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언, 니…."
로타나 마을에 촉수 강습이 있었던 그날.
새벽에 소낙비가 심하게 내렸고 아네스는 추위에 몸을 떨다가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귓가에는 언니 프라가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비에 흠뻑 젖은 소녀는 자기 몸을 덮은 촉수 개를 옆으로 힘겹게 밀어냈다.
철퍽.
물웅덩이에, 죽은 개가 늘어진다.
생명을 죽인 감촉을 되새기듯 아네스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작은 손에 쥐어진 작은 칼.
어른 중 누구도 보호받아야 할 그녀에게 그런 흉기를 쥐여준 적은 없었다.
칼을 쥔 건 오로지 아네스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소녀는 자신을 위협하던 괴물이 죽었음에도 한참 동안 눈을 부릅뜬 채 움직이지 못했다.
"언니, 아빠."
소녀의 내면은 유리처럼 덧없이 깨졌다가 다시 붙기를 반복했다.
눈앞에 있는 것은 소중한 가족을 해치고 위협한 '무언가'
그 '무언가'의 정체는 아직 열두 살의 소녀가 깨닫고, 접하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한 존재로.
그저 이런 게 있다는 사실을 알기만 했을 뿐인데도 충격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이 언니를 죽였다.
이러한 것이 우리 가족을 죽였다.
푸욱.
아네스는 야수 같은 눈빛으로 촉수 개의 목을 수 차례 내리찍었다.
푹, 푹, 푹, 푹!
"아악, 아아아악!!"
쌓인 증오를 쏟아내도 비워지지 않는다.
소녀는 문득 깨달았다.
'이미 죽은 거야.'
이미 죽은 것에 화풀이해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는다.
고향은 불타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숲을 나간 아네스는 한참을 걸어 경비병 숙소에 도착했다.
"도와주세요! 저희 마을이 괴물에게 습격당했어요."
"괴물? 오크나 고블린 말이냐?"
"아뇨…! 더 무섭고 끔찍한…."
"아저씨들이 모험가 길드에 전해둘게."
"지금 바로 가지 않으면 마을 사람들이 위험해요!! 도와주세요. 네?"
"허허…."
경비병들은 난처한 듯이 눈을 돌릴 뿐이었다.
신발도 잃어버리고 맨발로 퓌르나울까지 걸어온 아네스의 사정은 딱했지만…….
알려지지 않은 마물의 토벌은 모험가의 일이며, 그들에게 의지할 수 없을 때는 마을 구성원들끼리 알아서 한다.
그것이 마을에 자경단이 만들어지는 이유였다.
"모험가 길드에는 우리보다 훨씬 강하고 듬직한 언니 오빠들이 있단다. 그 사람들이 도와줄 거야."
"언제요? 얼마나 기다리면 돼요?"
"그야 뭐… 의뢰를 받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래선 늦어요…."
"진정하렴."
아네스의 조그마한 어깨 위로 털이 덥수룩 덮인 손이 쓱 올라왔다.
"힉…."
"많이 다친 것 같구나. 아저씨가 치료도 해주고, 맛있는 것도 줄게. 이쪽에 오렴."
"시, 싫어요!"
아네스는 자기 몸을 주물럭거리는 아저씨를 앙칼지게 뿌리치고 노려봤다.
"……귀찮은 꼬맹이가. 그럼 얼른 꺼져."
'…닮았어.'
그 개와 닮았어. 아니, 다를 게 없어.
어른들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웃기지 마.
나는 내가 선택할 거야!
"앗, 이 년이…!!"
아네스는 잽싸게 경비병의 돈주머니를 훔쳐 검문소 밖으로 빠져나갔다.
"거기 서!"
"학, 학, 학…!"
추격을 뿌리치며 무작정 달렸다.
깔끔하게 빼입은 사람들이 아네스를 신기한 듯 쳐다봤다.
지금 뛰고 있는 것도 아픈 발도 모두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제기랄! 수법도 가지가지야."
"경비대가 애새끼 하나 못 잡았다고 된통 깨지겠어."
"걸리기만 해라. 개 같은 년."
수일의 시간이 흘렀다.
경비대에서 돈을 훔치고 도망친 일은 큰 사건으로 번지지 않았지만,
보호자 없는 열두 살 소녀가 퓌르나울에서 살아남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숲속에 내던져진 한 마리의 촉수 괴물이 살아남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곳에는 나무 대신 빽빽한 건물이 있었고 사람들의 냉담한 시선이 곧 아네스를 거절하는 울타리였다.
반대로 접근해 오는 이들은 모두 속셈이 있었다.
아네스는 빈민가 아이들과 다르게 피부가 곱고 얼굴도 몹시 예뻤기 때문에
돌봐준다는 명목으로 그녀에게 접근해 몸을 건드리려 하는 남자들도 숱하게 있었다.
무지했던 어린 소녀가
그런 것이 혐오스럽다는 걸 깨닫게 된 건 아마도 그 숲에서.
촉수 개의 눈 속에서도 비슷한 걸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늦은 밤, 모험가 길드.
사람은 없고 접수원이 홀로 남아 오래된 의뢰서를 뜯어내며 새로 갱신하던 중.
아네스가 나타나 불쑥 말했다.
"저기."
"응?"
"그거, 떼지 말아주세요."
접수원은 자신이 뗴려던 의뢰서를 다시 보고, 후드를 깊게 눌러쓴 아네스를 내려보았다.
"…돈은 낼게요."
그 의뢰는 아버지 프린델이 낸 의뢰였다.
게시 기한이 끝나서 뜯으려던 찰나 아네스가 갱신을 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로타나 마을에는 지금 매우 위험한 괴물이 살고 있어요. 그것도 추가해 주세요."
"…모험가 라이센스는 있니?"
"아뇨…."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실을 순 없단다. 미안해."
"…그럼. 남는 돈은 적어도 의뢰 보수금에 추가해 주세요. 미리 지불하는 거예요."
"……무슨 일이 있었니? 얘기해 줄래?"
아네스는 접수원이 다가오려 하자 도망치듯 떠났다.
"앗…."
돈을 벌어야 했다.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그러면 언니를 구해줄 만큼 강한 모험가에게 부탁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퓌르나울에는 어린 아네스를 써줄 곳이 없었고
몇 주간 밤을 새며 돌아다녀도 입에 겨우 풀칠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텅 빈 돈주머니를 꼬깃꼬깃 구겨서 주머니에 넣은 아네스는 골목에 웅크리고 한참을 울었다.
'꼭 구해줄게. 언니, 아빠……. 랭글 아저씨, 모두들….'
흐르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너무나도 어려운 소원이라는 걸, 마음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네스."
누가 소녀를 불렀다.
그럴 리 없을 텐데. 여기에 나를 다정하게 불러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그 따뜻한 목소리는 마치 언니가 부르는 소리 같아서, 큰 눈망울이 물기를 머금고 흔들렸다.
"언…니…?"
"티아 언니야."
티아는 조용히 손을 내밀어, 아네스를 안아주었다.
치유의 빛으로 감싸며.
"모험가 언니! 언니는, 우리 언니는 어떻게 됐어요?"
"살아 있어."
"정말요?"
"응, 거기다 곧 만날 수 있을 거야. 프라가 씨는 지금 이 도시에 오고 있을 테니까."
아네스는 그것이 단순히 위로하려고 건넨 말이 아님을 알았다.
사실이라면 정말 기쁜 일이다.
다신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언니와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정말이에요? 티아 언니!"
"응."
"근데… 언니는 왜 울어요?"
"언니도, 슬픈 일이 있었거든……."
잠시 후.
정말로 아네스의 언니는 퓌르나울에 왔다.
괴물을 죽인, 백화 기사단과 함께.
*
신기하게도, 아프지는 않았다.
그런 걸 느낄 틈도 없이 재로 화했기 때문일까?
돌연 암흑천지가 되고 내 몸을 실감할 수 있는 재료는 무엇 하나 남지 않았다.
이미 죽음을 경험해본 나는 왠지 모를 친숙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 어머니의 품에 돌아가 잠들게 될까.
…아직이야.
벌써 어머니 품에 들어가는 건… 너무 일러.
나는 퓌르나울에서 티아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
「지금부터 얘기하는 걸 잘 들어, 티아」
"네!!"
「나는 곧 죽을 거야. 인간들에게」
내가 꺼낸 말이 너무 뜻밖이었는지, 당황하던 티아의 반응이 눈에 선했다.
"죽으면… 안 돼요. 촉괴 씨가 죽으면, 저는! 우리들은요?"
「너는 다시 사람들 틈에서 살아가면 돼」
"그런 거 이제 무리에요."
티아의 보지가 꼬옥 조여들었다.
"촉괴 씨가 가르쳐 준 것들… 영원히 잊을 수 없으니까. 책임져요."
「당연히 나도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거야」
발버둥 칠 생각이다.
내가 보유한 모든 기물을 사용해서.
「하지만 나는 높은 확률로 토벌되고, 인간들이 승리하겠지」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잖아요. 지금까지 잘 해왔잖아요. 저희랑 촉괴 씨는…."
「운이 따랐을 뿐이야」
나는 결국 누나처럼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왕성을 둘러본 결과, 숲에 틀어박힌 채로는 인간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막아낸다고 하더라도 금세 한계에 부딪치겠지.
이 나라에 얼마나 강한 인재들이 모여 있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내 추측은 확신에 가까운 것이었다.
"왜 그렇게까지 질 거라고 생각해요…?"
「상대는, 인간이니까」
티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렇게 단호한 태도로 말해도 티아는 같이 최선을 다해서 살아보자고 할 게 분명하다.
그녀가 내 죽음을 받아들일 리 없다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말했지만 가만히 당하기만 하겠다는 뜻은 아니야」
"그럼요…?"
「패배할 것을 전제로 하고 살아날 길을 찾는다」
왕성을 둘러보고,
내가 이 결론에 다다른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처럼 운신이 제한되는 상황.
모판들의 안전도 보장하기 어려운 지형에서는, 모든 걸 운에 맡길 수밖에 없다.
「다른 모판들에게도 전하겠지만, 티아. 인간 측의 구조대가 오면 너희는 저항하지 말고 얌전히 구조되도록 해」
"그건……."
「알겠지? 여기서 생활하면 되는 거야. 나쁜 악몽을 꾼 듯, 잠시 나를 잊고」
"……."
티아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잠시나마 날 잊고 살아야 한다는 것만으로, 그런 표정을 짓다니.
내 마음도 아려왔다.
「나는 패배한다. 하지만 모판들은 다치거나 죽어선 안 돼. 그러니……」
티아와 다른 모판에게는,
최대한 인간 측에 협력적인 자세로 있을 것을 강조할 생각이다.
티아는 이미 사람 사는 마을까지 왔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티아의 마음속에 간직한 비밀이 폭로 당하지만 않으면 되니까 비교적 안전하다.
다른 녀석들은….
날 위해서 싸우다 죽으라고 하는 것보다는,
내가 위기에 처하면 그러려니 하고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편이 훨씬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건 따로 연기하라고 지시하지 않아도 괜찮은 부분이다.
구조한 사람들도 의심하지 않겠지.
괴물과 정을 통했다고 사람의 삶까지 등진 여자들이 있을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실제로 모판들에게 날 지키며 싸우라고 할 경우.
프라가 때처럼 자궁 속 촉괴수로 협박을 하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니다.
먼저, 나와 섹스한 여자들은 모판화가 진행되기 때문에 전투 기물로는 부적합하다.
실제로 베스와 티아의 레벨은 상당히 낮아져 있다.
리비아와 에피도 레벨 다운이 일어나고 있으며 지금부터 적대하게 될 토벌대와 싸우기에는 부족하다.
차라리 그녀들은 미래를 위해 인간 사회에 숨어들도록 하는 편이 좋다.
"그러면 촉괴 씨는요?"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고, 안 되면 몸을 나누려고 해」
"몸을 나눠요?"
살점 변형을 얻고 나서,
나는 내 의식을 다른 곳에 옮기는 테스트를 진행했다.
도박수였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흩어진 몸 중 하나에 의식을 옮길 거야」
"……그런 게 가능하다니."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이건 진짜 진짜 비밀이야. 특급 시크릿」
"네."
티아는 고갤 끄덕였다.
"촉괴 씨와, 저. 단둘만의 비밀이에요."
「아니, 다른 모판에게도 알려줄 수 있는데….」
"……."
「……알았어. 알았어. 안 알려줄게.」
티아가 급속도로 삐지는 게 느껴졌기 때문에 황급히 말을 고쳤다.
어쨌든.
의식의 주체를 옮기는 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알 수 없고,
애초에 성공할지도 불분명하다.
의식을 일부분 옮길 수는 있었지만, 전체를 옮기려고 시도해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건 최후의 수단이야.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그래도 죽을 것 같다면 의식을 옮기겠지」
"새로운 몸이 된 촉괴 씨를 저희가 찾으면 되는 거네요?"
티아는 이해력이 좋았다.
「그래. 상황이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내가 먼저 말을 걸 수도 있고.」
"그러면… 저는 모험가 생활을 해서 힘을 기를게요. 촉괴 씨를 보호할 수 있게."
「그렇게 무리 안 해도 되는데, 레벨도 떨어졌잖아.」
티아의 헌신은 나조차도 가끔 놀랄 때가 있다.
레벨 다운된 몸으로 다시 레벨을 올리겠다니.
"저는 원래 늘 누군가에게 보호받는 사람이었어요. 뭘 하고 싶다고 말을 꺼낸 적도 별로 없어요."
날 만나기 전, 티아를 보호해준 사람은….
제이드와 베스일까?
"촉괴 씨를 만나고 저는 변했어요. 절 원하고, 사랑해주는 누군가에게 마음을 쏟는 것이… 제 기쁨이에요."
「날 사랑해?」
"사랑해요."
「어쩌면 네가 느끼는 감정이 조작된 걸 수도 있잖아. 그런 생각 해본 적 없어?」
이런 얘기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티아가 속을 터놓고 얘기하니까, 나까지 휘말린 기분이 들었다.
티아는 살짝 어려운 표정을 지었지만, 곧 그녀답게 방긋 미소를 지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반칙은 아니에요. 촉괴 씨의 능력으로 반하게 한 거니까."
「……」
"당신에게 반한 여자들이 늘어나겠지만, 그중에 제일은 저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상상 중인지 티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너무 예뻐서 정신 못 차리겠다.
"저는 분명히,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그게 예전의 저와 다른 점이에요."
「내가 잠시 이 세상에서 없어져도 너무 슬퍼하지는 마」
"반드시 돌아오기로 약속해 준다면요."
「반드시 돌아올게」
티아는 안심한 듯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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