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8화 (138/264)

한편, 왕국은 아이라를 중심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왕성이 괴물한테 장악당했다는데. 그게 사실이야?"

"그럼 이렇게 조용할 리가 있나?"

"듣자니 왕녀님이 싹싹 빌어서 돌려보냈다는데…."

"…쉿. 근위병이 보고 있어."

불과 며칠 전에 괴물의 강습이 있었는데도

기사단은 사실상 궤멸 상태에, 왕실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으니.

사람들의 불안감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다.

아이라는 알현실 내에 있었던 일을 극비로 하고 귀족들에게 함구령을 내린 후,

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지만….

"……."

아침에 눈을 뜨면, 매우 일어나기가 싫다.

아이라는 최악의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왕녀님. 기침할 시간이십니다."

"…알았다."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아름다운 외모를 더욱더 아름답게 치장하기 위한 시간이 약 1시간 30분 소요된다.

아이라는 다시 대신들을 불러 모았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촉괴의 위치를 특정한 지금, 다시 클레어 단장을 불러와서, 적이 저항할 틈도 주지 않고 밀어붙여야 합니다!"

"그랬다간 이번에야말로 수도 전체가 괴물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말 거요!"

"그러면 괴물이 하자는 대로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왕실의 신뢰가 바닥에 떨어지고 있소!"

"…리아나 단장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왕녀가 조용히 물었다.

대신들은 서로의 얼굴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리아나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소식이 없다.

죽은 것은 아닐진데, 어쩌면 죽음보다 더한 꼴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촉괴는 여자를 좋아한다.

그건 이제 비밀도 아니다.

아이라는 불쾌한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첫 키스를 난잡하게 빼앗긴 충격 그 이상으로… 괴물의 변태 같은 열의가 입술을, 혀를, 치아를 더듬으며 자기 몸에 타고 전해 들었던 기억.

왕녀인 내가 그런 저열한 사고를 품은 수컷과 입술을 맞대고 체액을 섞었다니….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데 자꾸만 혀에 그 감촉이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만약 공격한다고 해도, 리아나 단장 없이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클레어 단장이 있으면…."

"지금 그 클레어 기사단장과도 연락이 안 되고 있소. 백화 기사단은 사실상…."

…알고 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왕국이 자랑하는 최강의 기사단은 촉괴한테 당했다고.

그렇게 한 것은 촉괴의 능력인가, 교활함인가.

하지만 아이라가 그와 마주하고 딱 하나 알게 된 사실은 있다.

'촉괴가 마왕이 아니라는 점이다.'

마치 세상에 군림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내려와,

공포로 사람들을 지배하는 마왕이 아니라….

그 괴물은 본인만의 행동 원리와 개인적인 욕심이 있다. 그런 점에서는 말이 통해 다행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예언의 마왕은 무엇인가?'

솔직히 이제 아이라는 그 일까지 신경 쓸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당장 비상 선언을 해야만 합니다. 왕녀님."

"다음 회동을 기다리지요."

"괴물이 말을 건네올 때까지 기다리시자는 말씀입니까?"

"그밖에 좋은 방법을 모릅니다. 이번에 우리가 선제공격했다가 실패하면, 그때는 신민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아이라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다시 촉괴를 노린다고 해도 전장은 수도 한복판이 될 수밖에 없고

한 번 더 대규모 전투가 일어나면 수도에 사는 수십만 신민들이 살 곳을 잃고 만다.

왕국에서 발생한 대량의 피난민은 대륙에 엄청난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있다간, 수도가 괴물 둥지가 되고 말 겁니다."

"약조하였습니다."

모두 탄식을 흘렸다.

"…지금은 촉괴가 약조를 지켜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라는 혀에 감도는 쓴맛을 느꼈다.

각 기사단장의 공습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후,

왕실을 점거당한 것이 특히 좋지 않았다.

반대로 말하면 촉괴의 수가 매우 좋았다.

아이라는 목숨을 인질로 잡혀 있다.

사실 그게 목숨인지도 모른다. 촉괴가 자기 몸에 무엇을 하고 갔는지, 설명을 들은 바 없다.

'클레어는 아는 것 같았는데…….'

육화 열매? 라고 했던가.

아이라는 그날 전투 보고를 받지 않아서, 클레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모르나.

촉괴를 건드리지 않겠다며 속옷 차림으로 큰절까지 올려놓고서,

…약조를 깨는 행위─비상 선언─를 했다간 싫어도 열매의 역할을 알게 될 것이다.

촉괴가 그날하고 간 <약조의 츄츄♡>는 아직 유효했다.

그러나 마음마저 굴복한 것은 아니다.

적어도 그녀는 자신의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신민들의 안전을 위해 무릎을 꿇었다.

적의 비열한 협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것이다.

그 사실이 아이라의 마음이 무너지지 않게 지켜주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

'클레어는 내정이 마비되었다는 것을 알고 혼자 움직이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클레어 혼자서는 상황을 반전시키기 어렵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누군가가 아이라의 수난을 알아차리고 움직여 주어야 한다.

"왕녀님."

그때, 델리아가 회의실로 입장했다.

"무슨 일이죠?"

"데세발 측에서…."

데세발이?

건네받은 서신을 펼친 아이라는 동요를 숨기지 못했다.

'아니야. 이게 아니에요.'

이런 움직임을 원했던 것이 아니에요!

델리아는 이미 내용을 확인한 듯 조심스레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이것이 기회라고 봅니까? 델리아 집정관."

"기회라기보다는, 터질 일이 터졌다고 생각합니다."

"……."

아이라는 대신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현 시간부로, 왕국에 비상 선언을 내리겠습니다. 각 지역의 제후들에게 지원을 요청하세요!"

"옛. 알겠습니다!"

"와, 왕녀님! 괜찮으시겠습니까?"

대신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나뉘었다.

아이라의 결단을 기다렸다는 듯이 나서는 사람이 대부분.

일부는 아이라가 촉괴에 의해 몸에 폭탄이 심어진 것을 아는 이들이었다.

아이라에게 약조를 깬다는 것은, 죽음을 택하는 것과 같다.

아이라는 아카데미발 서신을 받은 후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

"이미 상황은 제 손을 떠났어요. 남은 건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입니다."

델리아는 떨고 있는 아이라의 손을 잡았다.

"델리아…?"

"허락 없이 몸에 손을 대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왕녀님."

"아니, 아니에요."

아이라는 델리아의 손을 꼭 맞잡았다.

"저는…… 왕녀님과 같은 운명입니다."

"당신도… 촉괴한테 당했었죠…."

그때, 왜 나섰냐고 따지는 것은 멋이 없다.

아이라는 안 그래도 되는 상황에 나서준 델리아가 고마울 따름이다.

덕분에 배속에서 괴물이 자라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겪고도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을 수 있으니까.

델리아와 아이라는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아도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존재였다.

서로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할 수 있는.

잠시 떨림을 진정시킨 아이라가 재차 명령했다.

"제후들에게 현재 상황을 명확히 전달하세요. 퓌르나울은 현재, 촉괴라는 괴물에 의해 장악당해 매우 위험한 상태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왕실에 맹세한 충성을 증명할 때라고 알리세요!"

"옛, 왕녀님!"

"룬 왕국에 영광 있으라!"

아카데미에서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촉괴의 둥지라고 할 수 있는 <리커버리 센터>는  땅 위에서 깨끗이 소멸했다.

서신에 적힌 것이 바로 그 내용이다.

밑에는 데세발 아카데미 학생회장의 날인과 함께 그녀의 짧은 견해가 실려 있었다.

- 치열한 전투가 예상되니 비상 선언 바람.

왕국의 비상 선언은 총력전으로 국가적 재난 상황을 해결하겠다는 의지 표명이다.

역사적으로는 마왕이 나타났을 때를 제외하고는 비상 선언이 있었던 적은 없다.

그 밖의 문제는 왕실 직속 기사단이 해결했기 때문이다.

아이라는 수십만 명을 인질로 잡고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히겠다고 선언한 촉괴의 협박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상 선언을 유보하고 있었지만, 상황은 급박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촉괴를 건드린 자가 나타났다.

왕녀가 지시한 일은 아니다.

복수심을 억누르지 못한 클레어인가? 그렇지 않으면 아카데미 측에서 움직였나?

'확인 중'이라는 말만이 서신에 적혀 있다.

지금 아이라가 알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촉괴의 반격이 시작된다는 것.

멀뚱멀뚱 아무 조치도 없이 시간만 보낼 수는 없다.

모두가 비상사태라는 걸 알아야만 했다.

아이라 왕녀는 불안감을 억누르며, 상황이 흘러가는 걸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일이 터지기 수 시간 전.

왕립 아카데미 데세발은, 한산했다.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바로 곁에 괴물 둥지가 있는데도 말이다.

데세발은 왕국의 공습 작전이 있을 때에도 자율 방어를 선언하고, 수비적인 태도를 일관했다.

용사 선발전을 위한 학생을 기르는 곳이, 왕국이 하는 특수 임무를 나서서 거들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아나 기사단장의 실종 소식과 더불어 왕성을 습격당했다는 이야기까지 퍼지자,

데세발에서도 대응하려는 움직임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고, 혹시 <촉괴 타입>이 '마왕' 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생기면,

데세발은 즉시 최강의 무력 집단이 된다.

그러나…. 여긴 기사단과 달리 에고가 엄청나게 강한 천재들만 모이는 곳이라서,

어지간한 위기 상황이 아니면 왕실의 지휘를 받지 않는다.

아카데미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은 촉괴의 대응 방식 덕분인지,

부화장과 아카데미는 캠퍼스를 반으로 나눠 먹고 기묘한 동거를 계속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데세발의 캠퍼스는 도시 구획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넓은데다,

<약조의 츄츄> 사건 이후로 데세발로 통하는 대교를 막고 있던 촉괴수들이 자취를 감추면서

아카데미는 정상 운영되었고, 아무도 부화장 근처로 얼씬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공격하러 가볼까?' 하는 사람도 없는.

그런 긴장 상태가 이어지고 있었다.

비유하자면 적국과 국경 경계선에서 감시 초소만 세워 놓고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위태로워 보이지만, 누가 먼저 손을 뻗지 않으면 그런 시간이 계속 이어질 것만 같았다.

데세발 제2 야외 훈련장.

시로코는 목검을 든 채 학생들의 자세를 봐주고 있었다.

복장은 평범한 체육 교사 같았다. 찰랑거리던 붉은 머리카락은 묶어 올렸고, 운동화를 신었다.

"허리 더 집어넣고. 체중 이동을 신경 쓰면서 발을 디뎌."

"네!"

"우리들 근데, 한가하게 이러고 있어도 돼요? 시로코 선생님."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너희들은."

학원생들은 지금 한창 이슈가 되는 <촉괴 타입> 건에 매우 민감하다.

"시로코 선생님도 기사단 시절에 싸웠다면서요? 촉괴 타입과."

"야, 그 얘기는 왜 해. 져서 은퇴한 거잖아."

"맞다. 그랬지~?"

'건방진 것들…….'

옛날 성질이었으면 벌써 헤드락 들어갔다.

그러나 이미 학원장에게 경고를 두 번이나 받은지라, 시로코는 한숨만 푹푹 쉴 뿐이었다.

"검 휘둘러. 발 디디면서."

"에이 씨! 못 해 먹겠네!"

그때, 한 성질 하는 피어싱 남학생이 목검을 내던졌고,

그 목검은 휙 날아가 시로코의 발밑에서 데구루루 굴렀다.

"……."

"우리들 레벨이 몇인 줄은 알고 이런 틀딱 훈련이나 시키고 있는 거야? 장난해?"

시로코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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