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화 (124/264)

한편, 클레어는 다음 목표 지점을 향해 빠르게 몸을 날리고 있었다.

이동 속도가 워낙 빨라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비치기도 전에 사라질 정도였다.

지금은 실책을 괴로워할 시간도 없다.

모든 사고를, 의식을.

오로지 목표 달성에 집중할 뿐이다.

클레어는 괴조에 탑승하기 직전, 리아나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

….

"적의 본체가 어딘가 다른 곳으로 빠져나갔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무조건 와이프 곁에 있을 거예요."

"와이프?"

"촉괴는 와이프처럼 생각하는 여자가 있어요. 성율 기사단 전 부단장 티아. 그녀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면 돼요."

그렇다.

촉괴는 지난 추격전에서, 지금껏 도구처럼 쓴다고만 생각했던 여성에게 깊은 애착심을 보여주었다.

그것이 완전히 예상 밖이어서 리아나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촉괴는 혼자 도망치면 살 수 있는 상황일지라도 애착 보지를 버리지 못한다고 설명할 수 있다.

막말로 식구들 다 버리고 일반인 보지에 숨거나,

도시 밖으로 나가면 찾을 방도가 없다.

그런데도 이 작전이 성립하는 이유는…….

이 퓌르나울 남구 어딘가에 촉괴의 와이프 중 하나로 확정 지어진 흑발 폭유 미소녀, 티아가 있고.

두 다리로 걸어 다니는 인간을 추적하는 건 괴물 찾기보다 훨씬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사단을 움직여 감시망을 펼치신 겁니까?"

"네. 티아는 어딜 가도 눈에 띄어요. 그녀를 사로잡을 수 있다면, 촉괴는 나올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러면 지금은 함께 숨어있겠네요."

"그렇죠. 그러니까… 사람을 찾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좀 더 쉬워지는 거예요."

"사람 찾는 일…."

리아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촉괴는 와이프의 안전이 100% 약속된 상황이 아니라면, 절대로 개별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고 봐도 좋아요."

'이것이 사람을 찾는 일이라면….'

클레어는 <심안>을 활성화하고 마지막 작전 구역에 도착했다.

'분명히 여기에 있다.'

세 번째 흑잠이 있는 곳.

널찍한 공터는 살점이 뒤덮여 있고,

둥지에는 클레어의 키보다 큰 꽃이 일정 간격으로 수십 개나 자라나 있었다.

……보고에는 없던 괴물이다.

이것들은 뭐지?

바닥에 뿌리를 내리고 움직일 기미도 없기에 부수는 건 간단해 보였지만.

클레어는 우선 흑잠을 향해 백룡검을 휘둘렀다.

촤악!

'됐어.'

모든 흑잠이 쓰러졌다.

리아나의 폐건물에 있는 하나를 제외하고는.

물론, 클레어는 그 사실을 몰랐다.

'남아있는 가스는 곧 바람이 쓸어갈 거야.'

가스로 세뇌당할 가능성은 크게 줄었다.

다행이다.

클레어는 그 거대한 꽃을 좀 더 자세히 살펴봤다.

"고기로 된 꽃…?"

고기 꽃.

본 그대로 말하면 그런 느낌이었다.

아무튼 크기가 엄청나게 컸는데, 자칫하면 나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6m~7m 정도까지 자라고, 거대한 고기 꽃잎 안으로 뭉툭하게 말린 덩어리 같은 공간이 있다.

클레어는 조심스럽게 날을 대서 꽃망울을 갈랐다.

주욱.

그러자 생물의 위장을 가른 것처럼,

그 안에 들어있던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오…. 오옥…."

"응…. 응규우……."

인간이었다.

그것도 젊은 여성들.

고기 꽃잎이 엄마 자궁처럼 따뜻하게 품고 있었는지, 모락모락 김이 난다.

'윽…….'

클레어는 이 꽃의 정체를 알고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이 고기 꽃은… 무려 열 명이 넘는 여자들이 서로 뒤엉켜 꿀을 빨고 있는 밀폐 공간이었다.

대체 무얼 위해서……?

촉괴한테 물어봤으면 명쾌하게 보지 즙 빨기 위해서라고 대답해 줬겠지만….

이 기괴한 광경.

인간은 이해할 수 없다.

'설마 이 안에서 모두… 서로 물고 빠는 중인 거야…?'

이젠 동물조차 아니잖아.

클레어는 더 이상 이것들을 눈여겨볼 자신이 없었다.

그때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린다.

'혹시 본체는 이 안에?'

갑자기 든 생각이었다.

전부 까봐야 하나?

보금자리를 빼앗긴 여자들이 클레어의 발을 붙잡는다.

"어째서!"

구조된 여자는 비통에 빠진 얼굴로 부르짖었다.

"왜 꺼내줬어!"

"……네?"

"…왜! 왜애! 날 돌려보내 줘! 다시… 다시 안으로 들여보내 줘!"

"그, 그건…."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클레어가 머뭇거리는 동안.

안락함을 빼앗긴 보지들은 고기 꽃으로 들어가기 위해 머리부터 집어넣고 있다.

먹히기 위해 애쓰는 피식자라니….

참 기묘한 광경이었다.

"다시! 다시 들어갈래…!"

"제발…. 제발 다시 먹어줘…!"

참다못한 클레어는 고기 꽃을 파괴해 버렸다.

스윽!

"꺄아아아악!!"

"안 돼애애애애!!"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비명을 지르는 여자들.

못 할 짓을 한 것이 클레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꽃 상단에 보지 즙을 빨아 맺힌 과실이 푸쥬쥭 바닥에 떨어지면서 으깨어진다.

'……벌레?'

그 열매 속에는,

자그마한 벌레가 수백 마리 들끓고 있었다.

……클레어는 미간을 찡그렸다.

부패한 느낌은 아니다.

오히려 그 애벌레가 들끓는 열매에서 단내가 난다…….

클레어는 오히려 그것이 참을 수 없이 역겨웠다.

'백화!'

화르르륵!

…클레어는 고기 꽃 조각을 모조리 불태우고 눈을 돌렸다.

'이것도 어떤 변태 같은 능력을 가졌겠지.'

하지만.

다가가지 않고, 건드리지 않고.

불태우기만 하면 당할 일 없다.

'나머지 꽃도 전부 파괴할까?'

클레어는 잠시 그렇게 생각했다가,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는 보지 가축들에게 주눅 들어 한 걸음 물러났다.

'지금은 관두자.'

지금은 구해줄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게 뭔지 연구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서둘러 본체를 찾아내지 않으면…….

"클레어!"

클레어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글로바 아저씨?!"

"이쪽이야!"

"죽은 줄로만 알았어요…!"

"나도 그런 줄 알았어."

퓌르나울 남부 구역이 촉괴의 손에 떨어졌을 때.

말은 안 했지만, 모두 글로바의 생존 가능성이 절망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촉괴는 남자를 가차 없이 죽이는 편이고…….

글로바는 거동이 불편한 환자였기 때문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클레어는 정색하고 백룡검을 겨눌 수밖에 없었다.

"우, 우와앗! 구, 국보! 잠깐. 닿기만 해도 죽어… 나, 죽어! 진짜 죽어!"

"……."

글로바는 지릴 것 같은 표정으로 벌벌 떨었다.

'이 한심한 모습…. 글로바 아저씨가 맞는데.'

클레어는 본인이 사람에게 칼을 겨누면 그 위압감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모르고 있었다.

다 큰 아저씨가 큰절하고 살려달라고 빌기 직전까지 갔는데도 검을 거두지 않는다.

"……정말 글로바 아저씨 맞습니까?"

"그럼 나 말고 누가 여깄어!"

"어떻게 살아남았죠?"

"…그놈이 내 목숨에 관심이 없었어."

"그놈? 촉괴 말이에요?"

"응… 그래요. 단장님. 내 와이프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 짓만 계속하더라고."

'…연기 같지는 않아.'

하지만 이 타이밍에 갑자기 기어 나오다니.

너무 수상하지 않은가.

클레어는 쉽게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아니, 진짜야! 나도 의심스러운 건 알겠지만요. 단장님!? 그 자식은 반병신이 된 수컷한테 관심이 없다고! 정말로!"

"아무리 그래도… 이 상황에 아저씨를 그냥 탈출하게 둬요……?"

"진짜! 다 걸고! 그 녀석, 수컷에게 진짜 노 터치라니까. 적어도 동성애 성향이 없다는 것은 확인했어요!"

정말인가?

현실에선 간혹 믿을 수 없는 일도 벌어지기 마련이라지만.

글로바가 눈앞에 나타난 게 기쁘면서도 황당했다.

클레어는 검을 거두지 않았다.

"뒤돌아요."

"예…."

"미안하지만, 철저하게 해야 할 부분이라서."

"압니다…."

클레어가 글로바의 몸을 더듬는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없는지.

하지만 상처가 꽤 악화한 모습,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아 메마른 몸….

"윽! 억! 아파…. 거기… 거기 많이 아픕니다! 단장니임!"

"……."

클레어는 약해질 것 같은 마음을 굳세게 다잡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저하게 더듬어서 확인했다.

"다시 돌아요."

"예…."

글로바는 서 있기도 힘든지 다리를 후들후들 떨었다.

"……5년 전에 제가 목욕하는 걸 훔쳐보신 적 있으시죠."

"……그, 그런 것까지 이야기합니까."

"말하세요."

"아니, 그것은……. 실수로, 헷갈려서…."

"그때 저한테 뭐라고 했는지 그대로 말씀해 보세요."

"……다시 한번 이런 일이 발생하면 목숨으로 사죄하겠다고 했습니다! 큰절하면서…."

"……."

"절도 할까요?"

"아니오. 됐어요."

충분히 확인했다.

클레어는 그제야 경계심을 풀고 글로바를 안았다.

"글로바 아저씨!"

"으어억."

고통스러워하는 글로바.

왕맘마통 기사단장이 안겨도 기뻐할 수 없는, 만신창이 몸이다.

"아,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왕가슴 단장님을 쏙 안아보겠어요."

"……."

클레어는 홱 떨어졌다.

"저것들은 대체 뭐예요?"

"<육화>라고 부르던데."

"육화?"

고기 꽃?

정말로 본 그대로였다니.

"수확하는 중일 거야. 그 괴물은 여자 몸에서 영양분을… 흡수하니까."

"많이 아팠어요? 왜 그렇게 식은땀을 뻘뻘 흘려요?"

"……아파 죽겠다. 서 있는 게 기적이야."

"어떻게 제가 있는 곳을 알았어요?"

글로바는 벽에 등을 기대어 숨을 골랐다.

아무래도 정말 아픈 것 같다.

얼굴에는 핏기가 없고, 몸은 지금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의학 지식이 없는 클레어가 보기에도 당장 안정을 취해야 할 상태로 보인다.

"창밖으로 백화가 번지는 것을 보고 달려왔어. 단장님이 여기 있을 줄 알았지……. 하핫…."

"촉괴의 위치를 알고 있나요?!"

"그래, 이쪽이야…!"

글로바의 몸이 뚝 멈췄다.

"글로바 아저씨?"

"…다이애나를 구해줘."

"다이애나 씨는 어떻게 됐어요?"

"괴물의 와이프가 됐어."

…….

잠시 둘 사이에 말이 없어졌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녀석이 하는 모든 일에 기뻐하면서… 허덕이고 있어……."

클레어는 글로바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했다.

"본심이 아닐 거예요."

"그렇겠지…?"

"생태학자분들 말로는, 괴물이 분비하는 체액 때문이라고 해요. 절대 다이애나 씨의 본심이 아니에요."

"……나…. 다시… 다이애나랑… 평소처럼… 얘기하고 싶어."

"구해줄게요. 반드시."

촉괴의 위치가 가깝다.

클레어는 글로바가 아내를 빼앗겼고,

계속해서 범해지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확신했다.

본인의 와이프로 만들 셈인 거야.

'그런 식으로 남의 사랑을 짓밟고.'

글로바 아저씨를 언제든 죽일 수 있었으면서,

일부러 살려두고 농락한 것도 마음에 안 든다.

촉괴가 남자였으면, 자신이 제일 싫어하는 최악의 스타일이었을 거라고.

클레어는 생각했다.

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녀가 화났다는 뜻이다.

"이쪽 골목으로 빠져나가면 돼. 놈은 우리 집에 있어."

"글로바 아저씨 집에서, 다이애나 씨랑 하고 있단 말이에요!?"

"……으. 으응…. 멘탈 깨지니까…. 재확인하지 말아 줄래…?"

"죄송해요…."

숨 막히게 파렴치하다.

클레어의 머릿속은 온통 '죽어라 촉괴'로 가득 차 있었다.

'추악해.'

기회가 오면, 망설이지 않고 전심전력의 백화로 뒤덮어 죽일 테다.

클레어는 어느새 호흡을 가다듬고 얼음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바늘처럼 예리해진 집중력.

흰색의 우아한 검날이 클레어의 맑은 투기를 머금은 듯 공명한다.

"성율 부단장, 티아도 함께 있었어요?"

"어떻게 알았어?"

확실하다.

촉괴는 지금 와이프랑 함께 있어.

클레어는 벨리컨을 손으로 감싸고 말했다.

"리아나 단장님. 들려요? 촉괴의 위치를 파악했습니다. 지원 가능합니까?"

치직. 치지직.

뭔가 방해받는 것처럼 노이즈가 들린다.

"리아나 단장님."

[아…. 우으읏……. 크…]

……?

신음…?

"리아나 단장님. 지금 상황이 어때요? 도움이 필요해요?"

설마.

리아나 단장이라면 자력으로 충분히 탈출할 수 있었을 텐데?

촉괴의 함정?

"위급한 상황입니까!?"

[윽…. 하아……. 여기보다 먼저…… *****!]

'생각하자. 클레어….'

리아나 단장까지 불러서 포위하면 확실하지만.

상황이 여의찮다면 혼자서라도 해야 하나?

흑잠을 물리친 이상 남부 구역은 되찾았다.

하지만 리아나 단장이 위험하다면

그녀를 구할 수 있는 타이밍은 지금뿐일지도 모른다.

[……촉괴*… **에… 있을*…]

"네? 뭐라고요? 잘 안 들려요!"

[…클*어… 함*이에…요**]

함정?

"글로바 아저씨. 여기서 기다려요."

이제 직접 확인해보는 수밖에 없다.

촉괴를 죽이고 리아나 단장을 도우러 간다.

클레어는 처음 작전 내용대로 명쾌하게 해야 할 일을 머릿속에 정리한 후.

마음을 다잡았다.

"글로바 아저씨?"

대답이 없다.

뒤를 돌아본 클레어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글로바의 얼굴에 촉수가 빽빽이 돋아나고 있었다.

"글로바…?"

놀랐다.

너무 놀랐다.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지면 사람이 그대로 굳어버린다고 하지 않던가.

클레어가 지금 바로 그랬다.

좀 전까지 떠들던 글로바는 어디로 가고, 괴물이 있다.

그 상황을 즉시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지금 떠오르는 건…….

시로코의 말이었다.

…상상도 못 한 기만책.

설마…!

"크, 읏…!!"

클레어의 손이 반응했지만, 늦었다.

글로바의 얼굴에서 뿜어져 나온 촉수는 클레어의 목에 휘감겼고,

가시를 통해 마비액을 꿀럭꿀럭 집어넣었다.

'마비액을 뿜는 가시 촉수……!! 보고에 있던…… 촉괴 타입의…!'

클레어가 발버둥 친다.

"끅…! 읏…! 으…!"

힘이 쭉쭉 빠져나간다.

잠깐 스친 것만으로도 리아나를 절뚝거리게 만들었던 진한 마비액이 클레어의 몸에,

3초, 5초, 10초….

꿀럭꿀럭꿀럭 주입되어 간다.

"아…. 큭…. 흐윽…!!"

클레어는 이를 악물었다.

다음화 보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