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절했던 기회 (17/223)

간절했던 기회

버스에서 내린 민우는 편의점부터 들렀다.

노란색 케이스에 들어 있는 캡슐 타입의 비타민C와 카페인 에너지 드링크를 사고, 커피숍에 들러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구매했다.

준비를 마치고 이제는 익숙해진 미디어센터로 들어섰다.

미디어센터 내부에는 페이퍼에 코를 박고 대사를 외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남자 스태프에게 다가가 아메리카노를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아, 네. 누구세요?”

“오디션 보러 온 사람입니다.”

“이건 뇌물인가요? 저한테 잘 보여 봤자 소용없는데.”

“압니다. 그냥 뭐 좀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요. 이건 그 대가로 받아주시고요. 곤란한 질문이면 대답 안 해주셔도 됩니다.”

안 그래도 오랜 시간 오디션을 진행하느라 진이 빠지던 참이었다.

조연출, 감규범은 민우가 내미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흔쾌히 받았다.

쪼록.

한 모금 시원하게 빨아 먹으니 카페인 덕분에 링거라도 맞은 것처럼 온몸에 활력이 돌았다.

“뭐가 궁금하세요? 커피값만큼 대답해드릴게요.”

“혹시 시차준이라는 사람이 오디션을 봤나요?”

감규범이 눈을 가늘게 떴다.

“오디션 참가자의 신상은 공개할 수 없는데요.”

“아는 후배인데 오늘 오디션을 보기로 했거든요. 만나서 해줄 이야기도 있는데 가버린 건 아닌가 해서요. 그냥 참가 여부만 알려주셔도 충분합니다.”

“흠···.”

잠시 고민하던 감규범이 서류로 눈을 돌렸다.

“오전에 약속이 잡혀있네요.”

주어도 빠지고 내용도 아리송한 대답이지만 못 알아들을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알려줬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물론이죠.”

손으로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해 보이며 몸을 돌렸다.

“100번 참가자분!”

스태프의 외침을 뒤로하고 한수연의 매니저 옆에 앉았다.

“삼촌, 비타민 좀.”

타이밍을 잘 맞춰서 도착한 것 같다.

이내 매니저가 비타민 케이스를 꺼내어 흔들었다.

“응? 다 먹었나? 어쩌지? 사탕이나 껌이라도 줄까?”

“그걸로는 모자랄 것 같은···.”

“내가 금방 사 올게.”

매니저가 벌떡 일어서자 민우가 나섰다.

“제가 비타민을 가진 게 있는데 드릴까요?”

가방에서 비타민 케이스를 꺼내려 하자 매니저가 잽싸게 민우의 팔목을 움켜잡았다.

“당신 뭐야?”

소란을 피울 수 없었기에 낮게 깔린 목소리였다.

확실히 이 사람은 배우의 재능이 있다.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위협에 간담이 서늘해졌을 정도였으니까.

“당신 뭐냐고?”

아차, 상념이 너무 길었다.

민우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보시다시피 오디션 참가자입니다.”

“몰라서 묻는 것 같아? 비타민을 당신이 왜 주냐고.”

“뭔가 오해를 하셨나 본데. 바로 옆에 있어서 대화가 들렸습니다. 비타민 이거는 비닐도 뜯지 않은 새거고요. 그냥 조공으로 생각하시고 받아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한수연 씨 팬이거든요.”

매니저의 눈썹이 치솟았다.

“얘가 수연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사생이냐?”

옆에서 듣고 있던 한수연이 매니저의 팔뚝을 찰싹 때렸다.

“어유, 삼촌! 팬이시라잖아. 그리고 나한테 사생이라도 남아있기는 해? 파파라치만 남은 거 아니고?”

듣고 보니 그렇다.

머쓱해진 매니저가 비타민 케이스를 받아 들고 샅샅이 살펴보았다.

민우의 말대로 비닐도 온전한 새것이다.

매니저는 곧바로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과했다.

“제가 실례했네요. 고맙습니다. 이건 제가 수연이한테 잘 전해 주도록···.”

“어휴. 내가 못 살아.”

한수연이 답답함을 금치 못하고 가슴을 두드리다가 매니저에게서 비타민 케이스를 뺏어 들었다.

“저기 팬분.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안 그래도 이것 때문에 조금 곤란한 상황이었거든요.”

밝게 웃으며 비타민 케이스를 흔들어 보이는데, 마스크 위로 드러난 눈으로 예쁜 웃음을 지었다.

찌익.

비닐을 까고 비타민 한 알을 입안에 던져 넣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아 흐뭇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한수연의 차례가 되었다.

“116번 참가자분 이쪽으로 오세요!”

비타민 덕분인지 한수연의 컨디션은 매우 좋아 보였다.

“화이팅! 부담 없이 보고 와.”

“응.”

한수연은 매니저의 응원을 받으며 보무도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

한수연이 오디션장에 들어가자 민우는 스태프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이름은 방지영이라고 했었다.

방지영에게 에너지 드링크를 내밀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실례합니다. 괜찮으시면 이거 드세요.”

“어? 감사합니다만···. 누구세요?”

“그냥 오디션을 보러 온 사람입니다. 너무 피곤해 보이셔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네요. 뇌물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드세요.”

차마 다크서클로 인해 판다 같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민우의 너스레에 방지영은 배시시 웃으며 음료수를 받아 들었다.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감규범처럼 여자 스태프도 음료수를 마시자 시들시들하던 채소가 물을 머금고 살아나듯 생생해졌다.

방지영과 안면을 튼 민우는 대화를 나누는 데 집중했다.

이미 21일을 반복하면서 방지영의 관심사는 파악해두었다.

거기에 맞춰서 대화를 이끌어가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오디션장의 문이 열리고 한수연이 나왔다.

예전에는 대략 10분 정도만 머물렀었는데 이번에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더불어 침울하던 예전과 달리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민우를 발견한 한수연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 그래도 감사 인사를 드리려고 했는데 마침 여기 계시네요. 팬분 덕분에 오디션은 잘 본 것 같아요. 정말 정말 감사해요.”

“잘됐네요.”

“팬분도 좋은 결과 있길 바랄게요.”

한수연은 민우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매니저와 미디어센터를 떠났다.

방지영이 민우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외쳤다.

“117번 참가자분!”

117번을 여러 번 불렀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안 오는 사람이 많나 봐요?”

“서류접수만 하고 오지도 않네요. 1차 합격도 쉬운 일이 아닌데.”

예전이라면 짜증과 피로로 인해 폭발 직전이었겠지만 이번에는 민우 덕분에 짜증이 누적된 상태가 아니었다.

“아차, 실례할게요. 117번 참가자분 없나요?”

“잠깐만요!”

방지영의 외침과 동시에 임대권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117번분?”

“허억, 허억. 아닙니다. 118번입니다.”

서류를 흘긋 본 방지영이 다시 물었다.

“임대권 씨?”

“맞습니다. 후우우···.”

진땀으로 범벅된 임대권은 도저히 오디션을 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잠시 숨 좀 돌리세요.”

방지영은 오디션장으로 들어가 시간을 조금 얻어냈다.

에너지 드링크와 함께 대화로 휴식을 취했기 때문인지 예전처럼 마녀의 포스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 수고하세요.”

볼일을 마친 민우는 슬쩍 웃어 보이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굳이 임대권을 돕기 위해 나선 게 아니라 방지영의 멘탈 관리를 했을 뿐이다.

임대권은 덤이었다고나 할까.

임대권이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른 것으로 보이자 방지영이 그를 오디션장으로 안내했다.

민우는 눈을 감고 캐릭터를 떠올렸다.

주인공이 언젠가 넘어야 할 산으로 작가가 설정한 인물이다.

천재만의 괴팍하고도 괴짜 같은 매력과 카리스마를 뿜어내야 하는 캐릭터.

뛰어난 능력을 가졌음에도 겸손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얼핏 보면 재수가 없기도 하다.

그래서 이름도 ‘김재수’다.

극에서는 국내 콩쿨에서 주인공에게 차원이 다른 연주를 보여주고 쿨하게 해외로 유학을 떠난다.

덕분에 주인공은 피아노 연주에 몰입하게 되고 이후 성공을 하게 된다.

주인공이 각성할 수 있도록 트리거가 되어주는 배역이기에 중요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제는 익숙해진 캐릭터의 빙의가 이루어졌다.

때맞춰 민우의 번호도 불렸다.

“119번 참가자분.”

민우의 눈꺼풀이 스르륵 열렸다.

그의 눈동자에 권태로움이 가득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방지영에게로 걸어갔다.

고작 눈 몇 번 깜빡할 정도의 짧은 시간에 권태로움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디션장에 들어가면 심사위원의 날 선 공격이 들어온다.

이때껏 단 한 번도 어긋나지 않았으므로 미리 눈빛을 거둔 것이다.

안 그래도 호의적이지 못한 상태인데 괴팍한 첫인상을 남긴다?

그건 그리 좋은 판단은 아닐 것이 분명하다.

어차피 미리 만들어둔 캐릭터로의 몰입은 스위치를 켜듯 단박에 가능하다.

“119번 참가자 들어갑니다!”

방지영의 안내를 받으며 오디션장 안으로 들어섰다.

예나 지금이나 호의를 담은 시선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미소를 입에 담았다.

“안녕하십니까, 참가번호 119번 강민우입니다.”

인사가 끝나자 아니나 다를까 밉상인 메기수염의 태클이 들어왔다.

“단역 한번을 빼면 경력이 거의 없네요?”

날 선 질문에도 민우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빙긋 웃었다.

* * *

만들어두었던 캐릭터로의 몰입은 의자를 끌어오면서 이미 끝냈다.

비록 지금 의상은 청바지에 낡은 스웨터지만 연미복을 입었다고 상상했다.

자연스럽게 엉덩이 쪽 허공을 털어내고 의자에 앉았다.

의자에 앉은 민우는 심사위원들을 훑듯이 바라보았다.

PD인 조영규와 눈이 마주쳤다.

잠깐 움찔했던 조영규의 눈이 커지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강민우 씨. 혹시 우리 어디서 본 적 있나요?”

느닷없는 조영규의 질문에 민우는 몰입이 깨져버렸다.

덕분에 본래의 해맑은 미소가 흘러나와 버렸다.

“피디님은 저를 처음 보시겠지만 저는 자주 뵀습니다.”

잠시 말을 멈췄던 민우가 싱긋 웃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멍해진 조영규를 일별하고 민우는 다시 감정을 잡았다.

턱을 괴고 민우를 바라보던 작가, 유명희가 특유의 비음을 흘려냈다.

“흐응···. 반전매력이라.”

“매력은 무슨. 끼가 없잖아요, 끼가.”

메기수염이 또다시 끼 타령을 했다.

유명희는 듣기 싫었던지 파리를 쫓듯 손만 팔랑거렸다.

민우는 순식간에 몰입을 끝내고 다시 한번 느긋하게 심사위원을 훑어보았다.

좀 전에 조영규의 방해가 있기 전과 완벽하게 똑같은 모습이었다.

조영규는 속으로 감탄했다.

‘역시 아무렇게나 쳐다본 게 아니야.’

심사위원을 훑듯이 본 것도 관중석을 확인하는 연기였을 터.

이미 의자에 앉을 때부터 연기는 시작된 거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흘러나온 목소리에서 완고함과 깐깐함이 느껴졌다.

대본의 대사를 현재 상황과 부드럽게 연결해냈다.

연기를 시작하겠다는 뜻과 연주를 시작하겠다는 뜻을 동시에 담은 거다.

이런 작은 의도가 연기에 몰입하도록 도왔다.

‘김재수인가? 내가 주고 싶었던 배역을 골랐구만.’

배우는 배역을 고르는 눈이 있어야 한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수많은 배역 중에 자신과 어울리는 캐릭터를 고르는 것도 능력이다.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캐릭터를 완벽하게 연기해야 하는 것이 배우 아니던가.

이렇게 되면 연기를 떠나서 강민우라는 연기자에 관한 점수는 꽤 높아질 수밖에.

민우가 오른손을 부드럽게 앞으로 뻗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 피아노를 쳤던가.

이제는 허공에 피아노를 그려낼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후우···.”

민우가 잠시 숨을 고르는 동안, 조영규는 주위가 조용해졌음을 깨닫고는 허탈하게 웃었다.

‘고작 대사 한 번에 모두를 집중하게 만들다니.’

사실 따지고 보면 호흡, 행동, 대사가 어우러진 연기에 집중하게 된 거지만.

멈춰있던 민우의 손이 움직였다.

딩-.

딱 한 음을 누르는 듯한 동작이었다.

‘흐응···.’

눈을 의심케 하는 마임 연기에 유명희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콧소리를 냈다.

마치 눈앞에 피아노가 보이는 것 같아서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해야 했다.

심사위원들이 놀라거나 말거나 민우는 눈을 감고 피아노 연주에만 집중했다.

페달을 밟는 디테일한 연기와 고조되는 연주에 맞춰 들썩거리는 궁둥이까지.

얼마나 리얼한 연기였던지, 바삐 놀리는 손가락에 따라 귓가에 환청처럼 피아노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피아노 연주는 의외로 금방 끝났다.

아니, 민우의 연기에 집중하는 바람에 시간 가는 것도 잊어버렸다는 게 맞는 표현 이리라.

“후우우···.”

내쉬는 한숨마저도 마치 연기를 하는 것 같다.

손을 무릎 위에 올린 민우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동자에 담긴 것은 무료함이었다.

유명희의 만면에 희열이 번져나갔다.

그럴 수밖에.

그녀가 원하던 김재수가 바로 코앞에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김재수죠?”

앞뒤 다 자른 질문이었지만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유명희가 조영규를 쳐다보았다.

“더 재봐야 할까 조 피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됐네, 그럼. 확정 짓자.”

조영규가 민우를 보며 말했다.

“강민우 씨.”

“네.”

“김재수 역에 최종합격하셨습니다. 캐스팅된 건 비밀입니다. 제작발표회 전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세요.”

“감사··· 합니다.”

민우는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토록 원했던.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던.

간절했던 기회를 드디어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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