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용미관 앞.
떼로 몰려온 악의 무리는, 한 줄기 빛 같은 시로코의 검극에 휘말려 전멸했다.
'성공했어.'
한 번 휘두른 후.
시로코의 몸은 크게 흥분한 상태였다.
지금 그 스킬은, 시로코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난염검>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패자의 불꽃을 쏘아내 열기로 모든 것을 장악하는 대염검도 아닌.
완전히 새로운 기술.
보다 높은 경지.
그녀가 아카데미에 들어와서 학술서 등을 통해 묘리를 깨우친 극의 중 하나였다.
먼 옛날.
1대 마왕을 토벌한 용사 파티 중에는, 검의 은자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었다.
이름도 불명, 출신도 불명.
왜 그런 자를 용사 파티에 넣었을까, 사람들은 궁금해했다.
검의 은자는 그 탁월한 검 솜씨로 마왕을 쓰러뜨리는데 큰 공을 세웠고,
홀연히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래서 부르길 [검의 은자]
검 그 자체라고 불린 자였다.
그자의 스킬과 검술을 연구하고자 하는 시도는 여러 번 있었는데, 왕립 아카데미에도 그 기록이 있었다.
그 기록에서는 이렇게 묘사된다.
'여러 빛줄기와 벼락이 뒤얽혀 공간을 지배하는 궁극의 참격이 된다.'
시로코가 완성한 것은 <일섬>
은자의 육섬팔뢰에는 한참 못 미치는 편린에 불과하나, 그 위력은 절대적이다.
공격 범위에 노출된 적들은 몸통이 쩍 갈라져 그 절단면은 새빨갛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공간을 샌드위치처럼 접어서 베었기 때문에 거리는 의미가 없다.
'비슷한데.'
촉괴는 느낌은 다르지만 클레어가 백화 작전 때 보여준 벼락같은 공격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클레어와 비견되는 참격을 보여줬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시로코의 엄청난 성장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녀는 레벨을 잃었을 때도 강해지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으며,
아카데미 선생님이 되면서까지 검술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런 노력이 부활한 피지컬과 함께, 섬겨야 할 주군을 얻는 것으로 상승 작용까지 생겨나.
지금, 날아올랐다.
「굉장해」
시간이 멈춰있는 듯하다가, 다시 흐른다.
그때였다.
참격이란 재해가 덮치고 지나가 몸통이 분리된 악의를 디딤발 삼아,
갈색 피부의 여자가 시로코 쪽으로 몸을 날렸다.
「시로코!」
여자는 풀어헤친 도복에 큰 젖가슴을 자랑하듯 내놓았고, 눈가리개를 썼다.
하지만 목표가 어딨는지 정확히 아는 것처럼 시로코의 간격으로 파고들었고,
이윽고 격돌했다.
쾅!!
지면이 또다시 진동한다.
시로코는 촉수 검을 세워 막았지만, 분명히 타격을 입었다.
"큭!"
한나의 스킬 <초진동>은 타격 지점으로부터 진동을 일으키고,
그 탄성파를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스킬이다. 패자의 불꽃이 왕국에서 최고라는 인증을 받았듯,
한나의 초진동 역시 제국에서 최고 등급을 의미하는 칼마씨로 분류되는 스킬이었다.
그 말은.
아무리 완벽한 방어라도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사실 여기서, 시로코는 내장을 전부 짓이겨져서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한나한테는 충분히 그럴 의도가 있었다.
'응?'
눈가리개 속,
한나의 눈이 깜빡거린다.
시로코의 움직임이 예상을 웃돌았다. 그녀는 검에 실린 탄성파를 절도 있는 동작으로 몸에 가둔 후,
그 힘을 고스란히 다시 검에 실어서 돌려보냈다.
시로코는 힘의 흐름을 몸속에서 자유자재로 운용할 만큼 숙련된 검사였기 때문에 가능한 곡예였다.
반격을 회피하기 위해 거리를 둔 한나는 몸을 풀면서 그녀를 지켜봤다.
'그래도 충격은 피해 갈 수 없었을 텐데.'
탄성파는 이미 시로코의 몸을 흔들고 지나갔다.
그녀의 수습이 탁월했던 것은 사실이나, 충격을 모두 완화할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그것을 대신 받은 자가 있었다.
「크어어억」
그자는 속으로 존나 아파를 연신 외치고 있었다.
촉수 갑옷이다.
촉괴 본체가 변신한 촉수 갑옷은 충격을 8할 이상 흡수,
패자의 불꽃과 일섬을 동시에 사용해서 흥분한 시로코의 몸을 정상 체온으로 돌려놓기까지 했다.
일반적인 갑옷이라면,
탄성파가 지나감과 동시에 파쇄된다.
그걸 견뎌냈다는 것은 저 갑옷이 생물처럼 스스로 회복하며 견딜 줄 안다는 뜻.
'……혹시?'
한나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다리 스탠스를 넓게 잡고, 팔을 앞으로 내민 전형적인 격투가의 자세다.
시로코도 촉검을 잡고 자세를 잡았다.
"미안. 다음부터는 안 막고 피할게."
「그렇게 여유 부려도 될 상대가 아냐」
촉괴는 이미 한나라는 인간을 겪은 적 있었다.
앞뒤 가리지 않는 선제공격.
이 '모든 일'이 그녀의 주먹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또' 한나는 선제공격을 먹이러 왔다.
촉괴 입장에서는 망할 년이 따로 없다.
여자 기숙사나 용미관 근처에는 수비용으로 놓아둔 기물이 상당히 많았는데,
한나는 또다시 그것들을 초토화하면서 돌격했다.
실제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는 붉은 살점이 호떡처럼 짓뭉갠 흔적이 즐비했다.
일관성 하나만은 칭찬해줄 만하다.
「……너는 진짜 많이 낳아야겠다」
"촉괴."
촉괴가 보낸 신호를 수신한 한나가 취할 행동은 하나뿐이다.
「온다!!」
악의는 전부 죽었고,
이것은 시로코와 한나의 일 대 일 매치업.
시로코의 레벨이 좀 더 높지만, 경시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권사들의 레벨은 좀 더 높게 쳐주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다양한 분야의 기술이 레벨에 적용될 수 있는 검사에 비해,
격투가는 자신들의 몸만을 단련하는 것에 진심이라 다른 요소를 배제하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한나 역시 같았다.
극한까지 단련된 육체로….
마치 전차처럼 부딪쳐 올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전개였지만.
한나는 뻔한 예상을 웃돌았다.
아무것도 없는 땅에 발구르기를 시도한다.
"흡!"
「뭐지?」
그러자 발끝에서 일어난 탄성파가 지면을 타고 흐르더니,
시로코와 한나 사이에서 집채만 한 바윗돌이 정육면체 큐브로 깔끔하게 뽑혀 나왔다.
"하앗!!"
한나는 그것을,
축구공처럼 걷어찼다.
시로코는 바로 패자의 불꽃을 두른 검으로 일섬을 날렸다.
슈악!
엄청난 두께의 바윗돌을 버터처럼 갈라 버린다.
그 바윗돌 사이로, 한나가 몸을 날리고 들어왔다.
"큿!"
공격 후 회복할 시간이 부족했던 시로코는 다시 '막을 수밖에' 없었지만.
시로코는 임기응변으로 한나의 플라잉 니킥을 비스듬히 흘려냈고,
탄성파는 시로코 3, 허공 7 정도로 분산되어 건물의 뼈대를 흔들었다.
쿠구구구……!!
자세를 회복한 한나는 짧게 중얼거리고 덤벼들었다.
"다시 붙자. 촉괴."
한나는 꼿꼿이 서서 앞 손 잽으로 시로코를 몰아붙였다.
큰 동작으로 탄성파가 실린 플라잉 니킥을 회피한 시로코는, 검을 제대로 잡지도 못한 채 응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로코는 집중력을 발휘해 한나의 공격을 피하면서 공간을 넓게 쓰기 시작했다.
한나의 흐름을 끊은 것은 시로코가 사용한 <촉괴의 권능>이었다.
바로 머리 뒤에서 나타난 게이트가 촉수를 무수히 뿜어낸다.
한나한테 그걸 처리하는 건 벌레 짓이기는 것과 별다를 게 없는, 수고스럽지도 않은 일이었지만.
약간의 빈틈을 허락하는 수밖에 없었고 시로코는 그 틈에 자세를 재정비했다.
"후우."
촉괴는 수준 높은 싸움에 놀라고 있었다.
지금 그 <촉괴의 권능> 활용은, 촉괴의 뜻이 아니다.
시로코가 타이밍을 가늠해서 비수 던지듯 상대에게 찔러 넣어 시간을 벌었고, 유효했다.
광범위한 공격을 치고받지 않고,
쓸데없는 피해를 억누르며 거리를 재고 밀어붙였다가 물러났다가 하며 치열한 공방을 다투는 둘.
두 사람의 싸움은 이제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
"흡! 흐읏!"
"후…!"
호흡하는 소리만 들린다.
그리고 검을 휘두르는 소리,
한나가 극한으로 단련된 육체를 빠르게 움직여 검을 받아내는 소리.
창과 검의 대결처럼 이는 본래 리치가 긴 검이 유리한 매치업이라고 할 수 있지만,
상성이라는 것은 극한으로 숙련된 자들끼리 붙으면 뒤집히기도 하는 법이다.
한나는 <초진동>을 사용해서 손등으로 검날을 흘려내며,
시로코의 손에 대미지를 누적할 생각으로 방어하는 중이었다.
시로코는 <패자의 불꽃>을 쓰면 간단히 그런 전략을 막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간 보는 중이다.
체중이 실리지 않은 가볍고 빠른 참격으로 한나의 움직임을 재고 있었다.
고수들끼리는 언제 승부를 걸어야 하는지 가늠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냥 모든 힘을 싣기만 한 주먹으로 난잡하게 휘둘러 봐야 서로에게 치명타를 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이제는 게이트로 무지성 촉수를 불러도,
한나는 한 호흡에 대응했고, 촉수는 풍선처럼 폭발했다.
이제 웬만한 잡기술은 초집중 상태로 들어간 두 사람에게 통용되지 않는다.
그렇게 서로의 기량을 확인한 뒤, 잠시 호흡을 고르는 시간.
"…붉은 머리에, 큰 가슴. 환상적인 검술 실력을 갖춘 여기사가 왕국에 있다고 들었어."
「가슴 큰 건 저쪽에서도 유명하네」
한나의 목소리에는 존경심이 배어 있었다.
그녀가 단순한 촉괴의 앞잡이라고만 생각했던 초반부와 다르게.
"제국의 권왕님이 날 알아주다니, 영광인데."
시로코는 숨을 길게 뱉고 씩 웃었다.
"미안하지만, 난 그쪽에 관해서는 잘 몰라."
"이제부터 알면 돼."
한나가 순간, 눈앞에서 사라진다.
시로코와 촉괴가 그녀를 포착했을 때는 이미 한나는 살짝 뜬 위치에서 다리를 위로 쭉 뻗고 내리찍을 준비 중이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자고 말하는 듯한,
살의가 실린 공격.
"권왕, 한나를!"
쾅!!
바닥이 두부처럼 으깨어진다.
시로코는 타격을 피했지만 그 탄성파가 고스란히 다리를 타고 올라와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즉, 땅에 닿으면 땅에 서 있는 시로코도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면…!!"
시로코도 가진 패를 꺼내야 할 때.
서로의 기량이 보통 이상인 것은 확인했고, 승패를 결정짓는 것은 어쩌면 스킬을 얼마나 잘 응용하느냐에 달렸을 수도 있다.
<패자의 불꽃>
검에 엄청난 열기가 응축될 뿐만 아니라, 이제는 주변에 닿는 사물까지도 열기 부여를 받는다.
그 말은.
시로코가 탄성파로 다리에 대미지를 받고 움직이지 못하더라도,
한나 역시 시로코한테 접근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올라가는 체온.
흐르는 땀방울은, 촉괴가 맛있게 먹고 있었다.
「츄루루룹」
시로코는 살짝 웃었다.
'노출 안 해도 되니까 좋긴 한데…….'
노출보다 더 변태 같은 짓하면서, 스킬 페널티를 수습하고 있는 이 느낌….
패자의 불꽃은 과하게 사용하면 사용자의 체온을 높이고 탈진 상태로 만드는 페널티가 있다.
그래서 사용을 주저하고 있었지만.
사용하고 있을 때, 그녀는 마치 불의 여신이다.
한나는 움직이지 못하는 시로코에게 달려들어 발차기 위주의 공격을 시도했지만,
도포가 순식간에 녹아내려 속옷 차림이 되었고, 그녀의 피부도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좋은 기회!
시로코는 검을 휘둘렀고,
놀라운 것은 한나 역시 물러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가까이 붙어서 클러치 상태를 만들려고 하지만,
시로코는 가볍게 어깨로 밀쳐내고 검을 휘두른다.
쭈웁. 쭈웁.
촉괴는 시로코를 빨면서 그녀의 체온 처리에 힘쓰고 있었다.
서방님의 쿨링 능력이 생각보다 좋아, 시로코는 기쁜 오산에 당황했다.
'…처음부터 이렇게 할 걸 그랬나.'
달아오른 시로코의 몸은 그토록 맛있는지,
쪽쪽 빨아대는 걸 쉬지 않는다.
그 말은, 더 싸워봐야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결판이 났다.
"음!"
한나는 거리를 두고 바닥에서 질량체를 뽑아 원거리에서 공격하는 수밖에 없지만,
시로코는 한 손에 쥔 촉검으로 그것들을 베어가며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한나가 건물로 눈을 돌리고 뛰어갔다.
기둥이라도 뽑아서 쓸 생각이었겠지.
하지만, 한눈을 팔고 기교를 부린 대가는 컸다.
쉭.
시로코가 뻗은 일섬이, 한나의 다리를 토막 냈다.
"큿!"
한나는 앞으로 엎어져서 무력하게 바닥을 뒹군다.
피는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절단면이 순식간에 열기로 눌러붙었기 때문이다.
"끄으윽!"
한나는 통증을 견디다가 그대로 기절했다.
"다리 한쪽 정도는 잘라야 얌전히 있을 것 같더라고."
「잘했어」
아까 그건 뭐였던 걸까.
촉수 괴물은 촉감각을 집중해, 역장이 일그러진 장소를 가만히 관찰했다.
'지금은 상처 아물듯 줄어들었어. 하지만…….'
악의는 역장을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지금 일어난 현상으로 봤을 때 꽤 설득력 있는 가설이다.
「…밖으로 나갈 준비 하자」
방법을 찾은 것 같다고.
촉괴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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