저것 다 입어보고 스타일링을 해봤는데 나한테 맞는 타입은 이런 거더라고.”
“아뇨, 아뇨. 오빠 탓을 하는 게 아니에요. 제가 해야 하는 일이 스타일링인데 저보다 더 스타일을 잘 잡으셔서 그래요. 제가 문제죠.”
“그거라면 걱정 안 해도 될 거 같은데. 나 막 깐깐하고 그런 사람 아니거든. 납득되는 선이라면 네 뜻에 따를게.”
곰곰이 생각하던 전정희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평상시 스타일은 오빠 의견을 많이 고려하도록 할게요. 제가 봐도 포인트를 잘 잡으셔서 조언해 드릴 것도 얼마 없거든요. 다만 촬영에 관한 의상은 제가 의견을 내도 될까요? 아무래도 의상을 빌리고 반납하는 과정에서 의견 충돌이 생기면 업무가 꼬일 거 같아서요.”
“그래. 미리 사진 찍어서 보내주면 더 좋고.”
“오케이. 그럼 그렇게 해요. 아참. 메이크업도 해야 하는데 대기실은 있겠죠?”
“원래 피아노 콩쿨이 열리는 곳이라 대기실은 있을 거야.”
첫 촬영 장소는 ‘예안 아트홀’. 이다.
홍경섭이 운전하는 차는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민우에게 배정된 대기실로 의상을 옮기고, 메이크업하며 촬영 준비에 정신이 없을 때.
구동운이 시차준을 대동하고서 민우의 대기실로 낯짝을 들이밀었다.
그를 발견한 전정희가 깜짝 놀라 얼굴을 돌렸다.
이미 시차준은 연미복에 메이크업, 헤어까지 완벽하게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대기실에 다른 배우들이 없음을 확인한 구동운은 홍경섭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씩 웃었다.
“이여, 경서비. 이제 사장이라며? 축하한다. 팀장 건너뛰고 사장이면 승진 정도가 아니라 영전이네.”
홍경섭이 처한 상황을 비꼰다.
축하 인사라고 하기엔 심하게 빈정거리는 말투다.
그에 비해 홍경섭은 어른스러운 얼굴로 자연스레 받아쳤다.
“축하는 화환이라도 하나 보내고 해야 하는 거 아니냐?”
“화환 보낼 사무실은 있고? 주소 불러봐. 화환은 나중에 쓸데도 없으니까 비싼 난이라도 하나 보내 줄 테니.”
메이크업을 받으며 가만히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민우가 피식하고 코웃음을 쳤다.
전정희가 참으라는 눈짓과 함께 격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전정희의 걱정 가득한 눈빛에 또다시 실소가 새어 나왔다.
“괜찮아. 나 무모한 사람 아냐. 걱정하지 마.”
민우는 자신의 배우 경력 모두를 촬영장에서 먹고 자며 살다시피 했다.
군대를 다녀온 기간을 빼고 거의 6년이다.
잠깐 스치듯 얼굴을 비추기위해 대기만 12시간이 넘게 할 때도 있었다.
이럴 때 써먹을만한 방법은 수없이 겪었고, 또 보았다.
시차준이 한마디 했다.
“경섭이 형. 이번에 맡은 배우는 형 입맛대로 휘두르지 마세요.”
“휘둘렀다고? 그 말은 내가 너를 휘둘렀다는 뜻이냐?”
“제가 원하지도 않는 걸 강제로 시켰으니 휘두른 게 아닐까요?”
구동운이 시차준을 거들고 나섰다.
“맞지. 그건 휘두른 거지. 이제 넌 내가 맡았으니 앞으로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너도 봤지? 이번 작품에도 수월하게 꽂아준 거.”
“봤죠, 봤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팀장님.”
팀장님이라는 말은 한 글자씩 끊어서 지껄인다.
“그래, 이제 꽃길만 걷자.”
두 놈의 생쇼에 홍경섭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속에서는 열불이 치솟는데 민우를 생각하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WI 엔터가 중소기업에 가까운 규모라지만 1인 기획사에 비할 바는 아니다.
힘이 없으니 그저 참아야 한다.
전정희는 코앞에서 점점 변하는 민우의 표정을 보며 안색이 노래졌다.
‘구동운 저 망나니가 어떤 사람인데. 이러다 큰일 나겠어.’
전정희가 발을 동동 구르거나 말거나 민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실력은 쥐뿔도 없는 녀석이 입만 살아서는.”
민우의 딕션은 얼마나 정확하던가.
묘한 침묵이 감돌던 때라 그의 한마디는 대기실의 모든 사람 귀에 박혀 들었다.
“뭐!”
구동운이 발끈하며 소리 질렀다.
거울 너머로 보이는 민우의 눈빛에서 모멸감이 느껴져 속이 뒤틀렸다.
민우의 한쪽 입꼬리가 슥 올라갔다.
눈은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아 차가운데 입가에는 미소가 머문다.
구동운은 들끓던 가슴이 순식간에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민우의 비뚜름해진 입술이 움직였다.
“그게 연주야? 발로 연주했어? 지나가는 고양이를 데려다 연주를 시켜도 너보다는 잘하겠다.”
“무, 무슨 개소리야?”
“개소리도 그것보다 더 아름답게 들릴걸? 실력이 없으면 연습을 해야지. 요행을 바라면 쓰나?”
구동운은 계속된 민우의 말에 부들부들 떨었지만, 시차준은 민우의 독설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눈치 개 없네. 이런 상황에 대사 연습이라니.”
“뭐야? 대사야? 뭔 대사가 저따위야?”
“원래 저런 캐릭터예요. 안하무인.”
“그래 저딴 배역은 줘도 안 하는 게 낫다. 괜히 이미지 망칠 필요는 없잖냐. 한 번 정해진 이미지는 생각보다 오래간다. 조심해야 돼.”
그 배역을 자신들도 원했다는 건 기억하지 못하나 보다.
전정희를 바라보며 민우가 물었다.
“메이크업 다 됐지?”
“네, 오빠!”
안절부절못하며 민우를 바라보던 전정희는 어느새 탄산음료라도 마신 듯 상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도 바보가 아닌 이상 절묘한 대사를 이용해서 둘을 엿 먹였다는 걸 깨달은 거다.
민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동운과 시차준은 잠시 쫄았지만, 꿇릴 게 없다고 생각했는지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처음 뵙겠습니다. 신인배우 강민우입니다. 제가 대사를 가끔 까먹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점검해야 하거든요. 기분이 상하셨다면 이해해주세요.”
심지어 사과도 아니고 이해해 달란다.
속으로야 발끈했지만 사정이 그렇다는데 무슨 말을 할까.
여기서 괜히 한 소리 해봤자 앞뒤 없이 날뛰는 멍청이가 될 뿐인데.
“용건이 아직 남았나요? 제가 촬영 전에 감정을 잡아야 하는데 좀 오래 걸리는 편이라서요.”
정중한 말투인데 왜 꺼지라고 들리는지 모르겠다.
구동운은 입술을 깨물고 몸을 돌렸다.
“가자, 차준아.”
둘이 대기실을 빠져나가자 전정희가 환호성을 터트렸다.
“꺅! 저 오늘부터 오빠 팬 해도 되나요?”
“이미 편인데 굳이 팬까지 될 필요 있어?”
“맞아. 우린 한편이죠. 경섭 오빠. 아까 구동운 얼굴 봤죠? 똥 씹은 거 같은 표정. 내가 살다 살다 저 자식···. 아차, 실례. 저 사람이 그런 표정 짓는 건 처음 봤네.”
전정희의 호들갑에 홍경섭은 피식 웃었다.
“자식이면 양반이지. 새끼라고 해도 못 들은 척해줬을 거다.”
그간 쌓인 게 워낙 많았나 보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전정희는 깔깔거리며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러다 뭔가 깨달은 듯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민우를 바라봤다.
“오빠 감정 잡아야 하죠? 제가 너무 방정을 떨었네요.”
“그냥 꺼지라고 한 말이었어. 신경 쓰지 마.”
“어쩐지 저도 그렇게 들리더라고요.”
대기실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어느덧 촬영 시간이 다 됐다.
감규범이 대기실의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김재수 준비됐죠? 10분 뒤에 촬영 시작이에요. 그리고 유 작가님도 오셨으니까 확 눈길을 사로잡으세요. 파이팅!”
말을 마치고는 휙 사라졌다.
“작가님 눈길을 잡으라니. 무슨 뜻이지?”
“연기 잘 하라는 뜻이겠지.”
홍경섭도 정확한 이유를 몰랐기에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 이유는 촬영현장에서 감규범을 만나고 나서 알게 되었다.
유명희는 가끔 기대되는 배우가 연기할 때면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
그녀의 기대대로 연기를 잘하면 분량이 늘어난 쪽대본이 날아온다.
심지어 최종대본을 나눠줬음에도 분량을 쥐고 흔들며 끝없이 경쟁을 유도한단다.
대본 작업이 밀려서 쪽대본을 남발하는 작가와 결이 다르다.
그런데 또 시청률은 국내 탑급이니 어느 누가 반기를 들 수 있을까.
촬영을 위해 대기하는 배우들의 눈은 긴장과 욕심으로 번들거렸다.
그들도 소문을 들은 것이다.
조영규의 옆에 앉은 유명희는 여전히 여왕 같은 포스를 뽐내고 있었다.
스테이지에 놓인 피아노 앞에는 시차준이 자리를 잡았다.
주변에 놓인 조명을 보니 촬영장에 왔다는 것이 실감 난다.
조영규가 메가폰을 들고 물었다.
“주효원, 준비됐죠?”
“네, 감독님. 언제든 오케이입니다.”
“어차피 정확한 타건은 아니어도 편집으로 싱크 맞출 테니까 리얼하게만 연기하세요.”
“명심하겠습니다.”
감규범이 음원을 틀고, 거기에 맞춰 시차준은 연주를 했다.
엉터리로 건반을 눌렀기 때문에 연주가 아닌 소음에 불과하다.
어느 정도 분량을 확보하자 조영규가 외쳤다.
“컷, 거기까지.”
NG 없이 한 번에 오케이다.
연주를 마친 시차준은 자신의 연기에 뿌듯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때를 위해서 오디션 합격 소식을 듣자마자 타건에만 신경 써왔는 데 그 보답을 받은 것 같다.
다음은 민우의 차례다.
“김재수, 준비됐나요. 한 번에 촬영할 겁니다. 등장부터 피아노 앞에 앉는 것까지. 중간에 안 끊으면 그대로 감정선 유지해서 피아노 연주까지 들어가세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감독님. 혹시 음원 없이 연주해도 상관없나요?”
시차준은 민우를 보며 비웃었다.
음원보다 나은 연주를 한다?
그거야말로 무리수가 아닌가.
조영규는 잠시 대답을 미루고 유명희를 바라봤다.
대답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유명희의 눈은 기대감으로 인하여 반짝거리고 있었으니.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은 조영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세요.”
사실 그도 궁금하기는 했다.
3차 오디션도 건너뛰게 했던 마임 연기.
그걸 귀로 들을 수 있을지 없을지가.
감독의 허락을 받은 민우는 감규범을 따라 동선을 체크했다.
그동안 조영규는 음악감독을 불러 피아노 근처에 마이크를 설치를 지시했고.
불필요한 노동을 하게 된 음악감독은 투덜거리며 스태프와 함께 움직였다.
“굳이 마이크까지 설치 해야 해? 그냥 후시녹음하지.”
지금 찍는 장면은 피아노 콩쿨에 관한 내용이다.
배우가 피아노 연주를 잘하면 얼마나 잘한다고.
피아니스트에 비하면 제대로 된 연주도 아닐 텐데 괜한 짓을 벌인다고 생각했다.
촬영 준비가 끝나자 조영규가 메가폰을 들고 외쳤다.
“김재수 등장씬부터 시작합니다. 스탠바이. 액션!”
대기실 방향에서 연미복을 입은 민우가 모델처럼 걸어 나왔다.
최근 운동을 열심히 한 덕에 몸도 탄탄해 보인다.
꼿꼿한 자세에서 풍겨져 나오는 분위기가 조영규의 마음에 쏙들었다.
객석을 향해 인사를 한 민우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후우···.”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는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촬영장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조용했다.
질식할 것만 같은 침묵 속에서 민우의 손가락이 유려하게 움직였다.
디딩-!
그의 손끝에서 쇼팽의 명곡 ‘녹턴 2번’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