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264)

* * *

"시르, 가! 놓치면 안 돼!"

글로바가 밀어준 덕분에 봉변을 피한 시르는, 그의 상태를 보고 숨을 삼켰다.

"부…. 부단장님… 팔이…!!"

시르 대신 푸른 별빛을 뒤집어쓴 글로바는 이미 전투가 가능한 상태가 아니었다.

팔꿈치 밑으로는 없다. 그나마 남은 팔도 쥐어짠 걸레처럼 뒤틀려 있었다.

빛에 노출된 허벅지, 얼굴, 어깨… 몸의 절반은 방어구의 보호력을 넘어선 파괴의 빛에 문드러졌다.

심한 화상을 입은 것과 같이.

"크윽…."

글로바가 무릎을 꿇는다.

시르는 황급히 다가와 글로바의 어깨를 지혈하며 손을 벌벌 떨었다.

그녀의 예쁜 눈에서 눈물방울이 계속 넘쳐흘렀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부단장님… 나 때문에!"

"…네 탓이 아냐."

"레벨 가지고… 놀려서… 죄송해요…… 으에엥…."

"……."

"아무것도 모르는… 신병 주제에…. 흐으윽……."

글로바는 설마 이런 상황에 자신이 웃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만큼 자신의 아픔에 공감해 주고 울어주는 예쁜 소녀가 기특해서였겠지.

"백화 기사단! 시르를 따라 임무를 완수해라. 작은놈이 본체다!"

"옛!"

"시르, 갑시다."

"하지만 선배님… 부단장님을 두고 갈 순…."

"글로바 부단장님이 방금 말하지 않았습니까? 시르를 따르라고. 망설이면 우리 기사단 전체가 발을 묶이는 겁니다."

"……."

시르는 푸른 별빛이 쏘아진 검은 통로를 빤히 쳐다봤다.

성율 기사단 전 부단장, 보니 페유리가 나섰다.

"저쪽은 저희가 가보겠습니다. 짚이는 구석이 있어서."

"…부단장님의 치료도 좀 부탁드립니다."

"…지혈 정도라면."

치유는 빛 마법만 가능하다.

별의 신도들은 그런 힘을 행사할 수 없으며, 그것은 전 부단장이었던 보니 페유리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빛 마법을 쓸 수 있는 일레시아의 신도라고 해도…

지금 글로바를 일으켜 세우려면 성녀라도 데려오지 않는 한 무리라는 사실을,

보니는 알고 있었다.

'글로바님은 이제 안 돼. 이 상황은 우리가 해결해야 한다.'

시르와 백화 기사단이 촉괴를 쫓는다.

보니와 성율 기사단은 반대 방향, 푸른 별빛이 쏘아진 곳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별의 신도 중 한 명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저…. 방금 그 공격은……."

차마 이어지지 못한 말을,

여기 있는 모두가 짐작하고 있었다.

방금 하수도관을 뒤흔들었던 충만한 빛을 쏜 게 누구인지를.

그 정도의 별빛을 다룰 수 있는 신도는 왕국 전체를 통틀어도 손에 꼽는다.

기사단장 리아나.

그리고……

티아.

"티아 부단장은 예전에 촉괴 타입의 마물에게 사로잡힌 적이 있습니다."

보니는 두서없이 얘기를 시작했다.

"마물과 정음한 여자가, 그 마물을 해치려 했더니 오히려 덤벼 들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 있을 겁니다."

"설마, 티아 부단장은… 그 촉괴와…?"

"이미 오래전에 망가져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보니 페유리는 이 사태를 초래한 책임을 벗어날 수 없다.

티아가 샤워 중일 때, 식사 중일 때, 잠들어 있을 때.

몰래 숨어들어 죽일 기회는 몇 번이고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결단력이 부족해서? 아니….

단장이 읽어낸 징후를,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율 기사단이 아직 하수도에 진입하기 전…….

조나스와 리르가 있는 B조에서 제일 먼저 전투가 일어났고,

리르가 처음 껍데기를 부수고 나오면서 일어난 진동과 큰 소음이 모두에게 전해졌다.

이때 글로바는 A조를 둘로 나누어 시르를 지원군으로 보내는 한편,

촉괴의 본체를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고…

지상에서 대기 중이던 티아도 지시를 내렸다.

"보니 씨는 단원들을 이끌고 B조를 지원하러 가세요."

"부단장은?"

"저는 다른 루트로 가겠습니다."

"……다른 루트라니?"

가장 강한 부단장이 따로 움직이는 건 전술상 이상할 게 없는 일이지만,

보니는 아까 그 미소가 마음에 걸렸다.

"적은 하수도 전체에 영향력을 뿌리고 있어요. A조가 진입하자마자 입구를 숨긴 게 바로 그 증거예요."

단원들이 술렁거렸다.

"그럼 저희도 들어가면…."

"밖으로 나올 수 없게 되는 건가요?"

"걱정하지 마세요. 괴물을 처리하기 전까지니까. 이번 공략은 상대가 예상하지 못한 통로를 이용해야만, 허를 찌를 수 있어요."

"그렇다면 나도 같이 갈게."

티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니는 단원들과 함께 움직여 주세요.

더러운 하수도에 들어가면 수호의 성법을 쓸 수 없을 테니까, 법검을 잘 쓰는 인원이 있어야 해요."

보니는 티아가 막힘 없이 말하니 더는 물고 늘어질 거리가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역시 기분 탓이었나…?'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이다.

사람이 좀 이상하게 웃었다고 죽일 것처럼 의심하다니.

리아나 단장의 나쁜 성격이 옮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떤 것은, 아무리 사소해도 떨쳐낼 수 없는 위화감을 주기도 한다.

보니는 자신과 함께 오랫동안 감시 임무를 수행한 세 명을 따로 불렀다.

"티아를 쫓아. 수상한 행동을 보이면 즉시 조치해."

"네."

…보니는 얼른 이 더러운 의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좋은 기회다.

징계받을 각오로 시원하게 저지르자.

그 결과,

티아가 불처럼 화내면서 자신을 때려주면 오히려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믿을 수 있게 해줘. 부단장.'

이 더러운 의심을 확인하고, 머리 숙여 사과하자.

결단을 내린 보니는 나머지 인원을 이끌고 하수도로 갔다.

시르와 만나서 적이 촉괴 타입이라는 걸 확인하자,

원인 모를 불안감은 점점 커졌다.

그 불안감의 정체를 이제 확인할 때다.

어둠 속에서 티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힉…."

보니를 따르던 신도들이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티아의 주변에는,

이미 죽임을 당한 시체가 셋…….

보니가 붙인 미행 조였다.

티아는 볼에 튄 핏방울을 쓱 닦으며 보니를 돌아봤다.

그녀는 세상 환하게 웃고 있었다.

"들켰잖아요. 보니. 단장님의 명령인가요?"

"……그래."

"냉철한 보니 씨가 그런 표정을 짓다니… 충격이었나 봐요."

"사실이 아니길 바랐어. 진심으로… 난 널 좋아했으니까."

"저도 좋아해요."

"닥쳐."

보니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동료를 죽인 입으로… 떠들지 마."

"동료는 동료를 의심하지 않는답니다."

"큭…!"

수년 간직한 중대한 비밀이 폭로된 순간.

티아는 맨홀 입구에서 쏟아지는 빛을 올려보며 깃털이 된 듯한 홀가분함을 만끽했다.

자신을 친구로, 동료로 대해준 보니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을… 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젠 속이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에요."

"왜…. 왜 그랬어?"

"서방님을 구하려고 하는데 방해하니까. 죽였어요."

"……."

"……."

보니는 탄식했다.

이 여자는 이미 미쳤다…….

거대한 벽이, 그녀들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듯했다.

"하마터면 조준이 빗나가서 큰일 날 뻔했잖아요."

"역시 네가 쏜 거였어? 글로바 부단장을 노리고…."

"들켰네요. 그것도."

티아는 아래를 내려보며 후, 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죽일 생각으로 쐈어요."

"이젠 거짓말할 생각도 없는 거야?"

"서방님을 만났으니까. 다시 서방님 곁으로 돌아갈 거예요. 지금까지 고마웠어요."

"……성율 기사단! 포위하라!"

성율 기사단이 누구 명령을 따를지는, 이제 명백했다.

12명의 여기사가 티아를 둘러싸고 법검을 뽑았다.

우웅, 하고 푸른 별빛이 검의 형상을 이루고 창백한 빛을 뿜어냈다.

"미안하지만,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을 거야."

"죄송합니다. 티아 부단장."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세요…. 제발…!"

"우린 인간이에요. 괴물과 이어질 수 없어요!"

기사단이 마음 먹으면 1초 후 법검으로 난도질 되어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갈기갈기 찢어질지도 모를 상황에서.

티아는 미소 지었다.

보니가 본 그 미소였다.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하는군요. 불쌍하게도…… 진정한 행복을 깨우친 적이 없었던 거예요."

"…티아."

"전 사랑의 전도사예요. 여러분이 진정한 사랑을 배울 수 있도록 도와줄게요."

"저항하지 마."

죽일 수밖에 없어지니까.

보니는 법검을 뽑고 티아 앞에 섰다.

"우리들 레벨은 네가 잘 알고 있겠지. 여기 모인 인원, 한 명 한 명이 전부 400 이상이야."

"보니 씨는 700이었나요?"

"800이야."

"……."

"네 레벨이 900을 넘는다는 건 알지만, 그 정도 법궁을 쓰고 세 사람을 동시에 상대했으니… 상당히 지쳤겠지."

아무리 티아가 괴물의 신부가 될 수 있다고 진지하게 믿는 여자라고 해도.

수년간 한솥밥을 먹은 동료에게 칼을 겨누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보니의 마음은 찢어질 것만 같았다.

"제발 저항하지 마. 널 죽이고 싶지 않아."

슥.

티아는 옷에 손을 넣었다.

"동작 그만! 움직이지 마."

"요즘은 참 레벨 보는 게 쉬워졌네요. 그래서일까요."

손목과 발목, 허리 부근에 스티커처럼 붙어 있던 검은 테이프를 쭉쭉 벗겨 나가는 티아.

"이런 편리한 도구도 이제 잡화점에 가면 그냥 살 수 있어요. 단돈 6 실버에."

"……?"

단원 중 몇 명이 심각하게 동요했다.

보니는 그저 의아할 뿐이었다.

"…무슨 일이지?"

"저건 레벨을 숨기는 장비예요. 보니 부단장님."

"뭐?"

레벨 측정기는 비교적 빠르게 상용화되었다.

하지만 레벨을 쉽게 알아낼 수 있다면,

쉽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사람도 생기는 법.

레벨이 민감한 프라이버시가 된 이후로는 시장에서 자주 볼 수 있게 된 상품이다.

하지만 그것이 왜 지금 튀어나왔는지 이해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스펙이 곧 영향력인 기사단에서…

레벨을 숨기고 살았다?

그러면서도 전 부단장인 보니 페유리의 레벨을 추월했다?

레벨 은폐용 장비는 팔찌 타입을 한 개만 끼워도 민간인─20레벨 미만─ 수준으로 보인다.

그런 것을 사지에 전부 끼우고 있었다면.

보니는 서둘러 티아의 레벨을 다시 측정했다.

[티아 Lv.1849]

"보니 부단장이라니, 부단장은 전데…… 벌써 해고 당한 건가요?"

"……."

왜…

마음먹으면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상대의 성장이, 왜 예상 범주 내라고 생각했을까?

이 여자가 진작 미쳐 있었다고 한다면…….

모든 것이 비정상이었을 텐데.

보니는 법검을 꽉 쥐고 소리쳤다.

"겁먹지 마! 레벨 차이는 상관없어. 우리 숫자가 훨씬 더 많으니, 한 번에 몰아붙여 제압한다!"

"역시 대단해요. 보니."

티아는 가소로운 듯,

겁에 질린 단원들을 바라보며 웃었다.

"늘 냉철하고… 무심한 듯하면서도 주변 사람을 잘 챙기고……."

"이제 와서, 정에 호소해도…!"

"젖가슴도 크고… 얼굴도 예뻐. 촉괴 씨가 무척 좋아할 거예요."

"윽…. 미친…!"

티아의 손에 법검이 잡힌다.

그 빛은 여기 있는 모두의 빛을 모아도 다다를 수 없을 만큼 찬란했다.

이어서 그녀의 뒤로 게이트가 열리고, 두꺼운 무지성 촉수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죽이진 않을게요. 여러분도 그분의 사랑을 알아야 하니까."

'악신…!!'

보니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단장님이 옳았다. 이 여자는 사악한 악신을 섬기는 무녀…!'

목숨 걸고 막아야 한다.

이 여자가…… 촉괴와 만나는 걸 허락해서는 안 돼!

"공격!"

12명의 기사들이 등 떠밀리듯 차례로 티아에게 덤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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