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하면 찾는 창세신 니뮤엘과는 다르게.
프레미아는 모든 마물의 어머니라고 불리며, 모두에게 꺼림칙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프레미아를 다룬 예술품을 보관하는 게 허락된 것은, 기껏해야 별의 교단 정도.
"모르는 사람한테 설명하기가 좀 어렵네. 그러니까… 나쁜 신을 섬기는 사교도들이 있어."
"그 사교도들을 물리치는 일을 하고 계십니까?"
"뭐. 그렇지. 우리들 엘프는, 마왕이 생기는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 원인은 프레미아라고 보는 중이고."
마왕이 생기는 원인.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
하지만 실재하는지도 알 수 없는 '모든 마물의 어머니' 같은 것을,
정말로 섬기는 자들이 있었다니…. 클레어는 모르는 세계의 이야기였다.
"넓은 의미로는 마왕과 싸우고 있는 셈이네요."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네. 사실, 마왕과 직접 싸울 수 있는 건 용사뿐이라고 생각해."
클레어는 눈을 크게 떴다.
혹시 이 엘프는… 마왕을 직접 본 적 있나?
클레어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에스칼리아'를 영접하고서 말이다.
"난 저 검은 기둥이 마왕인지도 잘 모르겠던데."
"마왕을 본 적 있으십니까?"
"응. 엘프는 오래 살잖아. 인간의 몸으로 마왕이 된 자, 흉왕凶王 세대야."
흉왕…?
얼마나 오래된 얘기인지, 어릴 적 배운 역사 공부를 복기하던 클레어는 아찔해졌다.
최소 500년 전이다.
"저…. 음……."
"…할머니 대하듯 하면 죽는다?"
"……넵."
"어쨌든 마왕의 변함 없는 특징은, 넘쳐흐를 듯한 파괴 본능이야. 저리 얌전히 있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파괴 본능…."
에스칼리아의 눈을 봤을 때 느낀 것과 닮았다.
모든 걸 부수고야 말겠다는 의지.
파괴의 화신….
"저 검은 것과는 아주 다르지. 마왕급으로 불길한 건 맞는데……. 내가 본 마왕들은 모두,
이 세상에 태어난 사실이 저주스러운 것처럼 다 부수고 다니는 게 기본이었거든."
클레어는 엘리의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깨달았다.
자신도 그런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만약 저것이 마왕이었다면,
혹은 촉괴였다면.
좀 더 다른 식으로 나오지 않았을까?
저것은 묘하게 잔잔한 물결처럼 자신들을 내려보고 있으며….
인간을 해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지지 않는다.
촉괴는 정말로 약조를 깬 것인가?
깼으면 왜 공격하지 않는 것일까?
퓌르나울은 지금 애매한 시간대에 갇혀 있는 것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다.
클레어도 마찬가지로….
"너무 내 얘기만 했나?"
"흥미로운 얘기였습니다. 마왕이 아니라면 뭘까요?"
"음~~ 글쎄. 나는 프레미아 쫓는 일에만 관심 있어서."
"어쩌면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것이 프레미아와 관계있다고 생각하면."
엘리는 살짝 말하기를 주저하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저건, 우리 생각보다 더 많이 위험할지도 몰라."
"짚이는 구석이 있으십니까?"
"원시악이라는 말. 들어봤어?"
원시악?
클레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 듣습니다."
"잘 알려진 개념은 아니야."
가르침을 원하는 것처럼.
클레어가 푸른 눈을 똘망똘망하게 뜨고 있으니, 엘리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태초의 원시악>."
엘리가 술잔을 흔들며 그 말을 입에 담는 순간.
누가 그런 불경한 소리를 내느냐며 힐책하듯, 창문이 바람으로 떨리고….
빗방울 소리가 들린다.
방안은 도리어 아주 고요해졌다.
"창세신이 존재하기 전부터 있었던 오래된 악이래. 어디서부터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인지도 몰라."
"창세신이 존재하기 전부터…?"
이 세상이 있기 전부터 있었단 말인데.
클레어의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영역의 이야기였다.
그런 걸 대체 누가 보았으며, 누가 이야기로 전했단 말인가?
수백 년의 세월을 살아온, 엘프의 이야기가….
클레어한테는 현실로 와닿지 않았으나.
어딘가 무시할 수 없는 꺼림칙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별의 교단이 섬기는 <아득한 별>도 지혜의 원시악이야."
"…아."
왠지 모르겠지만,
늘 곁에서 아득한 별의 지혜를 함께 탐구하자고 말하던 리아나 단장의 모습을 떠올린 순간.
클레어는 그것이 조금 친숙하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성법은 원시악의 힘인가요?"
"<아득한 별>의 탐구심을 채워주는 대가로, 별빛을 빌려 쓰는 거야. 누구도 그 실체와 접한 적은 없지만."
"…꽤 우리 일상에 가까이 존재하고 있었네요."
"외세계의 존재니까. 그 실체는 아무도 모르지."
비바람이 세지고 번개가 치자,
엘리는 일어나서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두 사람만의 비밀스러운 공간은 조금 더 어두워지고, 촛불 빛은 위태롭게 일렁거렸다.
"다른 원시악도 있습니까?"
"<추악한 살점>…."
불경한 단어가, 한 번 더.
예쁜 엘프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생존욕의 화신, 생명의 원시악……. 모든 마물의 어머니는, 그 힘으로 넘쳐흐르는 생명력을 지닌 마물을 낳았다고 하지."
"……저 검은 기둥 또한, 원시악의 힘인가요?"
"무슨 소리야?"
엘리는 분위기를 환기하듯,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예를 든 거야. 마왕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그런 이야기였잖아."
"……네."
클레어는 왠지 죄를 지은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들어선 안 될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 느낌.
"그런 무서운 게 도시 한복판에 있다고 생각하면, 무서워서 잠은 어떻게 자?"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세상에 마왕보다 두려운 존재가 있다고는,
생각해본 적 없는 클레어였다.
세상 모든 사람의 인식도 비슷하다.
우는 아이도 울음을 그치는 마왕의 존재를,
아득히 초월하는 옛것이 이 세계 어딘가에 도사리는 중이라고 생각하면, 갑자기 소름이 끼친다.
가늠할 수 없는 외세계의 거대한 존재가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다면…….
클레어는 자신하는 검 실력마저 먼지 한톨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아나 단장은 뭐라고 했을까.'
촉괴한테 사로잡힌 후로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리아나를 와이프 삼는다면, 촉괴가 제법 고생하겠지.
리아나는 절대 누군가의 뜻대로 되는 엉덩이가 가벼운 여자가 아니니까.
그런 생각을 했더니 살짝 웃음이 나왔다.
"누가 떠오르기라도 했어?"
"별의 교단 얘기가 나와서요. 아는 지인 중에 있었거든요. 늘 제게 지혜를 탐구하자고 말했었죠."
"음, 가슴 크기 보니 재능 있는 것 같은데?"
"……리아나 단장님이랑 똑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장난이야. 진지하게 받지는 말아줘."
밤이 깊었다.
시각은 새벽 2시….
술잔을 내려놓은 클레어는 다시 후드를 뒤집어쓰고 말했다.
"이제 가볼게요. 엘리."
"밖에 비 오고 번개 치는데?"
"그렇다고 같이 잘 순 없잖아요. 그리고…."
클레어는 허리춤에 찬 검 손잡이를 매만졌다.
환상적인 예리함을 자랑하는 국보, <백룡검>은 아니다.
그저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을법한 흔한 품질의 검 중에서도 그나마 나은 물건.
"저는 이 검을 손질하지 않으면, 잠이 안 와요."
시로코가, 어린 그녀에게 선물한 검이었다.
"그래."
엘리는 그녀를 떠나보내면서 말했다.
"네게 <아득한 별>의 지혜가 함께하기를."
문이 닫히자,
클레어는 어둠 속에 남겨졌다.
먹구름이 달빛도 가린 밤. 번개가 칠 때마다 주변이 환하게 타오르는 것처럼 색을 되찾는다.
클레어는 숙소로 이동하기 위해 움직였다.
'서두르자.'
생각보다 비가 많이 와서 후드가 금방 젖어 들었다.
갑옷까지 빗물에 젖게 하고 싶지 않았던 클레어는, 발걸음을 서두른다.
멀찍이 떨어진 왕성의 높은 첨탑에 천둥번개가 치고, 하늘이 잠시 밝아진 그때였다.
"……."
클레어는 우뚝 발을 멈췄다.
먹구름 뒤로 두려운 형상이 보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것이 뭔지 몰라 들여다보았고, 두 번째 보았을 때도 뭔지 몰라 계속 멍하니 들여다봤다.
"드래곤……."
먹구름 뒤로, 용의 형상이 그림자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용은 날개를 쭉 펼치고 날아가는 모양새로, 왕성 위를 맴돌다가 입을 쩍 벌린다.
거대한 용의 입에서 무수한 촉수가 뻗어 나와, 지옥으로 부르는 손짓인 것처럼 꾸물거렸다.
"……촉괴!!"
<마왕>이 나타났다.
저마다 집으로 들어가서 문을 걸어 잠그고, 불도 끈 채 숨을 죽인다.
불안해하는 소리가 웅성웅성 빗소리와 함께 모여 클레어의 귀를 맴도는 듯했다.
다들 보았다.
창공을 부유하는, 이 세상에서 제일 꺼림칙한 드래곤을.
「모든 왕국 신민에게 고한다」
"윽!!"
곧, 위협적인 촉감각이 클레어의 뇌에도 파고들었다.
'설마. 도시 전체에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건가……?'
「나는 촉괴다」
클레어는 검을 꽉 쥐었다.
하지만 당장은 촉괴를 목표로 포착할 수 없다.
저 날아다니는 용을 공격 범위에 넣으려면 상당한 거리를 뛰어야 한다.
그사이에 날아서 위치를 바꿀 수도 있었다.
클레어는 입술을 잘근 깨물고 촉괴의 음성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마왕이 너희의 가장 큰 두려움인 것 같은데」
"…?"
무슨 얘길 하려는 거지?
머릿속에 직접 주입하는 목소리는 거슬리지만, 확실하게 자기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제부터는 아니다」
'용에 탑승한 채로 말하고 있는 건가? 목소리가 아니라서 반향을 알긴 어려워. 어쩌면….'
클레어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미 근처에 와 있을 수도 있다.
촉괴는 기만책이 능하지 않던가. 클레어는 벌써 전투 태세에 들어가 있었다.
「너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은 괴물이다」
……이 무슨.
마물의 범행 성명치고는 너무나 대범한 말이었다.
모든 마물은 마왕의 하위에 있는 존재인데, 지금 저 괴물은 그것을 뒤집은 것이다.
마왕 위에, 괴물이 있다고!
촉수 드래곤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괴생명체가 바닥으로 낙하한다.
[악의 Lv.2112]
[악의 Lv.2233]
[악의 2형 Lv.3284]
'이것들은…!'
검은 파장 근처에서 출몰하는 괴물이다.
촉수 드래곤은 둥글게 날면서 광범위하게 검은 괴물을 살포해,
순식간에 도시의 방어선을 흔들었다.
곳곳에서 비명과 전투음이 난무한다.
"꺄아악!"
"뭐야 이것들은!"
"제길, 자는 녀석들 깨워!"
그때와 같았다.
촉괴의 왕성 강습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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