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264)

"음?"

누군가 복도에서 에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클레어다.

"마왕을 치러 갈 때는 저를 파티 멤버에 넣어주세요."

"너는 누구지?"

다른 초등부 학생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에단은 그걸 한눈에 알아봤다.

클레어는 사선을 넘은 적이 있다고.

"그 은발…. 노라 마을의 생존자인가?"

클레어는 보일 듯 말 듯 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끔찍한 루테르가'를 죽인 게 너였군."

"아버지가 말씀하셨어요. 저는 마물을 죽이기 위해 태어난 거라고."

"누구도 그런 이유로 태어나지는 않아."

"하지만 저한테는 특출난 재능이 있어요. 저를 써주세요."

에단은 뚜벅뚜벅 클레어에게 다가갔다.

시험 받는다고 생각한 클레어는 잔뜩 위축되었다.

'괜찮아. 하던 대로만 하면 인정받을 수 있을 거야.'

역시 깎아달라고 보채서라도 하편을 샀어야 했나?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에단은 클레어의 옷을 살펴보고 짤막하게 말했다.

"안 돼."

"어째서인가요?"

"넌 아직 어려."

"하지만…… 웬만한 어른들보다 강해요!"

"그런 문제가 아니야."

클레어의 머릿속은 온통 의문 부호로 가득 찼다.

용사가 하려는 말을 이해할 수도 없거니와,

그 또한 지금 말해봤자 이해할 리 없다는 듯한 태도.

그러나 에단은 단호하게 말했다.

"백화 기사단장. 너는 아직 자기가 어깨에 뭘 짊어지고 있는지도 몰라.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

"먼저 자신의 책무를 다해라. 그러고 나면, 얼마든지 데려가 주지."

"약속하셨어요."

어떤 말로 거절한다고 해도 그녀가 포기할 리 없다.

세상 모든 마물을 죽인다는 목적 아래에는 기사단장이란 자리도 통과점에 불과하다.

작은 소녀의 몸에는 본인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불꽃이 일렁이고 있음을, 에단도 어렴풋이 알아차리고 있었다.

"클레어!"

에단이 떠난 후 다프네가 일행에서 떨어진 클레어를 찾으러 왔다.

금발 소녀와 적발의 소년도 함께다.

"너 이름이 클레어야? 되게 예쁘게 생겼다."

"고, 고마워."

"나 이런 애 본 적 없는데. 어디 출신이야?"

클레어는 자기 신분을 솔직하게 밝혔다.

"와!"

소년이 눈을 빛냈다.

"우리랑 나이도 같은데 기사단장이야? 쩐다!"

"클레어… 대단해…!"

"흥."

"난 비토라고 해. 비토 애셔."

"클레어야."

모두의 시선이 금발 소녀에게 쏠렸다.

"……베아트리체 디 펠리시아."

팔짱 끼고 싫은 체하고 있었지만,

그녀도 클레어와 친구가 되고 싶은 눈치였다.

다프네는 클레어의 손을 꼭 잡았다.

"왕국의 보물들 구경하러 갈 거래. 우리 같이 돌아보자!"

"난… 데세발의 학생도 아닌데, 괜찮아?"

"우리가 숨겨주면 돼."

"교복 없는 건 어쩌려고?"

"베티가 물 엎질러서 갈아입은 걸로 해두자."

"그런 급조한 변명이 통할 것 같아? 애당초, 상식적인 어른이라면 나 같은 고귀한 레이디가 그런 사고를 저질렀다고 믿을 리가 없잖아."

잠시 후.

"어머, 베아트리체가 물을……. 그래서 옷을 빌려왔다고?"

클레어는 볼을 붉혔다. 거짓말할 생각 하니 벌써 부끄러운 그녀였다.

"네. 옷을 빌려 입었어요."

"베아트리체는 어쩔 수 없지. 가서 놀고 있으렴.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

"네…!"

클레어는 세 사람과 왕성을 구경하며 즐겁게 놀았다.

인원 체크때 한 명 더 늘었다는 게 들통나기 전까지는.

한편, 용사 에단이 퓌르나울에 나타나면서

마왕이 출현했다는 소문이 많은 사람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특히 모험가 길드가 떠들썩했다.

"마왕이 나타났다는데, 진짠가?"

"최근, 실종 사건이 많아진 것 같기도 해."

"몇몇 마을이 공격받기도 했다던데."

"이번 마왕은 대체 얼마나 끔찍한 놈일지……."

분위기는 걱정 반, 기대 반이다.

가끔 용사가 실력 있는 모험가를 픽업해서 데려갈 때가 있긴 하지만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기본적으로 마왕 토벌은 모험가들이 하는 일이 아니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이유는 간단한데 마왕 토벌은 신성한 임무라서, 수행하는 자에겐 그에 걸맞은 자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강함은 가장 중요한 자격 요건 중 하나였지만 무작정 그것만 보고 뽑지는 않는다.

나라마다 평가 기준은 다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혈통, 외모, 인성 다 본다.

모험가는 천한 출신이어도 실력에 따라서는 비교적 간단하게 신분 상승의 꿈을 꿀 수 있는 직업이지만,

용사 파티 멤버로는 선호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래도 모험가는 마왕 출현에 따른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직업이기도 한데,

마왕이 출현하면 마물의 활동이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활발해지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활동을 쉬고 있던 은 등급의 모험가들이 대거 길드를 찾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두둑한 보수를 위해.

또 다른 이는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

이런 시즌이 오면 쓸데없이 위험할 것 같은데다 보수도 크게 기대할 수 없어 기피되는 실종자 찾기 의뢰도 인기가 폭발한다.

모순되게도 모험가 중에는 보수도 짜고 위험한 일을 굳이 나서서 받으려는 부류가 존재한다.

현재 모험가 길드를 가득 메운 은 등급 모험가 중에는 이런 괴짜들이 많았다.

시시한 의뢰로는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진짜 위험하고 뭔가 있을 것 같은 의뢰에 마음이 동한다.

은 등급 모험가들은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이 손을 뻗지 않는 곳에 대박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촉괴의 온상지가 된 로타나 마을에서 나온 실종된 모험가 찾기 의뢰도 마찬가지였다.

"……."

동 등급 모험가의 관심을 받지 못해 게시판 구석에 걸린 채 잊힌 그 의뢰서를.

한 여자가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눈매를 가리는 검은 머리카락에, 새까만 로브까지 걸치고 있는 음침한 여자였다.

아무튼 가슴이 엄청나게 컸다.

"여자 혼자서는 위험한 의뢰 아닌가요?"

옆으로 불쑥 튀어나온 금발의 남자가 말했다.

"앗, 저…."

"로타나 마을에서 실종된 동 등급 모험가 찾기. 위험도 C. 파티 권장."

남자는 의뢰서를 소리 내 읽더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랑 같이 갈래요?"

"저는……."

"혹시 금 등급이라시거나? 그런 거 아니죠?"

"……아니에요."

"괜한 오지랖일까 봐 걱정했네. 저는 크리스퍼스라고 합니다. 은 등급이고요."

"아직 한다고는…."

크리스퍼스는 돈보다 여자를 밝히는 헌팅남이다.

그녀가 쭈뼛쭈뼛 길드 문을 열고 들어올 때부터 사냥감으로 점찍고 다가갈 타이밍을 가늠하고 있었다.

잘생긴 얼굴, 큰 키, 은 등급이라는 보장된 실력.

'거절할 거야? 이렇게 친절한 나를 뿌리치고 갈 수 있겠어?'

크리스퍼스는 자신 있었다.

"…리비아예요."

이름도 예쁘네.

크리스퍼스가 여자를 볼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성격, 그리고 외모였다.

발랑 까진 년은 크리스퍼스의 취향이 아니다. 이렇게 우물쭈물하고 싶은 말도 똑바로 못하면서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굉장히 야한.

마치 수컷에게 노려지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여자들이 크리스퍼스의 타깃이었다.

검은 로브로 온몸을 감쌌지만, 크리스퍼스는 알고 있었다. 리비아의 육감적인 몸매를.

변태처럼 그녀의 걸음걸이에 따라 풍만하게 흔들리는 유방과 엉덩이를 유심하게 관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리비아의 몸매는 굉장했다.

본인은 콤플렉스라고 생각하는 큰 엉덩이와 젖가슴.

그런 주제에 잘록한 허리와 잘 빠진 다리는, 모험가보다는 모델이 적격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세히 뜯어보면 볼수록 대어라는 확신이 생겼다.

"리비아. 내 친구를 소개해 줄게요."

크리스퍼스는 리비아가 똑 부러지게 거절하기 힘든 스타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제멋대로 이야기를 진행해 버린다.

"안녕. 우와. 미인이시네."

"……."

"난 하퍼. 은 등급이고, 앞에서 싸우는 게 특기야."

"리비아예요."

하퍼 역시 크리스퍼스와 관심사가 똑같았다.

'크으! 참을 수 없는데. 어디서 이런 년이 엉덩이 실룩거리며 나타났지?'

리비아의 몸을 핥듯이 쳐다보며 욕구를 드러낸다.

크리스퍼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하퍼, 이 병신새끼, 말아먹기 싫으면 그 짐승 같은 눈빛 좀 치워.'

이런 여자한테 접근할 때는 젠틀해야 한다고.

맹수처럼 달라붙는 남자를 좋아하겠냐? 분명히 깜짝 놀라서 도망치겠지.

"리비아 양은 뭘 잘해요? 마법? 성법?"

"성법을 조금 다뤄요."

"오~ 완전 고급 인력인데요."

"성법을 쓴다니 든든한데! 교단 소속?"

하퍼는 자연스럽게 말을 놓고 있었다.

마치 샌드위치 빵처럼 리비아를 사이에 두고 두 수컷이 밀착한다.

"독학으로 조금…."

"아니 독학으로 성법을 써? 진짜 대단하네. 우리 파티에 들어와. 분명히 잘 맞을 거야."

'잘 맞을 것 같다' 면서,

하퍼는 리비아의 젖가슴을 슬쩍슬쩍 팔로 건드렸다.

'이 녀석… 속옷 안 입었나? 하아, 못 참겠네.'

"하퍼, 떨어져. 리비아 양한테 실례잖아."

"미안해. 너무 친한 척했지?"

"아니요…."

생각보다 더 온순하다.

이런 년이 어떻게 모험가가 됐을까 싶다.

크리스퍼스는 바로 접수대에 가서 의뢰를 수주했다.

"이제 식사하러 가볼까요?"

"기다려."

그때였다.

리비아를 노리는 마수를 눈치챈 것처럼,

그들을 엄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금발 숏컷의 여성이 불쑥 끼어들었다.

"나도 낄래."

'젠장.'

크리스퍼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누가 봐도 방해꾼이다. 이렇게 쓸데없이 경계심만 강하고 오지랖만 넓은 년은 방해가 된다.

무조건 떨쳐내야 해!

"하하, 말씀은 고맙지만, 저희는 이미 수주를 끝낸 직후라서."

"접수원 씨, 한 명 추가해 주세요. 저도 낄 테니까."

막무가내였다.

"이런 미인이 우리 파티에 참가해준다면 고맙지."

'바보 자식, 하퍼! 우리 목적은 리비아 양이잖아.'

하퍼가 헤벌쭉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 여자는 엘프다. 특이하게 긴 귀를 확인할 것까지도 없다.

엘프는 누가 봐도 엘프다. 치사할 정도로 아름다운 용모가 그 증거…….

하지만 그렇기에 너무 눈에 띈다.

리비아만 품에 끼고 조용히 나가려 했던 크리스퍼스의 계획이 어긋나고 말았다.

"난 에피야. 실종자 찾으러 가는데 사람은 많을수록 좋지. 안 그래?"

"……."

'제길, 아는 사이라도 돼?'

크리스퍼스는 바쁘게 눈알을 굴렸지만, 리비아도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한 눈치였다.

"…뭐, 알겠습니다."

에피는 리비아와 팔짱을 끼고 보란 듯이 남자들을 경계했다.

"새 파티 결성을 기념하면서, 우선 식사하러 갑시다. 길드 앞에 노스워커라는 주점이 있는데……."

"거기보다 싼 곳 알아. 내가 안내할게."

"……."

"싸고 좋은 곳 갈 건데, 문제 있어?"

하퍼와 크리스퍼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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