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우
“후우···.”
입에서 뿜어져 나온 하얀 입김이 허공에서 스러졌다.
저 멀리 고층 빌딩은 저마다 밝은 빛을 검은 한강에 흩뿌렸다.
마치 비단에 사금을 뿌려놓은 듯한 아름다운 풍경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아름다움도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느껴진다고 하더니 과연 그러한 것 같다.
“악몽의 오늘이구나.”
오늘은 11월 21일.
4개의 오디션을 동시에 봐야 했기에 그에게는 아주 특별한 날이었다.
무심코 내딛는 한걸음에도 미래가 걸려있어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시간 배분을 잘하고 부지런히 움직인 덕분에 모두 참가 할 수 있었다.
참가는 했으나 합격은 하지 못한 것 같다.
심사를 보던 피디나 작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민우의 연기에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모습이었으니.
난간에 올려둔 팔뚝 위로 턱을 괴며 다시금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친다, 지쳐.”
곧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피곤했다.
사실 오디션을 보느라 피곤한 게 아니었다.
이토록 지친 것은 정신적인 피로감 때문이다.
불투명한 미래가 주는 압박감도 목을 죄는 것 같았다.
“하나만 합격해도 좋으련만.”
민우의 시선이 다리 아래로 향했다.
시커먼 강물이 너울거리며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
저 강물처럼 흘러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차가운 바람이 머리카락을 희롱하며 떠나가고, 자동차들은 뭐가 그리 바쁜지 발길을 서둘렀다.
왠지 모르게 홀로 남겨졌다는 기분이 들어 울적해졌다.
한동안 강물을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더 늦으면 막차 끊기겠네.”
늦가을의 한강 다리 위는 얇은 옷을 입고 버티기에는 너무 추웠다.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버스 정류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주머니 속에서 지폐가 바스락거렸다.
꺼내 보지 않아도 안다.
천 원짜리 세 장이라는 것을.
오늘 쓸 수 있는 돈은 주머니 속 3천 원이 전부다.
괜히 은행에 미리 넣어둔 월세 30만 원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만원만 꺼내 쓸까? 이렇게 추운 날은 따뜻한 국밥이라도 한 그릇 먹으면 딱인데.”
잠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30만 원으로는 내일 월세를 내야 한다.
깐깐한 집주인은 월세가 하루만 밀려도 온갖 욕을 해댔다.
더러운 꼴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제날짜에 월세를 입금해주는 게 낫다.
“오디션을 포기하고 엑스트라 일을 했다면 이런 고민도 하지 않았을 텐데.”
미래를 위해서 오늘을 투자했으니 아깝지는 않았다.
물론 결과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은 건 조금 아쉽긴 했지만.
“오늘도 삼각 김밥에 컵라면이네.”
씁쓸한 웃음을 입가에 매달고 버스정류장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순간, 먼 하늘에 밝은 빛과 함께 무언가가 뚝 떨어졌다.
“어? 유성이네?”
하나가 아니다.
꼬리를 물고 또다시 유성이 떨어졌다.
어디서 들었다.
유성이 사라지기 전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미덥지 못한 소문이었지만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잡고 싶었다.
재빨리 양손을 맞잡고 눈을 감았다.
“얼른 어머니가 건강하게 해주세요.”
꼬리를 물고 떨어지는 유성우 덕분에 수월하게 소원을 빌 수 있었다.
잠시 기다렸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신기하게도 유성은 아직도 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자비심을 베풀 테니 소원을 마저 빌어보라는 듯이.
“흠··· 그럼 다른 소원도 빌어볼까? 뭐가 좋을까···.”
잠시간 고민하던 민우가 미묘하게 웃었다.
“오늘 본 오디션에 전부 합격하게 해주세요. 될 수 있다면···.”
말꼬리를 흐리며 잠시 주위를 둘러본 후, 작은 목소리로 마저 소원을 빌었다.
“···슈퍼스타가 되도록. 아니면 우리나라 톱스타라도.”
소원을 마저 빌었지만 수십 개의 유성이 끝도 없이 쏟아졌다.
하늘에서 펼쳐지는 장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유성이 마치 비처럼 쏟아지는 광경은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였다.
한동안 유성을 바라보던 민우의 입가에 피식, 실소가 흘러나왔다.
“나도 참 애도 아니고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차가운 강바람에도 꿋꿋하게 한참을 다리 위에 서 있었다.
평생 살면서 보기 힘든 유성비를 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나아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민우는 몰랐다.
밤하늘을 수놓고 있는 유성에게 빈 소원 때문에 일상이 영화처럼 바뀌게 될 줄은···.
* * *
삑-.
“2,850원입니다.”
민우는 편의점에서 2개 묶음 삼각 김밥과 컵라면을 샀다.
유성에 시선이 팔려 막차를 놓치고 말았다.
걸어서 돌아왔더니 12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자기 전에 뭘 먹으면 안 된다는 건 안다. 채울 수 없는 허기를 도저히 이길 수 없었다.
사실 그게 허기인지 아쉬움인지 구분하기 힘들었지만.
‘내일이 되면 이게 내 전 재산이구나···.’
씁쓸한 생각을 지우며 취식대로 향했다.
내일 월세를 내고 나면 남은 전 재산은 150원.
한 달은 어찌 넘겼지만 또 다음 달이 문제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힘든 하루가 끝없이 이어진다. 어찌 지치지 않고 배길 수 있으랴.
그래도 끝까지 꿈을 놓지 않고 있었기에 하루를 버텨낼 수 있다.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삼각 김밥은 전자레인지에 넣고 데웠다.
나무젓가락을 살짝 벌려 컵라면 뚜껑에 끼웠다.
“내가 잘못 선택했던 걸까?”
처음부터 연예계에 올인한 건 아니었다.
한창 공부를 해야 할 고3. 우연히 친구를 따라갔던 아르바이트가 시작이었다.
연기는 재미있었다. 연기할 때면 마치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아 즐겁기도 했다.
주변에서 재능이 있다는 말도 자주 들었고, 아르바이트로 돈을 마련해서 연기학원에 등록했다.
미래를 생각하며 현실을 투자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언젠가 스타가 된다면 힘들었던 과거를 보상받을 수 있을 테니까.
개천에서 태어난 그가 용이 되는 방법은 그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돈과 인맥을 써서 배역을 얻는다. 좋은 노래를 사며, 훌륭한 트레이닝을 받는다.
그런 사람들과 경쟁해서 이기려면 특별한 재능이 있어야 했다.
너무 늦게 깨닫고 말았다. 개천에서 태어나 재능조차 변변찮은 연예인 지망생은 용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포기할 수도 없고.”
재능과 빽이 있는 이들이 쭉쭉 치고 나갈 동안 민우는 언제나 제자리걸음이었다.
아니, 오히려 뒷걸음쳤다.
민우의 커리어 하이는 단역을 맡게 된 23살이었다.
제법 성공적으로 연기를 마치자 자신감이 생긴 민우는 조연에 도전했다.
“그때는 모두가 떨어질 거라고 했었는데.”
결과는 놀랍게도 합격.
하지만 오디션으로 따낸 조연 자리는 갑자기 끼어든 연기자 윤동호에게 뺏겼다.
작가와 감독의 추천이라고는 했지만 윤동호의 집이 잘산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나중에 카더라는 소문을 들었다. 배역을 따내기 위해 출연료도 받지 않고, 제작비로 거액의 돈을 보탰다나.
꿈에도 몰랐다.
연예인도 배경이 좋아야 스타가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을.
이후로는 윤동호는 승승장구했고, 민우는 내리막길만 걸었다. 4년이 지나도록 엑스트라만 전전하면서.
슬럼프에라도 빠졌던지 단역 오디션에서도 줄줄이 낙방했다.
“차라리 그때 조연에 합격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조금이라도 빨리 다른 길을 갔겠지. 고작 한 발짝 앞에서 좌절해야 했으니 어쩌랴. 이 악물며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볼밖에.
이제는 그 길밖에 남지 않았기도 했고.
“문자도 보내야겠네.”
보조 출연 아르바이트를 오늘은 걸렀지만 내일은 해야 한다.
보조 출연 반장인 민종석에게 문자를 남겼다.
[형님 내일은 출근할 수 있습니다. 일정 있으면 문자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는 민우의 사정을 훤히 꿰고 있어 일감이 생기면 가장 먼저 연락을 주기도 했다.
띠띠띠-.
타이머가 끝난 전자레인지가 울어댄다.
데워진 삼각김밥을 꺼냈다. 컵라면의 뚜껑을 열고 뭉친 면을 나무젓가락으로 풀었다.
상념이 길어지는 바람에 면발이 약간 퍼져버렸다.
딸랑.
맑은 종소리에 시선을 돌리니 편의점으로 추레한 행색의 할머니가 들어섰다.
주름살이 가득한 할머니는 보따리를 귀중품이라도 되는 듯 꼭 껴안고 있었다.
할머니가 쪽지를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에게 내밀었다.
“학생, 미안한데 혹시 여기가 어디인지 아시나요?”
편의점 아르바이트가 종이를 힐긋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실망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쉰 할머니와 시선이 마주쳤다.
민우가 자동 반사처럼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했다.
흐릿하게 웃으며 인사를 받아준 할머니가 보따리를 추슬러 안고는 민우에게 걸어왔다.
“총각, 미안한데 혹시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 있을까요?”
할머니가 내미는 쪽지에는 주소가 적혀있었다.
주소를 대충 가늠해보니 집 반대편이다.
만약 이곳에 들르게 되면 빙 둘러서 집에 가야 한다. 대략 30분 정도 걸릴 것 같았다.
“어디인지 알 것 같네요.”
민우의 대답에 할머니가 얼굴에 희색을 띠었다.
“그래요? 그럼 어디로 가면 되는지 알려줄 수 있어요?”
“골목이라 조금 복잡한데···.”
동네 자체가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설명만으로 한 번에 찾아가기는 힘들다.
마음 같아서는 같이 가주고 싶었으나 이미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컵라면을 들고 가기도, 할머니를 모셔다드리고 오기도 애매한 상황.
안면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처음 보는 할머니를 위해 시간을 내기란 쉬운 선택은 아니다.
잠시 고민하던 민우는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추운 날씨에 보따리를 안고 다니느라 곱아버린 손은 빨갛게 얼어있었다.
손뿐만 아니라 얼굴도 마찬가지.
괜히 일찍 돌아가신 할머니가 떠올랐다.
명절에 시골로 내려간다고 하면 도착하기 몇 시간 전부터 나와서 기다리시던 할머니의 손도 이랬었다.
‘따뜻한 국물이라도 마시면 몸이 좀 녹을 텐데.’
보따리를 쥔 할머니를 살피던 민우의 뇌리로 컵라면이 퍼뜩 떠올랐다.
“할머니, 혹시 식사하셨어요?”
“아, 미안해요. 기다릴 테니 얼른 먹어요.”
“식사 안 하셨으면 저랑 나눠 드시죠.”
민우는 컵라면 뚜껑에 라면을 덜고 삼각 김밥도 한 개씩 나누었다.
덜어낸 라면 용기와 삼각 김밥을 할머니에게 밀어주었다.
혼자 전부 먹어도 모자라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는 괜찮은데···.”
얼떨결에 음식을 받은 할머니가 겸연쩍어했다.
민우는 뚜껑에 담은 라면을 젓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요즘 제가 다이어트해야 해서 이 정도만 먹어야 해요. 남은 건 버려야 되는데 아깝잖아요? 찾으시는 곳까지 같이 가드릴 테니까 먹는 것 좀 도와주세요.”
“···그래요. 고마워요.”
눈에 보이는 거짓말임을 눈치챘는지 할머니는 흐릿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루룩, 후루룩.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음식을 모조리 먹어 치운 민우와는 달리 할머니는 주저하느라 아직도 다 먹지 못하고 있었다.
민우의 눈치를 살피느라 마음 놓고 먹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싱긋 웃은 민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우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할머니는 허둥지둥하며 컵라면 용기를 내려놓았다.
“저는 담배 한 대 피우고 있을 테니까 천천히 드시고 나오세요.”
담배를 핑계로 할머니를 안심시킨 민우는 편의점 밖으로 나갔다.
담배는 피워 본 적도 없다.
군대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갈궈도 절대 배우지 않았다.
하루 먹고 살기 힘든 그에게 담배는 말 그대로 사치품이다.
싸늘한 바람에 옷깃을 여미고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별이 많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하늘의 별이 모조리 떨어질 기세로 쏟아지더니 아직도 남은 게 많은가 보다.
민우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별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