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3화 (173/264)

클레어는 남부 거리 구석에 있는, 2층에 숙소가 딸린 허름한 주점에 매일같이 들렀다.

그리고, 물을 마셨다.

아주 천천히.

후드로 얼굴을 가려도 숨길 수 없는 미모. 은은하게 빛나는 은발.

흰 블라우스 위로 무척이나 도드라지는 몸매의 굴곡.

왕국에서 제일 유명한 기사단장의 일탈치고는, 너무나 재미가 없다.

하지만 여관 주인은 흔한 술도 권하지 않고 잔만 닦을 뿐이었다.

그녀가 왜 이곳에 들르는지 어렴풋이 안다.

클레어는 며칠 동안 여길 다니고 있었다.

백화 기사단 회식으로 자주 가던 술집이다.

가끔 클레어도 이곳에 끌려와서 같이 떠들곤 했었다.

물론 어린 클레어에게 술을 권하는 사내는 없었고, 있다고 해도 글로바 정도였지만.

시로코는 그런 글로바를 혼냈고, 클레어를 곁에 끼고 함께 웃었다.

"……."

입술이 딱 떨어진다.

다신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면 아련해지기만 한다.

잠시 후, 클레어의 고요한 회상을 깨부수듯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리고, 거구의 사내들이 줄지어 들어와서는 자리를 채운다.

클레어는 소란스러워 잠시 돌아봤을 뿐,

이곳에서 자신이 별난 인간이라는 걸 알기에 다시 눈을 내리깔고 얌전히 있었다.

"이게 누구야. 도망친 왕국 기사단장 아닌가?"

하지만, 누군가가 클레어를 바로 알아보았다.

클레어는 말없이 여관 주인에게 돈을 내고 자리를 뜨려고 했지만,

털이 덥수룩하게 난 큰 손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딜 가려고?"

"당신들과 할 말 없습니다."

남자들이 왁자지껄 웃는다.

"대선배를 앞에 두고 인사 안 해?"

"대선배?"

클레어가 처음으로 남자의 수염 난 못생긴 얼굴에 흥미를 느끼고 살펴보았지만,

그녀는 그런 선배를 둔 기억이 없다.

다만 남자가 망토를 끌어와 보여준 심볼은 클레어를 놀라게 하기는 충분했다.

창백한 초승달.

"바로 내가, 창월 기사단장 필라노스다."

…지금은 사라진, 전설의 기사단.

창월……?

클레어의 미간이 찡그려진다.

"그리고 저기 있는 카돌은 '새로운' 백화 기사단 단장이고."

클레어는 바로 필라노스의 손을 뿌리쳤다.

"장난치고 있을 시간 없습니다."

"정말이야. 콜린트 경에게 작위를 임명 받았지. 도망친 여자 기사들보다는 우리가 낫다고."

"창월의 이름을 듣고 벌벌 떨었나?"

"…최근까지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남이 만든 위명에 기대면 부끄럽지 않습니까?"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냐?"

필라노스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턱을 치켜들며 보란 듯 말했다.

"왕실을 지키기로 맹세한 왕국 기사단장이 마왕을 앞에 두고 도망쳤다지? 백화란 이름이 울겠군."

신 백화 기사단장. 카돌이 음흉하게 웃으며 맞장구쳤다.

"마왕이 무서웠나 봐?"

"……."

도망쳤다.

그 말은 사실일지 모른다.

클레어는 임무를 완수해내지 못했고, 왕녀와 촉괴와 맺은 약조를 견디지 못하고……

감히 왕녀가 하사한 국보 <백룡검>을 바닥에 꽂으면서 그곳을 뒤로했다.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걸 알면서도 왕성에 가지 않았다.

이유는….

"촉괴는 반드시 잡을 겁니다."

지금의 왕실이, 촉수 괴물에게 굴복하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콜린트 경의 밑으로 들어가는 게 나은 길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렇다면 얼른 우리 대장한테 가서 고개를 숙였어야지."

"부하로 받아주는 것 정도는 생각해 볼게. 클레어."

"사양하겠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나은 길보다 선택한 길을 가야 할 때가 있다.

그날.

백룡검을 반환하고, 왕국 기사단장을 때려치운 날.

클레어는 촉괴한테 확실한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다.

나는 이 약조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라고.

다시 빈틈을 보이면, 내가 널 죽이겠다고.

또한…….

"당신들을 보니, 콜린트 경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 같진 않으니까요."

"뭐야?"

"이 계집년이!"

자칭 기사단장들이 벌떡 일어나 검 손잡이를 쥐자,

클레어는 조용히 주의를 주었다.

"뽑지 마세요."

"……."

"상대와의 실력 차를 알 수 없을 만큼 어리석은 자가 내 후임이 되었다고 생각하긴 싫습니다."

"잘난 척하기는."

필라노스와 카돌은 다시 의자에 걸터앉아 기분 나쁘게 웃었다.

"우리는 술 한잔하러 왔을 뿐이야. 술잔 따를 생각 없으면 얼른 꺼져."

"퓌르나울에는 네가 할 일은 없어. 콜린트 경의 병사들이 지키고 있으니까."

"지켜보면 알겠죠."

"핫. 칼 한 번 휘두르면 산도 깎는 여자가, 사람은 무서워서 못 죽인다고 하니. 너는 그래서 실패한 거야."

"이 오빠들이 하는 걸 잘 지켜보라고."

여관을 떠나면서 들은 마지막 말은,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묘하게 클레어의 가슴에 박혔다.

희생을 각오하는 검이 정말로 강한 검인가?

시로코 언니는, 일단 싸움이 시작되었다면 망설임 없이 휘두르라고 했을 테지.

클레어는 그럴 수 없다.

사람을 지키기 위한 검을 사람에게 휘두를 순 없다.

하지만 그래서는 촉괴를 이길 수 없다면.

기사단장도 그만두고,

다음에는 사람이기를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모르겠어요. 언니.'

시로코 언니가 보고 싶은 밤이다.

문득, 지나간 사람이 그녀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기운이 비슷하다.

큰 가슴도 비슷해.

클레어는 무작정 후드를 눌러쓴 그녀를 붙잡았다.

"저기요!"

"…?"

돌아본 여자는,

무척 아름답긴 했으나…… 시로코는 아니었다.

화사한 금색에 하얀 눈꽃이 녹아내린 듯한 백금발.

빠져들 것 같은 녹색 눈….

클레어는 최근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본 적이 없어, 그대로 멍해졌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헌팅하려고 붙잡은 건 아니지? 그쪽 취향이야?"

당돌한 음성.

클레어는 화악 부끄러워져서 볼을 붉혔다.

"죄송합니다. 다른 사람과 착각해서…."

"죄송하면 술집 추천 좀."

"네?"

"모험가들끼리 회식하는 건 나랑 안 맞아서. 조용하게 마실 수 있는 곳이 좋은데."

그녀의 눈빛이 좀 전에 클레어가 나온 여관 겸 술집을 향한다.

"거긴 관두는 게 좋을 거예요."

클레어가 그녀를 말렸다.

"……시끄러울 거예요. 굉장히."

"그럼 어디 방 잡고, 같이 마실까?"

"네?"

"너도 마시고 싶은 얼굴이길래."

백금발 여성은 마음이 끌리면 오라는 듯이 성큼성큼, 숙소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클레어는 당황스러워하면서도 따른다.

상점에서 술 몇 병, 안주를 적당히 챙긴 여성은 방에 들어와서 클레어와 마주 앉았다.

후드를 슥 내리면,

특징적인 긴 귀가 드러난다.

'엘프.'

클레어는 귀를 훔쳐보면서, 그녀가 환상적일 정도로 예쁜 이유를 알았다.

"그쪽은 안 벗어?"

"……."

누가 들으면 오해할 법한 대화였지만,

상대가 퓌르나울 주민이 아니라면, 얼굴을 보여도 불편한 대화가 오갈 이유는 없을 듯해서 선뜻 후드를 내린다.

엘프는 클레어와 마주 앉아 술을 따르며 말했다.

"나는 엘리야."

"클레어…입니다."

"안 마셔?"

클레어는 멀뚱멀뚱 잔을 바라봤다.

엘리가 잔을 들고 빤히 바라보는데도 뭘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처음 마셔봐서…."

"그래 보이긴 해."

"무슨 뜻입니까?"

클레어가 살짝 발끈하자, 엘리는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평생 검만 휘두르고 산 사람처럼 보인다고."

순진한 처녀로 보이기 싫어서, 클레어는 무리해 잔을 비운다.

대개 술을 처음 마셨을 때의 반응은 정해져 있다.

쓰고 맛없어서… 이게 뭔가 싶다.

"…엘리 씨는, 나라가 비상시인데 여자 혼자 돌아다니셔도 괜찮습니까?"

"나는 비상시라서 여기 온 거야."

엘리는 주머니에서 금 등급 모험가 라이센스를 보여주었다.

'금 등급 모험가.'

라이센스에 별이 추가로 세 개 달린 것을 보면,

엘리는 상당히 유명한 모험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업계가 살짝 다른 것만으로 서로를 전혀 모를 수 있다.

한쪽은 유명한 모험가지만, 클레어는 전혀 모르고.

엘리도 유명한 백화의 주인인 그녀를 모른다.

"왕국이 큰일 났다면서? 왕녀는 잡혀 들어가고, 지금은…."

"콜린트 경이 왕실을 장악했습니다."

"마왕과 싸우기 위해 내린 특단의 조치라고 떠들던데. 그거 맞아?"

"…올바른 조치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내심 촉괴와 싸우는 건 바람직한 흐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왕녀가 겪을 수치나 모욕을 생각하면 클레어의 마음도 흐려진다.

"하지만… 괴물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필요한 조치였습니다."

왕녀는 신뢰를 잃었다.

마왕 촉괴는 왕국을 위협하는 실질적인 적이 되었는데도,

미지근한 태도를 일삼아서 불만이 끊이지 않았고.

그 흐름이 제후들과의 연계를 완전히 박살 내놓았다.

이 단기간에.

[약조의 츄츄]같은 치명적인 스캔들이 터지는 바람에….

다들 왕녀의 파렴치한 행위에 경악하고 있다.

"하긴. 이곳저곳 경비가 삼엄하더라."

현재.

퓌르나울은 수도 경비대가 아닌, 콜린트 경의 사병이 치안을 장악하고 있다.

전보다 훨씬 억압된 분위기.

밤에는 돌아다니지도 못하게 통금을 걸고…….

클레어도 마주치면 피곤하니까, 늘 피해서 돌아다닌다.

그 사병들은 여자들을 붙잡아 촉괴와 관계가 있는지 알아보겠다며 성추행을 일삼기도 하고.

이미 관계를 맺었다고 확정난 여자는 끌고가서 고문까지 했다.

아이라 왕녀가 왕실에 있을 때는 그녀들을 이종간 피해를 입은 환자라고 감싸는 풍조가 있었는데,

마왕 촉괴가 '검은 기둥'을 쏘아올린 후,

콜린트가 왕실을 장악하고 모든 게 바뀌었다.

여자들은 자기 몸이 얼마나 정순한지를 늘 증명하는 태도로 살아야 한다.

"촉괴 타입은 위험한 마왕입니다. 특히 여성에게는…."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내 목적은 마왕이 아니야."

"그러면…?"

"나는 악신 프레미아의 우상을 파괴하기 위해 돌아다니고 있어."

악신. 프레미아.

7살짜리 어린애도 알 만큼 유명한 이름이지만,

좀처럼 입에 담는 일은 없는 여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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