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0화 (180/264)

촉수 괴물의 밤.

눈꽃처럼 하얀 기사가 도심과 거리를 두고 내달린다.

공중 선회 중인 촉수 드래곤과 나란히 줄을 맞추듯, 클레어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후드가 바람에 홱 걷히고 예쁜 얼굴이 드러난다.

뒤로 묶은 은발에, 결의를 다진 푸른 눈.

누구나 우러러 칭찬하는, 아름답고 하얀 꽃.

그러나 한꺼풀 벗겨보면 그녀 또한 범인이 이해하지 못할 경지에 오른 초인이었다.

타고난 재능이 너무나도 뛰어나 고독해질 운명이었던 소녀.

노라 마을의 생존자, 백화의 주인, 끔찍한 루테르가를 죽인 자.

왕국 최강의 기사단장은 지금.

도시에 드리운 거대한 위협에 맞선다.

그녀가 마침내 촉괴의 시야에 들어왔다.

'사람이 없는 곳으로 유인해야 해!'

가능하면 이미 피난이 끝난 곳.

건물이 무너지는 건 피할 수 없겠지만, 사람이 떼거지로 죽어나가는 것보다는 낫다.

클레어는 촉수룡과의 전투가 시작되면 주변 일대가 멀쩡하지 못하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신중하게 촉수룡을 도시 외곽 물가로 유인하려던 그때….

'아이 울음 소리?'

클레어는 발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봤다.

"으아앙!"

아뿔싸.

피난 행렬에서 떨어져 나온 아이가 있었다.

"엄마는? 엄마랑 아빠는 어딨어?"

"저기이…."

5세에서 6세 정도로 보이는 여아가 가리킨 곳에는,

부모로 추정되는 두 명의 성인 남녀가 건물 잔해에 짓눌려 있었다.

클레어는 울고 있는 여아를 꼭 안았다.

"언니가 지켜줄게!"

그것은 지키지 못할 약속이었다.

아이가 대피할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허나, 클레어의 목소리는 소녀의 떨림이 멎을 만큼 절박했다.

"언니가… 지켜줄게."

지킨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킨다!

"응…!"

"뒤로 가!"

세상 모든 저주를 짊어진 것과 같은,

탁한 적색으로 불타는 촉수룡이 클레어를 향해 날아든다.

'빠르다…!'

엄청난 추력이다. 벌써 코앞까지 와 있었다.

그러나, 클레어는 물러나지 않는다.

'충격 직전에 상쇄하는 수밖에 없어!'

꼬리치기? 발톱 할퀴기? 그것도 아니면 촉수 브레스?

무슨 공격이든 상관없다.

저것이 하늘 아래로 내려와 손을 뻗는 순간, 가장 강한 일격을 꽂아 넣어서 무로 돌릴 뿐이다!

퍼엉!

방향을 잡은 촉수 드래곤은 충격파를 일으키며 한층 더 가속한다.

촉괴의 공격은 꼬리치기, 발톱 할퀴기, 촉수 브레스…… 그 무엇도 아니었다.

몸통 박치기.

촉괴는 하늘을 부유하는 초질량의 드래곤을, 그대로 클레어에게 갖다 박았다.

콰아아아앙!!

촉수 드래곤의 목숨 그 자체를 불태우는 벙커 버스터는 아이라에게 예고한 견적대로.

도시의 3할을 먼지처럼 날려버렸다.

충격파로 수백 가구가 으깨진 두부처럼 주저앉았고, 도시 외곽을 감싼 벽은 흔적도 남지 않고 증발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위에서 보면 V자로, 클레어가 서 있는 곳만은 절대적인 파괴 영역에서 벗어나 있었다.

언뜻 보면 신을 죽이기 위해 설계한 공격이라고 할만큼,

과투자가 아니었나 싶었던 <벙커 버스터>는…….

클레어를 상대로는 견제 공격에 불과했다.

클레어라면 이 정도는 능히 버텨낼 수 있을 거라고, 촉괴는 읽었고.

그 판단은 아주 정확했다.

이윽고 대지를 짓밟은 촉수 드래곤의 몸통이 거대한 힘으로 들리는가 싶더니,

살끝에서 바늘처럼 튀어 나온 은색의 검기가 촉수룡의 동체를 절반으로 가르기 시작.

새빨간 핏물이 벌컥벌컥 괴어 올랐다.

촤아아악!!

클레어의 대처는 지극히 심플했다.

발을 내디디는 진각으로 검을 휘두를 공간과 충분한 힘을 확보.

벼락 같은 검격으로 충격을 상쇄하면서, 촉수 드래곤을 반으로 갈랐다.

마침내 갈라진 동체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은발의 기사는, 피해 없이 멀쩡했다.

허나, 여아는 아니었다.

아무리 상쇄된 충격이라도 어린이가 견딜만한 대미지는 아니었다.

클레어가 반드시 지키겠다고 맹세한 여아의 심장은 멈췄지만,

역설적으로 클레어의 의식은 모든 걸 초월하고 세포 하나에 이르기까지 전투 상황을 읽어내는데 쓰이고 있었다.

인간의 감정은 사라지고, 그저 몰입한다.

저것을 이겨내라고.

검을 휘둘러 베어내라고.

클레어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패배를 허락하지 않는 검의 유전자가 외친다.

너라면 벨 수 있다고!

터어어엉!

하늘이 피로 물든다. 하얀 불꽃이 바람을 타고 세차게 타올랐다.

촉수 드래곤의 동체를 갈라버린 클레어는 충격으로 밀려나는 와중에도

다음 공격을 위한 자세를 잡으며 적의 움직임을 꿰뚫고 있었다.

온 신경을 집중한 <심안>으로…!

적이 보이는 즉시 벤다!

「환영한다」

그러나, 클레어의 타깃은 딱 하나로 떨어지지 않았다.

반으로 가른 촉수 괴물의 드래곤 몸통 속에는, 엄청난 수의 촉괴수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클레어보다 몸이 큰 촉수 파리들이 수백 마리.

'……벤다!!'

이미 혐오감따위, 클레어의 정신을 어지럽히지 못한다.

달라붙는 붉은 거대 파리를 모조리 베어 가르는 클레어.

촉괴조차 그 움직임에는 감탄했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대한 많은 생물을 죽인다.

그런 행위에 어째서 아름다움을 느끼는지 의아할 정도로, 클레어의 검술은 완벽했다.

그러나.

"언니…. 살려주세요……."

그 꺼져가는 가냘픈 목소리에, 클레어의 집중이 깨졌다.

뒤를 돌아 보면. 그곳에는.

사람 목소리를 흉내내는 촉수 곰이 있었다.

머리 대신 잘린 단면으로 돋아난 큰 촉수가, 소리를 만들어 낸다.

슈욱!!

"윽!!"

클레어는 잠시 한눈을 판 틈에 왼팔을 베였다.

서둘러 몸을 틀긴 했지만, 깊게 긁힌 상처가 남는다.

다시 돌아본 맞은 편에는,

검은 슈트를 입은 붉은 머리의 여검사가 촉수 검을 들고 서 있었다.

슈트의 연장선으로 이어진 일체형 마스크와 후드가 시로코의 얼굴을 감싸고 있다.

그녀는 마스크 속으로 말했다.

"미안. 클레어."

"하아…. 하아…."

"뒤치기가 내 못된 남편의 취향이라서 말이야."

슥.

시로코는 촉수 검을 한 번 휘둘러 허공에 피를 털어낸 후.

마스크를 뗐다.

"시로코…… 언니…?"

클레어의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촉수 갑옷 동조율… 100%]

[촉수 갑옷 동조율… 101%]

쉬이익.

시로코의 붉은 머리카락이 옅은 광채를 띄고, 몸에서 난 열기는 촉괴가 수냉식으로 식힌다.

처음부터 전력으로.

게이트에서 그녀가 직접 뽑아낸 경질의 촉수 양손검은, 겉으로 보기에는 길고 위태로운 생선 가시처럼 얇았지만.

그 단단함은 가히 국보 급이다.

"언니가… 어쨰서……?"

"언니라고 부르지 말랬잖아."

시로코가 날카롭게 그녀를 노려보았다.

"정신 차려.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겠어?"

「기껏 멘탈 공격 해놓았더니 왜 격려를 해줘」

"아차차."

시답잖은 만담을 나눈 시로코는, 시원스럽게 웃으며 검을 바로 쥐었다.

"간다!"

텅!

수비 검술이 특기인 시로코가, 드물게 지면을 박차고 먼저 상대에게 접근한다.

클레어는 그만큼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상대가 친애하는 시로코 언니라는 사실에, 완전히 멘탈이 무너진 상태.

촉수 검을 간신히 받아내며 덜덜 떨고 있었다.

시시각각 무너질 위기에 처하는 클레어.

"이것밖에 안 돼?!"

"아…. 큿…!!"

다시 뒤에서 촉수 곰이 노래 부르듯이 말한다.

이번에는 글로바의 목소리였다.

"단장님… 다이애나를 부탁합니다…."

"그만해!!"

악질적인 괴롭힘이다.

클레어의 여린 마음을 후벼 파는.

하지만 목숨이 걸린 생존 경쟁에서, 여린 마음을 품은 것 자체가 그녀의 약점일지도 모른다.

극복하지 못하면 죽는다.

그만큼 촉수 갑옷의 포텐셜을 100% 끌어낸 시로코의 피지컬은,

클레어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강력했다.

하지만 놀라고 있는 건 시로코도 마찬가지였다.

'완전히 밀어낼 수 없어. 패자의 불꽃으로 누르고 있는데도.'

이미 클레어에게 열을 부여하며 대미지를 주고 있다.

하지만 클레어 역시 백화로 몸을 방어하면서 오히려 시로코를 밀어냈다.

검과 검이 교차한 상태로, 잠시 균형을 이루었다가.

클레어가 시로코의 칼 찌르기를 피하며 뒤로 물러난다.

"계속 오들오들 떨고 있을래?"

"……안 떨었어요."

클레어의 눈이 슬프게 내리깔렸다.

"구하지 못한 아이가 한 명 더 있었나, 마음이 갔을 뿐이에요."

촉수 드래곤의 살점에 뒤덮인 이곳은 완전히 촉괴의 권역이다.

사방팔방으로 촉괴수에 둘러싸인 클레어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벌써 이가 빠진 칼 하나 뿐이었다.

"그런 아이가 더 없어서 다행이에요."

「클레어」

"촉괴. 또 어디 숨어 있습니까?"

「이번에는 너와 제대로 마주 보고 있어」

"……."

촉수 갑옷을 눈치챈 듯하다.

클레어 정도 되는 달인이면, 시로코의 몸에 생긴 변화를 쉽게 느낄 수 있다.

「나랑 같이 가자」

"싫어요."

클레어는 시로코의 변절 이유를 묻지 않았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데 그런 얘길 해봐야 더 슬퍼질 뿐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시로코. 지금 저는 화가 많이 났습니다."

"……."

"글로바 아저씨와 조나스 아저씨의 원수도 여기서 갚겠습니다."

"나도 질 순 없어."

사뭇 진지한 얼굴로.

시로코도 클레어를 향해 검을 겨누고 말했다.

'…….'

클레어는 베인 상처를 슬쩍 살폈다.

시로코의 촉수 검에 휘감긴 촉수는 촘촘한 톱니 이빨을 달고 있다.

깊게 난 상처 자국은 검이 지나간 결대로 완전히 찢어져, 출혈이 멎지 않는다.

시간 제한이다.

또한, 클레어를 에워싸는 촉괴수들.

촉괴는 전혀 어렵게 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호흡을 정돈한 클레어는 검을 꽉 쥐었다.

"저, 하편까지 읽었어요."

못된 농담을 생각해낸 것처럼, 그녀는 이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도리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친애하는 언니에게 장난을 치는, 동생처럼.

시로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무슨 소리야?"

"……절대 지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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