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녀석들은 대체 뭡니까? 성녀님."
"마왕의 부산물."
"부산물……?"
"마왕이 살아 숨 쉬면서 고이는 사악한 기운이, 물방울처럼 고여서 뚝뚝 떨어지고 있는 거야."
클레어는 성녀의 얘기를 듣고 적잖이 놀랐다.
그런 식으로 자연 발생한 마물의 레벨이 2500?
불공평하다.
마왕은 본래 세상의 부조리란 부조리는 모두 모아둔 것 같은 생물체라고,
사람들은 보고 온 듯이 말하지만……
실제로 보게 되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죽이는 건 정말로 무리인가? 하지만 왕녀님께 받은 임무는…….'
"거의 다 왔어. 봉인을 강화하고 빠져나가면 돼."
"성국은 클레어가 마왕을 죽일 수 있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네요?"
리아나가 대뜸 말했다.
"뭐?"
클레어는 화들짝 놀라 리아나를 뜯어말렸다.
"그만 해요. 리아나 단장님."
"우린 마왕을 죽이러 왔다고 하는데, 들은 체도 안 하시잖아요?"
클레어도 알고 있었다.
왕국 기사단은 마왕을 죽이러 왔는데,
정작 용사 파티의 성녀는 중요한 부분에서 믿음을 주지 않는 태도를 일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적어도 나는 무리라고 생각해."
에실라도 숨길 생각도 없는 듯이 말했다.
사이에 낀 에파나는 안절부절못했다.
리아나는 생글생글 웃고 있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매우 날카로웠다.
"그런 성국이 왜 갑자기 왕국과 협력해서 봉인을 건드릴 마음이 생겼을까요?"
"너희한테는 알려줘도 상관없으려나."
성녀는 새까만 앞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봉인이 약해졌어. 최근에 갑자기."
"봉인이……?"
마왕이 살아있는 것도 모자라, 봉인까지 약해졌다?
가슴 한쪽이 서늘해지는 말이었다.
"에스칼리아는 꽤 많은 힘을 비축해 놓았다고 생각해. 자력으로 봉인을 깨려고 시도한 거겠지."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한 걸까요?"
"모르겠어. 우리는 다시 뚜껑을 닫으러 왔을 뿐이야. 대륙 북부를 갈기갈기 찢어 놓은 악마가, 다시 풀려나지 않도록."
"……저어."
클레어가 조심스레 손을 들고 말했다.
"저희는 백 년은 갈 봉인이라고 들었습니다."
"…계산은 틀리지 않았어."
백 년.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랜 시간.
상처 입은 마왕을 봉인하고 죽일 방법을 찾을 때까지 살해를 보류한다.
최고위 빛 속성 봉인 마법 <빛의 봉인살>은 그런 의도로 만들어진 마법이다.
얘기를 들어 보면 마치 금방이라도 봉인을 깨고 나올 것 같은데…….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날 리도 없고, 조짐이 보여서도 안 됐다.
"애초에 우리는 여길 다시 열 생각이 없었어……."
그런데 마왕이 스스로 봉인을 흔들었다.
이 사건은 성국을 뒤집어 놓았고,
왕국에 급하게 협조 요청까지 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누가 일부러 마왕을 건드리려고 하겠어?"
"이 현상이 새로 나타난 마왕과 관련이 있다면 재미있겠네요."
생각지도 못한 관점.
여기서 '두 번째 마왕'을 언급한 리아나를 보고,
에실라는 놀란 눈으로 띄엄띄엄 말했다.
"어……. 뭐…. 그렇…지? 마왕끼리 서로 통하는 구석이 있다면 말이야. 그런 전례는 없었지만…."
"모든 일은 처음 일어날 때는 전례가 없는 법이랍니다~."
"두 번째 마왕 문제도 있었지…. 너희, 수도를 비워두고 나와도 괜찮아?"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맡기고 왔습니다."
"마왕과 싸울 때는, 믿을 수 있는 사람부터 죽어."
에실라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예언의 성녀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어머니…."
"우리는 봉인을 강화하고 나갈 거야. 내 딸에게 봉인살 쓰는 것도 보여주고."
쓰다듬, 쓰다듬.
에파나는 머리 위를 쓰다듬는 어머니의 손이 기분 좋은 듯 배시시 웃었다.
"딸은 내 손자에게 가르쳐주겠지. 그렇게 봉인을 이어 나갈 거야. 겁쟁이 같아?"
"아뇨."
클레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역시 마왕이 두렵습니다. 할 수 있는 게 봉인뿐이었다면, 저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너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거야?"
"백화를 시험해 볼 가치는 있지 않겠습니까?"
"……거의 다 왔어."
미궁이 갑자기 확 넓어졌다.
모든 것이 어두워진다.
조금만 방심해도 암흑천지로 떨어질 것 같은 아찔한 부유감 속에,
핏발 선 붉은 눈동자가 모두를 집어삼키는 붉은 태양처럼 떠올랐다.
번뜩.
"안녕, 에스칼리아."
기기기기긱.
기괴한 소리와 함께,
한순간 모든 공간이 밝아지며, 빛으로 된 칼이 몸부림치는 거대한 몸체에 박힌다.
무수히, 끊임없이, 계속해서.
이렇게 환한데도 마왕의 본체는 새까만 심연에 잠긴 것처럼 제대로 식별할 수 없었다.
'봉인이라고만 들었지만, 이것은….'
클레어는 이 시스템이 원시적인 고문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몸부림칠수록 무한히 생성되는 빛의 검이 마왕의 몸을 파고드는 구조.
단순하지만 효과적.
생을 갈구할수록 생을 끊으려 하는 무자비한 칼날을 마주하게 된다.
에스칼리아의 붉은 눈은 그 칼날 속에서도 흉흉한 증오를 잃지 않았다.
클레어는 자신이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다.
온몸에 식은땀이 흐른다.
[멸망의 늑대 에스칼리아 Lv.9999]
'이런 것과 싸워 이겼다고……?'
클레어는 용사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사람 중 한 명이었지만,
정작 용사가 짊어진 무게를 전혀 알지 못했다.
마왕은….
스무 살밖에 안 된 은발의 소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두려운 존재였다.
저 증오에 찬 붉은 눈을 똑바로 보고도 서 있을 자신이 없다.
그때.
모르는 손이 클레어의 엉덩이를 슬쩍 더듬었다.
"햑!"
"긴장했어요? 클레어."
"아…. 리아나 단장님…!"
리아나는 빙긋 웃었다.
"클레어의 뒤는 내가 봐줄 테니까. 마왕을 죽여봐요."
"…감사합니다."
동료의 가벼운 장난이 뻣뻣해졌던 그녀의 몸을 풀어주었다.
……백화라면 죽일 수 있다.
클레어도 보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백화가 생명력을 태우는 용왕의 불과 같은 특성을 지녔다고 해도…….
그 힘은 <원본>에 전혀 미치지 못한다.
에실라 말이 옳다.
창세신 니뮤엘의 불꽃을 누가 감히 흉내 낸단 말인가?
클레어는 왜 자신에게 이런 힘이 주어졌을까,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알아낼 수 없었지만….
혹시 그게 마왕을 죽이기 위해서라면,
이 힘을 올바른 곳에 써야 하는 게 아닐까?
클레어는 어느샌가 그것이 자신의 책무라고 믿게 되었다.
"갑니다."
모두 클레어를 돌아봤다.
은발청안의 여기사는 상아처럼 곱고 아름다운 백룡검을 꺼내 들어,
혼신의 힘을 실은 일검(一劍)을 준비했다.
'마왕을 내 손으로 죽일 수 있다.'
에스칼리아의 붉은 눈에 핏발이 선다.
저항할 수 없는 상대에게 전력의 백화를 꽂아 넣을 뿐.
에실라는 손을 뻗어, 할 수 있는 모든 버프를 클레어에게 걸어 주었다.
리아나도 마찬가지.
백화에 창백한 별빛이 휘감긴다.
"하아아앗!"
클레어는 검을 휘둘렀다.
*
성녀 일행과 룬 왕국으로 가는 길.
클레어는 쭉 입을 다물고 있었다.
"클레어~ 풀 죽지 말아요."
"……."
"기사단장님은 최선을 다하셨…어요…."
결과는 분하게도 실패였다.
에스칼리아는 죽지 않았다.
하지만 죽을 만큼 괴로운 비명을 지르며, 몸에 붙은 하얀 불을 끄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은 있었다.
그러면 빛의 봉인살이 에스칼리아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고……
그런 사이클이 무한히 반복되었다.
하지만 클레어의 마음은 무거웠다.
마왕을 고문하러 간 게 아니라, 죽이러 간 거였는데.
왜 이렇게 실망스럽고 화가 날까.
왕녀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결국 죽이지 못했습니다. 라는 말을 전하러 가는 것은 어려운 일처럼 생각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말로 용서할 수 없는 건…….
"모든 게 잘 맞춰진 퍼즐 같았지?"
"……."
에실라 성녀의 말이 클레어의 가슴을 후벼팠다.
"네 불만한 공격 스킬이 왕국에 없으니까. 마왕을 죽이는 마지막 퍼즐 조각처럼 보여도 이상할 게 없지."
"…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세상을 구하러 간다는 막연한 믿음이 오만 그 자체였다.
왕국에서 손꼽히는 강자라고 해도 세계를 통틀어 보면 더 강한 자들은 있을 것이고,
그 정점에 서는 게 용사다.
용사도 어쩌지 못했던 마왕을,
스킬 상성만으로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에실라 입장에서는…….
마왕과 싸워본 적도 없는 애송이가 객기를 부린다고 생각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렇게 비관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레벨 높은 마왕님. 제 법궁은 눈알에 박아도 가만히 있으시던걸요?"
"큭큭, 그래, 그런 의미에서는 아주 유쾌했어. 네 백화, 아프긴 엄청나게 아픈 것 같더라고."
"……."
"마왕이 남은 생명을 다 불태울 때까지 고통받을 거라고 생각하면…… 유쾌해."
"저는… 책무를 다하지 못했습니다."
"책무?"
에실라는 눈을 깜빡거렸다.
"…백화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스러운 하얀 불이니까…. 용왕님의 불이니까."
"그런 건 상관없어."
덜그럭덜그럭.
네 사람을 태운 마차 바퀴가 흔들린다.
에실라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마왕을 죽이는 건 용사의 일이야. 기사의 책무란 그동안 사람들을 지키는 것이지."
"그것이 마왕을 죽이는 일과 연결되지 않습니까?"
"아니, 지키는 것과 죽이러 가는 건 달라. 에단에게 네 얘기를 들었지, 정말로 네 고향은 마왕 때문에 없어졌어?"
클레어는 말문이 막혔다.
마왕이 원인을 제공하긴 했지만, 클레어의 마을을 없앤 것은….
[끔찍한 루테르가]라고 불리는, 전 마왕군의 군단장이었다.
용사는 마왕을 쓰러뜨렸지만,
이어진 2차 피해까지는 막을 수 없었고…….
근처에 있던 마을은 마왕군의 보복성 공격에 속절없이 멸망했다.
생존자는 없었다.
단 한 곳.
하얀 불로 루테르가를 죽인 소녀가 나타난 노라 마을을 제외하고는.
"넌 확실히 강하지만, 에단은 널 데려가지 않았어. 지금이라면 알 텐데. 그 이유를."
"……용사님이 절 데려가지 않은 이유… 말인가요…?"
"모르겠어?"
클레어는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는 용사가 자신을 데려가지 않은 이유를,
열두 살에 불과한 소녀를 파티에 넣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로 그랬을까?
용사는 고향이 사라진 소녀의 분노와 증오를 몰랐을까?
돌아갈 곳이 사라진 인간의 아픔을…….
소녀의 눈빛이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었는데도.
「백화 기사단장. 너는 아직 자기가 어깨에 뭘 짊어지고 있는지 몰라.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어깨에 짊어진 것?
「먼저 자신의 책무를 다해라」
책무….
"마왕을 죽이는 게 너의 책무야?"
마차가 멈추어 선다.
클레어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아는 눈빛이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리아나는 바람처럼 떠난 동료를 보며 곤란한 듯 웃었다.
"저희는 왕녀님이 하라고 하면 하는 수밖에 없는데요. 그게 책무 아닌가요?"
"너처럼 낭만 없는 녀석이 지금 대화에서 뭘 느끼기나 했겠어?"
"음~. 낭만~?"
성율을 따르는 여자의 눈은 생기 넘치게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으면서도,
어떨 때는 매우 공허하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입으론 웃고 있지만 늘 눈으로는 세상의 차가운 면을 보고 있다.
"제 경험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에요. 이상은 고결할수록 더럽혀지기 쉽다는 거예요. 성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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