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쿠구구구궁!
거센 충격이 협곡을 뒤흔들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발을 딛고 서 있는 것조차 힘들겠지만, 상현은 그 충격의 원인인 브레스를 정면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생각보다… 센데!"
으드득! 상현은 이를 악물었다.
몰아치는 화염의 브레스.
바람의 벽이 버텨내곤 있지만, 상현으로서도 이렇게 막는 게 한계였다.
'이거 이러다가… 일단 집중!'
쾅! 일순간 벽이 흔들렸다.
상현은 얼굴을 구긴 채 생각을 털어냈다. 잡생각이나 하며 상대할 녀석이 아니다.
비록 제대로 된 드래곤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 파괴력 하나만큼은 어마어마했다.
협회 공인 공략집에서도 브레스는 무조건 피하라 했으니까.
더미를 세워 브레스를 흘리거나, 순간적인 이동 아이템을 활용해 피할 것!
그렇게만 하면 4인 파티 기준으로 충분히 상대할 만하다고 적혀 있었다.
그 이후에 적혀 있는 세세한 공략 방법은 다양했다.
비늘을 벗겨라.
혹은 내부를 노려라.
지능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파티의 성향에 맞춰 전투할 수 있도록 권유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브레스를 피해야 한다'라는 문구는 첫 장에 붉은 글씨로 강조되어 있을 정도였다.
마치 절대적인 규칙처럼.
푸확! 푸화아아악! 쿠구구구궁!
브레스는 계속해서 밀어닥쳤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점점 강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바람의 벽이 한 꺼풀씩 벗겨지고, 그럴 때마다 상현 역시 그 안쪽에 새로운 벽을 세웠다.
'뚫리면 죽어!'
으드드득! 이가 갈린다.
상현도 얼마든지 브레스를 빼놓고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쇼맨십이랍시고 굳이 맞선 것이었고, 그런 만큼 첫 단계에서 볼품없이 무너질 순 없다.
그리고 이것만 견뎌내면 이후는 쉬울 거란 확신 역시 있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제발 그만 좀 하라고 속으로 빌던 끝에.
푸스스슥.
브레스가 멎었다.
드래곤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자 푸륵푸륵, 남은 불꽃이 입가에서 살랑거렸다.
"후아아!"
상현은 짧은 숨을 토해냈다.
힘든 단계는 이제 끝이다.
나머지는, 세워놓은 계획으로 짓눌러버리면 그만.
'좋아, 일단은…….'
"으극!"
생각하던 상현이 옆으로 몸을 굴렸다.
콰과광! 바로 서 있던 자리에 드래곤의 육중한 꼬리가 내려 꽂혔다. 거의 크레이터처럼 갈라진 바닥에 상현은 식은땀을 훔쳤다.
'…긴장 풀면 안 되겠네.'
제대로 된 드래곤은 아니다. 지능이 일반적인 짐승 수준에 불과하니까.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지능'의 문제일 뿐, 물리적인 데미지 자체는 큰 차이가 없었다.
"삐약아! 마족들 드래곤 후방으로! 안 보이게 숨겨!"
"삐이잇!"
삐약이의 대답에 이어 마족들이 움직였다. 드래곤의 후방으로 이동하는가 싶더니, 나무 사이사이로 모습을 숨겼다.
이게 이번 공략의 1단계.
그리고 2단계는…….
"에라이!"
쿠쿵!
날아든 앞발에 상현은 다시 땅을 굴렀다. 갈라진 땅 위로 먼지구름이 확 피어올랐다.
다시 봐도 살벌한 데미지였다.
저기 찍혔다간 A급 헌터고 나발이고 그대로 육포가 될 게 분명했다.
"미믹은 그 자리에 대기! 바로 반응할 수 있도록!"
"크륵!"
이해한 건지 헥헥거리는 미믹. 이게 2단계였다.
상현은 파티원이 없고, 미믹과 마족으로 그 빈틈을 메워야 했다.
쾅! 쾅! 쾅!
연달아 밀어닥치는 공격을 피해내며 상현은 마지막 단계를 준비했다. 마족과 미믹은 분명 강한 전력이지만, 드래곤에게 데미지를 입힐 정도는 아니었다.
드래곤은 어디까지나 A급 던전. 그것도 상위의 던전 보스.
여기에 유효타를 먹이려면, 상현이 직접 나서야만 했다.
"크우우우우……."
드래곤이 멍청한 울음을 흘렸다.
확실히 지능이 떨어지긴 하는 건지.
감응력으로 전해지는 녀석의 감정은, 무언가가 '귀찮게'한다는 정도였다.
"자, 그러면!"
상현은 양손을 펼치고, 그 위로 힘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그때 드래곤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포효했다.
"크오오오오!"
일종의 드래곤 피어에 머리가 웅웅 울렸다.
하위 종의 본능적인 두려움을 일깨워주는 행위였다.
하지만 진짜 무서운 건 그렇게 몽롱해진 틈을 타 짓쳐드는 앞발과 꼬리!
번쩍하고 상현의 신발에서 빛이 터졌다. 여태껏 몇 번이고 목숨을 살려준 아이템, 실라페의 발걸음이었다.
간신히 공격을 피해내고, 상현은 상태를 체크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몸을 날렸다간 모아놓은 힘이 흩어질 것이다.
펼친 두 손 위엔 압축된 바람의 공이 들려있었다.
"됐어. 마족 전체 저 녀석 후방으로 접근! 꼬리 방향!"
명령을 내린 후 드래곤의 반응을 살폈다.
드래곤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상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뱀처럼 노란 눈동자 안엔, 짜증스러운 기운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건 마지막 단계를 위한 준비가 끝났다는 의미였다.
"그래, 마음껏 해 봐, 자식아!"
상현은 언제든 달릴 수 있게 자세를 낮춘 채 외쳤다.
드래곤이 몸을 일으켰다.
시작이다.
드래곤의 비늘은 단단하지만, 내부는 연약하다. 상현은 드래곤의 몸 안을 노렸다.
하지만 섣불리 접근했다간 공격에 직격 당해 쥐포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지금처럼, 드래곤에게 상현을 근접해서 공격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생각을 심어주는 것이다. 일부러 몇 번이고 타격을 피해가면서.
"크르르르르."
낮은 목울음에 상현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녀석은 마치 재채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상체를 애매하게 일으킨 상태였다.
그런 녀석의 입가엔 다시 붉은 입자가 모여들고 있었다.
드래곤 브레스. 그 위압적인 공격이 다시금 날아들기 직전.
"마족! 꼬리 잡아당겨!"
상현은 급히 지시했다. 마족들이 움직였다. 꼬리로 달라붙는 검은 마족들은,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개미떼처럼 보였다.
그리고 드래곤의 육중한 몸이 휘청거리더니, 점차 뒤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어서 드래곤이 '넘어지고', 쿠쿠쿠쿵! 지축이 흔들린다는 기분이었지만, 상현은 그대로 몸을 날렸다.
푸륵! 푸르륵!
그런 가운데서도 불꽃은 상현을 겨누고 있었다.
드래곤이 분노한 눈으로 상현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이대로라면 곤란하다.
"미믹!"
쇄애애애액! 지시하자마자 미믹의 굵직한 혓바닥이 날더니, 드래곤의 얼굴을 가격했다. 마치 뺨이라도 맞은 것처럼 드래곤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이건 마족도, 상현도 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평범한 타격이라면 다시 상현을 노릴 테니까.
하지만 미믹의 혀엔 지독한 독액이 묻어 있다.
"캬오오오오오!"
녀석은 상현의 존재조차 잊은 채 비명을 질렀다. 브레스 탓에 입을 벌린 상태였고, 그 안으로 독액이 스며들었으니까.
찢어진 입술에 염산을 들이부은 격이다.
고통 탓에 녀석은 기껏 모은 브레스를, 그대로 하늘로 쏘아 올렸다. 이글대는 불기둥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 틈에 상현은 녀석의 바로 곁까지 접근한 상태.
그리고 브레스가 멎길 기다렸다가, 드래곤의 얼굴 위로 뛰어올랐다.
"마무리!"
양손에 담긴 구슬.
그걸 합치고, 다시금 압축한다. 몇 번이고 연습했던 기술이었다.
주먹만 한 구슬이지만, 그 안에 담긴 에너지는 폭풍과도 비견될 정도!
상현은 녀석의 아가리에 구슬을 쑤셔 넣었다. 이어서 콱! 불쾌하게 뜨인 눈동자를 그대로 걷어찼다.
"캬아아아아!"
분노의 울음소리. 안 그래도 멍청한 녀석인데, 지독한 고통에 사리분별조차 되지 않는 상황.
드래곤은 상현을 잡겠다는 생각만으로 앞발을 휘둘렀다. 그러나 상현은 이미 그 자리를 벗어났고, 결국 스스로의 머리를 후려친 꼴이 되었다.
꿀꺽!
그 충격에 뱉으려던 구슬이 녀석의 목구멍으로 들어갔다. 식도를 타고, 마침내 위장까지.
녀석은 그에 당황했으나, 그것보단 인간을 잡아 죽이겠다는 생각이 더욱 강했다.
분노한 채 몸을 일으킨 순간. 녀석의 뱃속에서 폭풍이 터져 나갔다.
"나선환이다, 이 자식아!"
***
"끝난 건가……."
누군가가 중얼거렸지만 대답은 없었다.
상황실은 고요했고, 그런 가운데 수십의 사람들은 주먹을 말아 쥔 채 화면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거대한 폭발과 피어오른 먼지구름. 긴장한 가운데 협곡엔 가벼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먼지구름이 걷혔다.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드래곤 덩치만큼의 회색 잿더미.
그리고 씩 웃으며 카메라를 바라보는, 상현이었다.
- 이렇게! A급 던전까지 마무리하면 되겠습니다!
스피커로 상현의 목소리가 울려 펴졌다.
아주 잠깐의 정적이 더 이어지고, 상황실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그래, 내가 해낼 거라고 했지! 상현이는 가능할 거라고 했잖아!"
"크하하하하! 미친! 이걸 해낼 줄이야!"
"…정말 혼자 해냈다고? A급 던전을?"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벙찐 얼굴로 굳어버린 사람도 있었다. 또 일부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힘없는 웃음만을 흘리기도 했다.
- 어때요, 정말 쉽죠? 하하하! 시청하신다고 고생하셨습니다! 약속은 지켰고, 저도 사람인지라 오늘의 방송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히죽 웃는 상현의 얼굴. 이어진 한 마디와 함께 화면은 검게 변했다.
- 다음 방송 때 뵙죠!
활기찬 분위기가 이어지다가, 다시금 조용해졌다.
던전은 공략되었고, 방송은 꺼졌다.
아직 던전과 이어진 포탈은 열려 있었다.
역시나 우우웅. 포탈에서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선두엔 상현이. 그 어깨 위에 두 요정들이 자리 잡은 채였고, 마족들과 미믹이 그 뒤를 따랐다.
"고생했다. 지금 C급 던전 생긴 거 있지? 마족들 저것만 처리하고 돌려보내면 돼. 나머진 휴식! 뾰롱이랑 삐약이는… 읏차. 여기서 쉬고 있어. 미믹도. 알았지?"
모두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상현은 뒷수습을 마쳤다. 마족들이 포탈로 이동하고, 뾰롱이와 삐약이는 소파에 얌전히 앉았다. 헥헥거리는 미믹을 쓰다듬어준 후에야.
"음, 여러분?"
상현은 사람들을 쫘악 둘러보며 분위기를 잡았다. 진지한 표정에 모두가 꿀꺽, 침을 삼켰다.
"일단 예정된 계획은 끝났습니다. 여러분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고, 우선 감사하다는 말씀부터 드려야겠죠.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무슨 소리야? 뭐가 더 남았어?"
의문 섞인 성대원의 목소리. 그에 상현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사람들의 얼굴에도 긴장이 서렸다. 설마 자신들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단 말인가.
그러나 다음 순간 상현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
"마시고 죽겠다는! 휴가 알차게 보내겠다는! 그런 각오가 필요한 시점이죠! 와하하하하!"
"…세상에."
성대원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했다.
하지만 곧 천천히, 아주 천천히 분위기가 풀어지더니 어느 순간 상황실은 모두의 웃음으로 채워졌다.
고생했다는 공치사.
길드장님이 뭘 사줄지 기대된다는 식의 잡담.
상현의 활약에 대한 감탄 따위가 마구 뒤엉켰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헌터들은 금세 정신을 차렸다.
"고생했어."
하수연을 선두로, 그들은 한 명씩 줄줄이 다가와 상현과 악수를 나누었다.
"잘 봤다."
"헤이, 굉장했어. 응? 굉장했다고. 하하하, 이렇게 즐겁게 해주다니!"
"크하하하, 빌어먹을 자식! 넌 최고야!"
"…어, 감사합니다."
상현은 대충 웃으며 반응을 받아주었다.
머쓱하고, 동시에 뿌듯했다. 이제 끝났다는 해방감 역시 있었다.
그리고 조금 분위기가 진정되자 성대원이 다가와 물었다.
"어디서 마실 거냐? 아, 한 잔 할 거지? 이런 날에 술을 안 마신다는 건……."
"아, 당연히 마셔야죠. 확실하게 정한 건 아닌데, 일단 청량리 쪽으로 할까 생각 중이에요."
"…청량리?"
성대원이 미간을 좁혔다.
청량리라니.
물론 거기도 있을 건 다 있겠지만, 왜 굳이 그런 어중간한 곳을 고른 건지.
"…강남이나 이런 쪽 아니고?"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긴 한데, 강남 쪽은 좀 비싸니까요. 얼마나 나올지 짐작도 안 가서 말이죠."
"그게 뭔 소리야?"
성대원은 당황했다.
이미 엄청난 단위의 자금을 지녔고, 이번 UEL을 처리하면서 들어올 돈도 천문학적인 액수다. 그런 녀석이 고작 술값을 아낀다니.
"그거 얼마나 나온다고… 여차하면 내가 내줄 테니까,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자고. 끽해야 천만 원 들겠어?"
"엥? 천만 원요?"
"……?"
어째 반응이 이상했다. 당황스럽다는 느낌이긴 한데, 액수가 커서 놀란 건 아닌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안 될 것 같은데……."
"…뭐 얼마나 마시려고?"
"예? 아, 설마. 가게 하나 빌리자는 말씀이세요?"
상현이 피식 실소하고, 성대원은 갸웃했다. 그리고 상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그 동네 하루 술값, 제가 다 낼 거예요. 여기 계신 분들이 전부가 아니잖아요? B급이나 C급 헌터 분들, 직원 분들. 그리고 동네 주민들 사이에 제 시청자도 꽤 많을 테고요."
거기서 멈추었다가, 상현이 말을 덧붙였다.
"다 같이 고생한 거니까요."
"못 말리겠군."
성대원은 입꼬리를 올린 채 말했다. 고작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몇 십 만원에 벌벌 떨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이 규모는 뭐란 말인가.
"너, 변했어."
"방금 그 대사. 로맨스 소설에 나올 것 같았어요. 성장한 거라고 해주시죠."
"…맞아. 성장한 거지."
성대원은 진지하게 끄덕거리다가, 이내 씩 웃었다. 그리고 상현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잠시간 있다가, 성대원이 먼저 손을 건넸다.
상현은 그 손을 맞잡고 힘 있게 흔들었다.
그것으로.
한 달간의 계획이 모두 끝났다.