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하루의 시작
재주가 늘어날수록 22일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간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날이 코앞에 다가왔는지도 모르고.
만약 때가 된다면 완벽한 21일을 만들기로 했다.
그렇다면 완벽한 21일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이것은 오랜 시간 민우의 고민거리였다.
일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기억 속의 사고들을 막는 것이었다.
생판 남을 구해준다고 완벽한 21일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냥 넘겼을 경우 마음속에 앙금으로 남을 게 분명하다.
그것들은 두고두고 찜찜한 후회로 남아 발목을 잡게 될지도 모르고.
특히 버스 정류장에서의 사고가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머리를 식히기 위해 쉬는 날에는 사고장소에 들러 시간을 기억해두었다.
상념은 접어두고, 오랜만에 한강에 들렀다.
인생을 영화처럼 바꿀 수 있게 해주었던 유성은 그날 이후로 볼 수 없었다.
“아쉽네. 언제가 됐든 다시 한번 보고 싶었는데.”
하늘에 머물렀던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시커먼 강물이 흘러가고 있었다.
흘러가는 강물처럼 시간은 흐른다.
흐르고···.
흘러갔다.
* * *
“섭아, 잘 지냈냐? 오늘 점심어때?”
홍경섭과는 가끔 만나서 점심을 먹는 사이다.
물론 민우와는 달리 홍경섭에게 민우는 몇 년 만에 만난 반가운 친구였지만.
아무튼 같이 점심을 먹기로 약속을 잡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백화점을 들러 옷을 살 때 영감이 떠올랐다.
“어쩔 수 없지. 오늘은 미술만 해야겠네.”
아무리 기억력이 좋아져 잊어먹지 않는다고 하지만 영감은 다른 문제다.
지금 그리지 않으면 영감은 날아가 버리고 만다.
나중에는 그리려고 해봤자 다른 그림이 될지도 몰랐기에 어쩔 수 없이 작업실에 들렀다.
대충 스케치만 해두려고 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시간을 확인했을 때는 이미 오후 7시가 넘어있었다.
“이거 한 소리 듣겠는데.”
휴대폰을 확인하니 부재중 전화가 10통 가까이 쌓여있었다.
홍경섭은 전화를 한 번에 받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여러 번 걸었더니 가까스로 통화가 연결되었다.
-너 뭐냐?
“미안해. 약속을 잊어먹었어. 대신 저녁이나 같이 먹자. 비싼 거 살게.”
-됐다. 오늘 밥 먹을 기분 아니다.
점심과 저녁 사이.
고작 몇 시간 만에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듯한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뭔데? 무슨 일이야?”
-말하기 좀 복잡하다.
목소리에서 심상찮은 허탈함이 느껴졌다.
“밥이 싫으면 술이라도 먹던지. 위치는 문자로 보낼게.”
-그래. 술은 좀 땡기네.
민우는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던 바를 골랐다.
개별 룸이 있는 곳으로 이야기를 나누기 썩 괜찮은 곳이었다.
그림은 완성하지 못했지만 그리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졌다.
그리던 것들을 정리하고 지하철을 탔다.
약속장소에 도착하니 홍경섭이 먼저 도착해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홍경섭은 민우를 발견하자마자 위아래로 훑어보며 낯설어했다.
느긋한 여유가 몸에 배었다.
거기다 확 변해버린 스타일과 분위기는 또 어떻고.
아무리 몇 년간 만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정도가 있는 법인데 예상 범위를 아득하게 넘어섰다.
가끔 만나는 소속사의 스타들에게서나 보이던 아우라가 민우에게서 느껴지는 것 같아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했다.
“지금 뭐하냐?”
“아무것도 아냐. 근데 너 많이 달라졌다?”
매번 만날 때마다 듣는 이야기라 새롭지도 않다.
“달라지긴 무슨. 춥다. 얼른 들어가자.”
“여기 비싼 곳 아냐?”
바가 있는 위치는 강남, 그것도 역 근처의 빌딩 꼭대기 층.
위치만 봐도 가격이 예상될 정도인지라 홍경섭은 잔뜩 부담스러웠다.
“됐어. 얼른 들어가기나 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민우의 뒷모습은 마치 모델의 워킹을 보는 것 같다.
“쟤가 저렇게 자세가 발랐던가? 예전에는 좀 꾸부정했던 거 같은데.”
의문을 삼키며 건물 입구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3층 꼭대기에 도착했다.
바텐더가 서 있는 바를 제외하면 모두 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마음을 가라앉게 했다.
평소 클래식은 술집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근데 의외로 분위기를 고급스럽게 만드는 것 같았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가격이 나올 것 같은 장소다.
민우는 마치 단골인 것처럼 거침없이 움직였다.
룸을 잡고 외우기도 힘든 요상한 이름의 와인 한 병과 안주를 시켰다.
홍경섭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안주까지 테이블에 세팅이 끝난 후였다.
고소한 피스타치오가 한쪽에 소복이 쌓여 있고, 올리브, 아보카도, 말린 열대과일은 커팅 되어 예쁘게 놓여있었다.
크래커와 치즈는 카나페로 보였으나 대패 삼겹살처럼 얇게 썰린 고기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홍경섭의 시선을 눈치챈 민우가 와인병을 들며 말했다.
“하몽 이베리코 데 베요타야. 스페인 햄인데 도토리만 먹고 자란 돼지로 만들었다나?”
무슨 본토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발음에 홍경섭은 혀를 내둘렀다.
쪼르륵.
와인을 따르자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꽃향기 같기도 하고 과일 향기 같기도 했는데 정확하게 정의하기는 어려웠다.
민우는 자신의 잔에도 와인을 따른 다음 잔을 들어 향기를 맡았다.
“아로마가 좋지? 마셔봐. 탄닌 때문에 조금 떫기는 한데 균형이 잘 잡혀서 다양한 맛을 느끼게 해줄 거야.”
홍경섭도 와인을 마시는 법은 대충 안다.
색을 보고, 향기를 맡은 다음 입안에서 굴려 가며 맛을 느끼고 천천히 삼킨다는 걸.
과연 민우의 말대로 입안에서 느껴지는 풍미가 나쁘지 않다.
“나는 소주가 더 취향인데.”
“나도 그래.”
“근데 여기로 왜 왔냐?”
“이야기하기 편한 곳이라서.”
홍경섭은 주위를 둘러봤다.
확실히 독립된 공간감을 준다.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분위기가 저절로 잡히는 곳이다.
궁금할 게 뻔한데도 민우는 먼저 묻지 않았다.
그저 와인의 맛을 즐기고 있을 뿐.
홍경섭은 한숨을 내쉬고 와인을 한잔 가득 따랐다.
단숨에 한잔을 비운 홍경섭의 입이 열렸다.
“내가 요즘 맡아서 키우던 놈이 있었거든.”
민우는 기억을 더듬었다.
예전에 그런 얘기를 해줬던 것 같다.
“곧 조연을 맡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던?”
“내가 말해줬나? 기억이 없는데?”
민우는 속으로 뜨끔했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태연하게 와인병을 손에 쥐었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 그래서? 그 사람이랑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걸 말해 주려면 이야기가 긴데. 괜찮겠냐?”
피식 웃은 민우가 홍경섭의 잔에 와인을 반쯤 따르며 말했다.
“천천히 마시자. 밤은 기니까.”
비록 민우에게 주어진 시간은 새벽 3시 30분까지뿐이지만.
홍경섭은 한잔을 마저 마시고 나자 그나마 속이 가라앉았는지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우리 회사 사장이 나이가 좀 있어서 후계자가 필요한 상황이야. 후계자로 지목되는 이사는 세 명인데, 실적을 쌓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지. 사장이 가장 실적 좋은 놈을 후계자로 삼는다고 했거든.”
사장의 발언은 물밑에서 벌어지던 사내정치를 수면위로 끌어올렸고, 그로 인해 회사가 쪼개질 위기란다.
“이필성이라는 이사 놈이 있는데, 이놈이 세가 제일 약해. 실적도 모자라고. 뜬금없이 오늘 나더러 쉬라고 하더니 나 몰래 차준이한테 오디션을 보게 했다더라고. 그래, 오디션? 볼 수도 있지. 이해해. 놓치면 아까운 작품이라면 당연히 욕심도 내야지.”
“데리고 있었다는 사람 이름이 차준이야?”
“응. 시차준.”
“오디션 본 게 큰 문제는 아니잖아. 어차피 담당은 너 아냐?”
“그래, 내가 담당이지. 아니 담당이었지.”
홍경섭은 나직하게 욕설을 뱉으며 다시 와인을 한잔 가득 따랐다.
“6시쯤인가? 갑자기 연락을 해서는 이제 담당을 바꾼다는 거야. 차준이도 허락했다는데 그놈 성격을 내가 알거든. 위에서 강요하면 어쩔 수 없이 따를 놈이라는 걸. 젠장!”
울화를 삼키며 와인을 입안에 퍼붓는데 차마 말릴 수 없었다.
‘오늘 오디션을 봤다라···.’
어쩌면 민우가 아는 작품일지도 모른다.
“어떤 오디션을 봤대?”
“화도 나고 정신도 없어서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네.”
“알아볼 수 있어?”
주저하던 홍경섭은 동료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차준이가 본 오디션 제목. 녹턴? 그거 맞아? 아니 무슨 게임 캐릭터 이름으로 드라마 제목을 지었대? 야상곡? 캐릭터 이름이 아니라? 인마, 소리 지르지 말고. 모르는 게 죄는 아니잖아. 그럼 차준이가 본 오디션이 녹턴 에튀드라는 말이지?”
옆에서 듣고 있던 민우는 실소를 터트렸다.
‘녹턴 에튀드’는 4번째 순서의 오디션이다.
“다시 한번 말해봐. 그러니까 차준이 새끼가 그렇게 말했다고?”
홍경섭의 눈이 번들거렸다.
“그래, 고맙다. 나중에 밥 한 끼 살게.”
전화 통화를 끊은 홍경섭이 이를 부드득 갈아붙였다.
대충 돌아가는 상황이 예상된다.
아마도 홍경섭을 배신했겠지.
“헌신하면 헌신짝 된다더니. 옛말 틀린 거 없다니까? 망할 놈 같으니라고! 내가 어떻게 그 자리까지 올라가게 도와줬는데!”
민우는 시차준이라는 이름을 기억에 담았다.
와인을 한 모금 삼킨 민우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복수하고 싶냐?”
동네 마실이나 가자고 하듯 대수롭지 않은 말투에 오히려 섬뜩함이 느껴졌다.
“무슨 복수? 찾아가서 두들겨 패주자고?”
“상상력이 그렇게 빈곤해서 어쩌냐? 너를 버렸다며? 그럼 보란 듯이 성공해야지. 그게 복수잖아.”
“그럼 해야지. 내 반드시 차준이 새끼보다 나은 배우 찾아내고 만다!”
부어라 마셔라 하는 홍경섭을 보며 민우는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직감했다.
이제 22일을 맞이할 때가 되었다고.
* * *
띠리리릭, 띠리리릭.
새로운 21일의 아침이 밝았다.
눈을 뜨자마자 후드티만 입고 집을 나서 달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미친 듯이 달려가는 이유는 약수터가 있는 산에서 다친 중년 여인 때문이다.
최적의 경로를 이용하여 모든 사고를 막아내고 오디션까지 무사히 마치는 게 오늘의 목표였다.
“허억, 허억!”
산을 거슬러 달려가던 민우는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5시 5분.
1분 뒤면 중년 여인이 미끄러져서 허리를 다치게 된다.
민우는 다리에 더욱 힘을 주고 산을 뛰어 올라갔다.
산길에는 얇은 통나무를 길게 박혀있다. 통나무가 계단 역할을 해서 오르내리는 데 지장이 없도록 해둔 것이다.
허벅지가 터져나갈 것 같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약 10미터 앞에 빨간색 등산복을 입은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여자는 맞은편에서 올라오는 남자를 피하고자 옆으로 움직이려고 했다.
하필 여자가 내딛으려고 하는 곳에는 사람들이 밟고 지나다녀 납작해진 잡초가 있다.
서리가 내려 잡초는 얼어있는 상태였고.
만약 저걸 밟는다면?
둥근 통나무 때문에 반드시 미끄러진다.
그럼 허리를 다치게 되는 익숙한 전개가 이어질 것이다.
그럼 다시 이 짓을 해야 한다.
‘절대 그럴 수 없지!’
폐가 타는 것처럼 아팠지만 마지막 숨을 끌어모아 외쳤다.
“멈추세요!”
민우의 외침에 놀란 여자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여자뿐만 아니다.
주변의 사람들까지 놀라 민우를 바라보았다.
“허억, 허억!”
민우는 허리를 접고 숨을 몰아쉬었다.
온갖 운동을 섭렵했지만 체력만은 아쉽게도 20일에 머물러 있었다.
“뭐예요?”
놀라 당황한 여자가 주춤거리던 순간 얼음을 밟기라도 하듯 미끄러졌다.
재빨리 다가가 여자를 부축했다.
“어어··· 고마워요.”
“아닙니다. 괜찮으시죠?”
“네? 네.”
“길이 미끄러우니까 조심해서 내려가세요.”
“고마워요.”
“별말씀을.”
여자를 일별한 민우는 이마의 진땀을 닦으며 산을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