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같은 시각.
에스칼리아는 고통의 늪에 빠져 있었다.
몸을 태우는 하얀 불도, 내장을 찢는 빛의 검도.
그녀를 죽이진 못했지만……
스스로 삶을 포기할 방법이 없는 것이,
그녀의 가장 큰 불행이라 할 만큼, 큰 고통이었다.
'아파. 아파. 아파. 아파.'
맨발로 가시밭길을 걷듯이.
암흑뿐인 구렁텅이에 끝없이 떨어지듯이.
계속 이어지는 아픔만이 그녀에게 남겨진 모든 것이었다.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프다는 속삭임도 낡아 으스러질 만큼 되뇌고, 되뇌어…….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나는 이미 죽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될 때쯤.
에스칼리아는 익숙한 환상을 본다.
「에스칼리아, 여기야」
그 환상 속의 에스칼리아는 조그맣다.
사람 발에 치이면 툭 엎어질 정도로 작고 미약한 존재.
그런 존재를 이끌어 주는 두껍고 큰 손.
「에스칼리아, 이리 오렴」
그 남자의 목소리를, 에스칼리아는 기억한다.
'누구냐…. 누구냐, 너는.'
지독한 그리움만이 느껴졌다.
환상에 젖어 있을 때면 아픔에서 해방되지만,
반대로 그녀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 깨어나는 이 기억의 조각을,
어디서 주웠는지……
그것만은 전혀 생각해내지 못했다.
'누구든 상관없다. 잠시나마 이 아픔에서 나를 꺼내어 줬으니.'
생각할 여유가 생기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나를 쓰러뜨린 숙적, 용사 에단 힐레일도 아니고.
나를 위해 죽어도 좋다는 충성심 넘치는 마왕군도 아니었다.
가족.
하나뿐인 가족.
'동생아……. 미안해….'
에스칼리아는 촉괴와의 만남을 떠올리고 있었다.
누나와 처음 만났을 때 수줍어서 어쩔 줄 모르며 이상한 말투를 쓰던, 그 녀석.
두툼한 몸을 칭찬하듯 어루만졌더니 찌그러지는 모습도 귀여웠지.
동생아, 동생아.
에스칼리아는 먼 곳에서도 동생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많은 마물이 프레미아의 영향을 받아서 태어나지만,
오로지 그중에서도 촉괴한테만 짙은 연결감을 느꼈다.
왜 그런지는 모른다.
그 특별함은, 금세 애착이 되었다.
에스칼리아는 촉괴를 애틋하게 여겼다.
'귀여운 내 동생아.'
네가 죽었을 때 누나가 얼마나 슬퍼했는지 아니?
인간들을 모조리 죽여도 속이 시원치 않았는데…….
계속된 고통 때문에 이상해져 버린 것일까.
에스칼리아는 최근,
멀리서나마 동생이 살아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후후후, 마왕이라고 불린 이 몸도 미칠 때는 미치는 법인가.'
8년 전에 죽은, 귀여운 동생이 살아 돌아왔다고 생각하다니.
에스칼리아는 자신의 나약함을 저주하면서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실낱같은 가능성에 기대어 몸부림쳤다.
이미 처절하게 패배하고,
수치스럽게 살아만 있는 몸이라도.
동생을 도울 수 있다면,
멸망을 울부짖으리라.
나, 에스칼리아가 언제든 세상에 나갈 수 있노라고.
'마왕군 같은 걸 만들고, 세상을 호령할 게 아니라….'
에스칼리아는 짙은 후회를, 숨과 함께 뱉어냈다.
'……너와 함께, 있을 걸 그랬구나.'
*
왕국은 용사 선발전이라는 중대한 행사를 앞두고
여자를 노예로 만들어 괴물을 양산한다는 천박한 괴물….
<촉괴>의 등장으로 떠들썩했다.
"조나스가… 죽었어…?"
클레어는 돌아오자마자 연속으로 비보를 들어야 했다.
백화 기사단은 궤멸 직전이었다.
사망 34, 중상 14, 임신 11.
여단원들은 비교적 사지 멀쩡하게 살아서 돌아오긴 했지만,
이미 영혼을 빼앗긴 듯 넋이 나가 계속 흐느끼기만 할 뿐이었다.
백화 기사단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단장님…."
"죄송합니다. 단장님."
"……시르와 리르는?"
클레어는 늘 기사단 분위기를 밝게 해주던,
핑크 머리 쌍둥이 자매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게…."
"설마……."
"…기사를 그만둔다고 합니다."
릴시르 자매는 클레어도 예뻐하던 귀여운 후임들이었다.
늘 클레어 같은 기사가 될 거라고 말하는 게, 부담되긴 했어도…
기쁜 마음이 하나도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모두 클레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왕국 최강이라 불리던 백화 기사단이 다른 곳도 아니고 수도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촉괴>의 존재도 덩달아 유명해졌다.
"그 소문 들었어?"
"기사단이 거의 전멸하고도 그놈을 사로잡지 못했다더군."
"큰일 난 거 아니야?"
"진짜 좆된 거지."
"듣자니 그놈은, 이상한 페로몬을 뿜어서 여자는 당해낼 수 없다던데."
'…내 실책이다.'
클레어의 책상에는 글로바가 부하를 시켜 대필로 쓴 임무 보고서가 올라와 있었다.
<촉괴>는 아직 살아있다.
'내가 자리를 비우지 않았더라면.'
하지만 속으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신도 있다.
'내가 맡은 임무는 마왕을 쓰러뜨리는 일이었어. 그러나….'
수도에서는 마왕도 아닌 괴물이 날뛰어, 기사단이 전멸했다.
곁에 있던 소중한 사람들까지도 죽었다.
'내가 하려던 건 이런 게 아니었어….'
마왕을 쓰러뜨리러 가는 일이면,
다른 사람은 다 죽어도 좋다는 거야?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어. 하지만…….
이 도시를 떠날 때는,
우선순위를 그렇게 생각해 놓고 떠난 것도 사실이었다.
왜?
마왕을 죽이면 평화가 찾아와서?
넓은 관점에서 보면 마왕 토벌은 평화로 이어진다.
하지만 마왕은 쉽게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야말로 손에 꼽히는 빛나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 끊임없이 노력해서 갈고닦은 기량과,
하늘이 내린 최강의 스킬, 최강의 무구….
무수한 기연을 싹쓸이하고 최고의 동료들과 함께해도….
어떨 때는 눈앞의 희생을 감내하고서라도 마왕을 찌르는 일에만 모든 걸 바쳐야만 간신히 다다를 수 있다.
그걸 해내야만 하는 자가 용사다.
룬 왕국의 기사는….
기사 작위를 받을 때 맹세한 것처럼,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
눈앞의 사람들이 다치지 않게.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위험해지지 않게.
'그것이 나의 책무였어.'
용사님은 알고 있었던 거야.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부단장은 지금 어디에 있죠?"
"집에서 휴식 중입니다."
클레어는 즉시 글로바를 찾아갔다.
"촉괴는 살아있습니다. 단장님."
"글로바 아저씨, 뭘 봤어요?"
"그날 숲에서 본 사악한 전조를 봤습니다. 그것은…… 제가 느끼기로는 마왕만큼이나 위험한 존재입니다."
글로바는 클레어에게 빠짐없이 그날 있었던 일을 말했다.
지금 나타난 마물은 <촉괴 타입>이 아닌,
8년 전 마물의 숲을 점거했던 <촉괴> 이며…….
쓰러뜨리기 직전에 검은 물질이 나와 자신을 방해했던 일,
그것이 단원의 뇌를 조종하여 「살고 싶다」라는 의사를 표현했던 일.
클레어는 하나하나 곱씹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왔으니 안심해요. 괴물은 반드시 찾아서 처리할게요."
글로바는 클레어의 손을 꽉 잡았다.
"글로바 아저씨?"
"위험…해요…. 그 녀석은… 여자를……."
"여자라서 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클레어…."
"쉬어요. 아저씨. 아저씨가 일어날 때쯤에 모두 끝날 테니까."
같은 시각.
수도에 돌아온 리아나도 보고서를 받고 재밌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웃을 상황이 아닌데 웃는 것만큼 기묘한 것도 없어서, 다들 리아나 단장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이었다.
"재미있네요. 유인하는 걸까? 한번 와보라고……. 그 많은 인원을 어떻게 통제했을까?"
세뇌? 세뇌했다면 어떤 방법으로 세뇌했을까?
티아도 같은 원리로 배신했을까?
그렇다면 각자 생각하며 움직이는 걸까? 하나의 의지가 그녀들을 조종하고 있는 걸까?
리아나는 떠오르는 모든 경우의 수들이 뇌를 헤집어 놓도록 내버려 두고, 상쾌하게 웃었다.
광소였다.
"아아, 알고 싶어라!"
마지막 결론은 늘 같다.
"탐구해보고 싶네요. 파헤치고 싶네요. 맛을 보고 싶네요. 탐스러운 지혜의 열매가 절 기다리고 있어요."
"다, 단장님?"
"성율 기사단은 제기능을 못 하게 되었으니, 정보부를 소집해 주세요~."
"옛!!"
'촉괴……! 이번에는 절 재밌게 해주면 좋겠어요.'
리아나는 왕국에 누구보다 많이 공헌한 충성스러운 여기사였지만,
또 다른 일면은 탐구심의 괴물.
인명 피해 같은 것도 어찌 보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본인이 어떤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지가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녀의 후각이 예고하고 있었다.
왕국에 아주 재밌는 일이 일어날 거라고.
각 기사단장들이 상황 파악을 마치고 얼마 후,
아이라 왕녀는 그녀들을 호출했다.
"백화 기사단 단장, 클레어입니다. 왕녀님을 뵙습니다."
"성율 기사단 단장, 리아나입니다~. 왕녀님을 뵙습니다."
출석한 원로원들이 그녀들을 바로 질책했다.
"국제 망신이오!"
"임무도 실패하고, 기사단은 괴멸하고!"
"건국 이래 제일의 수치입니다."
"이렇게 창피할 수가!"
아이라 왕녀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용사 선발전이라는 중요한 행사를 위해,
각국의 중요 인사들이 모인 이 시점에…….
수도 한복판에 '쾅' 하고 구멍이 뚫리질 않나.
기사단이 괴멸하질 않나.
그냥 스캔들 취급하고 넘기기에는, 판이 너무 어지러워진 상황이었다.
"…거두절미하고 묻겠습니다. 기사단장들."
"예!"
"네~."
"촉괴가 8년 전의 그 촉괴라는 보고를 받았는데, 이것은 사실인가?"
"예. 부단장이 직접 확인했습니다."
"왕녀님! 그 이전에 직무를 유기한 기사단장에게 벌을 주셔야 합니다."
직무 유기라니…
터무니없는 트집이었지만,
원로원은 이미 대단히 뿔이 나 있는 상황이라서 아이라도 달래기 곤란한 듯했다.
"백화라는 것도 별 볼 일 없군!"
"정말 한심해. 한심하다고."
"그만."
아이라는 합법적으로 폭언을 쏟아붓는 분위기에 쐐기를 박았다.
"지난 일을 따지기보다 앞으로가 중요해요. 촉괴가 살아있다면, 또 흉한 일이 벌어지기 전에 반드시 처리해야만 합니다."
"왕녀님 말씀이 옳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약해진 기사단으로 가능하겠습니까?"
"거기다 촉괴라는 것은, 소문에 따르면 여자한테 매우 강하다고……."
"큰일이오. 왕국의 기사단장은 전부 젊은 처녀이니…."
참지 못한 클레어가 눈을 부릅떴다.
"반드시 처리하겠습니다! 백화 기사단의 명예를 걸고!"
다들 입을 다물었다.
클레어가 이토록 강한 태도로 나온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마치 은퇴했던 시로코가 돌아온 것 같은 위풍당당함.
실력은 이미 몇 번이고 증명해 온 클레어였기에, 잡음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아이라는 조용히 말했다.
"클레어, 리아나. 가능하겠습니까?"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끝까지 성질이 난 원로가 소리쳤다.
"알아보겠다고? 젊은 단장만 한 패기가 없군! 리아나 단장, 그런 식으로 해서 실패를 만회할 수 있겠소?"
"알아보는 게 제 일이랍니다. 촉괴가 여기 숨어 있다면, 정보부가 여러분을 조사할 수도 있겠네요."
"…윽…."
"우, 우릴 협박할 셈인가?"
"왕녀님 앞에서… 무례하다…!"
리아나는 주눅 들지 않고 조곤조곤 말을 이어 나갔다.
"아아. 하지만 정보에 따르면, 촉괴는 남자를 무척 싫어하는 모양이에요. 그런 게 도시에 숨어있다면… 누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겠네요."
원로들은 갑자기 깨달은 듯 조용해졌다.
누구도 리아나를 주눅 들게 할 수 없다.
그녀의 사고는 이미 범인이 간섭할 수 없는 영역에 들어가 있다.
"한 가지, 간청드릴 것이 있습니다. 왕녀님."
"무엇이지?"
"교단 정보부의 행동 제한을 풀어주셨으면 합니다."
"……나더러 비상 선언을 하란 얘깁니까?"
조용히 있던 집정관 델리아가 나섰다.
"왕녀님. 비상 선언을 하실 경우, 용사 선발전에 지장을 초래할 겁니다."
"그러나 지금이 비상사태인 것은 틀림없어요. 준 비상을 선언하겠습니다. 리아나 단장, 기한은 일주일입니다."
"…감사합니다."
"일을 해낸 기사단에게는, 큰 상을 내리겠습니다. 물러나세요."
"예!"
알현을 마친 두 사람은,
복도로 나와서 서로를 보았다.
"경쟁하게 됐네요. 클레어."
"……제 도움이 필요하면 불러주세요. 리아나 단장님."
"어머나. 경쟁할 마음이 없나요?"
"누가 먼저 잡든 상관없습니다. 피해가 더 확대되기 전에 끝내야 해요."
"<촉괴>가 두 번째 마왕일지도 모르니까요?"
"아뇨."
클레어는 단호하게 말했다.
"사람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마물이기 때문입니다."
"본체를 찾아내는 건 어려울지도 몰라요. <촉괴>는 8년 전에도 둥지에 수십 마리가 넘는 수족을 만들어, 자유자재로 부렸다고 하니까."
"글로바 아… 부단장 말로는, 사람 머리 정도 크기에, 불가사리 같은 형태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 몸속에 숨을 수도 있겠네요."
"……."
리아나의 발상은 클레어가 생각지도 못한 곳을 찔렀다.
그만큼 징그러워서 상상만 해도 미간을 찡그리게 되지만….
"…리아나 단장님은 창의적이시네요."
"어떻게 생각해요?"
"죽은 사람 몸에 들어간단 말입니까?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고통때문에 서 있지도 못할 겁니다."
"으흠. 역시 직접 봐야겠어요."
클레어는 리아나의 언동에서 오싹함을 느꼈다.
"'준' 비상입니다. 리아나 단장님. 왕국 신민들 몸에 손을 댈 생각은 아니시죠?"
"설마요. 저는 명령을 잘 따르는 기사랍니다."
"전… 돌아가자마자 수색대를 편성하고, 도시를 순찰할 생각입니다."
"마치 경비대처럼요?"
"……적은 내부에 있으니까요."
리아나는 싱긋 웃었다.
"짚이는 구석이 있으니까. 뭔가 알아내면 말해줄게요."
"…감사합니다."
꾸벅.
클레어는 리아나에게 고개를 숙이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직 어린 클레어에게는 조금 자극적일지도 모르지만요.'
기사단장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어수선한 거리 분위기도 점차 안정되었다.
가십처럼 떠돌던 <촉괴>에 관한 이야기도 시들해질 무렵…….
'지금 만나러 갈게요. 티아.'
리아나가 행동을 개시했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