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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악연? (11/223)

인연? 악연?

지하철을 내려 향한 곳은 소고기를 파는 곳이었다.

1인분에 5만 원정도.

민우는 더 비싼 집으로 가자고 했지만, 홍경섭이 고집을 부려 오게 된 곳이었다.

인테리어도 나쁘지 않고, 테이블마다 칸막이가 있어 다른 손님과 마주치지 않도록 했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났을 때였는데도 비어있는 테이블은 몇 개 보이지 않았다.

“맛집인가?”

민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잠시 검색해 볼게.”

휴대폰을 조작하던 홍경섭은 감탄 성을 토했다.

“오! 여기 블로그에도 제법 올라있는데?”

“요즘 블로그를 어떻게 믿어? 죄다 광고더만.”

“그건 그렇지. 어휴, 나도 시간만 있으면 숨겨진 맛집 좀 알아 둘 텐데. 그게 은근 도움이 되거든.”

“맛집이라···.”

민우는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차피 남는 시간, 발품을 팔며 맛집 지도라도 그려둘까 싶다.

물론 기록으로 남겨봤자 사라지겠지만 기억에는 남으니까 괜찮겠다.

빈자리에 앉아 고기를 주문했다. 주문한 고기는 금방 나왔다.

홍경섭은 테이블에서 화려한 빛을 뽐내는 꽃등심과 특수부위, 그리고 각종 채소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게 다 얼마치냐? 4인분이니까 20만 원? 미쳤다, 미쳤어. 20만 원이면 국밥이 몇 그릇이야?”

“그냥 먹어. 고마워서 쏘는 거니까.”

“난 삼겹살도 상관없는데.”

“소고기를 싫어하는 거야?”

“없어서 못 먹는다. 없어서.”

“그럼 이번 기회에 원 없이 먹자. 나더러는 눈치 보지 말라더니 왜 자꾸 눈치를 봐?”

“그거랑 이거랑 같냐? 아무튼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냐?”

민우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숯불 위에 고기를 올렸다.

치이익-!

식욕을 당기는 냄새와 함께 새빨간 고기가 노릇하게 익어갔다.

“무리 아니니까 그냥 먹기나 하셔. 고기를 암만 먹어도 천만 원이 넘겠냐?”

민우가 다 익은 고기를 집게로 집어먹자 그제야 홍경섭도 젓가락을 들었다.

“근데 아까부터 자꾸 천만 원 타령이네? 복권이라도 당첨됐어?”

“복권이라··· 복권보다 더 좋은 게 당첨됐네.”

“정말? 그게 뭔데? 로또? 아참 로또도 복권이지. 그럼 도대체 뭐지?”

머리는 딴생각하고 젓가락은 멈추지 않는다.

마치 서로 다른 기관이라도 된 것처럼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고기를 집어삼켰다.

그런 홍경섭을 보며 피식 웃던 민우는 불현듯 어머니가 떠올랐다.

항암치료 중에는 충분한 단백질을 먹어야 한다고 들었다.

그동안 돈이 없어 두부나 우유, 계란같이 싼 것만 먹어야 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허겁지겁 고기를 집던 홍경섭은 왠지 모르게 울적한 모습의 민우를 바라봤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의 내심이 어떤지 훤히 보였다.

“아, 배부르다. 이제 그만 먹어야겠다.”

“왜 더 안 먹고?”

“배불러.”

“고작 1인분 먹고 배부르다고? 네 뱃살만 봐도 10인분은 먹게 생겼는데?”

어처구니가 없어진 민우의 물음에 홍경섭은 피식 웃었다.

“인마. 이거 1인분이면 삼겹살 5인분이다. 뱃속에 벌써 고기 5인분의 가치가 들어갔다고.”

말도 안 되는 기적의 논리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병원비다 뭐다 나가는 돈도 많을 텐데 여기서는 적당히 먹자. 정 배고프면 나가서 국밥이라도 먹던지.”

말로 해봤자 먹힐 것 같지 않는다.

민우는 휴대폰으로 은행앱을 실행시켜서 내밀었다.

“봐라. 이 정도면 막 먹어도 되겠지?”

계좌를 확인한 홍경섭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너 부자구나?”

“고작 천만 원으로 부자는 무슨. 아무튼 내 걱정하지 말고 더 먹어.”

“됐다. 아껴라.”

“이거 오늘 내에 다 써야 해.”

“드디어 미친 거냐? 머리에 병이라도 생겼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는 집어넣어.”

“안 믿네?”

민우는 한숨과 함께 손을 번쩍 들었다.

종업원이 빠르게 민우에게 다가왔다.

“더 필요한 거라도 있으신가요, 고객님?”

“고기 10인분 더 주세요. 음료수도 주시고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고객님.”

민우의 주문에 홍경섭이 펄쩍 뛰었다.

지금 시킨 10인분이면 50만 원이 훌쩍 넘는다.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작게 외쳤다.

“야! 돈 있다고 막 쓰고 그러면 안 돼!”

“나중에 모자란다고 더 시키라고 하지나 마라.”

민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계속해서 고기를 구웠다.

주문한 10인분의 고기가 더 나오자 무를 수도 없게 되었다.

홍경섭은 한숨을 내쉬며 민우가 쥐고 있는 집게를 뺏어 들었다.

“소고기는 육즙이 생명이야. 삼겹살 굽듯이 하면 안 된다고.”

홍경섭의 고기 굽는 스킬은 예술이었다.

기름을 바르지 않았음에도 고기 표면에 윤기가 좌르르 흘렀다.

한입 깨물었더니 고소한 육즙이 입안을 흥건하게 적셨다.

고기가 좋은 건지, 굽는 스킬이 좋은 건지, 입안의 고기는 질기지 않고 부드럽게 씹혀 목구멍 안으로 넘어갔다.

“도대체 어떻게 굽는 거냐? 고기가 입안에서 녹는데?”

“고기 굽기는 타이밍이거덩. 우선 육즙이 갇히도록 주변을 먼저 익히고 절묘한 타이밍에 촤악!”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던가.

홍경섭은 신나하며 노하우를 읊어대기 시작했다.

민우는 맞장구를 쳐주며 고기를 집어 먹었다.

“야이씨! 치사하게 말 시켜놓고 혼자 먹냐!”

그때서야 상황을 눈치챈 홍경섭도 와구와구 고기를 입안에 집어넣었다.

그렇게 서로 경쟁하듯 한참 고기를 흡입하던 민우의 테이블에 누군가가 다가왔다.

“이게 누구야? 순월 고등학교 3학년 3반 강민우 맞지?”

듣기만 해도 역겨워지는 목소리.

놈을 확인한 민우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놈은 박효성이었다. 한눈에 봐도 눈에 띄는 여자 두 명과 함께 있었다.

그동안 제시간에 오디션을 본 덕분에 놈과는 마주치지 않았는데 하필 이곳에서 마주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도대체 저놈과는 무슨 악연이길래 이곳에서까지 만나게 된 걸까.

악연도 인연인지 더럽게 꼬인 것 같다.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네.”

박효성이 민우의 테이블을 훑어보며 피식 웃었다.

“여기 싼 곳은 아닌데, 소고기 사 먹을 정도면 형편 좀 나아졌나 봐?”

비꼬는듯한 말에 언짢아진 홍경섭이 민우에게 눈짓으로 물었다.

저놈 도대체 누구냐고.

민우는 눈살을 찌푸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리 편한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다.

“너희는 자리 잡고 앉아있어. 고기도 시키고.”

여자를 보낸 박효성이 의자를 빼냈다.

드르륵.

박효성은 무례하게 허락도 받지 않고 민우의 테이블에 앉았다.

홍경섭을 흘깃 바라본 그가 물었다.

“이쪽은 후배? 후배라고 하기에는 액면가가 좀 나가는데?”

손에 집게를 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듯하다.

발끈한 홍경섭이 한마디 했다.

“우리 밥 먹는 중인 거 안 보이나?”

반말이 왔기에 반말로 돌려줬다.

반말을 들었기 때문일까, 박효성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외모는 형인데 고기 굽는 걸 보니 동생 같기도 하고. 그냥 굽던 고기나 굽지? 형들은 할 얘기 있으니까 빠지고.”

“뭐라고?”

집게를 움켜쥔 홍경섭이 폭발하려고 하자 민우가 재빨리 말렸다.

민우도 화가 났지만 남의 영업장에서 행패 부리는 일은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질 나쁜 놈에게 엮여서 고생하기 싫은 이유도 있었고.

홍경섭을 진정시킨 민우가 차갑게 말했다.

“일행도 있어 보이는데 나중에 얘기하는 게 어때?”

돌아가는 어수선한 상황에도 박효성은 피식 웃었다.

“저 애들? 들어도 상관없는데?”

테이블 위에 고기를 한 점 집어 입안에 털어 넣었다.

아마도 여자들에게 돈을 받기로 했나 보다.

연예인 지망생만 백만 명이 훌쩍 넘는 시대다.

브로커만 있다면 돈을 주고 배역을 사는 일이 전혀 없는 일도 아니다.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챈 홍경섭이 다시 발작하려 했다.

민우는 발을 뻗어 홍경섭의 발등을 꾹 밟으며 눈치를 주었다.

발끈했던 홍경섭이 씩씩거리며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우리 밥 먹던 중이니까 다 먹고 얘기하자.”

“생각 잘했다. 이따 보자고.”

박효성은 야비하게 웃고는 명함 한 장을 꺼내 테이블에 놓았다.

“연락해.”

박효성이 멀어지자 홍경섭이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저 새끼 뭔데?”

“내 고등학교 동창.”

“그런 인연치고는 재수 더럽게 없는데?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없는데 딱 봐도 저 새끼는 관상 자체가 쓰레기구만.”

“나한테 생각이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마.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건 아니잖아.”

“똥은 치워야 다른 사람도 안 밟는다.”

“안 그래도 치우려고.”

민우는 박효성이 던지듯 내려놓은 명함을 집어 들었다.

삼현 픽처스.

캐스팅 디렉터 박효성.

역시 이놈은 캐스팅 디렉터였다.

“도대체 뭐 하는 놈인데?”

뺏듯이 받아 든 명함을 확인한 홍경섭은 곧바로 혀를 끌끌 찼다.

“안 봐도 비디오다. 돈 받고 배역 파는 인간말종 같은 놈이네.”

“제작자 측에서 알면 문제 생기는 거 아냐?”

“준 놈이나 받은 놈이나 숨기면 어떻게 알 건데? 계약서를 쓰는 것도 아니고.”

오물이라도 만진 듯 명함을 퉁겨냈다.

“증거가 없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어. 그냥 당하지 않고 피하는 게 상책이지. 혹시나 증거가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증거만 있으면 된다는 거지?”

“저런 놈들은 치밀해. 증거 따위 남겨 두겠냐? 그리고 피해자와 합의 보면 그만인데.”

민우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오늘이 없던 일이 되니까 놈을 캐낼 시간은 충분하다.

“하아, 비싼 고기 먹으러 왔는데 입맛만 버렸네. 소주나 시키자. 저 씨부랄놈 보니까 술 땡긴다. 그건 내가 낼게.”

“됐다. 오늘은 내가 산다고 했잖아.”

“동창이랬지? 저 새끼 학교 다닐 때도 저랬냐?”

“글쎄다. 그때나 지금이나 양아치 근성은 별로 변한 건 없어 보이는데.”

주문한 소주가 테이블위에 올라왔다.

민우는 소주를 마시면서 옛날 상황을 털어놓았다.

“완전 개새끼였네. 근데 저 여자애들은 뭐야? 딱 봐도 연예인 지망생 같아 보이는데.”

“나도 모르지. 엮여봤자 좋을 거 없는 놈이야.”

“나도 모르겠다. 알아서 해라.”

홍경섭은 욕을 해가며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각자 한 병씩 마셨음에도 취기가 오르는 것 같지도 않았다.

흥이 깨져버리자 홍경섭과 민우는 다음에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둘이 헤어지자 박효성은 타이밍도 절묘하게 은근슬쩍 민우에게 다가왔다.

파리처럼 양손을 비빈 그가 자신의 테이블로 민우를 이끌었다.

“이제 시간 되지? 그럼, 일 이야기나 좀 해볼까?”

그다지 내키지 않았지만 놈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하여 이끄는 대로 따랐다.

자리에 앉자 박효성이 여자 둘을 소개했다.

“이쪽은 강미애, 얘는 조수영.”

눈물점이 인상적인 여자가 강미애였고, 조수영은 단발에 성숙해 보이는 외모였다.

강미애와 조수영이 눈을 빛내며 민우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반가워요.”

“잘 부탁드려요.”

민우를 한가락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듯 정중해 보이는 인사였다.

목소리에 옅은 기대감도 깔려있었다.

“얘는 내 친구 강민우.”

“반가워요.”

민우의 인사에 강미애가 물었다.

“오빠는 무슨 일 하세요?”

“엑스트라예요.”

대답을 듣자마자 여자 둘의 눈매가 은근슬쩍 일그러졌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방송가에서 힘이 있고 자신들을 밀어줄 사람이다.

엑스트라면 자신들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안면을 틀 이유도, 친해져야 할 필요도 없다.

순식간에 안면 몰수하는 둘을 보며 민우는 그들의 이름을 뇌리에 새겼다.

그래야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외면할 수 있으니까.

아무리 예쁘고 잘나도 인성이 별로라면 롱런할 수 없다.

물귀신처럼 발목을 잡게 될지도 모르고.

박효성은 강미애와 조수영을 보며 씩 웃었다.

“엑스트라라···. 잘됐네.”

뭐가 잘됐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박효성은 야릇한 웃음을 입가에 매달고 물었다.

“민우야, 너 혹시 단역 한자리 살래? 삼백에 단역, 천에 비중 낮은 조연. 엑스트라니까 배역 하나라도 아쉬울 거 아냐. 내가 요즘 맡은 영화가 하나 있는데 돈만 주면 끼워 넣어 줄게.”

이미 ‘학교폭력’의 오디션은 수없이 많이 봤다.

캐스팅에 영향을 끼칠 정도의 자리에 박효성은 없었다.

이놈은 지금 사기를 치려고 한다.

“···니가 뭐라도 되냐?”

어처구니없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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